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

 
헤라클리터스Heraclitus는 Everything changes라고 말한 데 비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Nothing changes라고 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탈리아 남쪽 엘레아Elea 사람으로 플라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청년이었을 때 (기원전 450년 쯤) 파르메니데스를 만났는데 늙은이였고 소크라테스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통해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남쪽과 시실리Sicily 사람들은 아이오니아Ionia 사람들에 비해서 과학적이고 회의적이기보다는 신비주의와 종교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피타고라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형이상학을 소개한 데 있으며 형이상학은 헤겔에까지 내려오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논리학을 발견했다고도 말하는데 그는 논리에 근거해서 형이상학을 창조해냈다.

그는 감관의 세계는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실재는 오로지 하나the One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만물이 나고 죽는 것을 보고 다라지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는데 만물이 끊임없이 달라진다고 믿은 헤라클리터스와는 상반되는 사고였다.
그는 일원론주의를 표방했는데 예를 들면 그에게는 차겁고 뜨거운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거운 것은 뜨겁지 않은 것이었고 어둠은 빛이 아닌 것이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유명하다.

"너는 부재하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사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철학에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용은 존재할 수 있다.
어떻게?
그의 논리로라면 이러 할 것이다.

"어떤 책에 동물이 있는데 그 놈을 용이라 한다."

홍길동과 춘향이도 마찬가지로 이런 논리로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게 된다.
즉 용, 홍길도, 춘향이는 말word로서의 용, 홍길동, 춘향이인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우리가 현재 강감찬에 관해 말할 경우 강감찬은 논리적인 의미에서 현재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아는 강감찬은 전해내려오는 강감찬일 뿐 역사적으로 존재한 강감찬에 관해서는 모를 수 있다.
이럴 경우 그는 말할 것이다.

"너는 과거의 사람 강감찬을 현재 말하고 있는데
너의 강감찬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것이며
기억이 지식의 근원일 줄을 네가 안다면 과거에 대한 것이더라도 기억이 현재 작용하고 있으므로
기억이 어떤 의미에서 현재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본체substance가 있음을 가정한 것으로 그는 본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런 개념이 그에 의해서 정의되었으며
본체란 개념은 이 천 년이상 철학, 심리학, 물리학, 그리고 신학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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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페도클레스

 
마지막으로 7명의 고대 그리스 현인들 중 Empedocles가 있다.
그는 철학자, 예언자, 과학자, 그리고 야바이꾼으로 기원전 440년에 활약했다.
그는 시실리 남쪽 아크라가스Acragas의 시민이었다.
그를 야바이꾼이라고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정치가로 자처하면서도 자신을 신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인이 거주하던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시실리에서도 전제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은 잦았으며 싸움의 선두에 선 사람들은 보통 처형되거나 도시 밖으로 쫒겨났다.

엠페도클레스는 쫒겨났고 쫒겨난 후부터는 예언자로 행세했다.
그는 경이로운 일들을 시위했는데 때로는 마술을 부렸고 때로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시위했다.
예를 들면 자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석을 이용해서 시위를 하면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 즉 예언자로 보일 수 있다.
전래되는 이야기로는 그가 바람을 조정했으며 사흘 전에 죽은 여인을 살려냈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에트나Etna에 있는 화산 분화구crater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신이라도 분화구 속에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이 녹아버렸을 것이다.

이런 시가 전래된다.

"위대한 엠페도클레스,
열렬한 혼 에트나에 뛰어들었고
온몸이 구워졌다(roasted)."

이 시를 쓴 시인의 상상력에는 문제가 있는데
분화구 속에서는 구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녹아버렸을 것이다.

과학적 그의 발견에는 공기를 나눌 수 있는 물질이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그는 양동이를 거꾸로 물 속으로 담그면서 물이 양동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시위하면서 공기를 나눌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양동이를 약간 들어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물이 영동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공기가 나뉘어졌다가 사라짐을 설명했다.
그는 또 컵의 물을 막대기로 휘저으면서 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식물도 섹스를 한다면서 진화를 말했으며 가장 적당한 것이란 현재 잔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달이 빛을 반사한다고 했고 태양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빛이 지나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되지만 워낙 빨라 우리가 관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일식이란 달이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우주에 대한 관찰은 놀라웠다.
그는 이탈리아에 의학 학파를 결성했으며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우주의 원소로 먼지, 공기, 불, 물 네 가지를 꼽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水地火風 네 가지를 기본 원소element로 꼽은 것이다.
그는 만물이 이 네 원소들의 적절한 비율로의 구성이라고 했다.
그는 네 원소들이 사랑love에 의해서 혼용되고 다툼strife에 의해서 나눠진다고 했다.
이런 변화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필요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Love와 Strife의 관계에는 주기가 있으며
모든 물질은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네 가지 원소들만 love와 strife와 더불어서 영원하다고 했다.

Strife만으로는 헤라클리터스와 유사한 이론이지만 love와 함께 변화의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물질세계를 구체sphere로 보고
가장 바람직한 때로 strife가 밖에 있고 love가 안방을 차지할 때이며 strife가 안방으로 들어오게 되면 love는 안방에서 밀려나게 된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는 strife가 안방을 차지하는 것으로 love는 구체가 없는 상태가 된다.

엨페도클레스의 종교관은 피타고라스의 것을 따르고 있다.
그는 어떤 때는 신처럼 당당했지만 어떤 때는 자신이 대단한 죄인인양 수그러졌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계명을 말했다.
월계수잎을 먹지 말라.
가련한 사람, 매우 가련한 사람, 콩에는 손도 대지 말라.
그는 세상을 동굴에 비유하면서 우리는 오직 동굴 속에서 그림자만을 볼 뿐이며 동굴 밖에 실재 세계가 있다고 했다.
이런 가르침을 플라톤이 받아들여 저서 <공화국 Republic>에서 동굴의 비유를 들었다.

엠페도클레스의 철학, 즉 사상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오히려 진보적이고 과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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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짝사랑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적인 논리를 폈는데 다음과 같다.

신은 목적을 갖고 순수한 사고로, 행복으로, 그리고 자아실천Self-Fulfilment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만물은 신의 사랑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신은 모든 행위의 최종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여기서 신의 사랑이란 개념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신만이 오로지 물질이 없는 형상으로 진화는 좀더 신에 가까워지는 걸 의미하지만 신과 같이 완전해질 수 없는 이유는 물질이 온전히 제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교는 한 마디로 진화하는 철학적 종교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종교는 플라톤의 종교와 상이한데, 플라톤의 종교를 수학적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종교는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을 셋으로 구분했다.

1. 감지되고 소멸되는 것들로 식물과 동물
2. 감지는 되지만 소멸되지 않는 것들로 하늘에 떠있는 별들
3. 감지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들로 사람과 신의 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이란 태초에 우주라는 거대한 시계를 만든 사람으로 그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시계와도 같은 우주 안에서 인과법칙을 따라 운동이 일어난다.
신은 마치 시계를 만든 사람처럼 부동유동자Unmoved Mover였다.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지만 그 밖의 것들을 움직이는 자이다.
그에게 신은 살아 있는 영원한 존재였으므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태초에 "누구로부터도 원인을 제공받지 않고 자력으로 운동을 일으킨 부동유동자"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에 관해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스피노자Spinoza(1632-77)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신이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짝사랑해야 한다는 것인데, 짝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상에 못할 짓이 그 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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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성하고 달라진다고 보았다.

네 가지 원인이란 다음과 같다.

물질적Material 원인
형상적Formal 원인
능률적Efficient 원인
최종적Final 원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예로 들면, 동상에 사용된 청동은 물질적 원인에 속하고, 겉으로 나타난 이순신의 모습은 형상적 원인에 속하며, 조각가가 청동이란 재료로 이순신의 모습을 제작한 것은 능률적 원인에 속하고, 이순신의 모습을 구상한 조각가의 아이디어는 최종적 원인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를 시계에 비유하면, 시계의 제작자가 시계 속에 운동이 일어나도록 함으로써 시계의 운동에 변화의 목적을 제공했다.
이런 변화는 진화하는 것으로 진화의 목적은 시계의 온전한 운동으로 신과 유사해지는 것으로, 즉 시계가 시계 제작자의 의도대로 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헤겔Hegel(1770-1831)에게 영향을 주어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역사가 절대정신에 의해 신의 의도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시계가 시계 제작자의 의도대로 운동한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몸의 형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어째 생소한 말로 들린다.
그가 말한 형상이란 이순신 장군 조각이 차지하는 공간이 아니라 몸을 하나가 되게 하는 조화unity로서 유기체organism란 말이 더욱 그럴듯 하다고 럿셀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눈은 보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몸을 떠나서 눈은 그런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데 실상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보기 때문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는 형상이 사물의 근원이며 고유한 본체substance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반드시 물질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물질이 없는 영원한 것들도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영혼이 그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형상이 물질보다 더욱 실재라고 했다.
그의 형상과 물질에 대한 구별은 그의 논리에서 가능성potentiality과 실재성actuality의 구분으로 진전된다.
가능성을 원천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그의 이론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그는 모든 변화를 진화로 보면서 사물은 변하며, 더욱 형상을 갖게 되고, 형상은 좀더 실재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했다.
신이 변치 않는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순수한 형상이기 때문에 순수 실재라서 그러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론은 그래서 희망적이었으며 또한 목적론적이었다.
이미 결론을 가정하고 전개한 논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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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

 
스토익주의에서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세 사람의 위상은 매우 중요한데 순서대로 세네카Seneca(기원전 3~65년)를 먼저 소개하고 나머지 두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다.

세네카는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로마에 거주했다.
세네카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기원후 41년에 코르시카Corsica로 추방당하기 전까지는 순풍에 돛을 단 정치가였으며, 황후 메살리나Messalina의 미움을 받은 후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에 의해 추방당했다.
황제의 두 번째 아내 아그리피나Agrippina는 48년에 그를 불러들여 그녀의 11살난 아들의 가정교사로 채용했고 그녀의 아들이 나중에 황제로 즉위했는데 그가 네로Nero였다.

세네카는 익히 알려진 부자로서 그의 재산은 3억 세스테르세스Sesterces라고 했는데 이 돈을 호나산할 경우 럿셀이 1944년에 쓴 <서양 철학사>에 기술한 대로 약 1천 2백만 달러에 해당했으니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 값어치는 더욱 배가 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번 것은 영국에 돈을 꾸어주고 받은 고리가 증식되어 돈 놓고 돈 먹기의 효과였다.
디오Dio의 말로는 당시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가 고리를 받고 돈을 꿔주어도 영국인은 돈을 빌려 쓸 수밖에 없었다.
정치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줄당기기 게임과도 같아서 네로의 힘이 강성해지자 세네카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의로운 동기에서였는지 아니면 불의한 동기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네카가 네로를 살해하고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키려고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더러 소문은 세네카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자 세네카는 반정부인사로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로는 스승을 차마 살해할 수 없어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65년에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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