자유당의 붕괴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5월 29일에는 이승만 내외가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어 6월 2일에는 손영수 의원 등 94명의 자유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을 선언했다.
138명의 자유당 의원들 가운데 이기붕이 사망하고 한희석, 장경근, 최인규, 이재학, 임철호, 이익흥 등 당 지도부가 사직당한 데다 94명이 집단 탈당하자 자유당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6월 15일에 이르기까지 9명의 의원들이 계속 당을 떠났다.
이로서 자유당은 사실상 붕괴된 셈이었다.
6월 1일 현재 자유당 의원 138명 가운데 105명이 당을 이탈했다.


자유당의 잔류파와 원외 인사들은 힘을 합해 제2공화국 아래서 제일 야당으로 기능해 보고자 노력했다.
조경규를 비롯한 재건파는 자유당의 지속적인 존속을 위해 소속 의원들의 일치단결을 강조했다.
이들은 6월 12일 정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 구성되는 참의원에 11명의 후보를, 그리고 민의원에는 54명의 후보를 내세웠지만, 국민의 심판은 차가웠다.
자유당은 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을 뽑는 7·29총선에서 참의원 58석 중 4석을, 민의원 233석 중 단 2석을 차지했을 뿐이다.
예상을 넘어선 참패로 야당으로나마 연명하고자 했던 자유당의 계획은 무산되어 결국 창당 10년 만에 해체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한승주 교수가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분석한 대로 당시의 상황은 사실 자유당이 재건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허정 과도정부의 비혁명적 성격,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 한국 정치 엘리트의 일반적 보수성 등의 호조건에다가 미대사관 측도 자유당을 야당으로 키우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재학의 회고록에도 미대사관 측이 여러 차례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자유당의 조직만은 고수해 달라”고 협의해 왔다고 적고 있다.


자유당이 왜 이러한 호조건 속에서도 붕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이유는 그 창당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당은 애초부터 어떤 정치적 이념을 중심으로 뭉친 조직이 아니라 이승만이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출발한 당이었다.
자유당의 창당목적은 바로 이승만의 재집권에 있었던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과 4사5입 개헌파동을 일으키면서 자유당은 이승만을 영구집권의 위치에 올려놓는 이른바 그 창당목적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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