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 혹은 형상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그리스인이 자연은 질서정연하며 합목적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운동이나 정지의 근원이 된다면서 이런 내적 원리를 지녔을 때 “하나의 자연 혹은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한 그는 궁극적 원인을 형상, 질료, 운동, 목적 넷으로 보고 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 혹은 형상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질료보다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여러 개의 형상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개물에 형상이 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질료가 형상을 얻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생성으로 보았고, 사물의 실재, 즉 현실적 활동energeia 혹은 완성태entelekheia로 보았다.
그에게 질료는 가능태dynamis로서 참나무 씨앗이 참나무의 가능태인 것처럼 사물로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질료 자체는 형상을 결여하기 때문에 단지 가능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질료가 형상을 욕구할 때 생기는 것이 운동으로 이는 가능태가 현실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질료가 욕구하는 운동의 대상인 형상을 그는 본래 신성을 지닌 좋은 것으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원인들이나 다름없었는데 목적을 갖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필연적인 목적을 갖고 작용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는데 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적자생존5)에 대해 논했다.
그가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한 이유는 사건들이 일정한 양식으로 발생하므로 일련의 사건이 한 가지 완성될 경우 앞서 일어난 사건들은 완성을 위한 단계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지막 완성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6)
이런 식의 설명은 동식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과학의 발전에는 장애가 되고 특히 윤리문제에 걸림돌이 된다.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형상들 가운데 모든 타자를 움직이는 단일한 ‘부동의 원동자 First Mover’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순수형상’으로서 누스Nous(Reason) 혹은 사유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그에게 자연은 누스가 “자신을 사유하는 것” 혹은 “사유의 사유”인 것이다.
누스 혹은 사유는 훗날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신의 개념에 적용되었다.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뉴턴Sir Isaac Newton(1642-1727)의 ‘제1법칙 운동’에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비과학적인 사고였음을 증명했다.
갈릴레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 운동법칙에 의하면 어떤 물체가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은 채 운동할 경우 그 물체가 일정한 속도로 직선운동을 계속한다.
이는 진공 상태에서 증명된다.
외적 원인은 운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못되고 다만 속도와 방향의 변화에만 작용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자연 운동인 ‘부동의 원동자’가 일으키는 원운동을 순수형상으로서 누스로 이해했는데 러셀은 이는 운동의 방향에 있어 지속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뉴턴의 중력법칙에 의해 중심을 향해 계속해서 이끄는 어떤 힘을 요구하므로 또한 비과학적인 사고임을 지적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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