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는 질료matter와 형상form이 구별되는데 예를 들면 대리석은 질료이고 조각가가 보여준 조각상은 형상이다.
형상을 형태로 이해하면 문제가 없지만 그는 질료가 사물이 되는 것을 형상의 원인으로 간주하여 형상을 사물의 실체와 동일시했다.
그는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보았는데 물론 형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형상, 즉 사물의 본질이 실체라고 생각했고, 이를 형상이 관여하는 질료와는 독자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형상을 질료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믿었다.
그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모든 개체들을 구성하는 이데아로 형상을 접목시켰다.
그에게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로 질료는 형상의 가능태이다.
그러므로 한 덩어리의 대리석은 가능태에 있는 조각상이라고 말할 수 있거나 또는 하나의 조각상은 적합한 행위로서 한 덩어리의 대리석에서 생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가 오브제들의 개별적인 모습보다는 그것들이 공유하는 객관적인 형상이나 본질을 모방한다면서 예술가의 입지를 한층 격상시켰다.
예술이 개별적인 종자의 형태보다는 객관적인 형상을 모방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미학인데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객관적인 인식력의 역할을 역사보다는 과학에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예술가가 오브제의 형태보다는 그 형상 혹은 본질을 재현한다는 그의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오브제를 통해서 그 오브제가 지닌 형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 훌륭한 화가란 호랑이, 사자, 말 혹은 어떤 류의 의자와 침대 혹은 인간의 코미디와 비극적 행위를 묘사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들만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형상들을 더불어 묘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혹은 형상론에 있어서의 문제는 수많은 호랑이, 사자, 말 혹은 어떤 류의 의자와 침대에서 어떻게 모든 것들이 공유하는 그 적합한 형상을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들이 나고 죽더라도 그 객관적 형상들은 존속하며, 따라서 더 영구적인 실재라고 했다.
그에게 형상은 기본 실재로 개별적인 것들과는 구별되는 존재이고 개별적인 것들은 변화의 흐름에서 단지 그 형상의 양상들이다.
플라톤은 예술가가 개별적인 것들을 모방한다고 하찮게 여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시적·개별적인 것들을 통해 예술가는 분별할 수 있는 그 객관적인 형상들을 모방할 수 있다고 스승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정정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런 사상은 그리스인에게 만연되어 있었는데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자연이 하나의 교향곡이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리스인의 전설에 의하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연극작품 <에타루스>에서 언급한 대로 조각과 건축의 발견은 데다루스인데 호메루스Homer(BC 8세기경)는 그가 아킬레스의 방패를 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헤시오도스Hesiodus(700년경 BC), 헤로도토스Herodotos(489-425 BC), 호메루스 등은 대장장이를 중요한 마술적·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자로 여겼다.
피타고라스 이후 그리스인은 수와 비례 속에서 자연의 심오한 법칙, 즉 존재의 원리를 찾았으며 피타고라스학파는 세계의 전체적 근간이 되는 이 원리를 음악에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에 비례가 있다고 보았는데 예를 들면 물에 있어서 산소와 수소의 비례라든가 사람의 몸에 있어 수분이 차지하는 퍼센트를 말한다.
물론 그가 이런 과학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리듬처럼 고유한 비례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확한 비례와 부분들의 통합은 플라톤에게도 매우 중요했는데 그는 예술적 목적을 위해서 자연의 형식을 조금이라도 수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이데아들의 완전미와 불완전한 감각미를 대립시켰다.
이데아를 감각미의 ‘원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플로티누스에 의해서였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 사람 모두 미를 아름다운 사물들의 객관적 한 특징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물의 미를 부분들의 비례 및 배열에 두었으므로 사물이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다울 수도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한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밖의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히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미에 대한 그의 판단은 가톨릭 미학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354-430)는 말했다.
“나는 어떤 사물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지 아니면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준다는 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했다.
“어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다운 본질essentialiter pulchra로 보고 미를 사물의 본질이자 실질essentia et quidditas로 여겼는데 플라톤의 영향이었다.
이런 미에 대한 관념이 르네상스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베르티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사물이 아름답다면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도 미는 하나의 커다란 혜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플라톤은 “만약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미를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라고 했다.
미는 찬미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신성하게 여겨졌다.
내적이고 정신적인 미에 대한 찬탄이 외적이고 물질적으로 번졌으며, 가톨릭과 중세가 가졌던 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미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미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즉 자연의 한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술 자체의 한 특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미를 예술의 목적, 즉 예술들을 한데 결합시키고 규정짓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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