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대한 궁금증 일곱 가지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하나, 예수는 실존인물일까?

 

1808년 10월 나폴레옹 황제는 바이마르를 방문했다.
황제는 궁정의 고문 뷔란트와 기독교에 관해 대화하던 중,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커다란 의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백발의 뷔란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하, 예수가 역사에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존재했는가 또는 전하께서 살고 있는가 어떤가를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서기 93년경에 쓴 《유대 고대사》는 유대의 첫 역사책으로서 그 책에는 “이른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제는 재판을 위해서 최고회의를 소집하고 이른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출두시켰다.
그는 이들을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고 고소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판결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62년에 처형당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예수의 제자, 즉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44년에 이미 처형당했다.
요세푸스는 예수의 이름이 ‘여호수아(Jehosuah)’로 아주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헤브라이어 여호수아의 애칭이 ‘예수아(Jeschua)’이며 이를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예수(Jesus)’이다.


요세푸스 당시는 초대 교회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그가 의도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예수에 관한 드문 역사적 기록이라서 문맥을 정돈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쯤 지혜로 충만한 사람(우리가 그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면) 예수가 살았었다.
그는 말하자면 전혀 믿기 어려운 일들을 행했는데 즐겨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많은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이 그에게 나아갔었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아)였다.
우리 가운데서 계획된 고소로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물론 전에 그를 사랑했던 이들이 오늘날 그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이 보낸 많은 선지자들이 그에 대한 수천 가지 놀라운 일들을 선포했던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의 또 다른 저서 《유대인 전쟁》 슬라브어 번역본에는 예수의 신문과 처형에 대해 추가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기독교의 전통을 닮아 있어 언급 의도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흥미로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의 아내의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죄판결을 내리기를 거절했으나, 그 대신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했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내용이 다소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예수가 실존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110년경에 쓴 《연대기》에도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타키투스는 64년에 네로 황제가 로마 시에 불을 질렀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그들을 박해했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이름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Christos)에게서 유래했다.


한편 예수의 생애에 관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한 네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저자들이다.
공관복음서는 같은 견해에 따라 씌어졌다고 해서 부르는 말로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들을 지칭한다.
가장 먼저 마가가 60년경에 복음서를 썼고, 요한이 가장 늦은 90년에 썼으며, 그 사이에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가 씌어졌다.


네 사람은 우리가 궁금증을 쉽게 풀 수 있도록 예수의 생애를 시기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내용들도 제각기 달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제자들은 각자의 편집의도에 따라 예수의 생애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수집했는데, 그들의 편집의도란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적 관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음서에서 접하는 예수의 생애는 오류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네 복음서들을 비교하여 재편집하면서 읽는다면 보다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역시 또 다른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생애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사람의 생애를 지식의 대상으로서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학문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종교의 진면목을 놓치게 된다.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개개인의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그의 인생에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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