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시덜Elizabeth Siddall(1829-62)




엘리자베스 시덜Elizabeth Siddall(1829-62)은 수채화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고 중세 기법을 이용하여 낭만적인 주제를 표현했다.
라파엘전파의 지지자 존 러스킨은 시덜의 작업을 존중했으며 그녀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러스킨은 쿼더당 150파운드를 준다는 조건으로 시덜에게 <샬롯 The Lady of Salott> 같은 중세적인 드로잉과 수채화에 대한 선매권을 요구했다.
여성 화가로서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드러낸 <샬롯>은 1832년 테니슨이 아서 왕 시대를 주제로 처음 발표한 시 <샬롯>의 한 구절을 토대로 한 것이다.
샬롯은 저주를 받아 실제 세상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거울에 비친 모습만을 태피스트리로 짜야 했다.
시덜 자신이 옷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달프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직조작업에 숙달된 여성의 이미지에 개인적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중세의 여성 노동은 가정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동일한 제목의 헌트의 작품에서 남성성을 대표하는 것은 무장하고 말을 탄 채 거울에 비쳐진 랜슬롯 경이다.
그 순간 샬롯은 창문너머 카멜롯을 직접 보고 결국 절망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시덜의 드로잉에는 거울이 깨졌고 직기가 부서진 장면은 없다.
시에서 샬롯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시덜은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는 순간을 주제로 삼았다.
헌트의 작품에서는 샬롯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고급 매춘굴을 연상시키는 방에는 여기저기 이국적인 물건들이 흩어져 있으며 그 속에 서 있는 샬롯은 점잖은 부인으로서의 역할에 실패한 여자이다.
헌트의 샬롯과는 반대로 시덜의 샬롯은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제하는 자제력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시덜의 또 다른 드로잉 <방탕한 여인들 곁을 지나가는 피파 Pippa Passing the Loose Women>는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1812-89)의 시를 위한 삽화로 배경은 르네상스 도시 아솔로Asolo이다. 창녀들이 계단에 앉아 애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처녀인 피파가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다.
매춘은 1850년대에 상당한 사회적인 문제였다.
시덜은 낮은 계급 출신이었으므로 모델이라는 그녀의 직업도 점잖은 이들의 눈에는 비천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덜은 누드모델을 하지 않는 등 빅토리아 시대의 예의범절을 고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제티가 후기에 가까이 한 사람들 중에는 가정부이자 정부였던 퍼니 콘포스를 비롯하여 매춘과 관련된 여자들이 있었다.
<방탕한 여인들 곁을 지나가는 피파>에서 시덜은 비난의 여지가 없는 피파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꼼꼼할 정도로 정확한 드로잉을 통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로제티가 “숙달된 작품은 아니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가득하다”고 말한 이 드로잉을 시인 브라우닝이 매우 좋아했다.


시덜은 1857년에 <클럭 손더스 Clerk Saunders>를 그렸는데 수채화인 이 작품의 주제와 시적 양식은 로제티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로제티의 걸작들 중 몇 점은 시덜에게서 받은 영감을 그린 것들이다.
그는 회화와 시의 주제를 단테와 중세의 로맨스에서 취해 이를 가상현실로 묘사했다.
여성 한 사람 혹은 그룹을 통한 이상화되고 관능적인 이미지는 로제티의 주요 모티프였다.
여성들은 사치스러운 액세서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부분은 그가 첼시의 집을 가득 채운 동양적 공예품이나 중세 골동품이었다.


시덜과 벽덕스러운 로제티와의 관계는 1860년 결혼을 전후로 매우 불안정했다.
시덜은 1861년에 사산死産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아편중독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런던에서 아편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1862년 아편 과다복용으로 죽었으며 자살로 추정된다. 전기 연구자들은 로제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시덜의 관에 자신의 원고를 모두 넣고 묻었다가 1869년 다시 관에서 원고를 끄집어내기 위해 시신을 드러낸 기괴한 이야기에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




왕립미술원에서 만난 밀레이와 더불어 회화의 전통적인 규칙과 동시대 미술의 천박함에 반발한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는 런던에 있는 도매상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은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그는 사스 학교Sass's School로 진학하지 못했다.
로제티가 이탈리아에서 온 지식인 가문의 출신이고, 밀레이가 면화 도매업자의 아들로 경제적 후원을 받은 데 반해 가장 경제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 헌트는 왕립미술원에 입학하기 전 4년 동안 부동산회사에서 일했으며 후에는 내셔널 갤러리에 복제화를 팔아 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왕립미술원에 입학했을 때 아무런 선입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학생시절 작품에서 특별히 급진적인 성격을 보이지 않던 헌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47년 미술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존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 1,2권을 읽은 후부터였다.
풍경화의 미학을 정립하기 위해 과학적, 종교적 논의들을 모두 동원한 이 책에서 러스킨은 젊은 화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자연으로 가자’고 하면서 미술의 개혁을 주장했다.
러스킨은 1843년에 『근대 회화론』 1권을 발간한 뒤 이내 유명해졌다. 터너의 회화를 옹호하기 위해 소책자로 출간하려고 했던 『근대 회화론』은 이런 과정에서 계획이 바뀌어 17년에 걸쳐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젊은 화가들을 위해 쓴 결론 부분은 압권이었다.
이 부분에서 러스킨은 클로드 로랭이나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1606-69)를 좇거나 터너를 흉내 내는 것으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충고했다.
영국에서 조슈아 레이놀즈가 1769년에서 1790년까지 한 강의들을 모아 출판하여 널리 읽혀진 『강론』 이래 이 분야에서 그와 같이 진지하게 기존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가 없었다. 레이놀즈는 역사화가 가장 우월하며 초상화와 풍경화는 열등한 장르로 취급해온 르네상스식 장르구분의 질서를 영국 내에 확립했다.
러스킨은 이 모든 것을 돌려놓았는데, 이론적 측면에서 그가 시도한 공격이 바로 라파엘전파가 실제 회화에서 반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든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은 헌트와 밀레이로 하여금 왕립미술원에서 배우는 레이놀즈의 기법과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직접 사생하며 자세하게 관찰하여 생생한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다.


헌트와 로제티는 이전에 서로 본적이 있었지만, 1848년 초여름 왕립미술원의 전시회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로제티는 홀본Holborn에 있는 헌트의 집을 방문하고 둘은 공통된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회화에 대한 자신들의 접근방식을 통일시켜나갔다.
헌트는 로제티에게 밀레이를 소개하고 세 사람이 작업을 함께 하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매일 저녁에 만났으며 피사Pisa에 있는 캄포 산토Campo Santo의 프레스코화들을 복제한 조반니 파올로 라시니오Giovanni Paolo Lasinio(1796-1855)의 판화들을 연구했으며, 특히 메디치 궁전Palazzo Medici에 있는 예배당에 벽화를 그려 유명한 초기르네상스의 피렌체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1420-97)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러스킨은 이런 작품들이 공식적이고 완성된 후기르네상스 회화와는 다르지만 위대한 종교미술의 특징을 지녔다고 했는데, 헌트, 로제티, 밀레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헌트는 양식에 있어서 밀레이와 유사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새로운 초기기독교 회화를 함께 작업하고, 1849년 왕립미술원에서의 전시 성공에 의해 고무되어 있었으며 영국 미술의 미래가 곧 자신들의 미래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 성직자들을 피해 기독교 선교사를 숨겨주는 개종한 영국 가족’을 위한 습작 Study for "A Converted British Family Sheltering a Christian Missionary from the Persecution of the Druids'>(1849)은 헌트의 초기작품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 The Eve of St. Agnes>(1848년경)에서 나타나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이의 작품과 유사하다.
선교사 뒤에 있는 두 여인은 밀레이의 작품을 상기시킨다.
이 작품에도 상징적 소재들이 사용되었고 포도나무와 옥수수는 야만인을 교화시키는 신성한 종교의 영향을 암시한다.
오두막 문에 걸려 있는 그물은 두 가지 이유에서 도입된 것으로 하나는 성서에 언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드루이드 성직자들이 물고기를 두려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기찬 주제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동작을 표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인상을 준다.
신선하고 깨끗하며 선명한 유채의 처리는 성공적인데, 이는 젖은 흰색 바탕을 사용한 라파엘전파의 특징적인 유화기법의 승리 가운데 하나이다.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는 존 키츠의 시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헌트는 키츠의 시에서 “정직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신성함과 방종의 나약함”을 발견했다.
이는 도덕적 문제들의 유형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그의 의도로 이런 점은 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클라우디오와 이사벨라 Claudio and Isabella>(1850)와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 Valentine Rescuing Sylvia from Proteus>(1851)에서도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림으로 그리려는 시도는 라파엘전파 모두에게 특징적이었지만, 밀레이가 동시대 연극의 새로운 조류와 방향을 함께 하며 새로운 자연주의에 관심을 기울인 데 반해 헌트는 셰익스피어를 통해서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려고 했다.
이런 의도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클라우디오와 이사벨라>로 라파엘전파의 초기 양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의 영향 하에 전경에 극도로 세밀하게 잎들을 하나하나 그린 이 작품에서는 감옥의 창밖으로 화사한 봄꽃이 보이지만 상황은 음울하다.
젊은 청년은 누이에게 그녀의 동정童貞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줄 것을 간청한다.
헌트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찾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가장 덜 알려진 <베로나의 두 신사 The Two Gentlemen of Verona>에서 가장 도리에 어긋나는 장면을 묘사했다.
성욕을 주제로 한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는 주인공 발렌타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프로테우스가 실비아를 겁탈하려는 순간에 나타나 “악당 같으니! 무례하고 야만적인 행동을 그만둬”라고 소리치며 이를 막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마지막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프로테우스의 옛 애인인 줄리아가 남자로 변장한 채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는 예전에 프로테우스가 그녀에게 준 것이지만 이제는 가치를 상실한 애정의 상징이다.
희곡의 내용이 실제 야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 이 작품의 배경은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에 인접한 켄트Kent의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며 인물들이 셰익스피어 시대의 의상을 하고 있다.
헌트는 밀레이와 로제티처럼 문학적, 종교적 사건들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여기에서는 자극적인 색상과 색조를 거침없이 결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존 에버렛 밀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1829-96)>






존 에버렛 밀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1829-96)가 어려서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는 그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밀레이는 저지Jersey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문이었다.
아버지는 맨체스터 하우스Manchester House의 경영자이자 면화 도매업자로서 아들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작품을 왕립미술원의 관장이던 마틴 아처 시Sir Martin Archer Shee에게 보여주자 그가 감명을 받았다.
사스 학교 과정을 매우 짧은 시간에 끝낸 밀레이는 1840년에 전례 없이 어린 나이인 열한 살에 왕립미술원의 견습학생이 되었고, 재학 중에 아카데미의 모든 상을 휩쓸었다.
사스 학교는 왕립미술원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준비단계로서 어린 예술가들이 기초 기술을 배우는 곳이었다.


밀레이가 제작한 완벽하게 라파엘전파주의에 합당한 첫 작품은 <이사벨라 Isabella>(1848-49)로 주제는 이 공동체의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1849년 로제티의 첫 라파엘전파 작품보다 한 달 늦게 왕립미술원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환각적일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관람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화면 속의 형제들은 라파엘전파의 구성원 일곱 명과 비슷해서 그가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에 대한 자신의 형제애를 표명이라도 하듯 이사벨라의 의자 가장자리에 PRB라는 이니셜을 새겼다.
왼편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인물이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스로 화가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유명한 평론가가 되었다.
인물들의 얼굴표정에서 그가 모델들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본다.
이사벨라의 아버지로 보이는 냅킨을 머리에 두른 노인의 모델은 밀레이의 노망든 아버지였다.
밀레이는 직업모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나 지인을 모델로 함으로써 충실한 묘사를 통해 각 인물의 특징을 살릴 수 있었으며 생동감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통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인물들이 매우 좁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어 왕립미술원의 우등생이었던 밀레이가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 분명하다.
존 키츠의 시 <이사벨라, 혹은 바질 단지 Isabella: or the Pot of basil>는 라파엘전파 구성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원칙을 완전히 실행하게 될 회화로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키츠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이사벨라와 로렌초Lorenzo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다루었다.
따라서 주제와 모델들의 의상이 라파엘로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키츠의 시에서 이사벨라는 오빠들의 하인이었던 로렌초와 사랑에 빠진다.
<이사벨라>는 오빠들이 여동생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던 계획이 방해받자 매우 화가 난 모습을 나타낸 작품이다.
불운한 운명의 연인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이사벨라와 로렌초가 운명의 핏빛 오렌지를 나눠먹는다.
후에 로렌초의 머리를 벤 뒤 숲속에 묻어버리는 오빠들 가운데 하나가 호두를 거칠게 까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어 이사벨라의 개를 괴롭히고 있다.
이로 인해 수평적 화면이 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밀레이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충실과 의식적인 의고주의 양식 모두를 보여준다.
<이사벨라>는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양식화되어 있으며 계획된 신선함이 있다.
인물들의 빈틈없고 다양한 묘사,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세부에 대한 고고학적이며 정확한 관찰, 멍청한 두 형제의 악의를 포착하는 화가의 방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개를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뻗치는 모티프는 계획적이다.
개를 쓰다듬는 이사벨라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은 로렌초에게서 오렌지 반쪽을 힘들게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동작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치밀한 세부묘사는 전체적인 구도의 비현실과 충돌한다. 배경에 보이는 항아리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상징물로 존재하는데, 로렌초가 살해당한 뒤 그의 영혼이 이사벨라에게 나타나 진실을 밝히자 그녀는 시체를 파내어 그의 머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둔다.


밀레이는 자신의 많은 작품에서의 선례가 되는 <최후의 만찬>과 같이 열세 명의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는 전통을 무시했다.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은 화가로서는 이런 구도를 만들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도는 화면의 테마가 되는 중심사건에서 급격하게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관람자의 눈은 천천히 왼편을 향하면서 울퉁불퉁하게 나열되어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게 되며, 이는 다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초상을 훑어보다가 불운한 여인의 부드러운 태도에 머물게 된다.
뒤쪽 벽을 덮고 있는 태피스트리의 평면성과 바깥쪽 풍경이 보이는 인접 벽면 사이의 관계 설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는데, 공간이 애매모호하며, 풍경이 보이는 벽면은 테이블의 오른쪽 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뒷면의 태피스트리로부터 오른쪽으로 꺾이는 각도로 설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태피스트리와 나란하게 옆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밀레이는 회화 공간을 재편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연주의적 관점의 요구에 구성의 대담함을 적용시키는 일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파엘전파는 피사의 캄포 산토에 있는 15세기 프레스코를 본뜬 조반니 파올로 라시니오의 석판화집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동일한 양식으로 일련의 드로잉을 재작했는데, 이는 구성원들 모두가 동일한 양식을 구사한 유일한 예였다.
밀레이가 1848년에 그린 드로잉 <장미덩굴 곁의 연인들 Lovers by a Rosebush>은 <이사벨라>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두 연인은 물론 개까지도 <이사벨라>와 동일한 모델로 보인다.
꽃에 대한 묘사에서 밀레이가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드워드 콜리 번-존스Sir Edward Coley Burne-Jones(1833-98)>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1855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윌리엄 모리스를 만나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된 에드워드 콜리 번-존스Sir Edward Coley Burne-Jones(1833-98)는 로제티를 만난 뒤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대학을 중퇴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모리스와 런던에 정착하여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지도를 받으며 함께 작업했다.
성직자의 삶을 포기한 그는 회화와 사랑에 빠졌다.
토머스 콤브Thomas Combe가 소장하고 있던 라파엘전파의 작품을 보고 매료되었다.
무엇보다도 로제티의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그리고 있는 단테>와 <엘핀-미어의 처녀들>이 그를 감동시켰다.
그는 교회의 의식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 예술의 반복적인 계율과 중세주의에 매력을 느꼈는데, 로제티의 이런 작품들은 그의 취향에 대한 답을 제공해주었다.
번-존스는 런던으로 이주했을 때 대부분의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을 만났으며, 밀레이의 최근 작품들을 보았다.
회화 미숙했던 이 시기에 그는 때때로 라파엘전파의 자연주의적인 양식을 따르는 회화를 시도했다.


화가로서의 번-존스의 경력은 로제티를 열렬히 추종하고 그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라파엘전파에 속하는 화가는 아니었다.
두 작품 <클라라 폰 보르크 Clara von Bork>와 <시도니아 폰 보르크 Sidonia von Bork>(1860)에서 번-존스는 로제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 빌헬름 마인홀트Wilhelm Meinhold(1797-1851)의 소설 『시도니아 마법사 Sidonia the Sorceress』(1847)를 그림으로 그린 로제티의 양식을 베꼈다.
번-존스는 옥스퍼드 유니온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급 피지에 펜과 잉크로 아서 왕을 주제로 <아름다운 숄을 두른 알리체 Alice la Belle Pelerine>, <전쟁터로 가다 Going to the Battle>, <갤러해드 경 Sir Galahad>과 같은 작은 드로잉을 그렸다.
이것들 가운데 가장 잘된 드로잉은 <전쟁터로 가다 Going to the Battle>로 좀 더 조용하고 덜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로제티의 목판화 삽화와 유사하다.
관람자를 향해 등을 보이는 두 여인과 옆모습의 여인이 궁전의 정원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기사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전경, 중경, 후경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여기서는 세 구획으로 변형되었다.
로제티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대로 지평선을 향해 후퇴하는 느낌을 찾을 수 없으며, 성벽을 중심으로 가까이 있는 사물은 모여 있고 먼 곳에 있는 사물은 흩어진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면의 빛줄기는 빛 체계의 일부이자 드레스의 무늬로 나타나 있다.
열십자무늬를 가까이서 보면 격자 울타리에서도 작은 크기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운데 구획에 창들이 갑자기 연달아 나타나고, 임무를 수행하러 혹은 전쟁터로 가려고 성을 떠나는 기사의 차분한 얼굴이 보인다.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죽는 것 모두 번-존스의 회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날 법 하지 않은데, 그의 화면은 실제 세계와는 다르고 모든 것이 정지하고 일체의 동요도 없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번-존스의 색채는 종종 노란빛을 띠지만 결코 빛나는 법이 없으며, 초기에는 따뜻한 대비와 상당히 강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로제티의 작품을 모방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번-존스의 화면에는 대기가 존재하지 않고 그 어느 것도 강조되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얼굴 표정은 없고 팔은 무기력하게 달려 있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는데 자신이 아는 것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서 그의 회화에는 발전이 없다.


번-존스는 1859년에 이탈리아로 갔으며, 1862년에는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 러스킨과 함께 활동했다.
1877년 이전에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 후 곧 명성을 얻었으며 외국에서도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그는 형태와 표현양식의 순수성 그리고 중세 미술의 고양된 도덕성을 회복하려고 했다.
주제를 성서와 고금의 문학작품에서 취하고 유려한 선묘, 단정한 구도, 풍요로운 색채로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일어난 유일한 변화라면 자신을 로제티에게서 해방시킨 것이었다.
로제티가 번-존스에게 끼친 영향은 1862년 혹은 1863년경부터 점차 줄었고, 그때부터 번-존스는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켰다.
번-존스는 좁고 폐쇄된 상상력을 화면에 펼쳐놓았고 큰 규모로 작업하면서 등장인물들에게 더 큰 공간을 제공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감에 따라 한 주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를 안 러스킨은 번-존스가 북유럽과 그리스 신화 전부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켰으며 폭넓은 공감으로 이를 기독교 전설의 전통과 조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옥스퍼드에 있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번-존스는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기독교 신화가 관념과 감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톤으로 약화시켜버렸다.
그의 회화는 신화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화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신화를 그대로 옮겨놓았으므로 인간의 세계가 아닌 세계로 관람자들을 이끌었다.
이는 그의 이상주의의 함정으로서 허위의 구체성으로 나아갔다.
이런 사실은 그의 누드화에서도 나타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번-존스의 <방앗간 The Mill>





번-존스는 자연스럽게 윌리엄 모리스에게 가까이 갔고, 신화를 사용하는 방법이 모리스의 것과 유사해졌다.
그는 모리스에게서 <목신과 프시케 Pan and Psyche>의 주제를 따오기도 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사악함 때문에 고통을 받아 물에 빠져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은 프시케를 살며시 강가로 밀어 올렸으며 그곳에 앉아 있는 목신이 그녀를 위로한다.
목신은 헤르메스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목인牧人과 암염소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허리에서 위쪽은 사람의 모습이고 염소의 다리와 뿔을 가지고 있으며, 산과 들에 살면서 가축을 지킨다고 여겨져 왔다.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잠든 인간에게 악몽을 불어넣기도 하고, 나그네에게 갑자기 공포를 주기도 한다고 믿어져 ‘당황’, ‘공황’을 의미하는 패닉panic이란 말이 이 신에서 유래했다.
목신은 로마 신화의 파우누스Gaunus에 해당한다. <목신과 프시케>는 번-존스가 초기 이탈리아 작품에서 무엇을 어떻게 끌어냈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는 피에로 디 코시모Piero di Cosimo(1462-1521)의 <프로크리스의 죽음 Death of Procris>(1510)을 고쳐서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번-존스는 준準 인간의 감정, 즉 때때로 개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리고 목신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그린 작품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에 대한 놀랄 만한 느낌을 재현했다.
그는 신화의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느낌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지만 이런 효과를 자주 창출해내지는 못했다.


번-존스 작품의 핵심은 우아함이다. <방앗간 The Mill>은 유미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자연주의를 배제하고 색조와 색채를 미묘하게 조화시킨 그림이다.
오른편에 세모꼴의 현이 달린 타악기의 일종으로 해머로 연주하는 덜시머dulcimar를 연주하는 꿈결 같은 인물은 미술과 음악의 관계를 보여준다.
구성이 우아하고 장식적이며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색채의 처리가 유미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한 성기 르네상스의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1477?-1510)의 양식과 유사하고 왼편의 풍경에서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양식이 발견된다.
프리즈 형태는 번-존스가 사우스 켄싱턴 미술관South Kensington Museum(현재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본 이탈리아의 혼례용 서랍장 앞면에 채색된 부분을 참고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 물방아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작은 인물들은 그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고 극찬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1439?-92)의 <그리스도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1450-55)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번-존스가 이탈리아 회화에서 찾으려고 한 특징은 초기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이 닮고자 한 명확함과 자연에 대한 충실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차가운 빛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의 변화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음영법인 스푸마토sfumato 같은 부드러운 빛과 깊은 그림자를 좋아했다.


수수께끼 같은 작품 <방앗간> 전경의 아름다운 세 여인은 이 작품의 구매자인 콘스탄틴 알렉산더 이오니데스Constantine Alexander Ionides의 딸 애그랄리아 코로니오Aglaria Coronio와 메리 잠바코Mary Zambaco, 마리 스파르탈리Marie Spartali를 모델로 한 것이다.
세 여인 모두 그리스 태생으로 런던의 부유한 그리스인 동호회에서 ‘삼미신三美神’으로 알려진 여성들로 작품에서도 삼미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세 여신의 발은 땅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균형, 좌우대칭, 제스처는 솜씨 있게 표현되었지만 여신들은 육중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춤이라면 그들은 매우 느린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번-존스의 개인적인 사연도 들어 있는데, 그는 1867년에 메리 잠바코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그녀는 남편과 헤어진 여자 상속인이자 여류조각가였다.
잠바코의 연애행각은 스캔들이 되었고 번-존스의 결혼생활도 평탄치 못했다.


<비너스의 칭송 Laus Veneris>은 번-존스의 작품세계가 성숙단계에 이른 작품이다.
수평적인 면들을 이용하여 공간감을 주고 색채를 대담하게 사용한 것은 1850년대 로제티의 수채화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된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과 음악과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번-존스가 흠모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1813-83)는 1861년 파리에서 3막으로 된 낭만적 오페라 <탄호이저 Tannhauser>를 처음 공연했을 때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1876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서 재연했을 때는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독일 시인 탄호이저(1200?-70)의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참회의 노래로 민승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탄호이저는 바이에른 지방의 기사 출신으로 전해오는데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각지를 편력하고 십자군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1797-1856)의 시에서 다루어지고 바그너의 낭만적 오페라로 유명해졌다.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 방랑기사 탄호이저는 자신의 타락을 후회하면서 교황에게 사면을 청원하게 되는데 번-존스는 <비너스의 칭송>에서 그가 타락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탄호이저는 열린 창문 너머로 에로틱한 비너스와 시녀들을 훔쳐보고 있다.
비너스의 집Venusberg 내부는 육체적 쾌락에 싫증이 난 듯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비너스가 손으로 무심히 머리를 쓸어내는 포즈는 로제티 후기 여인상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작품은 비너스의 모습이 메리 잠바코와 유사한 점에서 번-존스의 개인적인 사연과 관련지울 수 있다.
화면의 대부분이 장식적이며 표면이 태피스트리 같다.
실제로 비너스의 집안 가구들은 모리스 상사가 번-존스의 디자인으로 생산해낸 제품들과 비슷하다.
작품 자체가 수공예 정신의 모범적인 예가 되었다.
비너스가 입고 있는 의상의 무늬는 색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도장을 일일이 찍어 만든 것으로 14세기 이탈리아의 방식을 좇은 것이다.
<비너스의 칭송>는 그로스베너 화랑Grosvenor Gallery에서 열린 두 번째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