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아르누보에 끼친 영국 디자인의 영향은 앙리 반 데 벨데와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가장 완벽한 아르누보의 초기 예는 유럽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가장 빨리 시작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한 벨기에의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의 작품이다.
그의 건물과 실내장식은 영국 디자인 개혁전통의 급진적인 정치이념이 신로코코 양식의 엘리트적 유미주의 그리고 건축에서 철강과 유리의 사용으로 가능해진 기술적 진보와 결합된 실용적인 예이기도 하다.

13세기 이전에 플랑드르 방직의 중심지로 운하로 북해와 연결되어 있어 외항기선의 출입이 가능한 겐트Gent(플라망어로는 헨트)에서 태어난 오르타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 부속 건축학교 재학 중에 이미 독보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뒤 공부를 계속하여 1881년에 브뤼셀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이 학교에서 존경받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알퐁스 발라Alphonse Balat(1818-95)에게 사사했으며 그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레오폴드 2세Leopold II(1835-1909)의 단골 건축가로 1874-76년에 라에켄Laeken에 지은 왕립 온실Royal Glasshouses의 둥근 지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의 이용에 뛰어난 발라는 창의적인 표현방식을 고안하여 강철과 유리를 재료로 혁신적인 구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에는 모리스, 애슈비, 비어즐리의 영향이 엿보인다.
발라는 반 데 벨데와 마찬가지로 재료와 구조의 성질에 충실한 조립에 의존하는 기능주의를 주창했다.
왕립 온실 건축이 오르타가 화려하게 디자인한 바론 반 에트벨데 백작Baron van Eetvelde(1852-1925)의 저택(1895-97)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르타가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강과 유리 같은 재료의 건축적 가능성을 이용한 것은 건축물에 금속 요소를 많이 드러내 보인 벨기에 건축가 어네스트 헨드릭스Ernst Hendrickx(1844-92)의 조수로 일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다.

오르타는 1890년에는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1893년에 성숙한 아르누보 최초의 건축적 표현으로 유명한 타셀 하우스Tassel House(1893-95)를 설계했다.
브뤼셀의 폴 에밀 얀스 가에 있는 자신의 주택 설계를 오르타에게 의뢰한 에밀 타셀Emile Tassel(1838-79)은 브뤼셀 대학의 도형기하학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애호가이자 전문가, 아마추어 사진작가, 일본 미술품 수집가였다.
오르타가 타셀을 만난 건 1893년 ‘자기완성, 관용, 그리고 계몽’을 교의로 프랑스 혁명 후 유럽에서 생긴 비밀결사 프리메이슨Freemason 집회에서였다.
타셀은 아마도 격조 높은 환경을 갖춘 주택을 원했던 것 같다.
타셀이 원한 것은 “학자와 미술가들만으로 구성된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독신자”의 집이었다고 오르타는 술회했다.
고객의 지적, 사회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타셀 하우스에서 노출된 철 구조물의 혁신적인 사용과 개방적 공간은 오르타 양식의 특징이 되었다.
집의 입구는 연철로 만든 곡선의 난간, 요동치듯 비틀린 벽면장식 그리고 선명한 색상의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었다.
방과 복도들은 눈에 띄지 않게 서로 통해 있다.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계단이며 철로 제작된 계단기둥은 식물을 모방해 만들어졌는데, 철제 난간은 물결치듯 흐르는 형태이며, 이런 형태는 벽의 덩굴무늬 그림과 바닥 모자이크의 덩굴무늬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나선형과 곡선은 아르누보의 주요 모티프로 영국의 맥머더 그리고 특히 삽화가 헤이우드 섬너Haywood Sumner와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다른 화가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오르타가 보여준 선의 형태는 벨기에 특유의 것이다.
그것은 이후 사람들이 ‘벨기에식 선’으로 명명한 긴장감 넘치고 추상화된 장식이다.
그러나 오르타의 장식미술에서 다른 아르누보 화가들처럼 식물의 잎이나 꽃이 아니라 기둥과 줄기였다.
그의 업적은 채찍선 같은 리듬을 지닌 전형적인 아르누보 곡선을 처음으로 공간과 구조로 변형시킨 데 있다.
1890년대 초 영국이 벨기에에 미친 영향은 실내장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응접실 장식에서 오르타는 애초에 구상했던 이집트 양식의 벽지를 버리고 반 데 벨데에게서 구입한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식당에는 찰스 프랜시스 앤슬리 보이지가 만들어 일레인Elaine이라고 명명한 또 다른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응접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 장식에는 리버티상사를 위해 제작된 수선화무늬가 있는 천을 사용했다.
역점을 둔 곳은 서재이고, 1층과 2층 사이에는 타셀의 사진작업을 위한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다.
타셀은 집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모임에서 사당 안쪽 벽면에 투사된 슬라이드를 이용해 강연을 하곤 했다.
손님용 욕실과 흡연실은 이런 모임을 위해 마련되었다.

타셀은 오르타가 브뤼셀 대학의 종합기술학부에서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오르타는 대학에서 프랑스 건축가이자 건축보존위원으로서 건축물에 철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옹호한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의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오르타는 타셀을 통해서 화학 콘체른Konzern의 대표인 발명가, 화학자 아르망 솔베이Armand Solvay를 알게 되었다.
1895년과 1900년 사이 고급스러운 루이즈 가에 솔베이 저택을 디자인했다.
아직은 조심스러웠던 타셀 저택의 외관과는 달리 여기서 건물 정면은 활 모양으로 구부러졌고, 측면의 돌출 창 부분도 궁형으로 튀어나왔다.
건물 배치부터 사소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부는 다시금 서로 통하는 공간이라는 도식을 따랐다.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고 조정되었으며, 홀 안에서는 놀랍게도 부풀어 오른 공간이 캐러멜색, 금색, 살구색과 같은 많은 따스한 색조를 띤 채 방문객을 둘러싸게 된다.

브뤼셀에 있는 일련의 집들이 오르타의 명성을 증명하는데 그는 1894년과 1905년 사이에 자신의 집 외에도 다섯 명의 변호사를 위한 주택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주택은 변호사 외에도 정부 각료들을 위한 것으로 미적으로 진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호화스럽기 때문에 오르타와 그의 많은 고객들이 속해 있던 벨기에 노동자당에 투표한 대중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브뤼셀의 많은 미술가들처럼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그는 1896년과 1899년 사이에 백화점, 사무실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당을 위해 다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강당을 건립했다.
1895년과 1899년 사이에 세워진 인민의 집Maison du Peuple 정면은 벨기에 최초로 철과 유리를 폭넓게 사용한 구조물이며 내부의 강당 지붕의 철골빔은 구조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식적이었다.
이 건물은 1960년대에 아르누보를 경시한 택지개발업자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아르누보의 공적 표현은 상점과 백화점의 설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르타는 동료 건축가 폴 세인트노이Paul Saintenoy(1862-1952)와 함께 아르누보 양식으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브뤼셀에서 가장 큰 두 백화점, 즉 폴 세인트노이가 1899년에 세운 올드 잉글랜드 백화점Old England Department Store의 유리 정면과 오르타가 1901년에 건립한 아 리노바시옹A L'Innovation으로 명명된 백화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 리노바시옹의 정면은 주위의 전통적 건물들에 반항하듯 볼록한 모습이다.
거대한 유리창은 외부에 벽돌의 필요성을 제거했으며, 보행자들이 내부에 진열된 많은 상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이 백화점들은 구매자들에게 오르타의 인민의 집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조명과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 아 리노바시옹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오르타는 1903년에 다른 상점 그랑 바자 안스파크Grand Bazar Anspach를 설계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상점 양쪽에 늘어선 아파트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유리 정면을 없애고 위층에 벽돌을 올림으로써 어느 정도 소박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주출입문 위에 날개 모양의 유리덮개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적 느낌을 보탰다.
근대 재료인 철과 유리로 건축된 이 새로운 거대한 건축물은 쇼핑의 경험을 재규정했으며, 중류층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여가기회를 제공하고, 중하류층과 노동계층 여성들에게는 고용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각 층마다 상품들로 진열된 백화점들에는 화장실, 카페 그리고 심지어 미술화랑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여성들이 도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오르타는 1913년에 브뤼셀 미술협회 회장이 되고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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