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예수의 모습은 영화나 그림에서 본 모습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성화에 나타난 예수의 공통점은 큰 키에 건장하고 미남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어디서 그처럼 잘생긴 모델들을 구해왔는지 궁금하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전기작가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거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한 모델을 찾았다고 한다.


실존인물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유대인들의 규정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는 키가 크고 건장해야 한다.
예수의 키가 작다거나 허약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한 그 역시 큰 키에 건장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잘생긴 얼굴이란 근거는 없다.
예수의 얼굴에 관한 유일한 언급을 요한복음서에서 본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요한복음서 8:57】


서른서너 살 된 예수가 자신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의미의 말을 하자 사람들은 위와 같은 말로 질책을 했다.
예수가 나이에 비해 늙은이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주름이 졌던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고뇌하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위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가 편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짐을 대신 졌기 때문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짐이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613가지나 되는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많은 제제를 받았던 것이다.
힘에 겨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613가지 율법에는 구레나룻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었다.
법을 어기지 않는 결백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생활에 간섭을 받아야 했다.
예수는 그러한 간섭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그 짐들을 대신 지고 율법학자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서 신학적 논쟁이란 오늘날처럼 고상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논쟁에서 지면 정죄를 받아 중의회에 회부된다.
신성모독죄가 적용되면 돌팔매로 목숨을 빼앗기고 만다.
검사와도 같은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검사보다 더 법에 정통해야 할 뿐 아니라 검사의 책략까지도 알아채야 하는 일이다.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다.
예수의 얼굴에 근심이 없고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란 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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