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




왕립미술원에서 만난 밀레이와 더불어 회화의 전통적인 규칙과 동시대 미술의 천박함에 반발한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는 런던에 있는 도매상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은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그는 사스 학교Sass's School로 진학하지 못했다.
로제티가 이탈리아에서 온 지식인 가문의 출신이고, 밀레이가 면화 도매업자의 아들로 경제적 후원을 받은 데 반해 가장 경제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 헌트는 왕립미술원에 입학하기 전 4년 동안 부동산회사에서 일했으며 후에는 내셔널 갤러리에 복제화를 팔아 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왕립미술원에 입학했을 때 아무런 선입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학생시절 작품에서 특별히 급진적인 성격을 보이지 않던 헌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47년 미술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존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 1,2권을 읽은 후부터였다.
풍경화의 미학을 정립하기 위해 과학적, 종교적 논의들을 모두 동원한 이 책에서 러스킨은 젊은 화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자연으로 가자’고 하면서 미술의 개혁을 주장했다.
러스킨은 1843년에 『근대 회화론』 1권을 발간한 뒤 이내 유명해졌다. 터너의 회화를 옹호하기 위해 소책자로 출간하려고 했던 『근대 회화론』은 이런 과정에서 계획이 바뀌어 17년에 걸쳐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젊은 화가들을 위해 쓴 결론 부분은 압권이었다.
이 부분에서 러스킨은 클로드 로랭이나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1606-69)를 좇거나 터너를 흉내 내는 것으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충고했다.
영국에서 조슈아 레이놀즈가 1769년에서 1790년까지 한 강의들을 모아 출판하여 널리 읽혀진 『강론』 이래 이 분야에서 그와 같이 진지하게 기존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가 없었다. 레이놀즈는 역사화가 가장 우월하며 초상화와 풍경화는 열등한 장르로 취급해온 르네상스식 장르구분의 질서를 영국 내에 확립했다.
러스킨은 이 모든 것을 돌려놓았는데, 이론적 측면에서 그가 시도한 공격이 바로 라파엘전파가 실제 회화에서 반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든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은 헌트와 밀레이로 하여금 왕립미술원에서 배우는 레이놀즈의 기법과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직접 사생하며 자세하게 관찰하여 생생한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다.


헌트와 로제티는 이전에 서로 본적이 있었지만, 1848년 초여름 왕립미술원의 전시회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로제티는 홀본Holborn에 있는 헌트의 집을 방문하고 둘은 공통된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회화에 대한 자신들의 접근방식을 통일시켜나갔다.
헌트는 로제티에게 밀레이를 소개하고 세 사람이 작업을 함께 하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매일 저녁에 만났으며 피사Pisa에 있는 캄포 산토Campo Santo의 프레스코화들을 복제한 조반니 파올로 라시니오Giovanni Paolo Lasinio(1796-1855)의 판화들을 연구했으며, 특히 메디치 궁전Palazzo Medici에 있는 예배당에 벽화를 그려 유명한 초기르네상스의 피렌체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1420-97)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러스킨은 이런 작품들이 공식적이고 완성된 후기르네상스 회화와는 다르지만 위대한 종교미술의 특징을 지녔다고 했는데, 헌트, 로제티, 밀레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헌트는 양식에 있어서 밀레이와 유사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새로운 초기기독교 회화를 함께 작업하고, 1849년 왕립미술원에서의 전시 성공에 의해 고무되어 있었으며 영국 미술의 미래가 곧 자신들의 미래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 성직자들을 피해 기독교 선교사를 숨겨주는 개종한 영국 가족’을 위한 습작 Study for "A Converted British Family Sheltering a Christian Missionary from the Persecution of the Druids'>(1849)은 헌트의 초기작품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 The Eve of St. Agnes>(1848년경)에서 나타나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이의 작품과 유사하다.
선교사 뒤에 있는 두 여인은 밀레이의 작품을 상기시킨다.
이 작품에도 상징적 소재들이 사용되었고 포도나무와 옥수수는 야만인을 교화시키는 신성한 종교의 영향을 암시한다.
오두막 문에 걸려 있는 그물은 두 가지 이유에서 도입된 것으로 하나는 성서에 언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드루이드 성직자들이 물고기를 두려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기찬 주제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동작을 표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인상을 준다.
신선하고 깨끗하며 선명한 유채의 처리는 성공적인데, 이는 젖은 흰색 바탕을 사용한 라파엘전파의 특징적인 유화기법의 승리 가운데 하나이다.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는 존 키츠의 시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헌트는 키츠의 시에서 “정직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신성함과 방종의 나약함”을 발견했다.
이는 도덕적 문제들의 유형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그의 의도로 이런 점은 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클라우디오와 이사벨라 Claudio and Isabella>(1850)와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 Valentine Rescuing Sylvia from Proteus>(1851)에서도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림으로 그리려는 시도는 라파엘전파 모두에게 특징적이었지만, 밀레이가 동시대 연극의 새로운 조류와 방향을 함께 하며 새로운 자연주의에 관심을 기울인 데 반해 헌트는 셰익스피어를 통해서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려고 했다.
이런 의도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클라우디오와 이사벨라>로 라파엘전파의 초기 양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의 영향 하에 전경에 극도로 세밀하게 잎들을 하나하나 그린 이 작품에서는 감옥의 창밖으로 화사한 봄꽃이 보이지만 상황은 음울하다.
젊은 청년은 누이에게 그녀의 동정童貞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줄 것을 간청한다.
헌트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찾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가장 덜 알려진 <베로나의 두 신사 The Two Gentlemen of Verona>에서 가장 도리에 어긋나는 장면을 묘사했다.
성욕을 주제로 한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는 주인공 발렌타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프로테우스가 실비아를 겁탈하려는 순간에 나타나 “악당 같으니! 무례하고 야만적인 행동을 그만둬”라고 소리치며 이를 막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마지막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프로테우스의 옛 애인인 줄리아가 남자로 변장한 채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는 예전에 프로테우스가 그녀에게 준 것이지만 이제는 가치를 상실한 애정의 상징이다.
희곡의 내용이 실제 야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 이 작품의 배경은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에 인접한 켄트Kent의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며 인물들이 셰익스피어 시대의 의상을 하고 있다.
헌트는 밀레이와 로제티처럼 문학적, 종교적 사건들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여기에서는 자극적인 색상과 색조를 거침없이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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