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하나님의 아들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곧 그가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이 케케묵은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그가 법정에서 신문당한 내용이 바로 이 문제였다. 복음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했다고 기록했고, 초대교회는 이러한 믿음에 따라 형성되었다.
논란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의심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생긴다.


헤브라이어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유대의 왕을 뜻한다.
초기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신앙의 출발로 삼았다.
메시아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생긴 것은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메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의 역할과 사람들이 기대한 역할이 달랐을 뿐 아니라 양자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얻기 바랐다.
그러한 이해가 생전에 가능하지 않다면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가능해지길 원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마가복음서 1:11】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은 소리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받았다는 것은 광야에서 활약하는 예언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행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된 것이지 선택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조건이 선행되지 않을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종말론적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유대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달아났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복음서 6:15】


예수는 다윗 왕의 말씀을 논제로 삼아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 적이 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좥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좦’”
【마가복음서 12:35-36】


예수는 자신이 혈통적으로 다윗 왕의 후손이지만 메시아가 왕의 후계자로서 다윗의 가문에서 배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로마에 빼앗긴 유대의 독립을 회복하여 유대의 왕권을 세우는 메시아가 되는 것은 거부했다.
그는 지상의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통치와 질서를 지상에 세우는 그러한 유대의 왕이기를 바랐으며 이는 신권을 위임받은 왕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메시아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이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유대의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바르게 하는 데 노력을 다했다.
예수의 그러한 노력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열세 번째 사도라고 불렸던 바울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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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신비주의자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신비주의mysticism란 신비체험을 통해 신성(神性)과 합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신비체험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신성과 하나의 실체(實體)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같다.
신비체험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직관에 의한 인식으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인식과는 근본이 다르다.


초기기독교 시대에 그노시스파(Gnosticism, 靈智主義者)가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이해했었다.
그노시스란 원래 지식을 뜻하는데 이들은 신비적 영감으로 신의 계시에 접하여 신과 합일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이해하는 것은 초대교회 교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아서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예수가 신비주의자라는 것은 그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마태복음서 5:3-10).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신비주의 가르침이다.
신비주의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누구에게나 있다.


신비주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요한복음서 11:9-10】


여기서 빛이란 신성을 의미한다.
예수는 사람 안에 빛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면서 인간이 신성을 지녔느냐 하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데 그에게 언어란 달을 가리키기 위한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달을 직접 보려면 손가락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신비주의자는 보았다, 또는 들었다 하는 말을 사용하는데 물론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 실제 시각과 청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말하면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자신에게 내려온 것을 본 것이나,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예수 자신에게만 가능한 보고 들음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서 신비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신비주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제자들의 체험을 의심하게 된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나누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바로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마가복음서 9:2-8】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가 특히 사랑한 제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면서 예언자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제자들에게도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체험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체험을 한 것은 예수가 신비주의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귀신들을 제어하고 질병을 고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는데 곧 신비주의 지식을 준 것이다.
신비주의 지식이란 직관에 의한 순수한 지식이며 자각을 통해 얻은 확실한 지식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그 열둘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그들을 내보내셨다. 【누가복음서 9:1-2】


신성과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the self)를 부정해야 한다.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각오(覺悟)를 뜻하는데 이는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서 궁극적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데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신성과 자아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라는 신비주의 지식을 가르쳤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마가복음서 8:34-35】


신비주의자는 신성과 하나의 실체를 이룰 때, 달리 말하면 신성이 스스로 본질을 드러낼 때 곧잘 환희를 체험한다.
자각에 의한 순수한 지식은 일반 지식과 달라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생긴다.
예수가 환희를 체험하는 가운데 드린 기도에서 순수한 지식과 신성과의 합일에 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주고자 하는 사람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서 10: 21-22】


최후의 만찬에서도 신비주의 요소가 발견되는데 그날 예수가 행한 예식에는 그의 언약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서 14:22-25】


이 구절을 빵이 예수의 몸이고 포도주가 예수의 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예수에게서 신비주의 지식을 구할 수 없다.
그것들은 상징적 언어에 불과하다. 빵은 예수의 인격 또는 신격을 의미하며, 포도주는 행위에 대한 의미로서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고 이해해야 신비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신비주의 방법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과 하나의 실체가 되는 체험을 하기를 바랐다.


예수는 사역 말기에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으며,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신비주의 안에서는 자아와 타아의 구별이 없으며 오로지 신성과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자각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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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대한 궁금증 일곱 가지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하나, 예수는 실존인물일까?

 

1808년 10월 나폴레옹 황제는 바이마르를 방문했다.
황제는 궁정의 고문 뷔란트와 기독교에 관해 대화하던 중,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커다란 의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백발의 뷔란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하, 예수가 역사에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존재했는가 또는 전하께서 살고 있는가 어떤가를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서기 93년경에 쓴 《유대 고대사》는 유대의 첫 역사책으로서 그 책에는 “이른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제는 재판을 위해서 최고회의를 소집하고 이른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출두시켰다.
그는 이들을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고 고소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판결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62년에 처형당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예수의 제자, 즉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44년에 이미 처형당했다.
요세푸스는 예수의 이름이 ‘여호수아(Jehosuah)’로 아주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헤브라이어 여호수아의 애칭이 ‘예수아(Jeschua)’이며 이를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예수(Jesus)’이다.


요세푸스 당시는 초대 교회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그가 의도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예수에 관한 드문 역사적 기록이라서 문맥을 정돈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쯤 지혜로 충만한 사람(우리가 그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면) 예수가 살았었다.
그는 말하자면 전혀 믿기 어려운 일들을 행했는데 즐겨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많은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이 그에게 나아갔었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아)였다.
우리 가운데서 계획된 고소로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물론 전에 그를 사랑했던 이들이 오늘날 그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이 보낸 많은 선지자들이 그에 대한 수천 가지 놀라운 일들을 선포했던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의 또 다른 저서 《유대인 전쟁》 슬라브어 번역본에는 예수의 신문과 처형에 대해 추가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기독교의 전통을 닮아 있어 언급 의도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흥미로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의 아내의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죄판결을 내리기를 거절했으나, 그 대신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했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내용이 다소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예수가 실존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110년경에 쓴 《연대기》에도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타키투스는 64년에 네로 황제가 로마 시에 불을 질렀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그들을 박해했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이름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Christos)에게서 유래했다.


한편 예수의 생애에 관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한 네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저자들이다.
공관복음서는 같은 견해에 따라 씌어졌다고 해서 부르는 말로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들을 지칭한다.
가장 먼저 마가가 60년경에 복음서를 썼고, 요한이 가장 늦은 90년에 썼으며, 그 사이에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가 씌어졌다.


네 사람은 우리가 궁금증을 쉽게 풀 수 있도록 예수의 생애를 시기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내용들도 제각기 달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제자들은 각자의 편집의도에 따라 예수의 생애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수집했는데, 그들의 편집의도란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적 관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음서에서 접하는 예수의 생애는 오류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네 복음서들을 비교하여 재편집하면서 읽는다면 보다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역시 또 다른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생애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사람의 생애를 지식의 대상으로서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학문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종교의 진면목을 놓치게 된다.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개개인의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그의 인생에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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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예수의 모습은 영화나 그림에서 본 모습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성화에 나타난 예수의 공통점은 큰 키에 건장하고 미남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어디서 그처럼 잘생긴 모델들을 구해왔는지 궁금하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전기작가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거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한 모델을 찾았다고 한다.


실존인물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유대인들의 규정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는 키가 크고 건장해야 한다.
예수의 키가 작다거나 허약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한 그 역시 큰 키에 건장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잘생긴 얼굴이란 근거는 없다.
예수의 얼굴에 관한 유일한 언급을 요한복음서에서 본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요한복음서 8:57】


서른서너 살 된 예수가 자신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의미의 말을 하자 사람들은 위와 같은 말로 질책을 했다.
예수가 나이에 비해 늙은이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주름이 졌던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고뇌하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위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가 편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짐을 대신 졌기 때문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짐이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613가지나 되는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많은 제제를 받았던 것이다.
힘에 겨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613가지 율법에는 구레나룻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었다.
법을 어기지 않는 결백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생활에 간섭을 받아야 했다.
예수는 그러한 간섭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그 짐들을 대신 지고 율법학자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서 신학적 논쟁이란 오늘날처럼 고상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논쟁에서 지면 정죄를 받아 중의회에 회부된다.
신성모독죄가 적용되면 돌팔매로 목숨을 빼앗기고 만다.
검사와도 같은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검사보다 더 법에 정통해야 할 뿐 아니라 검사의 책략까지도 알아채야 하는 일이다.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다.
예수의 얼굴에 근심이 없고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란 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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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예수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기원전 8세기에 예언자 미가는 장차 출현할 유대의 왕, 곧 유대인들의 목자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애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가서 5:2】


미가의 예언에 응답하듯이 누가복음서는 예수의 생애가 시작되었음을 이렇게 알렸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누가복음서 2:11】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9km 지점에 있는 작은 동네이다.
예수가 태어난 곳이 부모의 고향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며 그곳이 다윗의 고향임을 강조한 누가의 주장은 훗날 학자들로부터 의심을 받을 만했다.
예수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 신화처럼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복음서를 썼는데 네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 문장이 가장 빼어났다.
누가는 복음서를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귀하께 이 이야기를 차례대로 엮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가복음서 1:3】


누가는 정확하게 조사했다고 씀으로써 자신의 기록의 신빙성을 사전에 확보하려고 했지만 그의 의도는 메시아의 출생을 서술한 처음부터 드러났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씌어졌는데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토스)란 말은 헤브라이어 메시아(Messiah)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의 후손 가운데서 왕위에 오를 자를 선택하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다.
예수의 출생지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기록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누가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한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누가복음서 1:32】


한편 마태는 누가와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의 출생에 관해 기록했다.
그는 예수의 족보를 따지는 방법을 통해 메시아가 탄생했음을 주지시키려고 했다.
마태복음서는 그 시작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42대에 걸친 족보를 나열함으로써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예수의 생애가 신화처럼 꾸며진 것은 후대의 일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시편 구절이 신화를 창조하는 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셨으니,
그는 성실하셔서 변경하지 아니하신다.
“네 몸에서 난 자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왕으로 삼을 것이니,
그가 네 뒤를 이어서 왕위에 앉는다.”
【시편 1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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