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
마른 데파르트망Department 태생의 프랑스의 보석세공사, 유리공예가 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는 파리의 루이 오코크Louis Aucoc 밑에서 금세공 도제수업을 받고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런던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파리로 돌아온 뒤 1년 동안 보석상이자 금세공가인 오귀스트 프티Auguste Petit를 위해 일했으며, 유명한 파리의 보석상들을 위해 장신구를 디자인했는데 그 중에는 네덜란드의 루이 프랑수와 카르티에Louis Francois Cartier(1819-1904)도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에콜 베르나르 팔리시를 다니며 조각가 뷔스티앵 르키앵으로부터 배웠다.
1884년 프랑스 공예품 전시와 연계하여 루브르에서 열린 ‘프랑스 왕관 보석 전시회’를 계기로 랄리크는 독자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는 벨 에포크Belle Epoque(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름다운 시절) 풍조 아래 화려한 장식작품을 제작하여 명성을 얻고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1885년에 파리의 보석세공 공방인 쥘 데스타프Jules Destape를 인수했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파리의 일류 보석상들을 위해 보석장식을 만들었으며, 사업은 새로운 공방을 물색해야 할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1890년 그는 30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1890년 이전의 랄리크 보석디자인의 모티프는 당시 파리에서 일반적이던 자연주의적 보석세공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파리 보석상들에게 납품하는 동안 그들의 취향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1895년 더 이상 납품하지 않게 되자 랄리크는 비로소 새로운 형식과 모티프의 세계로 향했다.
그가 새로운 형식과 모티프에 대한 영감을 얻은 곳은 상징주의로, 여성 인물, 여인의 머리, 곤충, 물고기, 백조, 딱정벌레, 꽃 등 도약하는 운동감이 가득한 세계였다.
그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전통 원료를 거부하고 선명한 색채의 준보석을 선호하여 보석디자인에 혁신을 일으켰다.
요정이나 꽃과 같은 모티프는 랄리크의 아르누보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가 1897-98년에 제작한 머리띠 <사이렌 Siren>은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이 선호한 여성으로 보석세공인들에게 인기 있는 모티프였다.
그는 1895년부터 1909년까지 프랑스 미술가 전시회에서 정기적으로 보석과 공예품을 선보였다.
그는 일본 공예에 관심이 많아 칠보자기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가 1895년과 1907년 사이에 디자인한 보석세공품 중 칠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미묘하게 변화하도록 처리한 차갑고 혼탁한 색조를 선호했다.
진주와 자개 외에 상아 그리고 색을 가미해 세련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뿔을 선호했다.
돌 가운데서는 무지개빛을 내는 신비한 오팔과 황옥, 월장석을 선호했다.
아르누보 시기에 보석으로 유명해진 랄리크는 자신의 보석디자인을 값싸게 복제하는 데 점차 관심을 기울이다가 1901년경부터는 유리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 유리 제조업체를 인수해 1918년부터는 유리세공에 몰두했다.
1908년과 1910년 사이 틀에 부어 제작한 장신구를 연속적으로 생산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가 1904-06년에 제작한 브로치 <키스 The Kiss>는 그의 첫 유리공예품이다.
<키스>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연인들이 화관을 쓰고 사랑스럽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징적 이미지의 사용은 아르누보의 모호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미술가들은 분명한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과학자, 심리학자, 정치가 그리고 평론가들과는 달리 종종 시대의 도덕적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고객과 시장은 그들의 작품에 보수적 가치를 부여했다.
유리작업에서의 랄리크의 혁신은 프랑수아 코티Francois Coty(1874-1934)로부터 향수병 디자인을 주문받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전등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그는 가장 먼저 유리를 조명기구에 활용하여 전기스탠드, 샹들리에 등을 제작했으며, 1910년대에 유리그릇 제작에 몰두하면서 작풍에 변화가 1920년대의 화려한 아르데코Art Deco(Style Moderne이라고도 한다) 양식을 구현하게 되었다.
아르데코는 1910년경에 파리 살롱전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명칭은 새로운 양식이 출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미술 및 현대산업 박람회’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아르데코는 1930년대에 서유럽과 미국의 건축과 장식미술에서 주된 양식이 되었다.
아르누보가 수공예적인 것에 의해 나타나는 연속적인 곡의 선율을 강조하여 공업과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반면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방식을 미술과 결합시킨 기능적이며 고전적인 직선미를 추구했다.
아르데코 양식의 특징은 단순함, 깔끔한 형태, 유선형 같은 외양, 구상주의 형태에서 나온 기하학적이고 양식화된 장식과 매우 다양하며 값비싼 재료로 이중에는 천연재료와 인조재료도 종종 포함되었다.
그러나 아르누보와의 경계선이 희미했는데, 슈토클레트 저택과 같은 프로젝트는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두 양식 모두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양식의 연속성의 예를 1920년대까지 활동한 많은 아르누보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가장 성공적인 전환은 랄리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랄리크의 유리 제조 사업은 번창하여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의 반짝이는 유리분수가 광고포스터에 등장하는 등 박람회를 대변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 후 아르데코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제작된 그의 유리제품들은 아르누보와의 장식적 연속성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1925년경에 제작한 큰 병 모양의 전등은 자연주의의 유기적 형태가 음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불새 The Firebird>라고 명명된 같은 시기의 다른 전등은, 그와 비슷하지만 1880년대 상징주의 화가들의 정신에 가까운, 변신하는 새-여인을 모티프로 하여 디자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