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은 성령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성서에 기록된 대로 고난 받고 멸시 당했음을 떠올렸다.
그의 생애가 모두 예언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언한 부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자신의 체험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일을 생각하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부활이란 목격의 대상이 아니라 예언과 신앙의 대상임을 알았다.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몸소 행하고 전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서 완성되는 것이며, 제자가 스승의 신념과 신앙을 전파할 때 스승은 제자를 통해 부활한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으며 바리새파 또한 부활을 믿었지만, 그들은 부활이란 최후의 날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신앙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은 구약성서에 부활에 관한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한 자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 또한 상식에 속했다.
예수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부활 개념이 일반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마가복음서 6:14).
바리새파 사람에게서 교육을 받은 바울도 그러한 신학을 이어받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의 신학이 드러난다(데살로니가전서 4:16).
예수의 부활이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도래할 근거가 된다는 것이 바울의 기본 신학이다(고린도전서 15장).


그러나 부활신앙을 부활 사건과 동일시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미 존재했던 부활신앙이 부활 사건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지, 부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부활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다.
예수는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써 부활신앙이 엄연한 사실임을 드러냈다.


부활신앙은 성령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장차 오실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하여 예수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자신의 사역을 성취했다고 기록했다.


예수는 사역 말기에 제자들에게 자주 성령에 관해 가르쳤다.
예수는 성령이 변호인처럼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서 14:26】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요한복음서 16:7】


베드로는 예수의 생애가 하나님의 예정된 생애였음을 말할 때 예언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요엘서 2:28-29】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며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성령의 시대는 메시아의 도래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바램이었다.
베드로는 그러한 바램을 부활신앙과 연관 지어 하나의 거대한 사건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했음을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요한복음서 14:15?1】


요한의 증언은 훗날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되었다.
예수가 자신을 진리라고 말한 것은 성령이 곧 진리의 영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지극한 사랑이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을 동시에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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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수가 처형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예수를 따르던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0리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바위산에 둘러싸인 쓸쓸한 마을이다.
그들은 예수가 붙잡히고 처형당한 일에 관해 이야기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예수가 몸소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함께 걸었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가 “두 분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침통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글로바라는 사람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서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가 시치미를 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주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누가복음서 24:19?4】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서 24:25?6】


이야기는 계속된다.
예수는 두 제자들과 동행하며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에 관한 내용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엠마오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예수에게 함께 하룻밤을 지낼 것을 제안했고 예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을 때 예수가 빵을 들어 축사하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자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는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누가복음서 24:27?2】


누가가 전하는 두 제자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면 제자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예언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던 그들에게 예수는 모든 예언자들의 말을 들려주고 해석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처형된 후 제자들이 예수의 생애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서로 연관 지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스스로 사랑의 화신이 된 스승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약성서를 통해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그들에겐 뚜렷한 이해가 없었지만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최후의 만찬을 떠올렸다.
예수가 빵을 떼어 그들에게 주면서 그것이 자신의 몸이라고 말했고, 포도주를 들어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피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뚜렷한 확신이 생겼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진리의 영이었다.
바로 예언자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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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의 이야기를 전하며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과거에 없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래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듣고 또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이야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황홀감을 맛본다.
한때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고 이야기의 주인공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사람들에게는 심한 체벌이 가해졌지만,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이야기가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는 데 전력했다.
그렇게 전래된 이야기라서 빛이 바래지 않고 어제 일어난 사건처럼 생생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늘나라와 인생의 비밀을 폭로한 불경죄로 처참하게 처형되고 말았다.
그 비밀은 한마디로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사랑의 제단에 스스로 피를 뿌렸다고 말한다.
그가 스스로 저주를 받음으로써 사랑의 화신으로 부활하기를 바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목숨을 바쳤으므로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비밀과 인생의 비밀을 아는 행운을 얻었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입을 씰룩거릴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다시 질문을 한다.
“당신은 사랑을 받지 않으면서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라고 주인공은 말했다.
그러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인공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하늘나라의 통치이며 질서라고 가르쳤다.
종교란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사랑은 로고스이고 진리이며,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그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가난한 산골 동네에서 품팔이를 하며 홀어머니를 부양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는 고난으로 얼룩진 유대인들의 역사를 상징하며, 종교의 속박 때문에 죄인 취급당하는 인생을 상징한다.
그는 유명한 신학자들로부터 신학적 도전을 받았고, 혁명을 꾀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정치적, 사회적 도전을 받았으며, 제자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다.
종교가 사람들을 구속하던 때였으므로 신학 논쟁은 목숨을 걸 만큼 치열했다.


역사에는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야기는 없다.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인생은 무가치하다.
그러한 역사도 무가치하다.
사람들은 꿈과 희망이란 미래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무턱대고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좌절을 맛보았으며 그래서 꿈과 희망이란 생전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주인공은 사랑으로 꿈과 희망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버림받고 소외되는 일은 없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사랑을 알면 꿈과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긍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의 생애를 통해 알았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었다.
과거 이천 년의 종교가 해결하지 못한 실천의 문제를 그가 몸소 행한 것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학자들의 기록에 전해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네 사람의 증언으로 전해졌다.
네 사람은 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다.
이들은 주인공의 생애를 시기적으로 가지런히 정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생애를 틀림없이 재편집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도했지만 어느 누구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생애를 다시 재편집하는 이유는 주인공의 생애가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내내 그리고 지금도 병상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 진수에게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아울러 병상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이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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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신약 사이 300년의 유대 역사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구약성서에서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의 레위 사람 가운데서, 가문별 우두머리들의 이름과 제사장들의 이름은, 다리우스가 페르시아를 다스릴 때의 왕실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느헤미야기 12:22】


여기서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를 뜻한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인 B.C. 331년 가을에 사망했다.
예수가 태어나기 약 300년 전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는 약 300년의 공백기가 있다.
이 시기에 서양역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이 변화에 대해 아는 것은 신약성서, 곧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새 지배자가 되면서면서부터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가 예루살렘을 공략하기까지 먼저 살펴본 후에, 유대가 다윗 왕 이래 처음으로 국권을 회복했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한다.
또한 예수가 헤롯 대왕 재임 때 태어났으므로 로마 제국이 부상하면서 유대의 왕에 즉위한 헤롯, 그가 사망한 후 세 아들이 유대를 분할하여 지배한 분봉왕 제도, 그리고 기사계급 출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취임하기까지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한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새 지배자

B.C. 336년, 200년 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걸쳐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해온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다리우스 3세의 즉위식이 열렸다.
그리고 같은 해 그리스 북부의 작은 왕국 마케도니아에서도 젊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부왕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겾留?동맹군을 격파한 뒤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지중해 연안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확립했지만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2년 뒤 B.C. 334년 역사적인 동방원정을 시작하였는데 그 목표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이듬해 예루살렘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B.C. 332년 시리아로부터 지중해를 따라 내려와 7개월간의 포위 끝에 두로 요새를 함락시시고 이집트까지 진군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북쪽 왕은 돌아가서, 처음보다 더 많은 군대를 일으킬 것이며, 몇 해가 지난 다음에, 큰 군대와 장비를 이끌고 갈 것이다. 【다니엘서 11:13】
하드락 가까이에 있는 하맛에도, 매우 지혜롭다고 하는 두로와 시돈에도, 그 말씀이 내린다. 【스가랴서 9:2】


알렉산드로스는 B.C. 331년 가우가멜라(Gaugamela) 격전지에서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페르시아 군대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가을, 페르시아의 왕궁들은 화염 속에 사라졌으며 스물다섯의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페르시아 국장에 따라 장엄하게 장사지내도록 허락함으로써 승리자의 아량을 베풀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오리엔트 세계의 새 지배자가 되었고 점령 도시들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명명하였는데 이 이름이 붙은 도시는 70여 곳에 달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연결해주는 관문에 위치한 유대의 지배자 역시 다리우스 3세에서 알렉산드로스로 바뀌었다.
신정국가 유대는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았지만 유대교는 상당히 그리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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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살의 알렉산드로스가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야심은 ‘아시아의 왕’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힌두쿠시를 거쳐 오늘날의 사마르칸트로 진군했고, B.C. 326년 봄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Taxila)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는 카불(Kabul) 협곡을 지나 인도와 오늘날의 서파키스탄으로 나아갔다.
10년이 넘은 이 대원정은 B.C. 323년 여름 알렉산드로스가 열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끝났다.


어렸을 적에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문화의 우수성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사도의 역할을 자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과 동방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약 800명의 장군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시켰으며, 페르시아 군인들을 마케도니아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의 무차별 정책은 오리엔트 문화의 그리스화와 그리스 문화의 오리엔트화를 동시에 이루어 헬레니즘 시대를 여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그의 위대함은 훗날 신격화로 나타나 로마의 젊은이들은 그를 신으로 믿으며 숭배했다.


서른두 살의 알렉산드로스가 후사도 없이 사망하자 심복 장군들은 제국을 차지하려고 후계자 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헬레니즘 3왕국 즉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로 나뉘어졌다.
우리가 유대 역사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왕조는 둘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수도를 정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와 시리아의 안디옥(안티오키아)에 수도를 정한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이다.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 군사겭燦台?요충지에 위치한 유대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B.C. 198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가 요단강 근처 파니온(Paneion, 가이사랴 빌립보를 말한다)에서 이집트의 군대를 섬멸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부터 유대는 시리아의 통치영역으로 들어갔다.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안티오쿠스 3세는 한 장관에게 내린 칙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들의 도시로 들어갈 때 중의회의 지휘 하에 열렬히 환영하며 군인들과 코끼리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었고, 성에 있던 이집트 점령군을 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유대에 호의적이어서 성전 확장공사에 원조를 해주었고, 성전 제사에 사용할 물건들을 공급해주었으며 제사장들에게는 면세의 특혜를 주었다.


유대는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제국,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종교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유대인들은 통치자에게 세금을 바치긴 했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전 중심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신정국가 체제였다.
헌법은 모세 5경, 즉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있는 사제법을 따랐다.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를 책임진 대제사장은 신정국가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대제사장직은 B.C. 960년경 솔로몬 왕 때부터 시작된 전통에 따라 사독(Zadok)의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유대의 제3대 왕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야훼께 바치는 성전을 건립하고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생긴 이 전통은 대대로 내려오다가 시리아의 지배 때 메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깨지고 만다.
열광적 헬레니즘주의자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금화를 바치고 사독 가문이 아닌 데도 대제사장직에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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