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시덜Elizabeth Siddall(1829-62)




엘리자베스 시덜Elizabeth Siddall(1829-62)은 수채화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고 중세 기법을 이용하여 낭만적인 주제를 표현했다.
라파엘전파의 지지자 존 러스킨은 시덜의 작업을 존중했으며 그녀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러스킨은 쿼더당 150파운드를 준다는 조건으로 시덜에게 <샬롯 The Lady of Salott> 같은 중세적인 드로잉과 수채화에 대한 선매권을 요구했다.
여성 화가로서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드러낸 <샬롯>은 1832년 테니슨이 아서 왕 시대를 주제로 처음 발표한 시 <샬롯>의 한 구절을 토대로 한 것이다.
샬롯은 저주를 받아 실제 세상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거울에 비친 모습만을 태피스트리로 짜야 했다.
시덜 자신이 옷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달프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직조작업에 숙달된 여성의 이미지에 개인적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중세의 여성 노동은 가정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동일한 제목의 헌트의 작품에서 남성성을 대표하는 것은 무장하고 말을 탄 채 거울에 비쳐진 랜슬롯 경이다.
그 순간 샬롯은 창문너머 카멜롯을 직접 보고 결국 절망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시덜의 드로잉에는 거울이 깨졌고 직기가 부서진 장면은 없다.
시에서 샬롯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시덜은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는 순간을 주제로 삼았다.
헌트의 작품에서는 샬롯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고급 매춘굴을 연상시키는 방에는 여기저기 이국적인 물건들이 흩어져 있으며 그 속에 서 있는 샬롯은 점잖은 부인으로서의 역할에 실패한 여자이다.
헌트의 샬롯과는 반대로 시덜의 샬롯은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제하는 자제력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시덜의 또 다른 드로잉 <방탕한 여인들 곁을 지나가는 피파 Pippa Passing the Loose Women>는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1812-89)의 시를 위한 삽화로 배경은 르네상스 도시 아솔로Asolo이다. 창녀들이 계단에 앉아 애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처녀인 피파가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다.
매춘은 1850년대에 상당한 사회적인 문제였다.
시덜은 낮은 계급 출신이었으므로 모델이라는 그녀의 직업도 점잖은 이들의 눈에는 비천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덜은 누드모델을 하지 않는 등 빅토리아 시대의 예의범절을 고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제티가 후기에 가까이 한 사람들 중에는 가정부이자 정부였던 퍼니 콘포스를 비롯하여 매춘과 관련된 여자들이 있었다.
<방탕한 여인들 곁을 지나가는 피파>에서 시덜은 비난의 여지가 없는 피파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꼼꼼할 정도로 정확한 드로잉을 통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로제티가 “숙달된 작품은 아니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가득하다”고 말한 이 드로잉을 시인 브라우닝이 매우 좋아했다.


시덜은 1857년에 <클럭 손더스 Clerk Saunders>를 그렸는데 수채화인 이 작품의 주제와 시적 양식은 로제티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로제티의 걸작들 중 몇 점은 시덜에게서 받은 영감을 그린 것들이다.
그는 회화와 시의 주제를 단테와 중세의 로맨스에서 취해 이를 가상현실로 묘사했다.
여성 한 사람 혹은 그룹을 통한 이상화되고 관능적인 이미지는 로제티의 주요 모티프였다.
여성들은 사치스러운 액세서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부분은 그가 첼시의 집을 가득 채운 동양적 공예품이나 중세 골동품이었다.


시덜과 벽덕스러운 로제티와의 관계는 1860년 결혼을 전후로 매우 불안정했다.
시덜은 1861년에 사산死産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아편중독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런던에서 아편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1862년 아편 과다복용으로 죽었으며 자살로 추정된다. 전기 연구자들은 로제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시덜의 관에 자신의 원고를 모두 넣고 묻었다가 1869년 다시 관에서 원고를 끄집어내기 위해 시신을 드러낸 기괴한 이야기에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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