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해양보호구역 답사기 - 아주 특별한 바다 여행
박희선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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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8



사람이 못 지킨 송도갯벌을 지킨 저어새

― 우리나라 해양보호구역 답사기

 박희선 글

 자연과생태 펴냄, 2011.5.2. 14000원



  아름다운 바다를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건사할 만할까요? 바닷가를 에워싼 숲을 밀어내고 커다란 휴양시설을 지으면 아름다운 바다를 앞으로도 아름답게 건사할 만할까요? 조용하고 정갈한 바닷가에 우주선 발사기지터를 세우면 이 바다를 아름답게 지킬 만할까요? 해군기지를 바닷가에 지으면 이 바다를 튼튼하게 돌볼 만할까요?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바닷가마다 빙 둘러서 올리면 이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와 갯것을 깨끗하게 누릴 만할까요?


  서녘 남녘 동녘 세 군데가 바다인 나라에서 살면서 바다를 생각합니다. ‘세계 5대 갯벌’로 손꼽히는 서해 갯벌이 있는 나라에서 살며 바닷가와 갯벌을 생각합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이 있고, 다도대 해상 국립공원이 있으며, 태안 해안 국립공원이 있는 한국입니다. 그만큼 이 바다가 아름답기에 오늘 우리가 기쁘게 누리면서 앞으로도 아이들한테 고이 물려줄 터전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바다가 아니라면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하지 않을 테고, 깨끗하지 않은 바다라면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어렵겠지요. 무언가를 자꾸 뚝딱거리기보다는 바닷결 그대로 살리는 길을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강 하구에 퇴적물이 쌓여 섬 같은 지형이 생기고 그곳에 풀이 자라 고유의 생태계를 형성한 곳을 ‘풀등’이라고 한다. 바다에서 모래사막처럼 떠오르는 이곳 풀등은 지상보다는 그 밑에 다양한 생태계를 품고 있다. 풀등의 풍부한 모래층은 넙치, 가자미 같은 가자미목 물고기나 다양한 저서생물들에게 훌륭한 서식처이며 산란장이다. (34쪽)


보전지역으로 지정할 당시 여의도 면적의 30배에 달했던 풀등은 불과 10년도 안 되어 2/3 이상이 사라져 버렸다. (36쪽)


섬을 찾는 사람들이 기하급수로 늘고 있는 요즘, 접안시설이 따로 없는 풀등에 수없이 오가는 보트들이며 고운 모래섬을 파헤쳐 갯벌체험을 즐기는 고사리 같은 손들이 풀등의 경관과 생태계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38쪽)




  박희선 님이 쓴 《우리나라 해양보호구역 답사기》(자연과생태,2011)를 읽습니다. 바야흐로 겨울이 저물고 봄으로 접어들면서 아이들이 슬슬 바다를 찾습니다. 시원한 바닷가에 가서 모래밭 놀이도 하고 바닷물 놀이도 하고 싶다 합니다. 자전거를 달려서 두 아이하고 고흥 여러 바닷가로 나들이를 다닐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집에서는 봄 여름 가을 세 철에 걸쳐서 고흥 발포나 구암이나 풍남 바닷가로 나들이를 다니곤 합니다. 때로는 두 시간 즈음 걸어서 바닷가로 가고, 때로는 군내버스를 기다려서 바닷가로 가며, 때로는 자전거를 달려 바닷가로 갑니다.


  처음에는 발포 바닷가로 자주 갔는데, 이곳이 국립공원 보호구역에서 풀리고 커다란 휴양시설이 뚝딱뚝딱 들어서려 하면서 좀처럼 발길이 가지 않습니다. 바닷가를 에워싼 숲이 깡그리 밀린 자리에 높다란 휴양시설이 들어서는 바다는 그리 즐겁지 않습니다. 바다에 가는 까닭은 시멘트 구조물을 보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고기를 구워 먹으려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닷물에 뛰어들고 모래밭에서 뒹굴며 바닷바람을 쐬려는 뜻입니다.



송도갯벌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영종도, 장봉도 갯벌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을 만큼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시작으로 갯벌 매립에 자신감을 얻은 인천광역시가 영종도와 청라지구, 송도를 잇는 인천자유경제구역 개발을 추진하면서 갯벌은 마치 땅따먹기 게임에 잘려 나가듯 야금야금 사라져 갔다 …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갯벌로서의 가치를 점점 잃어가던 송도갯벌에서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으로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는 저어새들이 정착해 번식을 시작한 것이다. 번식지는 어처구니없게도 해안가 남동공단 주변의 유수지 안에 돌탑처럼 쌓인 작은 인공 섬이었다. (98쪽)




  《우리나라 해양보호구역 답사기》는 크게 네 갈래로 엮습니다. 바다가 아름다운 곳을 네 군데 들고, 갯벌이 고운 곳을 네 군데 들며, 바다와 갯벌을 체험여행 할 수 있는 곳을 네 군데 듭니다. 책끝에는 바닷가에서 만날 수 있는 ‘바다 이웃(바다 생물)’을 사진도감처럼 아기자기하게 넣었습니다. 덧붙여 해양보호구역이란 무엇이고, 한국에서 어느 곳이 해양보호구역인가 하는 대목도 꼼꼼히 밝혀 줍니다.


  ‘해양보호구역’이라면 ‘이곳은 꼭 지키자’고 하는 터전입니다. 국립공원도 ‘이곳만큼은 꼭 지키자’고 하는 터전이에요. 온 사회가 지나친 막개발로 치닫기 때문에, 이곳에는 더 삽날을 들이밀지 말자고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할 만해요. 이곳까지 삽날을 들이댄다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물려줄 아름다운 삶터란 깡그리 무너지고 만다는 뜻이라고도 할 테고요.


  《우리나라 해양보호구역 답사기》에서 송도갯벌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 한쪽이 시립니다. 나는 인천 영종섬에 공항이 들어서기 앞서부터 영종섬에 사는 동무를 만나려고 뻔질나게 배를 타고 드나들었습니다. 이제 공항으로 바뀌어 이름조차 사라진 용유섬을 그리고, 영종섬에 가득했던 소금밭을 그려 봅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드나들던 곳이 이제는 다리를 타고 자동차로 싱싱 달리는 곳으로 바뀌었어요. 이러면서 갯벌도 바다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곳에 저어새가 찾아와서 알을 낳고 새끼를 돌본다고 하는군요. 


  인천시는 갯벌을 야금야금 메꾸어 ‘새도시’로 바꾸려 했는데, 저어새가 바로 그곳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으면서 온 세계 눈길이 송도갯벌로 쏠렸다고 해요. 마침내 인천시도 갯벌 개발을 조금은 멈추고 ‘저어새 지키기’에 한손을 거들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바다와 갯벌에 시멘트를 어마어마하게 들이부었지만, 저어새는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그곳을 저희 ‘고향’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저 ‘고향 찾아오기’를 할 뿐이로구나 싶습니다.




간척 후유증은 진도만의 고민이 아니다. 무절제한 간척으로 갯벌만 망치고 농지로도 쓸모없어진 땅이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이밖에도 많다. 우스갯소리로 몇 십년간 간척사업으로 떼돈을 번 건설 회사들이 앞으로는 ‘생태 복원’을 위한 역간척 사업으로 수십 년은 더 버틸 것이라는 농담도 한다. (160쪽)



  나라에서는 4대강사업을 하면서 큰 냇물이나 작은 냇물 모두 시멘트밭으로 바꾸었습니다. 앞으로는 이 시멘트밭을 걷어내는 ‘생태 복원’, 다시 말해서 ‘참다운 냇물 살리기’를 할는지 모릅니다.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냇물 죽이기’를 하느라 건설 회사가 돈을 벌었다면, ‘죽이기를 살리기’로 바꾸는 일을 하느라 또 어마어마한 돈을 건설 회사가 벌어들이는 일을 꾀할는지 모를 노릇이에요.


  처음부터 그 어마어마한 돈을 마을 가꾸기에 쓸 수 있었다면, 이 나라 뭍과 바다를 고이 살리는 길에 쓸 수 있었다면, 아니 이제라도 나라살림을 건설·건축·개발이 아니라 ‘삶터 가꾸기’에 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에 비로소 이 나라 서녘이나 남녘이나 동녘 모두 어느 고장 어느 바닷가이든 모두 ‘아름다운 바다’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몇 군데 국립공원이나 해양보호구역만 깨끗이 건사할 노릇이 아니라, 부산 앞바다나 영광 앞바다도 깨끗하면서 아름다운 터전이 되도록 할 노릇이지 싶어요. 인천 앞바다나 울산 앞바다나 포항 앞바다도 이제는 정갈하면서 사랑스러운 터전이 되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순천만갯벌은 순천 시내를 흘러온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해 바다로 빠져나가며 만들어낸 전형적인 하구 갯벌이면서 내륙으로 깊숙이 휜 만입형 갯벌이다. 경관이 워낙 수려해 인공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하구를 원형에 가깝게 보전한 원시 갯벌이어서 오랜 세월 안정적인 생태계를 이루어 왔다. (204쪽)



  물고기와 갯것을 얻기만 하는 바다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뭍과 바다는 지구를 이루는 터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뭍도 바다도 다 같이 즐겁게 살 수 있는 터전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벌써 망가진 곳이기에 더 망가뜨려도 되지 않습니다. 커다란 도시에서도 냇물이 깨끗하게 흐를 수 있을 때에 마을사람 누구나 즐겁습니다. 작은 도시에서도 뒷산이나 옆산이 숲으로 우거질 때에 마을사람 누구나 즐겁지요. 시골에서도 ‘도시 위해시설’이 아닌 고요한 숲과 너른 들이 알맞게 어우러질 때에 마을사람 모두 즐거우리라 느껴요.


  마치 보석과 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하는 해양보호구역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우리나라 해양보호구역 답사기》를 곁에 두면서 생각해 봅니다. 시끌벅적하게 놀러다니는 바다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웃음노래를 즐기려고 찾아가는 바다가 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냇물을 살린다고 하면서 시멘트를 들이부으면 냇물이 몽땅 죽는 줄 이제 사람들이 좀 깨달았기를 빌어요. 바다를 살린다고 하면서 바닷가에 시멘트를 들이붓는다면 바다는 그만 죽고 마는 줄 이제 사람들이 함께 알아차리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6.3.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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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고기 - 연어 이야기
고형렬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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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2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 은빛 물고기

 고형렬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2.4. 14000원



  예부터 모든 마을에는 샘터나 우물터나 빨래터가 있습니다. 마을이니까요. 예전에는 한집에 따로 물꼭지가 있지 않았어요. 어느 집에서건 물동이를 마련했고, 물을 길어다 썼어요. 집안에서 물꼭지를 틀어서 물을 쓰는 일이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물을 써야 할 적에는 동이를 이고 두레박이나 바가지를 썼어요.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로 물을 나누어서 쓰던 때에는 어느 곳에서나 맑고 싱그러우면서 단 물이었다고 느낍니다. 나 혼자 쓰는 물이라 나도 너도 쓰는 물이기에 이 물을 더럽히거나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어요. 다 함께 쓰는 물이니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살림을 지었어요.



넓지 않은 마당을 품고 있는, 진흙과 나무로 지은 자그마한 너와집. 빨랫줄이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감나무 허리에 묶여 있다. 고향집에 들어가듯이 고 옹을 따라 문지방 안쪽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 문쪽에 앉는다. (20쪽)


10년 전까지만 해도 신기 사람들은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개울은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입에 닿은 물은 꿀꺽꿀꺽 목구멍을 넘어서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처럼 하천과 사람의 내장에 같은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물을 먹을 수가 없다. (27쪽)



  고형렬 시인이 쓴 《은빛 물고기》(최측의농간,2016)를 읽습니다. 이 책은 “은빛 물고기”를 다룹니다. “은빛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연어’를 좇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깊은 멧골짜기 냇물에서 깨어난 작은 물고기가 바다로 흘러간 뒤에 다시 깊은 멧골짜기 냇물로 찾아가서 알을 낳은 뒤에 빈 껍데기 같은 몸뚱이를 내려놓는 한살이를 찬찬히 짚습니다.


  그런데 고형렬 시인이 은빛 물고기를 만나려고 깊은 멧골짜기를 찾아갈 즈음 이 물고기는 좀처럼 그 깊은 멧골짜기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을사람이 냇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던 때에는 은빛 물고기가 이 냇물로 찾아왔다지만, 마을사람 누구도 냇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때에는 은빛 물고기가 이 냇물로 찾아오지 못한다고 해요.



이제 그들은 물속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물속에서 밤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강풍과 파도와 폭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68쪽)


먹이들이 떠다니는 북태평양의 수중 광경은 마치 눈 내리는 지상의 산속과 같다. 그것들이 해류를 따라 흐르고 연어들은 그들을 따라 흘러간다. (145쪽)



  물고기가 마시는 물이 바로 사람이 마시는 물입니다. 사람이 마시는 물이 언제나 물고기가 마시는 물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더 마실 수 없어서 목숨이 끊어진다면, 사람은 냇물을 더 마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 놓고 마실 만한 냇물이 사라진다면, 냇물에서 물고기가 더 살 수 없습니다.


  깊은 멧골에서 졸졸 솟는 작은 물줄기는 내를 거치고 가람을 타면서 바다로 흐릅니다. 바닷물은 다시 뭍이나 하늘을 거쳐서 깊은 멧골로 돌아가서 샘물이나 냇물이 되지요. 똑같은 물이 이 지구별에서 흘러요. 똑같은 물을 사람이 마시고 물고기가 마셔요. 이 물줄기는 목숨줄기이면서 삶줄기입니다. 가느다른 물줄기는 삶줄기이면서 사랑줄기요 살림줄기입니다.


  그러니, 물 한 모금을 고이 여겨서 아낄 수 있을 때에 사람인 나는 내 목숨을 아끼고, 내 이웃인 물고기 목숨도 아낄 수 있습니다. 물 한 모금을 함부로 다루거나 더럽힌다면, 사람인 나는 내 목숨부터 함부로 다루거나 더럽히는 셈이요, 물고기까지 괴롭히듯이 다루거나 더럽히는 셈입니다.



모든 생명의 살과 생각은 마음의 열반과 함께 뒤섞여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반영이고, 마음의 작용은 몸의 작용이고, 그 작용은 만물 어떤 것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200쪽)



  고형렬 시인은 ‘자취가 끊어진 은빛 물고기’를 좇아서 곳곳을 누빕니다. 이 물고기를 따로 기르는 사람을 만나고, 예전에 이 물고기떼를 늘 마주하던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은빛 물고기가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이러는 동안 암컷하고 수컷은 저마다 어떤 헤엄짓으로 만나는지를 살핍니다. 두 물고기가 짝짓기를 하는 마지막 몸짓을 살핍니다. 짝짓기를 마치면서 낳는 알을 살핍니다. 온몸을 뒤틀면서 숨을 내려놓고 빈 껍데기 몸뚱이를 물살에 맡기면서 이승을 떠나는 흐름을 살핍니다.



그 광경을 쳐다본다면 아마 그 빛이 움직이는 하늘이 거대한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공간의 하늘 속에 혹은 하늘벽에 찰나적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지워지는 빛의 신출귀몰은 인간 영혼에 하나의 강렬한 표상을 박아둘 것이다. (238쪽)



  사람은 한 번 짝짓기를 한 뒤에 목숨을 내려놓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물고기처럼 한 번 짝짓기를 한 뒤에 목숨을 내려놓는다면 아기가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못할 테지요. 물고기는 제 알이 물속에서 스스로 깨어나서 자랄 수 있도록 모든 숨결을 불어넣은 뒤에 조용히 물길을 떠납니다. 사람은 제 숨결을 두 씨앗에 담아서 하나로 그러모은 뒤에 이 씨알에서 깨어날 새 목숨을 기다리면서 살림살이를 추스르고 보금자리를 가다듬습니다.


  물고기는 알에서 깨어난 뒤에 맞잡이한테 잡아먹히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아기로 태어난 뒤에 어버이한테서 온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하나씩 새롭게 배웁니다. 물고기는 모든 삶을 스스로 견디고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배우지요. 사람은 어버이한테서 말을 물려받고, 삶과 살림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요. 물고기는 제 어미한테서 ‘냇물과 바닷물에서 스스로 기운차게 살아남는 길’을 물려받습니다.



삼척으로 돌아온 모든 연어들이 한 번 쉬고 올라가던 그 못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최적의 자연의 늪을 불도저와 삽을 동원해서 메워 버리고 그 위에 테니스장을 설치했다. (284쪽)


사랑하는 길은 자연 속에 저들을 가만히 두는 일뿐이다. 저 물빛들을 사랑하다가 오히려 생명을 다칠 것이다. (363쪽)



  《은빛 물고기》를 읽으면서 우리 마을 샘터랑 빨래터를 헤아립니다. 열 몇 해 앞서까지 이 샘터에서 물을 긷고 이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다는데, 이제 이 샘터나 빨래터는 흙일을 마친 연장을 씻는 노릇을 합니다. 가문 날에는 물을 뽑아내는 노릇을 합니다. 농약을 칠 적에는 농약에 물을 섞으려고 호스를 길게 이어서 빨래터에 꽂습니다.


  빨래를 하지 않는 빨래터에는 물이끼가 낍니다. 물을 긷지 않는 샘터에도 물이끼가 낍니다. 그렇지만 이 샘터와 빨래터에는 다슬기가 살아요. 다슬기는 깨끗한 물살에 깃들어 살몃살몃 춤을 추듯 기어다닙니다. 개똥벌레는 이 다슬기를 먹이로 삼아서 살지요.


  나는 아이들하고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마을 어귀 빨래터하고 샘터를 치웁니다. 이때에 다슬기는 고스란히 살립니다. 봄에 깨어날 개똥벌레 애벌레가 이 다슬기를 먹고 자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빨래터 둘레에는 흙이 없으니 개똥벌레가 살 수 없지만, 빨래터를 치우는 동안 다슬기가 물살을 따라 흘러가서 이웃 논도랑으로 가면, 그곳에서 깨어날 개똥벌레가 다슬기를 만나겠지요.



백자가 알의 배꼽으로 들어가면 입을 완벽하게 닫아 거는 알들은 그때부터 생기를 머금고 단단해지며 팽창하는 듯하다가 멈춰서 수정알처럼 빛난다. 수정란들이 붙은 돌은 반석의 든든하고 포근한 요람이다. (370쪽)


꿈이 되지 않는 것들은 죽지 못한다. 생명들은 생명을 낳고 죽는다. 생명을 낳는 것들은 그 전 생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물과 같은 부드러운 꿈들이었다. (399쪽)



  마을사람이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던 나날, 은빛 물고기는 은빛 춤을 추면서 냇물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마을사람이 개울에 엎드릴 수 없는 오늘날, 은빛 물고기가 은빛 춤을 추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더욱이 지난 몇 해 사이에 이 나라 거의 모든 냇물은 시멘트더미로 탈바꿈했습니다. 커다란 물줄기뿐 아니라 시골마을 작은 물줄기에다가 골짜기 물줄기까지 시멘트더미를 품에 안아야 했습니다.


  시멘트더미가 물줄기와 냇바닥을 뒤덮은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은빛 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시멘트를 찬양하거나 노래하는 글은 나올 테고, 시멘트길을 따라 자전거나 자동차를 달리다가 ‘인증 사진’ 찍는 놀이는 할 수 있을 테지만, 이제 《은빛 물고기》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 갈 만한 시인은 나오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다람쥐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송사리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딱새나 제비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큰빗이끼벌레 이야기 말고 눈부신 모래밭을 밟으면서 반짝이는 물빛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모래밭도 맑은 냇물도 물고기도 숲도 나무도 들꽃도 사라지고 온통 시멘트더미와 커다란 시멘트집만 덩그러니 남은 온 나라 물줄기에서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 만할까요? 고형렬 시인이 쓴 《은빛 물고기》는 고운 손길을 받아서 새롭게 옷을 입고 우리 곁에 태어납니다. 살가운 이야기책은 언제라도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데, 살가운 우리 이웃은, 숲이웃은, 냇물이웃은, 바다이웃은, 언제쯤 우리 곁에 고운 눈망울과 숨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2016.2.2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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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문명의 뿌리 - 미국의 뿌리는 어떻게 뽑혔는가, 제15회 환경책큰잔치 2016 올해의 환경책
웬델 베리 지음, 이승렬 옮김 / 한티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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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7



‘대규모 문명’은 뭔가 크게 어긋난 모습 아닐까

― 소농, 문명의 뿌리

 웬델 베리 글

 이승렬 옮김

 한티재 펴냄, 2016.1.25. 19000원



  한겨울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뛰쳐나가서 마당을 와아아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어쩜 이렇게 씩씩한가 하고 뒷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이 아이들처럼 놀았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나무란 말이 문득 떠올라요. 아차,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이들을 나무라고 말았네 하고 새삼스레 깨닫지요. 그래서 곧바로 말을 바꿉니다. “얘들아, 겨울에는 양말을 신고 놀자. 발이 아야 하겠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여요. “얘들아, 너희가 예쁘다고 여기면서 새로 장만한 이 멋진 신이랑 장화가 여기 있는데 이 신을 안 신어 주면 이 신이 서운해 하지.”


  똑같은 일이나 몸짓을 놓고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면서 말을 내놓느냐에 따라 참말 살림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늘 느낍니다. 아이들이 겨울에도 맨발로 놀겠다면, 또는 양말바람으로 마당을 뛰어다니겠다면, 이대로 놀라 할 수 있어요. 이러다가 발이 다친다든지 양말에 또 구멍이 나면, 이런 대로 맞아들이면 돼요. 발이 다쳤으면, “그래, 발이 다쳤네. 어떻게 하지?” 하고 되묻고, 양말에 구멍이 났으면, “그래, 구멍이 났네. 어떻게 하지?” 하고 되묻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깨달으면서 새로운 길을 열도록 북돋울 노릇이에요.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즐겁게 저희 살림길을 열도록 도와야지요.



착취자의 기준은 효율성이고, 양육자의 기준은 돌봄이다. 착취자의 목표는 돈, 즉 이윤인데, 양육자의 목표는 건강이다. (29쪽)


식량울 무기로 생각하든가 또는 무기를 식량으로 생각하면 소수의 사람들에게 안보와 부의 환상을 심어 줄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34쪽)



  웬델 베리 님이 빚은 《소농, 문명의 뿌리》(한티재,2016)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때 교수로 일하다가 이 교수 일을 접은 뒤에 농사꾼이 되었다는 웬델 베리 님이라고 합니다. 도시에서 지식인으로 지내던 살림을 고이 접은 뒤,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지내는 살림으로 거듭난 웬델 베리 님이라지요.


  도시하고 시골을 온몸으로 겪은 삶이요, 도시하고 시골에서 온몸으로 일한 삶이기에, 웬델 베리 님이 쓴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는 두 문명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짚습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가 하는 대목을 건드리고, 사람들이 시골을 등지면서 무엇을 잃고 잊고 놓치는가 하는 대목을 살핍니다.



전문가가 주도하는 시스템의 가장 잘 알려진 첫 번째 위험은, 많은 비용과 수고를 들여 한 가지 일만을 하도록 훈련되는 사람들, 즉 전문가들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 예방에는 아무 기술도 관심도 없는, 질병에 대해 값비싼 치료책에만 능숙한 의사들이 생겨난다. (51쪽)


미국 시민들은 “노동력의 96퍼센트는 식량 생산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을 기꺼운 마음으로 경청한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은 노동력이 ‘해방’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고용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79쪽)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 크게 짚는 대목을 꼽자면 ‘앗기·돌봄’입니다. 웬델 베리 님이 두 가지 문명을 두루 겪고 살아낸 나날을 돌이킨다면, 도시살이는 ‘앗기’요, 시골살이는 ‘돌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골살이도 ‘앗기’랑 ‘돌봄’으로 갈린다고 해요. 한집 사람들 살림을 짓는 “작은 보금자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커다란 농장”을 수많은 기계와 화학비료로 ‘운영 관리’할 적에는 ‘앗기’라는 문명이 된다고 해요.


  ‘대규모 농장’은 땅에 땅힘을 되살리도록 북돋우지 않고 ‘더 많은 생산량’에만 목을 매단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대목은 여느 도시 이웃도 웬만큼 알리라 생각해요. 이를테면, 양계장 아닌 닭공장에서는 수십만 마리 닭이 옴짝달싹 못하면서 밤낮조차 없이 아주 빠르게 살이 찌다가 죽어야 합니다. 알 낳는 닭도 하루 내내 전구 밑에서 알만 낳지요. 돼지우리나 소우리 아닌 돼지공장이나 소공장이 되고 만 커다란 짐승우리에서도 돼지이며 소이며 옴쭉달싹 못하면서 그저 살만 빨리 찌우다가 죽어야 하는 얼거리예요.


  이 같은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곧잘 다룹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모습은 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스스로 제 밥을 제 손으로 일구는 삶하고 아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안데스 농업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화해의 모델을 제시해 준다. 치료책은 주변부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대자연이 가장 생활 속에서 숨 쉬게 하는 것, 다양성을 통일된 전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런 것이다. (357쪽)


건강한 농장에는 나무들이 심겨 있을 것이다. 농장이 위치한 곳이 애초부터 숲이 울창한 삼림지대일 수도 있고, 과실수와 견과류 나무들, 또는 그늘을 만들기 위한 나무들이 심겨 있거나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363쪽)



  《소농, 문명의 뿌리》를 읽어 보면, 미국에서는 96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도 4퍼센트가 될랑 말랑 하는 사람들이 ‘대규모 농장’에서 곡식하고 고기를 뽑아내어도 먹고살 수 있는 얼거리라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엇비슷합니다. 한국도 ‘도시 거주 인구’가 90퍼센트를 넘은 지 열 해 즈음 되고, ‘농업 인구’는 ‘시골 거주 인구’ 가운데에서도 얼마 안 되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살림이라지만, 막상 ‘돈을 버는 일’ 때문에 너무 바빠요. 손수 흙을 일구어서 밥이나 고기를 얻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막상 느긋하게 도시 문명을 누리거나 즐기지 못하기 일쑤예요.


  집집마다 자동차는 있는데, 이 자동차로 길을 나설라치면 언제나 길이 잔뜩 막혀요. 도시에서는 쉴 만한 자리나 공원도 마땅하지 않은데, 주말에 바깥 나들이라도 가려 하면 그야말로 길이 막히고, 기차도 시외버스도 빈자리가 드물지요. 참말 뭔가 많이 뒤틀리고 만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농을 하는 농부는 이익과는 관계없이 그저 밭을 거닐지만, 산업농에 종사하는 농부나 관리인은 오로지 필요 때문에 농장을 돌아본다. (375쪽)


아미쉬 농업은 현대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다. 그러나 결코 무지하거나 비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정통농업보다 정교하다. (423쪽)



  교수님 아닌 농부님 살림을 짓는 웬델 베리 님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그대는 ‘진보’를 좋아하려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대는 ‘현대’ 문명이 좋으냐고 묻습니다. 웬델 베리 님이 도시에서 교수로 살다가 시골로 옮겨서 오랫동안 농사꾼으로 사는 동안 몸소 겪고 지켜보노라니, ‘진보와 현대’라는 이름은 거의 허울뿐이었다고 밝힙니다. 우리 삶은 굳이 ‘현대적’이지 않아도 되고, ‘진보’가 아니어도 된다고 밝혀요.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 웬델 베리 님은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아름다운 삶’이나 ‘즐거운 살림’이나 ‘착한 사랑’이나 ‘참다운 꿈’이나 ‘기쁜 웃음’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시로 내다 팔아서 돈을 얻어야 하니까 그렇게 농약이나 비료를 많이 쓸 수밖에 없지만, 한집 사람들이 손수 먹을 곡식이나 열매나 고기라면 그처럼 함부로 ‘땅을 괴롭히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내 곁에서 깔깔거리며 노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웬델 베리 님 책을 읽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만한 종이소꿉을 손수 오려서 둘이 신나게 오랫동안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작은 흙지기’가 되면 스스로 즐겁게 흙을 짓습니다. ‘작은 살림꾼’이 되면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참으로 기쁘게 하루를 짓습니다.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기쁜 살림을 언제나 아름답게 누리면서 아이들하고 함께 누릴 사람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일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꿈을 북돋울 어른이나 어버이여야지 싶습니다. 2016.2.1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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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자 식물 - 식물 영과 함께하는 치유 가이드
팸 몽고메리 지음, 박준식 옮김 / 샨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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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5



새봄에 신나게 뜯을 쑥을 기다리면서

― 치유자 식물

 팸 몽고메리 글

 박준식 옮김

 샨티 펴냄, 2015.12.28. 18000원



  설날이 지나면서 겨울은 한껏 누그러집니다. 아직 이월이지만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뽕나무 둘레에는 쑥이 몽실몽실 돋습니다. 뽕나무 둘레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쑥싹을 만납니다. 곧 새봄 쑥을 신나게 뜯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겨울이 저물면서 쑥이 돋는 요즈음은 코딱지나물이나 곰밤부리나 봄까지꽃도 함께 올라옵니다. 갈퀴덩굴도 살그마니 고개를 내밀어요. 냉이도 이 작은 새봄 들꽃 곁에서 살짝살짝 인사를 합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옹크리면서 포근한 볕을 기다리던 들풀은 곧 온누리를 푸르게 덮으리라 생각해요. 추운 바람이 불던 겨울이 길었어도, 이 긴 겨울 끝에는 포근하면서 보드랍고 살가운 봄바람이 찾아온다는 꿈을 나누어 주어요.



우리는 원래 식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으며, 따라서 식물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해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5쪽)


할머니는 식물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집안일을 모두 끝낸 오후만 되면 할머니는 풍성한 정원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따거나 꺾곤 했는데, 일하는 내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듯 계속 중얼거리셨다. (38쪽)



  팸 몽고메리 님이 쓴 《치유자 식물》(샨티,2015)을 읽으면서 봄풀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미국에서 ‘약초 치료사’이자 ‘식물 영 힐러’로 일한다고 하는 팸 몽고메리 님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 같은 서양에도 ‘약초 치료사’라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한국 같은 동양뿐 아니라 지구별 어디에서나 ‘풀로 몸을 다스리는 사람’은 늘 있었지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왜냐하면, 먼 옛날부터 이 지구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땅을 일구어서 곡식이며 열매를 얻었으니까요. 땅을 일구기 앞서는 들풀이나 나무열매를 얻었어요. 언제나 풀과 나무한테서 밥을 얻었으니, 따로 치료사나 약초 치료사가 아니어도 풀을 잘 알거나 살피기 마련이에요.



매일 아침 새로운 날을 시작하면서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가, 따스한 숨을 보내 주는 태양에 감사하고,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대지에 감사하며, 산소를 제공해 주는 나무에 감사하고, 이 땅에 생명수를 주고 내 몸에 필요한 수분을 제공해 주는 하트스프링의 순수한 물에 감사한다. (107쪽)


생명을 죽이는 방식의 현대화와 세계화가 전 세계를 잠식해 감에 따라 서구 외의 지역도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자연의 상품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우리가 지구를 통해서 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상태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며, (129쪽)



  한국에는 한의사가 있습니다. 한의사로 일하는 분들은 한약을 바로 ‘풀’에서 얻습니다. 풀 아닌 것으로도 한약을 재거나 달입니다만, 한약은 언제나 ‘풀’이 바탕이 된다고 할 만해요. 쑥뜸을 뜨더라도 쑥이 있어야 쑥뜸이 되어요. 쑥을 가리켜 그냥 ‘쑥’이라고도 하지만 ‘약쑥’이 따로 있고, 쑥을 잘 말려서 찻물로 끓여서 마셔요.


  우리는 보리를 말린 뒤에 ‘보리찻물’을 끓여서 마셔요. 보리는 보리밥도 되지만 찻물로 거듭나는 ‘약물’이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옥수수차이든 결명자차이든 모두 매한가지예요. 요즈음 널리 퍼진 ‘허브’라는 풀도 바로 ‘풀’입니다. 약풀이기 앞서 언제나 풀이에요.


  가만히 보면,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도 풀입니다. 나락이라고 하는 풀을 논에 씨앗으로 심어서 거둔 뒤에 겨를 벗겨 쌀알을 얻어요. 이 쌀알로 지은 밥이니, 밥도 ‘풀숨’이라고 할 만합니다. 풀 기운을 먹는 밥이라고 하겠지요.



내가 학생들과 하는 활동 가운데 하나가 밤 산책이다. 많은 사람이 어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는 자기 안의 두려움들을 대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211쪽)


우리가 육체의 눈만 사용해서 보는 까닭에 주변에 있는 것들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한평생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274쪽)



  《치유자 식물》은 우리 몸을 달래거나 다스리도록 돕는 풀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잊고 지낸 풀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조금만 돌아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풀 한 포기가 바로 우리 몸을 곱게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멀리 있는 어떤 대단한 풀(약초)을 찾을 노릇이 아니라, 가만히 마음을 열어서 우리 보금자리를 둘러싼 풀을 알아보자는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내 몸을 살리는 풀은 벼(쌀밥)가 될 수 있고, 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쑥이 되거나 냉이가 될 수 있습니다. 씀바귀나 고들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서나물이나 민들레가 될 수 있고, 젓가락나물이나 피나물이 될 수 있어요. 토끼풀이나 꽃다지가 될 수 있고, 머위나 뱀밥이 될 수 있지요.


  상자나 그릇에 담아서 키우는 상추 한 포기가 우리 몸을 살릴 수 있고, 고춧잎이나 깻잎이나 콩잎이 우리 몸을 살찌울 수 있어요. 배춧잎이나 무잎이나 유채잎이 우리 몸을 보듬을 수 있을 테고요. 어느 풀이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서 마주할 때에 비로소 풀숨이 우리 몸으로 스며든다고 합니다.



보호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허용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304쪽)


우리는 바구니를 들고 민들레가 엄청나게 피어 있는 큰 들판으로 향한다. 그 꽃의 숫자만으로도 이 평범한 꽃의 성공이 입증된다 … 민들레 같은 식물이 우리의 현관 바로 앞에서 엄청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336, 337쪽)



  새봄에 신나게 뜯을 쑥을 기다립니다. 새봄을 부르는 늦겨울비를 맞으면서 쑥잎을 쓰다듬습니다. 쑥잎 곁에서 하얗게 꽃을 피운 곰밤부리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곰밤부리 둘레에서 보랏빛 꽃송이를 앙증맞게 터뜨린 봄까지꽃도 살며시 건드립니다. 빗방울이 톡 터지듯이 퍼집니다. 풀거미가 사는 거미줄에도 빗방울이 조롱조롱 달리고, 겨울을 이기고 맺힌 꽃눈하고 잎눈에도 빗방울이 알롱달롱 달립니다.


  우리 집에서 돋는 봄풀이 우리 식구한테 새로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들여다봅니다. 우리 이웃집에서 돋는 봄풀은 우리 이웃집 사람들한테 싱그러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이웃 마을과 들에서 돋는 봄풀은 모든 이웃한테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2016.2.1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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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재발견 - 소리 풍경의 사상과 실천
토리고에 게이코 지음, 한명호 옮김 / 그물코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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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8



‘소음’한테 자리를 빼앗긴 ‘소리’를 되찾기

― 소리의 재발견

 토리고에 게이코 글

 한명호 옮김

 그물코 펴냄, 2015.9.20. 12000원



  아침이 되면 아침을 여는 소리를 듣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대로 아침 소리를 듣고, 시골에서는 시골대로 아침 소리를 들어요. 봄에는 봄대로 봄 소리를 듣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겨울 소리를 듣지요.


  아침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늘 다른 소리가 찾아오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시골이 아닌 도시여도 아침하고 새벽하고 낮하고 저녁하고 밤은 늘 다른 소리가 흐릅니다. 숲이 아닌 도시여도 봄하고 여름하고 가을하고 겨울에는 언제나 다른 소리가 흘러요.


  도시에 있기에 늘 같은 소리이지 않고, 시골이나 숲에 있기에 언제나 다른 소리이지 않아요. 해가 움직이는 결을 살피면서 바람이 흐르는 결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새롭게 태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오늘날에는 명소라고 하면 대개 벚꽃 명소 등 시각적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을 떠올린다. 그런데 당시 에도 거리에는 벌레 소리라는, 자연의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 (13쪽)


숲에서 울리는 소리는 단지 ‘공기의 진동인 음향’이 아니다. ‘싱싱(しんしん,소복소복)’이라는 기이한 소리는 깊은 산속의 냉기, 나무들의 향기, 산의 신비 등을 전부 결합한 전체적인 감각이다. (21쪽)



  토리고에 게이코 님이 쓴 《소리의 재발견》(그물코,2015)을 읽으면서 소리를 새롭게 헤아려 봅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라 하더라도, 까치랑 까마귀가 노래하는 소리가 다릅니다. 까치떼랑 까마귀떼가 노래하는 소리도 달라요. 참새와 박새와 콩새와 딱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다르고, 제비와 직박구리와 물까치가 노래하는 소리가 달라요. 개똥지빠귀하고 검은지빠귀가 노래하는 소리도 사뭇 다르고요. 그런데 우리가 새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새마다 다른 노래를 느낄 수 없어요. 새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새가 노래하는 줄 아예 못 느낄 수 있어요.


  마주앉은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지 않으면 마주앉은 사람이 들려주는 말을 듣지 못해요. 마주앉은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와 마주앉은 사람이 들려주는 말을 한귀로 듣더라도 다른 한귀로 이내 흘려 보내고 말지요.


  소리를 다시 찾는다고 할 적에는, 소리하고 얽힌 삶과 살림을 다시 찾는다고 하는 셈이라고 봅니다. 소리를 새롭게 찾는다고 할 적에는, 소리를 둘러싼 삶과 살림을 새롭게 찾는다고 하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음악가는 이제 오로지 콘서트홀 안의 소리에만 관심을 집중하며 바깥의 환경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41쪽)


‘꽃’과 ‘황성의 달’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진 다키렌타로는 어떤 소리 풍경 속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을까. 그의 감성을 키운 것은 어떤 소리 풍경이었을까 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살던 옛집의 소리 풍경을 알 수 있다면 방문객들이 이를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소리 풍경을 설계하는 것을 프로젝트의 기본 콘셉트로 삼고 싶었다. (148쪽)



  《소리의 재발견》은 우리를 둘러싼 소리가 ‘소리’인지 ‘소음’인지 ‘노래’인지 ‘가락’인지 ‘결’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 아니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숨결인지를 생각해 보자고 이끕니다. 오직 눈에만 기대어 바라보는 삶과 살림이 아니라, 귀를 열고 마음을 열면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삶과 살림을 바라보자고 이야기해요.


  일본에서 어느 작곡가 옛집을 되살리는 일을 맡은 적에 있다는 글쓴이는, 작곡가하고 얽힌 유물이나 건축에만 마음을 쓰기보다는 ‘노래를 지어서 사람들한테 선물처럼 들려준 숨결’이 되기까지 ‘작곡가 한 사람이 이녁 보금자리에서 늘 들은 소리’가 무엇인가에 깊이 마음을 쓰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작곡가 옛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작곡가 한 사람이 늘 들은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도록 그곳을 꾸미려 했다고 해요.


  이런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전남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 문학관’이나 전북 전주에 있는 ‘혼불 문학관’이나 강원 원주에 있는 ‘토지 문학관’ 같은 곳이 떠오릅니다. 태백산맥이라는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에 찾아가면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전라도 고장말’을 얼마나 듣거나 느낄 만할까요? 혼불이라는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에 찾아가면 ‘혼불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삶말’을 어느 만큼 듣거나 느낄 만할까요? 토지라는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에 찾아가면 ‘토지라는 작품과 얽힌 사랑과 삶과 꿈이 흐르는 말’을 어떻게 듣거나 느낄 만할까요? ‘말’을 다루는 문학인데, 막상 문학관에서는 ‘말소리’나 ‘말결’이나 ‘말투’에는 거의 마음을 못 기울이지 않느냐 싶어요.



풍경이란 원래 오감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본래 소리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풍경의 존재 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귀로 파악한 풍경만을 따로 끄집어내서 소리 풍경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굳이 소리 풍경이라고 한 것은 풍경에 본래 있어야 할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즉 소리가 거의 의식되지 않는 현대 사회의 상황 때문이다. (181쪽)



  우리가 소리를 되찾거나 되살리려고 한다면, 전남 벌교에 있는 문학관에서는 ‘벌교말’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서 지리산 자락에서 흐르는 바람소리를 들을 만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부산에 있는 박물관이나 문학관이라면, 마땅히 부산말로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살피거나 돌아볼 만해야 하지 않으랴 하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이런 것도 있어요. 대구에 있는 롯데리아에서는 ‘대구말로 주문을 하고 셈을 치를’ 수 있으면 재미있고, 광주에 있는 맥도널드에서는 ‘광주말로 주문을 하고 셈을 치를’ 수 있으면 재미있을 테지요. 서울 표준말은 서울에서 쓰도록 하고, 대전에서는 대전말을 울산에서는 울산말을 제주에서는 제주말을 ‘고장 표준말’로 삼을 수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어요.


  《소리의 재발견》이라는 책은 우리가 현대문명에 길들면서 스스로 잊은 ‘소리 풍경’을 스스로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들려줍니다. 눈으로만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소리로도 누리는 풍경이 되고, 냄새로도 누리는 풍경이 되며, 살갗으로도 누리는 풍경이 될 때에 오롯이 참다운 풍경이 되리라 하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들려줍니다.


  그러고 보면 그래요. 밥 한 그릇은 맛으로만 먹지 않아요. 눈으로도 먹고, 냄새로도 먹지요. 또 아삭 바삭 아구 냠냠 씹는 소릿결로도 먹어요. 밥상맡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라든지 기운으로도 함께 먹지요.


  소리를 되찾으면서 풍경뿐 아니라 삶을 되찾습니다. 소리를 새롭게 찾으려 하면서 살림살이를 되찾고, 서로서로 기쁘게 나눌 사랑을 되찾습니다. 4349.1.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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