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회양과차淮陽過次(회양을 지나다가)

 

山中處子大如孃 緩著粉紅短布裳산중처자대여양 완저분홍단포상; 산 속 처녀가 어머니만큼 커졌는데 짧은 분홍 베치마를 느슨하게 입었네.

赤脚낭창羞過客 松籬深院弄花香적각낭창수과객 송리심원농화향; 나그네에게 붉은 다리를 보이기 부끄러워 소나무 울타리 깊은 곳으로 달려가 꽃잎만 매만지네.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 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과보림사過寶林寺(보림사를 지나며)

 

窮達在天豈易求 從吾所好任悠悠궁달재천개이구 종오소호임유유;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家鄕北望雲千里 身勢南遊海一漚가향북망운천리 신세남유해일구;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掃去愁城盃作箒 釣來詩句月爲鉤소거수성배작추 조래시구월위구;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寶林看盡龍泉又 物外閑跡共比丘보림간진용천우 물외한적공비구;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보림사는 전남 장흥 가지산에 있는 절이며, 용천사는 전남 함평 무악산에 있는 절이다.

 

한식일등북루음寒食日登北樓吟(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十里平沙岸上莎 素衣靑女哭如歌십리평사안상사 소의청녀곡여가; 십 리 모래 언덕에 사초꽃이 피었는데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노래처럼 곡하네.

可憐今日墳前酒 釀得阿郞手種禾가련금일분전주 양득아랑수종화; 가련해라 지금 무덤 앞에 부은 술은 남편이 심었던 벼로 빚었을 테지.

 

김삿갓이 원산에 이르러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지나다가 정자에 올라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어린 과부가 남편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며 내는 곡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들려왔다.

 

범주취음泛舟醉吟(배를 띄우고 취해서 읊다)

 

江非赤壁泛舟客 地近新豊沽酒人강비적벽범주객 지근신풍고주인; 강은 적벽 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今世英雄錢項羽 當時辯士酒蘇秦금세영웅전항우 당시변사주소진;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으랴, 돈이 바로 항우이고 변사가 따로 있으랴, 술이 바로 소진이지.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명칭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한다. 항우項羽는 초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이고, 소진蘇秦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 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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