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대한 공리의 총체로서의 이성



순수형상으로서의 누스 혹은 이성이 자신을 사유하는 것이 자연이라는 말은 이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순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 대한 사고에서 연유한 것으로 갈릴레이 이래 과학으로 규정된 자연의 의미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오늘날 이성이란 말은 어떤 담론이 대상을 인식할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게 되는데 이때 담론이 고려할 규칙들이나 공리들의 총체나 체제를 의미한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대상 과학의 경우 관찰을 실행하고 반복하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실험실에서의 과학자들의 경험은 이런 것들과 거의 관련이 없다면서 그러나 이런 경험이 인류학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지적했다.
극히 추론적인 규칙들의 총체는 경험과는 무관하며, 경험을 소흘히 함으로써 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뿐이라면서 예를 들어 정신분석에 의한 꿈의 해석은 이런 인지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8)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자료, 즉 꿈에 관한 이야기는 동일한 형태로 재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보편적인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담론은 그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고찰하는 담론들, 즉 넓은 의미에서 인식론들과는 구별되고 인식론들은 과학적 이성의 이념을 반성, 조작, 변용, 이데올로기화 한다.9)

과학에 대한 주석들이 갈릴레이시대 이래 많아지고 있으며, 오늘날 과학에 대한 사회학적 과학, 과학적 욕망과 같은 과학에 대한 정신분석, 과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역사 등이 존재하는데 리오타르는 이런 것들이 기술적·사회적·심리적·공상적인 경험적 변수들과 과학적 이성이 무관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빈번한 혼동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존성이 과학적 담론의 규칙체계보다는 오히려 그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10)
이런 규칙들의 지위에 관한 의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는 오늘날 과학적 이성에 관한 주석이 어떤 커다란 불확실성의 감정을 초래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런 지위를 고찰하게 되면, “이런 규칙들은 주여져 있는가, 자연적인 것인가, 신적인 것인가, 필연적인 것인가?”11) 하는 인식에 관한 규칙들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성의 이성 혹은 그 근거를 회의하는 것을 뜻한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성의 이성은 순환을 범함이 없이는 제시될 수 없으며, 새로운 규칙들 혹은 공리들을 확립하는 능력은 이런 규칙들에 대한 필요가 감지되는 정도로 나타난다.
과학은 이성을 ‘드러내는 수단 moyen de reveler’이며, 이성은 과학의 ‘존재근거 raison d’etre’로 남아 있다.12)

그러므로 이성에 귀속된 지위는 필요와 수단의 변증법, 기원에 대한 동등성, ‘새로운 것’이라는 무한한 능력의 요청, 잉여권력에 의한 정당화라는 기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직접 유래한다.”13)

리오타르는 인지적 이성이 인식 자체에서가 아니라 공공이나 공공의 위임들이 추구하는 목적에서 발견된다면서 인지적 이성의 이성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과학이 더욱 많은 정의, 복지, 자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지적했는데 파스칼이 명확하게 구별한 대로 지식과 세계 사이의 야합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보았다.14)
이 같은 이성들 사이의 혼란은 합리적으로 변명될 수 없으며, “혼란은 보편언어une langue universelle, 즉 개별적 언어들les langages partticuliers 속에 확립되어 있는 모든 의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메타언어un metalangue에 대한 지극히 ‘근대적’인 기획에서 기인한다.
이성에 대한 이같은 회의는 과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메타언어에 대한 비판, 즉 형이상학(그리고 또한 메타정치학)의 몰락에서 유래한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현재 철학적 사유의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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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 혹은 형상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그리스인이 자연은 질서정연하며 합목적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운동이나 정지의 근원이 된다면서 이런 내적 원리를 지녔을 때 “하나의 자연 혹은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한 그는 궁극적 원인을 형상, 질료, 운동, 목적 넷으로 보고 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 혹은 형상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질료보다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여러 개의 형상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개물에 형상이 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질료가 형상을 얻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생성으로 보았고, 사물의 실재, 즉 현실적 활동energeia 혹은 완성태entelekheia로 보았다.
그에게 질료는 가능태dynamis로서 참나무 씨앗이 참나무의 가능태인 것처럼 사물로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질료 자체는 형상을 결여하기 때문에 단지 가능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질료가 형상을 욕구할 때 생기는 것이 운동으로 이는 가능태가 현실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질료가 욕구하는 운동의 대상인 형상을 그는 본래 신성을 지닌 좋은 것으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원인들이나 다름없었는데 목적을 갖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필연적인 목적을 갖고 작용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는데 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적자생존5)에 대해 논했다.
그가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한 이유는 사건들이 일정한 양식으로 발생하므로 일련의 사건이 한 가지 완성될 경우 앞서 일어난 사건들은 완성을 위한 단계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지막 완성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6)
이런 식의 설명은 동식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과학의 발전에는 장애가 되고 특히 윤리문제에 걸림돌이 된다.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형상들 가운데 모든 타자를 움직이는 단일한 ‘부동의 원동자 First Mover’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순수형상’으로서 누스Nous(Reason) 혹은 사유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그에게 자연은 누스가 “자신을 사유하는 것” 혹은 “사유의 사유”인 것이다.
누스 혹은 사유는 훗날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신의 개념에 적용되었다.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뉴턴Sir Isaac Newton(1642-1727)의 ‘제1법칙 운동’에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비과학적인 사고였음을 증명했다.
갈릴레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 운동법칙에 의하면 어떤 물체가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은 채 운동할 경우 그 물체가 일정한 속도로 직선운동을 계속한다.
이는 진공 상태에서 증명된다.
외적 원인은 운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못되고 다만 속도와 방향의 변화에만 작용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자연 운동인 ‘부동의 원동자’가 일으키는 원운동을 순수형상으로서 누스로 이해했는데 러셀은 이는 운동의 방향에 있어 지속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뉴턴의 중력법칙에 의해 중심을 향해 계속해서 이끄는 어떤 힘을 요구하므로 또한 비과학적인 사고임을 지적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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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예술을 자연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동·식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보고 만물이 변화의 현상 안에서 굴복하지 않고 견뎌낸다고 보았다.
이런 활동적인 원리가 변화의 생산물의 본질을 정의한다.
우리는 자연에 관한 그의 견해를 먼저 이해한 후 예술이 자연의 명백한 순환적 본성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불확실하고 혼돈된 감성을 따르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자연학』과 『천체에 대하여 On the Heavens』에 상세히 적혀 있는데 후자는 전자가 논의하다 남긴 대목에서 시작된다.
이 두 권의 책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1564-1642)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과학을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자연에 대해 보편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자연의 본성에 속하는 것들은 그 자체 운동과 정지의 원리들을 갖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자연은 그리스인이 ‘퓌시스 phusis(physis)’라고 부른 것에 관한 학문으로 퓌시스는 우리가 번역하는 자연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 말은 생성becoming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데 예를 들면 참나무 씨앗의 본성nature이 참나무가 되고, 뽕나무 씨앗의 본성이 뽕나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본성의 뜻을 자연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낟알의 성장뿐 아니라 낟알 자체도 자연에 포함시키면서 “자연이란 표현은 어떤 자연적 과정 및 그 과정의 산물 양자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성 혹은 자연은 사물이 나서 자라 최종 상태에 이르는 것이며, 이는 그 사물의 존재 목적의 본성 혹은 자연이 최종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에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은 사물이 지닌 본질로 존재하고, 어떤 사물은 외적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동·식물과 순수 질료(원소)는 그 성질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그에게 자연은 사물의 질료를 지칭하는 동시에 형상, 즉 사물의 본질, 자연을 이끄는 힘이다.
따라서 사물들은 동작 혹은 운동의 내면적 원리를 지니는데 그가 말하는 운동이란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운동보다 넓은 의미로 물리적 운동에 특성의 변화와 크기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연에 대해 이원적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자연을 끊임없는 변화 중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조건 하에서도 일정하게 지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 같은 이원적 개념은 중세에까지 통용되었으며, 현재에도 이처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연과 정신적으로만 알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두 종류의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타타르키비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 혹은 타타르키비츠의 말로 “그리스적 표현의 애매모호성”2)이 로마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를 12세기에 아베뢰즈Averroes(1126-98)가 퓌시스phusis를 나투라natura로 번역했기 때문인 것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나투라는 가시적 사물들 전부summa rerum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을 의미했다. 중세 때는 그 애매모호성을 무해하게 만들기 위해 각각 다른 형용사를 붙여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을 구별지음으로써 자연이란 표현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보유했다.”3)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뱅상 드 보베Vincent de Beauvais(?-1264)의 『사면경 Speculum quadruplex』에서 확인된다면서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 및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1260-1327?)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개념을 받아들였고, 또한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와 스피노자Benedict (Baruch) Spinoza(1632-77) 등과 같은 몇몇 근대 철학자들도 이를 수용했다고 적었다.

신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에서 비롯했는데 뱅상 드 보베는 『사면경』에서 “능산적 자연은 곧 자연물들의 지고한 규범 혹은 패턴인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라고 했다.
그는 능산적 자연을 조물주로 보았고 소산적 자연을 피조물로 보았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에는 자연을 창조에 한정했는데 신은 자연의 창조주이나 자연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해석은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예술론에 영향을 끼쳤는데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할 때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과 가시적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는 『엔네아데스』 5장 초에서 “예술은 한낱 가시적 사물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원천을 이루는 원리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 즉 가시적 사물 전체를 생산해내었고 또 생산해내고 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천 년 후 알베르티도 『회화론』에서 플로티누스가 말한 의미로서의 자연을 언급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오늘날에까지도 수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주제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이었던 반면 세잔의 주제는 플로티누스와 알베르티가 말한 자연이었다고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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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는 질료matter와 형상form이 구별되는데 예를 들면 대리석은 질료이고 조각가가 보여준 조각상은 형상이다.
형상을 형태로 이해하면 문제가 없지만 그는 질료가 사물이 되는 것을 형상의 원인으로 간주하여 형상을 사물의 실체와 동일시했다.
그는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보았는데 물론 형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형상, 즉 사물의 본질이 실체라고 생각했고, 이를 형상이 관여하는 질료와는 독자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형상을 질료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믿었다.
그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모든 개체들을 구성하는 이데아로 형상을 접목시켰다.
그에게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로 질료는 형상의 가능태이다.
그러므로 한 덩어리의 대리석은 가능태에 있는 조각상이라고 말할 수 있거나 또는 하나의 조각상은 적합한 행위로서 한 덩어리의 대리석에서 생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가 오브제들의 개별적인 모습보다는 그것들이 공유하는 객관적인 형상이나 본질을 모방한다면서 예술가의 입지를 한층 격상시켰다.
예술이 개별적인 종자의 형태보다는 객관적인 형상을 모방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미학인데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객관적인 인식력의 역할을 역사보다는 과학에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예술가가 오브제의 형태보다는 그 형상 혹은 본질을 재현한다는 그의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오브제를 통해서 그 오브제가 지닌 형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 훌륭한 화가란 호랑이, 사자, 말 혹은 어떤 류의 의자와 침대 혹은 인간의 코미디와 비극적 행위를 묘사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들만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형상들을 더불어 묘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혹은 형상론에 있어서의 문제는 수많은 호랑이, 사자, 말 혹은 어떤 류의 의자와 침대에서 어떻게 모든 것들이 공유하는 그 적합한 형상을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들이 나고 죽더라도 그 객관적 형상들은 존속하며, 따라서 더 영구적인 실재라고 했다.
그에게 형상은 기본 실재로 개별적인 것들과는 구별되는 존재이고 개별적인 것들은 변화의 흐름에서 단지 그 형상의 양상들이다.
플라톤은 예술가가 개별적인 것들을 모방한다고 하찮게 여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시적·개별적인 것들을 통해 예술가는 분별할 수 있는 그 객관적인 형상들을 모방할 수 있다고 스승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정정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런 사상은 그리스인에게 만연되어 있었는데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자연이 하나의 교향곡이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리스인의 전설에 의하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연극작품 <에타루스>에서 언급한 대로 조각과 건축의 발견은 데다루스인데 호메루스Homer(BC 8세기경)는 그가 아킬레스의 방패를 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헤시오도스Hesiodus(700년경 BC), 헤로도토스Herodotos(489-425 BC), 호메루스 등은 대장장이를 중요한 마술적·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자로 여겼다.
피타고라스 이후 그리스인은 수와 비례 속에서 자연의 심오한 법칙, 즉 존재의 원리를 찾았으며 피타고라스학파는 세계의 전체적 근간이 되는 이 원리를 음악에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에 비례가 있다고 보았는데 예를 들면 물에 있어서 산소와 수소의 비례라든가 사람의 몸에 있어 수분이 차지하는 퍼센트를 말한다.
물론 그가 이런 과학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리듬처럼 고유한 비례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확한 비례와 부분들의 통합은 플라톤에게도 매우 중요했는데 그는 예술적 목적을 위해서 자연의 형식을 조금이라도 수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이데아들의 완전미와 불완전한 감각미를 대립시켰다.
이데아를 감각미의 ‘원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플로티누스에 의해서였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 사람 모두 미를 아름다운 사물들의 객관적 한 특징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물의 미를 부분들의 비례 및 배열에 두었으므로 사물이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다울 수도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한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밖의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히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미에 대한 그의 판단은 가톨릭 미학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354-430)는 말했다.
“나는 어떤 사물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지 아니면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준다는 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했다.
“어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다운 본질essentialiter pulchra로 보고 미를 사물의 본질이자 실질essentia et quidditas로 여겼는데 플라톤의 영향이었다.
이런 미에 대한 관념이 르네상스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베르티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사물이 아름답다면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도 미는 하나의 커다란 혜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플라톤은 “만약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미를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라고 했다.
미는 찬미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신성하게 여겨졌다.
내적이고 정신적인 미에 대한 찬탄이 외적이고 물질적으로 번졌으며, 가톨릭과 중세가 가졌던 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미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미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즉 자연의 한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술 자체의 한 특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미를 예술의 목적, 즉 예술들을 한데 결합시키고 규정짓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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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고의적 예술 격하와 그에 따른 혼돈



플라톤은 회화와 생물을 본질미가 아닌 비교적 아름다운 것들로 취급했고, 비극과 희극은 순수하지 않은 것들로 취급했다.
회화와 문학에 대한 그의 배척은 미를 지나치게 ‘형상’으로 파악하려는 사변적 정립에도 원인이 있지만 정치적으로 불순한 동기가 작용한 때문이다.
단토는 저서 『예술의 철학적 특권박탈 The Philosophical Disenfranchisement of Art』(1986)에서 플라톤의 불순한 동기를 예술의 철학적 특권 박탈이었다는 말로 신랄하게 비판한다.14)
플라톤의 『국가 The Republic』 10권에 나타난 예술가의 모습을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BC 450년경-385)의 희극 『구름 The Clouds』(BC 423)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를 빗대어 시대에 뒤진 자로 오명을 씌운 그 철학자의 모습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아서 단토는 주장한다.15)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플라톤이 숭배해마지 않는 소크라테스를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현실과 무관한 이상주의자로 조소했다.
『구름』이 철학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자 소크라테스는 제자이면서 서사시인 이온에게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성보다 낮은 수준에서 관객을 궁지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암울하고 혼돈된 기백에 의존한 것이라고 이온에게 설명했다.
단토는 이를 가리켜 “오직 자체의 자아-평가에서 예술을 다루는 것”으로 비판한다.16)

단토는 『구름』과 『국가』를 예술과 철학 사이 전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이온이 플라톤에 의해 『국가』의 심리상태의 확인, 즉 예술이 교활한 표리부동 안에서 예술에 반해 사용되고 있음을 극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묘사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예술가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자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단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해 철학과 예술 사이의 전쟁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플라톤의 철학이 모방의 모방이 된 이래, 이후 철학이 플라톤적 유언에 자리매김되는 부록에 있었던 이래, 철학 자체가 곧 예술의 특권 박탈이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헤겔리안으로서 그는 헤겔이 바로 예술을 철학에서 구분하여 미학을 예술철학으로 탈바꿈하게 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술이 빠져나간 철학의 꼴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 생긴 다음의 의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예술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형성된 철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가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술이 자유롭게 되자 예술을 압제해 온 철학 또한 자연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공격을 니체는 ‘미적 소크라티즘 aesthetic socratism’이라 했는데 이는 소크라테스가 이성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것들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이성을 미로 예증한 때문이다.
니체는 이를 불합리 안에서 지독한 미를 발견하는 비극의 사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안했다.
단토는 이를 그같은 것에 이르도록 소크라테스가 우리를 확신시키는 희극의 사망을 나타낸다고 했다.

단토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관념은 역사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플라톤에 의한 철학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플라톤은 예술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행위로 보고 이에 대응할 만한 모방론을 만들어 유포시켰기 때문에, 서양의 미술사를 단토는 “예술을 고립시키려 한 플라톤의 예술론에 의한 미술의 억압사”로 본다.
그는 칸트가 예술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무관심성 Interesselosigkeit’이란 말로 특징지운 것을, 미술품은 자연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말과 관련지워서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을 가한다.

단토는 말한다.17)

플라톤이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직 그리고 궁극적으로 순수한 형상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자이어야만 현상의 세계에서 시종일관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보통 남자와 여자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들 - 돈, 권력, 섹스, 사랑 - 에도 흥미를 쏟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무관심한 결정들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단순히 금으로 나타난 것을 소유함에 있어 어느 누가 의기양양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이래 영리하게도 더 할 나위 없이 예술품들을 관심의 범위 밖에 자리매김한다.
사람됨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인 이래 플라톤의 시스템에서 실재가 주된 명백한 품등 밖에 자리매김되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인간 품등 밖에 자리매김되므로 - 그래서 그들이 반대 방향들로부터 그 논점에 접근하더라도 둘 모두에 있는 그 밀접한 관계는 예술이 인간적인 것으로 우리가 규정하는 관심들로부터, 그리고 그것에 알맞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에 대한 존중함과 더불어 자리매김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휴가라는 것이다.

단토는 이런 관점이 칸트가 예술에 관해 ‘무목적적 목적성’이란 말을 언급함으로 인해 강화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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