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의 미술읽기 개장
오늘 '광우의 미술읽기'란 방을 하나 만듭니다. 미술을 블로거들에게 보편적인 문화의 하나로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술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소위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을 이해시키고 가까이 접하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이 방을 개설하는 것입니다. 우선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활동한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를 중심으로 그들과 더불어서 파리 화단을 구성한 르누아르라든가 다양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설명함으로써 블로거들이 미술에 입문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블로거들에게 이런 지식을 심어준 뒤 조금씩 추상화라든가 좀 더 설명이 요구되는 작품으로 옮겨갈 예정이며, 르네상스와 17, 18세기의 서양미술도 다룰 예정입니다. 블로거들이 열심히 따라와 준다면, 20세기 미술을 폭넓게 다룰 것이며, 또한 예술철학도 병행하여 쉽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서두의 이야기가 방대하지요? 그렇지만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려고 합니다. 다만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블로거들의 참여가 실현을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올리는 글에 대한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성의껏 답변해드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술을 가까이하면 삶의 풍요로워진다고 말하고 싶으며, 이 말을 블로거들이 증명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은 첫날, 제목을 ‘에두아르 마네, 부르주아의 아들 화가를 꿈꾸다’로 하겠습니다.
<오귀스트 마네 부부의 초상 Portrait of M. and Mme Auguste Manet>과 <틴토레토의 자화상 모사>를 보면, 마네가 후기르네상스 베네치아 태생의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1518-94, 본명은 Jacopo Robusti)의 양식을 익혀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가 이십대 후반 화가를 꿈꾸며 그린 습작 정도의 수준의 그림들입니다. 앞으로 자주 언급하겠지만, 마네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노력하는 화가였습니다.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대가들의 양식들을 모사하며 그들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발견한 건 서른을 갓 넘긴 후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마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10년 이상 열심히 모방한 끝에 대가 양식들의 장점들을 취해 빛이 주는 효과를 회화에 적용했습니다. 틴토레토가 이미 모델의 얼굴에 빛의 효과를 적용할 것을 볼 수 있지요? 중요하지 않은 의상은 어둡게 해서 디테일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관람자의 시선이 모델의 얼굴에 모아지도록 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무대의 장면 같아 보이지요? 화가의 의도가 빛의 사용으로 드러나지요? 빛을 조명으로 사용하니까 모델의 얼굴이 진지하게 보이며 성격이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까?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는 파리 북쪽 교외에서 8대째 지주로 행세한 부유한 집안 출신입니다. 1814년 쉰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클레멘트는 파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지성인으로 고향 제네빌리에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시장으로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제네빌리에의 거리 명칭을 클레멘트로 붙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오귀스트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법무부의 고위 공직자로 지내다 나중엔 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완고하면서도 교양을 갖춘 볼테르주의자로 전제정치와 제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무장한 공화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재단사가 지은 수세기 동안 달라지지 않은 전통 양복을 입었으며, 프랑스인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레종도뇌르 훈장을 상징하는 빨간 리본을 달고 다닌 멋쟁이였습니다. 오귀스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스웨덴 외교관의 딸 이제니 데시레 푸르니에와 1831년 1월 18일에 화촉을 밝혔는데, 그는 서른네 살이었고 신부는 스무 살로 열네 살이나 어렸습니다. 외제니의 아버지 푸르니에는 스톡홀름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스웨덴 왕과 친분이 두터워 외제니는 스웨덴 왕의 대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성악에 재능이 있었고 음악교육도 충분히 받았으므로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이상은 마네의 할아버지와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화단의 총아로 떠오를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난 건 1832년 1월 23일이었고, 태어난 곳은 파리의 센 강 남쪽에 위치한 프티소귀스탱, 지금의 보나파르트 가 5번지(사진)입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난 4층 건물에는 마네 가족 외에도 어린 에두아르에게 데생을 가르쳐준 외삼촌 에드몽 에두아르 푸르니에도 살고 있었습니다. 1800년에 태어난 에드몽은 에두아르가 태어날 무렵 포병대 장교로 계급이 대위였습니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에드몽을 통해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드몽은 주말에 에두아르와 에두아르보다 한 살 어린 외젠, 그리고 세 살 어린 귀스타브 삼형제를 미술의 성지 루브르 뮤지엄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루브르와 뤽상부르 뮤지엄에서는 정부가 구입한 당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루브르의 푸르탈레 갤러리는 많은 스페인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했기 때문에 파리의 ‘스페인 뮤지엄’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작품들은 스페인이 동란의 소용돌이로 어수선할 때 루이 필립 왕이 스페인 미술전문가 바론 테일러를 고용해 비밀리에 구입한 것들입니다. 테일러는 백만 프랑 이상으로 4백 점 가량 구입했지만, 정작 대가들의 작품은 몇 점 안 되었습니다. 스페인 작품들은 1838년부터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842년에는 영국인 미술품수집가프랭크 홀 스탠디시가 죽으면서 자신이 소장했던 스페인 미술품 5백 점 가량을 프랑스 왕에게 기증했습니다. 그의 기증품에는 고야 8점, 엘 그레코 9점, 리베라 25점, 무릴로 38점을 포함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스페인 회화는 자연히 프랑스 회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마네가 훗날 스페인 화풍을 응용해서 그림을 그린 건 당연해 보입니다.
에두아르는 열두 살 때 롤랭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로 5학년부터 가르치는 사립학교였습니다. 학생 4백 명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목요일과 일요일에만 집에 보내졌습니다. 에두아르는 입학하던 해에 5학년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낙제했습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한 오귀스트의 걱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두아르는 학교에서 앙토냉 프루스트와 단짝이었는데 그와 평생 우정을 나눴으며, 훗날 문화부 장관이 된 프루스트는 에두아르와의 추억을 『회고록』으로 펴냈습니다. 프루스트는 역사과목 시간에 교사가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았던 문필가이자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1713-84)의 『사교계』를 학생들에게 읽게 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디드로가 동시대 화가들을 향해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유행에 뒤질 모자를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고 꾸짖는 대목에서 마네가 소리를 질렀다. ‘디드로도 멍청한 놈이었군. 화가는 자신이 산 시대를 증언해야 하는 거야. 유행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본 것을 그려야 해’라고 말했다.”
에두아르가 학교를 졸업한 건 1848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법대에 진학해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지만 법대에 진학할 만한 성적이 못되어 강권할 수 없었습니다.
마네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해군이 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해군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였습니다. 마네는 1847년 7월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마네는 1848년 12월 군사훈련 목적의 견습용 배에 승선하여 브라질의 수도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이듬해 4월, 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친 지망생들이 보는 시험에서 다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해군이 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마네는 해군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849년 가을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856년까지 6년 넘게 쿠튀르의 화실에서 수학했습니다. 프루스트는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마네는 모델에게 일주일 동안에 취해야 할 제스처를 설명하는 월요일마다 항상 말썽을 일으켰다. ... 하루는 탁자 위에 올라서서 모델들에게 화를 냈다. ‘좀 더 자유로운 포즈를 취할 수 없어요?’ 듣다 못한 한 모델이 ‘너 같은 애송이한테 매번 그런 소릴 듣기란 쉽지 않은 일이군. 그래도 내 덕택에 로마풍의 포즈를 볼 수 있는 것 아네요?’라고 대꾸했다. 마네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여기는 로마가 아냐! 여긴 파리이고 난 로마에 갈 생각이 없어. 중요한 건 파리라고.’
... 한 번은 마네가 모델에게 일상의 옷을 입힌 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 그때 쿠튀르 선생이 들어왔다. 선생은 남루한 옷을 걸친 모델 앞에 서서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누구 짓이냐?’ ‘접니다’ 하고 마네가 대답했다. '자낸가? 자넨 결국 도미에밖에는 안 되는 일문이구만’ 하고 말했다.”
쿠튀르는 마네를 풍자 삽화를 그리는 풍자만화가, 화가, 조각가 도미에Honore-Victorin Daumier(1808-79)에 비유해서 사실주의 그림이나 그리는 저급한 화가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도미에는 당대에 살던 프랑스인의 생활을 단순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포착하여 기록한 시대의 증언자였습니다. 사실 쿠튀르에게 비난 받을 만큼 저급한 화가 아니라 쿠튀르보다 더 위대한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된 화가입니다. 아카데미풍을 배척했다지만, 쿠튀르의 그림을 보면 고대의 역사적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구성이 새롭고 과격적이었지만 낭만주의 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도미에처럼 있는 그대로의 장면, 또는 과거 화가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의 장면을 그린 건 매우 진보적인 화가의 태도였습니다. 도미의 정치풍자만화는 오늘날 시사만화의 효시입니다. 그는 정치풍자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쿠튀르는 두 주에 한 번 화실에 와서 제자들과 대화하며 기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드로잉을 회화의 본질로 여겼습니다. 이는 당시 파리 화단의 거물 외젠 들라크루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들라크루아는 5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스케치할 만한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면 결코 기념비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쿠튀르는 “대상을 3분 동안 바라본 후에는 그것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고대 조각상을 바라보든 대가의 그림을 바라보든 대상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채색에서 색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가능한 한 색을 덜 섞어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네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건 이것들 외에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네는 낮에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쉬스 아카데미Academie Suisse에서 모델을 그리면서 스케치를 익혔습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문을 연 쉬스 아카데미는 모델로 활동하던 쉬스라는 사람이 문을 연 곳으로 기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약간의 돈을 받고 모델을 그릴 수 있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훗날 마네와 더불어 파리 화단의 주역이 될 클로드 모네가 1859년부터 이 아카데미에 왔으며, 미국 남쪽 세인트 토마스에서 파리로 이주해온 유대인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폴 세잔이 이곳에서 모델을 그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한편 마네는 두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선생 수잔의 어머니 그루테 커크는 홀랜드 남쪽 잘트봄멜 동네에 있는 커다란 고딕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수잔이 어째서 열아홉 살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파리로 와서 혼자 살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슈만의 곡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수잔의 아파트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걸어갈 만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마네는 시간이 나면 그녀의 아파트로 갔습니다. 파리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수잔이 피아노 교습을 받는 제자와 사랑에 바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수잔은 1852년 1월 29일에 마네의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옹 에두아르 레엔호프라고 했습니다. 막 스무 살, 정확히는 스무 살하고 엿새 된 마네가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당시 미혼모가 자식을 낳는 건 예사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구청에 출생신고를 하는 것 또한 보통이었는데, 법으로도 생부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네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가족과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에 수잔과 아들에 관해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실을 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수잔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