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행위능력의 중요성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제약으로 작용한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이성적 행위능력의 중요성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한다. 칸트주의자들은 이성적 행위능력을 지키고 북돋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엄격한 의무는 부정적인 의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책임 영역에 강제적으로나 조작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옳게 행동하건, 그르게 행동하건 그들에게 맡길 일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순수한 견해에서 보면,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지라도 살인자에게는 사실을 말해줘야 하며, 친구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살인자의 책임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칸트의 시각으로 보면, 나의 처지에서는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나는 책임을 다하는 셈이고, 살인자의 결정에 책임질 일이 전혀 없다. 불행하게도 살인자가 나쁜 결정을 해서 친구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칸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점은 이런 상황에서 친구를 살려야 할 책임을 나에게 전혀 부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칸트주의자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책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그러한 의무를 지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경솔하게도 내가 비밀경찰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친구의 죽음에 부분적으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칸트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칸트 윤리학이 내세우는 절대주의에 실망한 나머지 자리를 뜨기도 했다. 칸트의 견해는(이성적으로 보더라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정도의) 단순한 거짓말일지라도 절대로 나쁜 것이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절대주의적인 칸트주의자들은 칸트 윤리학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해 일종의 문턱이란 개념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남에게 강압하지 말라’거나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도덕원칙은 일정한 한도 안에서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은 단순히 결과만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성적 행위자의 가치에 대한 반응이자 칸트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신뢰와 자율을 특징으로 하는 이상적 인간관계에 이성적인 행위자를 포함하는 데 대한 중요성에 대한 반응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다가 너무도 나쁜 결과를 빚어낼 경우(문턱의 한계에 이를 경우)에는 이 원칙을 깨는 것이 허용된다. 이렇게 되면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된다. 이때는 결과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칸트 윤리학의 기본 정신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악의 위협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 요컨대, 상호신뢰라는 게임을 즐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인데, 이런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비록 이상적이긴 해도 위험을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수정된 칸트의 견해가 살인자를 대하는 데는 이전보다 더 적절해보일지 몰라도 칸트 윤리학의 순수성이 손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 문턱이란 개념이 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결과가 나쁘다고 판정해야 할까? 문턱이란 개념에 의존하는 의무론적 견해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크리스틴 코스가드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수단 그 자체로 대하지 말라는 이상적인 원칙은 특정 상황에 이르면 폐기될 수 있다. 우리를 악행 앞에 속수무책으로 버려두던 의무론의 문제점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론가들은 칸트의 기본 사상에 담긴 당위성에 이끌려 그의 기본 이론을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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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서당 욕설시辱說某書堂, 오랑캐 땅의 화초胡地花草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서당 욕설시)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생도제미십 선생내불알;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 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이다.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파격시破格詩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천장거무집 화로접불래;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菊樹寒沙發 枝影半從池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강정빈사과 대취복송하;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月利山影改 通市求利來월이산영개 통시구이래;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

 

이 시는 모든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어야 한다. 천장에 거미()/화로에 겻()불 내/국수 한 사발/지렁(간장) 반 종지/강정 빈 사과/대추 복숭아/월리(워리) 사냥개/통시(변소) 구린내

 

욕공씨가辱孔氏家(공씨네 집에서)

 

臨門老尨吠孔孔 知是主人姓曰孔임문노방폐공공 지시주인성왈공; 문 앞에서 늙은 삽살개가 콩콩 짖으니 주인의 성이 공가인 줄 알겠네.

黃昏逐客緣何事 恐失夫人脚下孔황혼축객연하사 공실부인각하공; 황혼에 나그네를 쫓으니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부인의 아랫구멍을 잃을까 두려운거지.

 

구멍 공자를 공공(개 짖는 소리), 공가(), 구멍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썼다.

 

허언시虛言詩

 

靑山影裡鹿抱卵 白雲江邊蟹打尾청산영리녹포란 백운강변해타미; 푸른 산 그림자 안에서는 사슴이 알을 품었고 흰 구름 지나가는 강변에서 게가 꼬리를 치는구나.

夕陽歸僧紒三尺 樓上織女囊一斗석양귀승계삼척 누상직녀낭일두; 석양에 돌아가는 중의 상투가 석 자나 되고 베틀에서 베를 짜는 계집의 불알이 한 말이네.

 

사슴이 알을 품고 게가 꼬리를 치며, 중이 상투를 틀고 계집에게 불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허망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을 헛된 말 장난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호지화초胡地花草(오랑캐 땅의 화초)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지만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더라도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

 

자에는 '오랑캐'라는 명사와 '어찌'라는 부사의 뜻이 있다.

 

 

낙민루樂民樓

 

宣化堂上宣火黨 樂民樓下落民淚선화당상선화당 낙민루하낙민루; 선정을 펴야 할 선화당에서 화적 같은 정치를 펴니 낙민루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 흘리네.

咸鏡道民咸驚逃 趙岐泳家兆豈永함경도민함경도 조기영가조기영; 함경도 백성들이 다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의 집안이 어찌 오래 가랴.

 

낙민루는 누대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앞에는 드넓은 성천강城川江이 보이고, 멀리 상류에는 높은 산들이 보이며, 하류 쪽은 바다와 접해 있어 아득한 물길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넓은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만세교까지 있다. 관찰사가 집무 보는 관아를 선화당宣化堂이라 하였다. 구절마다 동음이의어를 써서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학정을 풍자했다. 선정을 베푸는 집이란 뜻의 선화당宣化堂을 화적 같은 도둑떼라는 뜻으로 선화당宣火黨이라 했다. 백성들이 즐거운 집이란 뜻의 낙민루樂民樓를 백성들이 눈물 흘린다는 뜻의 낙민루落民淚라 했다. 그리고 함경도咸鏡道를 모두 놀라 달아난다는 뜻의 함경도咸驚逃, 조기영趙岐泳을 어찌 오래 가겠는가라는 뜻으로 조기영兆豈永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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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어두운 밤에 홍련을 찾아가다暗夜訪紅蓮

 

암야방홍련暗夜訪紅蓮(어두운 밤에 홍련을 찾아가다)

 

探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탐향광접반야행 백화심처총무정; 향기 찾는 미친 나비가 한밤중에 나섰지만 온갖 꽃은 밤이 깊어 모두들 무정하네.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욕채홍련남포거 동정추파소주경; 홍련을 찾으려고 남포로 내려가다가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가 놀라네.

 

동정洞庭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의 배경이 된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를 말한다. 홍련紅蓮을 만나려고 여러 여인들이 자는 기생방을 한밤중에 찾아갔는데 어둠 속에서 얼결에 추파秋波라는 기생을 밟고는 깜짝 놀랐다.

 

諺文風月언문풍월

 

靑松듬성담성이요 청송듬성담성립이요; 푸른 소나무가 듬성듬성 섰고

人間여기저기. 인간여기저기유라; 인간은 여기저기 있네.

所謂엇뚝삣뚝이 소위엇뚝삣뚝객이; 엇득빗득 다니는 나그네가

平生쓰나다나. 평생쓰나다나주라; 평생 쓰나 다나 술만 마시네.

 

언문풍월諺文風月이란 한시漢詩처럼 글자 수와 운을 맞추어 짓는 우리말 시를 말한다. 김삿갓의 일화 속에 끼어 전하는 사면 기둥 붉었타/석양 행객 시장타/네 절 인심 고약타와 같이 처음에는 한시에 빗대어 지은 희작시戱作詩였으나, 1900년대에 들어와 잡지의 문예란을 차지하면서 독자적인 시 형식으로 부상하였다. 내용도 진지해져서 과거의 단순한 말장난과는 달랐으며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개춘시회작開春詩會作(봄을 시작하는 시회)

 

데각데각 登高山하니 데각데각 등고산하니; 데걱데걱 높은 산에 오르니

시근뻘뜩 息氣散이라. 시근뻘뜩 식기산이라; 씨근벌떡 숨결이 흩어지네.

醉眼朦朧 굶어하니 취안몽롱 굶어관하니;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굶주리며 보니

욹읏붉읏 花爛漫이라. 욹읏붉읏 화난만이라; 울긋불긋 꽃이 만발했네.

 

산에서 시회가 열린 것을 보고 올라갔는데 시를 지어야 술을 준다고 하자 이 시를 지었다. 사람들이 언문풍월도 시냐고 따지니 다시 한 수를 읊었다.

 

諺文眞書석거하니 언문진서섞어작하니; 언문과 진서를 섞어 지었으니

是耶非耶皆吾子라 시야비야개오자라; 이게 풍월이냐 아니냐 하는 놈들은 모두 내 자식이다.

 

독가소제犢價訴題(송아지 값 고소장)

 

四兩七錢之犢放於靑山綠水하야 사양칠전지독을 방어청산녹수하야; 넉 냥 일곱 푼짜리 송아지를 푸른 산 푸른 물에 놓아서

養於靑山綠水러니 隣家飽太之牛가 양어청산녹수러니 인가포태지우가; 푸른 산 푸른 물로 길렀는데 콩에 배부른 이웃집 소가

用其角於此犢하니 如之何卽可乎리요 용기각어차독하니 여지하즉가호리요; 이 송아지를 뿔로 받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리까.

 

가난한 과부네 송아지가 부잣집 황소의 뿔에 받혀 죽자 이 이야기를 들은 김삿갓이 이 시를 써서 관가에 바쳐 송아지 값을 받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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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피하기 어려운 꽃難避花, 기생과 함께 짓다妓生合作

 

난피화難避花(피하기 어려운 꽃)

 

靑春抱妓千金開 白日當樽萬事空청춘포기천금개 백일당준만사공; 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같고 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홍비원천이수수 접과청산난피화;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 뒤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기생합작妓生合作(기생과 함께 짓다)

 

金笠. 平壤妓生何所能김립. 평양기생하소능;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김삿갓

妓生. 能歌能舞又詩能기생. 능가능무우시능;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기생

金笠. 能能其中別無能김립. 능능기중별무능;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김삿갓

妓生. 月夜三更呼夫能기생. 월야삼경호부능;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기생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옥구김진사沃溝金進士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옥구김진사 여아이분전;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한 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김삿갓이 옥구 김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진사가 이 시를 보고 그를 자기 집에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와 긁을 파를 운으로 불렀다.

 

양반론兩班論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피양반차양반 반부지반하반;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조선삼성기중반 가락일방재상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내천리차월객반 호팔자금시부반;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관기이반염진반 객반가지주인반;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럼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 내력을 밝힐 수 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 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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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회양과차淮陽過次(회양을 지나다가)

 

山中處子大如孃 緩著粉紅短布裳산중처자대여양 완저분홍단포상; 산 속 처녀가 어머니만큼 커졌는데 짧은 분홍 베치마를 느슨하게 입었네.

赤脚낭창羞過客 松籬深院弄花香적각낭창수과객 송리심원농화향; 나그네에게 붉은 다리를 보이기 부끄러워 소나무 울타리 깊은 곳으로 달려가 꽃잎만 매만지네.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 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과보림사過寶林寺(보림사를 지나며)

 

窮達在天豈易求 從吾所好任悠悠궁달재천개이구 종오소호임유유;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家鄕北望雲千里 身勢南遊海一漚가향북망운천리 신세남유해일구;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掃去愁城盃作箒 釣來詩句月爲鉤소거수성배작추 조래시구월위구;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寶林看盡龍泉又 物外閑跡共比丘보림간진용천우 물외한적공비구;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보림사는 전남 장흥 가지산에 있는 절이며, 용천사는 전남 함평 무악산에 있는 절이다.

 

한식일등북루음寒食日登北樓吟(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十里平沙岸上莎 素衣靑女哭如歌십리평사안상사 소의청녀곡여가; 십 리 모래 언덕에 사초꽃이 피었는데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노래처럼 곡하네.

可憐今日墳前酒 釀得阿郞手種禾가련금일분전주 양득아랑수종화; 가련해라 지금 무덤 앞에 부은 술은 남편이 심었던 벼로 빚었을 테지.

 

김삿갓이 원산에 이르러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지나다가 정자에 올라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어린 과부가 남편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며 내는 곡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들려왔다.

 

범주취음泛舟醉吟(배를 띄우고 취해서 읊다)

 

江非赤壁泛舟客 地近新豊沽酒人강비적벽범주객 지근신풍고주인; 강은 적벽 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今世英雄錢項羽 當時辯士酒蘇秦금세영웅전항우 당시변사주소진;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으랴, 돈이 바로 항우이고 변사가 따로 있으랴, 술이 바로 소진이지.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명칭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한다. 항우項羽는 초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이고, 소진蘇秦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 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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