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197. 무덤



사람들은 오늘날 ‘학교’라 할 적에 ‘졸업장을 주고받는 시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설에 보내야 아이들이 배울 수 있다고 여기는데, 막상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는 제대로 못 보지 싶다.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무엇이든 배우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왜 배워’서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서 우뚝 서며 슬기롭고 사랑스레 살림을 짓는 길을 걷는가’를 나눌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무턱대고 배우기만 하는, 더욱이 숫자라고 하는 점수에 얽매이는 오늘날 학교는 무덤과 같지 싶다. 학교는 무덤일까 삶터일까? 무덤 같은 학교는 감옥일까 배움터일까? 감옥에 가깝지 싶은 학교는 쳇바퀴질일까 새로짓기일까? 쳇바퀴질에서 좀처럼 못 벗어나지 싶은 오늘날 이 나라 학교는 틀에 맞추어야 하는 질서일까, 스스로 길을 찾는 날갯짓일까? 아이들은 무덤자리에서조차 뛰놀면서 까르르 웃는다. 아이들은 때나 곳을 굳이 가리지 않는다. 어른들은 허울이나 허수아비를 자꾸 세우면서 아이들이 못 놀도록 막아선다. 이곳에서는 이래야 하고 저곳에서는 저래야 한다는 틀을 자꾸 집어넣는다. 우리, 조금 느슨해져도 좋지 않을까? 지켜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아이들 몸이나 마음에 새기기보다는, 가꾸면서 활짝 웃고 노래할 길을 조금 더 이야기하면서 나누어야 아름답지 않을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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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6. 엉성



빈틈없이 잘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될까. 빈틈없이 잘 아는 터라 새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면, 아무리 빈틈없이 잘 알더라도 늘 제자리걸음이 되리라 느낀다. 빈틈없는 모습이 외려 빈틈이 된달까. 빈틈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모로 엉성하겠지. 엉성하거나 어설프기에 배우려 할 테고, 하나하나 배우면서 빈틈을 채울 텐데, 배움길을 걷는 사람은 즐겁거나 알차거나 아름다이 삶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면서도 이래저래 틈을 보일밖에 없지 싶다. 이러한 틈이 있으니 배우는데, 이러한 틈을 기꺼이 드러내면서 나누기에 한 걸음을 더 내딛을 만할 테고. 빈틈있는 아이를 어떻게 마주하면 될까? 빈틈있는 어른으로서 어떻게 가르치거나 이끌면 될까? 서로서로 빈틈이 있다는 대목을 서로서로 어느 만큼 받아들이거나 너그럽게 헤아리는가? 배우는 사람이기에 빈틈없는 살림이 아닌, 배우는 사람이기에 빈틈있어 고꾸라지기도 한다는 대목을 자꾸 되새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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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5. 플라스틱



장사하는 이들은 돈을 벌 생각이다. 착한장사이든 나쁜장사이든 돈을 벌어야 한다. 무엇을 팔아 돈을 번 다음에 이 돈으로 살림을 지으려는 생각이다. 착한장사를 꾀한다면 사람들한테 팔 무엇이 그야말로 상냥하면서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바라리라. 착한장사가 아닐 적에는 무엇을 팔든 돈을 더 벌어서 살림을 늘릴 수 있기를 바라겠지. 그래서 온누리에 석유와 화학제품과 플라스틱과 비닐과 농약과 화학의약품과 병원과 학교와 감옥과 군대와 정치와 언론 들이 넘치는구나 싶다. 모두 돈하고 맞물리는 장사이다. 이들 장사는 착한장사일까? 생각해 보자. 학원장사는 착한장사인가 나쁜장사인가, 아니면 그냥 돈을 바라는 장사인가? 교사로 일하며 돈을 버는 어른은 참교사인가 거짓교사인가, 아니면 그냥 돈을 바라면서 교원자격증으로 다달이 은행계좌에 숫자가 늘기를 바라는 사람인가? 이 지구별에 플라스틱이 넘칠 뿐 아니라, 가게마다 플라스틱 물건이 가득하고, 아이들 장난감도 플라스틱으로 값싸게 척척 찍는 까닭을 생각해 보자. 착한장사를 헤아렸다면 셈틀도 플라스틱 아닌 나무로 짰겠지. 사진기 겉틀도 이와 같다. 가볍고 단단한 나무도 많다. 그런데 왜 나무로 짠 셈틀이나 사진기가 안 나올까? 착한장사 아닌 나쁜장사이거나 돈장사일 뿐일 테니까. 그러면 돈으로 세간을 장만해서 살림을 꾸리는 어떤 살림을 꾸릴 생각인가? 착한살림인가 나쁜살림인가, 아니면 그저 돈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살림인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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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4. 에누리



나는 어릴 적에 에누리하고 덤을 함께 익혔다. 우리 어머니하고 저잣마실을 다닌다든지 이웃집을 만날 적에 으레 두 모습을 보여주셨으니까. 저잣거리나 가게에서는 에누리를 바라셨고, 이웃집에는 덤을 주곤 했다. 이러다가 어느 날에는 저잣거리나 가게에서 “‘우수리’는 가지세요” 하고 말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러면서 ‘우수리’라는 말도 배웠다. 어느새 어버이가 된 나는 저잣거리나 가게나 책집에서 에누리를 하는 일이 없다. 어느 것을 사든 고마운 노릇이요, 어느 책을 장만하든 새로 배우는 기쁨을 누리기에 ‘부르는 값’에 오히려 덤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기 일쑤이다. 생각해 보라. 아름답게 누린 책인데 값을 에누리하고 싶은가? 맛나게 먹은 밥인데 값을 깎고 싶은가? 고맙게 택시를 타고 왔는데 굳이 삯을 덜어 달라 하고 싶은가? 제값을 치르는 길, 참값을 나누는 길, 기쁨값이랑 웃음값을 함께하는 길을 아이들하고 헤아린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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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3. 나누는 사이



어버이하고 아이는 나누는 사이로구나 싶다. 길든 짧든 깊든 얕든 무엇이든 나누는 사이라고 할까. 즐거움이든 미움이든, 노래이든 짜증이든, 참말로 아무것도 안 가리면서 모조리 나누는 사이로 하루를 지내지 싶다. 처음에는 이모저모 알려주느라 바쁘거나 힘들거나 벅찰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품을 들이고 말미를 써서 알려주고 나누는 사이에 서로 새롭게 자란다. 듣는 사람은 품이랑 말미를 들여서 듣는 동안 ‘예전에도 들었지. 그런데 예전에는 아직 살갗에 와닿지 않았어. 이제 조금씩 와닿는구나’ 하고 여기면서 자란다. 말하는 사람은 품이랑 말미를 써서 말하는 동안 ‘예전에 말할 적에 못 알아듣거나 잊었다면 더 살피고 따져서 새롭게 알려주어서 배우도록 해 보자’ 하고 여기면서 자란다. 나누는 사이로 지내기에 나중에는 열 마디 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살뜰히 읽으면서 수월히 지낼 만하다. 나누는 사이가 아닐 적에는 처음이든 나중이든 아무런 얘기가 오가지 않았으니 울타리나 담이 높을 뿐 아니라 두툼하다. 우리가 사랑이나 꿈이나 생각을 나누는 사이라 한다면, 번거롭거나 성가시거나 귀찮아 하지 말 노릇이다. 차분히 기다리면서 듣고, 찬찬히 지켜보면서 말할 적에 나눌 수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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