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신비주의자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신비주의mysticism란 신비체험을 통해 신성(神性)과 합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신비체험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신성과 하나의 실체(實體)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같다.
신비체험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직관에 의한 인식으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인식과는 근본이 다르다.


초기기독교 시대에 그노시스파(Gnosticism, 靈智主義者)가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이해했었다.
그노시스란 원래 지식을 뜻하는데 이들은 신비적 영감으로 신의 계시에 접하여 신과 합일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이해하는 것은 초대교회 교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아서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예수가 신비주의자라는 것은 그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마태복음서 5:3-10).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신비주의 가르침이다.
신비주의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누구에게나 있다.


신비주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요한복음서 11:9-10】


여기서 빛이란 신성을 의미한다.
예수는 사람 안에 빛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면서 인간이 신성을 지녔느냐 하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데 그에게 언어란 달을 가리키기 위한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달을 직접 보려면 손가락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신비주의자는 보았다, 또는 들었다 하는 말을 사용하는데 물론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 실제 시각과 청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말하면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자신에게 내려온 것을 본 것이나,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예수 자신에게만 가능한 보고 들음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서 신비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신비주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제자들의 체험을 의심하게 된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나누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바로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마가복음서 9:2-8】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가 특히 사랑한 제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면서 예언자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제자들에게도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체험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체험을 한 것은 예수가 신비주의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귀신들을 제어하고 질병을 고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는데 곧 신비주의 지식을 준 것이다.
신비주의 지식이란 직관에 의한 순수한 지식이며 자각을 통해 얻은 확실한 지식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그 열둘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그들을 내보내셨다. 【누가복음서 9:1-2】


신성과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the self)를 부정해야 한다.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각오(覺悟)를 뜻하는데 이는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서 궁극적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데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신성과 자아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라는 신비주의 지식을 가르쳤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마가복음서 8:34-35】


신비주의자는 신성과 하나의 실체를 이룰 때, 달리 말하면 신성이 스스로 본질을 드러낼 때 곧잘 환희를 체험한다.
자각에 의한 순수한 지식은 일반 지식과 달라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생긴다.
예수가 환희를 체험하는 가운데 드린 기도에서 순수한 지식과 신성과의 합일에 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주고자 하는 사람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서 10: 21-22】


최후의 만찬에서도 신비주의 요소가 발견되는데 그날 예수가 행한 예식에는 그의 언약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서 14:22-25】


이 구절을 빵이 예수의 몸이고 포도주가 예수의 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예수에게서 신비주의 지식을 구할 수 없다.
그것들은 상징적 언어에 불과하다. 빵은 예수의 인격 또는 신격을 의미하며, 포도주는 행위에 대한 의미로서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고 이해해야 신비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신비주의 방법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과 하나의 실체가 되는 체험을 하기를 바랐다.


예수는 사역 말기에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으며,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신비주의 안에서는 자아와 타아의 구별이 없으며 오로지 신성과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자각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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