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살의 알렉산드로스가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야심은 ‘아시아의 왕’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힌두쿠시를 거쳐 오늘날의 사마르칸트로 진군했고, B.C. 326년 봄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Taxila)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는 카불(Kabul) 협곡을 지나 인도와 오늘날의 서파키스탄으로 나아갔다.
10년이 넘은 이 대원정은 B.C. 323년 여름 알렉산드로스가 열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끝났다.


어렸을 적에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문화의 우수성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사도의 역할을 자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과 동방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약 800명의 장군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시켰으며, 페르시아 군인들을 마케도니아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의 무차별 정책은 오리엔트 문화의 그리스화와 그리스 문화의 오리엔트화를 동시에 이루어 헬레니즘 시대를 여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그의 위대함은 훗날 신격화로 나타나 로마의 젊은이들은 그를 신으로 믿으며 숭배했다.


서른두 살의 알렉산드로스가 후사도 없이 사망하자 심복 장군들은 제국을 차지하려고 후계자 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헬레니즘 3왕국 즉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로 나뉘어졌다.
우리가 유대 역사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왕조는 둘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수도를 정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와 시리아의 안디옥(안티오키아)에 수도를 정한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이다.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 군사겭燦台?요충지에 위치한 유대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B.C. 198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가 요단강 근처 파니온(Paneion, 가이사랴 빌립보를 말한다)에서 이집트의 군대를 섬멸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부터 유대는 시리아의 통치영역으로 들어갔다.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안티오쿠스 3세는 한 장관에게 내린 칙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들의 도시로 들어갈 때 중의회의 지휘 하에 열렬히 환영하며 군인들과 코끼리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었고, 성에 있던 이집트 점령군을 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유대에 호의적이어서 성전 확장공사에 원조를 해주었고, 성전 제사에 사용할 물건들을 공급해주었으며 제사장들에게는 면세의 특혜를 주었다.


유대는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제국,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종교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유대인들은 통치자에게 세금을 바치긴 했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전 중심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신정국가 체제였다.
헌법은 모세 5경, 즉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있는 사제법을 따랐다.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를 책임진 대제사장은 신정국가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대제사장직은 B.C. 960년경 솔로몬 왕 때부터 시작된 전통에 따라 사독(Zadok)의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유대의 제3대 왕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야훼께 바치는 성전을 건립하고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생긴 이 전통은 대대로 내려오다가 시리아의 지배 때 메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깨지고 만다.
열광적 헬레니즘주의자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금화를 바치고 사독 가문이 아닌 데도 대제사장직에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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