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정권의 붕괴 원인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 정권은 혼란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서 좀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지만 설득력을 잃고 외면당했다.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비판과 매질만 당했을 뿐이었다. 정국은 극도의 위기감에 직면했으며 군부 쿠데타 설까지 유포되고 있었지만, 정부는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5·16쿠데타를 당하고 말았다.
실로 어처구니없이 민주당 정권은 단명으로 끝나버렸다.

장면 정권의 실각은 한 정당 혹은 한 개인의 단순한 정치적 실각에 그쳤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치적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장면 정권 몰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나 장면 정권 자체의 성격과 정치적 및 경제적 측면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장면은 사실 정권을 담당할 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역사적 배경이란 반식민지 독립운동의 혁혁한 경력을 말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반제국주의 투쟁경력을 가졌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장면은 이 같은 점을 결여하고 있어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지니지 못했다.


장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참모진도 대부분 일제하의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런 점은 신생국가에 있어 초기 정치 지도층은 반식민 투쟁자들 가운데서 추대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온후하고 신사풍의 인격자였으나, 후진국 혼란기의 정치 지도자로서는 매우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그는 너무 우유부단했고 결단력과 포용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집권 후 민주당 구파의 이탈을 막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도 자파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원내 안정 세력 확보에 급급했다.
그의 과단성 없는 성격은 위기에 대한 처리나 관리능력에서 거의 무능하게 나타났다.
당시 내각 사무처에서 8개 대학의 3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3.7%만이 장면 정권을 지지했을 뿐 51.5%는 사태를 기다려 보겠다는 태도로 나타났다.
장면 정권은 시민혁명이라는 물굽이에 비해 후속 조치가 미흡했고, 국민의 기대심리에 전혀 부응치 못했다.
왜 국민의 요구가 폭발하는가?
왜 자유가 범람하는가?
왜 혁신계가 도전하고 과격한 학생운동이 일어나는가 하는 데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이에 적당한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장면은 혼란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인식했으며, 야기되는 문제들을 역사적 안목에서 보고 대처해야 했는데 그럴 만한 경륜과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민주당은 훈련과 규율을 통한 정신적 응결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지도체제는 극도로 문란했으며, 분파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도 이를 통제하고 내부적으로 단결을 공고히 할 만한 지도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장면 정권의 실체였다. 이런 집단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돌릴 에너지가 나올 리 없었고, 혼란만 거듭하자 종국엔 불명예스런 실격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을 고찰해 보면 첫째, 민주당은 혁명 주체가 아니라 남의 힘을 빌어서 집권했기 때문에 이들은 통치행사에서 혁명세력과 국민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따라서 외압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소신껏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필요할 때에 강경한 조치를 결행하지 못한 것은 이에 연유된 것이다.
차기벽 교수가 지적했듯이 8·15해방 후의 비극상은 한국을 해방시키는 데 일치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처럼 4·19혁명의 미완성과 민주당 정권 단명의 비극은 혁명세력과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할 세력이 일치하지 못한 데 있었다.


다음에는 이데올로기의 결여를 꼽을 수 있다. 민주당은 반독재 투쟁과 내각책임제 실현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워 국민의 포용과 지지를 구해 왔다.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가 실현된 마당에 다음으로 국민에게 제시할 비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면서 다음 단계로 인도해 갈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고, 국민은 이념의 지향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민주당에 대해 기대심리의 좌절을 맛보았다.


집권당이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갈 이데올로기가 빈곤하면 자연 국민의 지지를 잃고 집권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민주당이 집권하게 된 데는 학생들의 세력만이 아니라 교직자를 포함한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변화를 원했던 일반 서민들의 지지까지 힘입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희망적인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혼란만 심화되자 이들은 장면 정권에 등을 돌리고 오히려 비판세력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혹자는 민주당의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내세워 변호할는지 모르나, 이 정책 또한 민주당 정권이 의욕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설정했던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서 취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각책임제하에서의 행정권 약화도 장면 정권의 몰락의 원인인데, 내각책임제는 본시 입법과 행정의 권력통합과 조화를 그 이상으로 한다. 엄격한 삼권분립에 입각한 대통령 중심제보다도 입법부와 행정부의 유기적인 긴밀한 유대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정책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각이 의회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을 때, 또는 국무총리가 의회를 조종할 때 가능하다.
반대로 국무총리가 자기의 의향대로 의회를 이끌지 못하거나 혹은 내각이 의회의 신임을 받지 못할 때는 행정권은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정국은 안정을 잃게 된다.
장면 정권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해당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신민당) 소장파의 도전에 봉착해서 의회 내 안정 세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함으로써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일 장면이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직에 있었다면 그토록 의회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신경 쓸 것 없이 소신대로 정책을 수행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민주당은 반독재를 위해 내각책임제를 이상으로 내세웠지만, 혁명 후 폭발하는 난제를 해결해야 할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내각책임제가 과연 적합했느냐 하는 의문마저 제기된다.


아무튼 장면 정권으로서는 내각책임제하에서 일차적으로 의회 내에 안정 세력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는 집권 9개월 동안 세 번이나 개각하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장면 국무총리가 의회에 안정 세력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입증해 준다.
2개월 단명의 각료진을 이끌고 어떻게 강력한 행정력을 구사할 수 있으며, 정책의 일관성과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겠는가.
행정력의 약화는 그에 반비례하여 사회혼란을 야기할 뿐이었다.


내각책임제가 권력을 분산시켜 독재와 장기집권을 막고 의회와 내각의 유대로 효율적인 정책수행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정치수준이 낮고 역사적으로 혼란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서는 자칫 무력하게 허물어지는 최악의 단점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내각책임제를 금과옥조로 주장하고 실현시켰지만, 그 제도가 가진 최악의 취약성 때문에 무너지는 결과를 맞아야 했다.


다음으로 장면 정권의 몰락의 원인은 군부에 대한 통솔이 소홀했던 데 있었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새 정부가 수립되어 일차적으로 파악하고 수행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무력을 가진 군부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군부와 정보를 교환할 적절한 채널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또한 통제할 만한 기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국방장관을 임명할 때부터 군부를 장악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측면보다는 신파와 구파 그리고 소장파 사이의 각료직 안배의 측면에서 장관직을 배려했다.
장면 정권은 군부 내의 사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다만 각군 참모도 총장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했던 형편이었다.


한편 군부는 장면 정권의 감군정책과 군부숙청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감군과 숙청은 하위 장교의 진급과 직결되어 있었다.
장면은 7·29총선 유세 때 병력을 6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감군하겠다고 공약했었다.
병력감축은 장교들이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감축시킴으로써 그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장면 정권의 감군계획은 2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여 심각성이 다소 완화되는 듯했으나, 국회에서 군부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했을 때 군부의 불만은 대단했다.


민주당 정권이 군을 다루는 데 있어 범한 큰 실수는 부패 군부의 숙청을 약속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점이다.
군부숙청 약속은 고위 장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또 한편으로 숙청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 사실은 숙청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던 하급 장교들을 실망시켰다.
민주당 정부의 군부숙청 공약에 고무되어 하급 장교들은 상관의 비위사실을 들추어내는 과감한 행동을 취했다.
이것은 하극상의 사건을 빚어냈고 후에 5·16쿠데타와도 연결되었다.
또 군은 장면 정권의 혁신계와 급진 학생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에 대해 굴종적인 저자세를 취하는 데도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지적해야 할 점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군 장교들과 교류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사회적 출신성분과 교육배경에 있어 양자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상류계급의 출신이 많았다.
장면 정권의 주요 멤버들의 58%가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고 41%가 지주의 자제들이었다.
이에 반해 군 장교들은 대체로 농민의 자제들이었고, 5·16쿠데타 후 군정 참여자의 71%가 농촌출신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국내에서 중등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군 장교들은 능률 우선주의의 훈련을 받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명쾌한 대답과 분명한 행동을 요구받는 생활습성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를 놓고 입씨름이나 벌이는 정치인들의 비능률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단 군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그들은 정부에 대한 충성심의 갈등 같은 것은 느끼지 않게 된다.


경찰의 사기저하도 장면 정권의 몰락에 원인이 되었는데,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자유당 정권에 협조했거나 대중의 지탄을 받던 경찰관 4,500명을 숙청했고, 2,524명의 공민권도 제한했다.
따라서 경찰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자연히 직무에 회의를 느끼고 사명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경찰은 민주당 정부에 충성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데모 진압에 적극성을 나타내지 않았고, 시위 군중으로부터 지목받을 가능성과 정부로부터 해고당할 가능성 사이에서 적당한 처신을 취했을 뿐이었다.
1945년 미군정 때 일본 경찰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조병옥 경무부장에 의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훗날 정부를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장면 정권은 경찰의 사기와 효율성을 회복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권을 보호하는 데 경찰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시위 군중은 이 같은 경찰의 소극적인 자세를 충분히 읽고 있었다.


또한 장면 정권 실각의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민주당이 선거구호로 내걸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국민의 흉금을 울렸고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국민은 민주당이 집권하면 경제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집권 후 경제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 가능성에 따르는 조바심과 공포감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업들은 새로운 투자를 꺼려했고 따라서 경제운용도 위축되었다.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은 만성적 실업문제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특히 고등인력의 실업문제는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4·19혁명 이후 관영요금의 인상으로 시중물가가 크게 올랐고, 이에 따라 민중들은 기아와 빈궁으로 고통을 받았다.
경제지표상의 거의 모든 지표가 1960년, 1961년 두 해에 최하를 기록했다.
물가는 1961년 1, 2개월 동안에 15%나 뛰었고, 1960년의 실업률은 24%에 달했다.


장면 정권의 경제시책들 가운데 국민의 신망을 잃게 한 것은 환율변경과 미국 원조의 사용에 대한 감독과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500 대 1의 환율이 650 대 1로 변경되었으며, 1,000 대 1로 바뀌었다가 한 달 만에 1,300 대 1로 평가 절하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면 정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남한의 민중들과 혁신세력들은 남북의 경제 합작과 문화교류, 나아가 민족의 통일에 의해서만이 남한에서의 민족경제와 민족문화를 복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큰 폭의 환율변경은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환율 현실화의 압력이 있었으나 이를 묵살해 왔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제공한 원조자금의 지출에 대한 감독도 거부했었다.
이에 비해 장면 정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승낙했다.
당시 미국의 원조는 한국 정부 예산의 52%나 되었다.
그러므로 원조액 지출의 감독은 한국 정부 예산지출의 52%에 대한 미국의 감독과 검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은 장면 정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데 대한 불만이 컸다.
이를 장면 정권의 허약성으로 생각하고 비판을 퍼부었다.
혁신계와 극렬 학생들은 장면 정권의 굴복을 ‘국가적 수치’, ‘반동 정치인의 민족배신 행위’, ‘한국의 미국 시장화’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또 한 가지 민주당 정부의 경제시책을 어렵게 만든 것이 식량문제였다.
1961년 봄에 접어들면서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보릿고개를 넘어가기까지에는 약 130만 가구가 정부의 구호미를 필요로 했다.
장면 정권에게는 어느 하나라도 난제가 아닌 것이 없었다.


민주당 정부는 1961년 2월 종합적인 경제 타개책의 하나로 유효수요를 늘여 경기를 활성화시키려고 이른바 미국의 뉴딜정책과 같은 국토개발사업의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안은 총 연인원 4천5백만 명에 3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관개시설, 토목공사, 조림, 댐 건설 등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5·16쿠데타로 중단되었으며 5개년 경제개발 계획도 불발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한 5개년 계획의 근간이 되었다.


여하간 만성적인 경기침체, 실업률의 증가, 환율변경, 식량기근, 정치자금과 관련된 경제운용 등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