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의 나의 수채화 인생
박정희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42 ― 우리 어머니 삶도 예술이요 문화가 아닐까?
 :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나의 수채화 인생》



- 책이름 : 나의 수채화 인생
- 글ㆍ그림 : 박정희
- 책만든곳 : 미다스북스(2005.3.31.)
- 책값 : 13000원





 (1) 손과 얼굴과 하얀 빛


 안양에 볼일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사람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어쩐지 사람들 얼굴에 자꾸 눈이 갑니다. 손에도 눈이 가고, 하얗게 드러낸 종아리나 허벅지에도 눈이 갑니다. 그러다가 제 손을 들여다보고, 뒷간에 있는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곰곰이 살핍니다.

 때는 바야흐로 삼월하고도 스무 날을 넘기는 때. 지난해까지만 해도 삼월에 한 차례 눈보라가 치고 나서야 따순 기운이 돌았는데 올해에는 삼월 눈은 찾아오지 않을 듯한 느낌. 벌써부터 반소매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이 생겨나고, 자동차 에어컨 돌리는 사람도 있고.


..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밖의 일을 보고 돌아온 나에게 남편은 정색을 하고 앉으라더니, “나, 왜 살아?”라고 물었다. 남편의 그 말에 무어라 얘기를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준엄한 표정 앞에 나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의 명령으로 사는 거지요. 당신은 팔십 평생 참 좋은 의사로 수고 많이 했고, 이제는 머리도 몸도 늙고 망가져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지요. 먼저 하나님께로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  (6쪽)


 무릎이 맛이 가고 왼어깨가 나가고 오른팔꿈치도 반편이가 된 가운데 먹통인 오른손목도 내 손목 같지가 않은 지금, 다문 1분 자전거를 타도 네 군데 다섯 군데에서 아이고 아야 엉엉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합니다.

 한창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면서 살던 때에는, 고무신 안쪽 발가락과 발바닥만 하얗고 나머지 몸뚱이는 죄 새까맸는데,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된 지금은 ‘살갗이 참 하얗네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도서관 지키랴 천막농성 하랴, 길에서 햇볕 쬐며 움직일 일이 없어진 요즘이니, 싫디싫은 허연 얼굴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이 진저리가 쳐집니다. 햇볕을 쬐며 일하고 싶은데. 햇볕 쬐는 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해도, 낮에는 햇볕을 쬐면서 돌아다니고 싶은데.


.. 행복이라 느끼면서 살다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주었던 사랑을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나에게 베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라는 권위로 혼내고 다그치기보다는, 함께 즐기고 어떻게 하면 서로 즐거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 왔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이에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받은 추억들이 너무나 많다 ..  (39쪽)


 어릴 적부터 제 살결은 허연 편이었습니다. 동무들하고 똑같이 바깥에서 뒹굴며 놀아도 동무들은 금세 까맣게 그을리는데 저는 허여멀겋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늘을 부러 찾아가지 않고 그냥 땡볕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노는 데에도 살갗이 잘 타지 않았습니다. 군대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하얀 얼굴이라고 해서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휴가를 받아 한두 번 세상 구경을 할라치면 ‘꼭 도적놈 같다’는 소리를 듣지만, 부대에서는 ‘얼굴 허연 놈’ 소리를 듣습니다.

 책만 읽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그다지 안 많은 사람임에도, 또 책읽기보다는 밖으로 나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은 사람임에도, 얼굴이 허여니 책상에서 펜대나 굴리는 놈팽이로 여기는 눈길이 달갑지 않습니다. 남들 눈길이 어떠하든 제 나름대로 살면 그만일 텐데, 저부터 사람 보는 눈길에서 홀가분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잘 그을렸다고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얼굴이 허옇다고 해서 못난 사람이 아닐 텐데,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얼굴 허연 사람’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대접을 해서 무척 꺼려졌습니다.


.. 초등학교에 근무한 경험이 있던 나는,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어린이가 질색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한글도 모른 채 선생님께 맡기고 싶었다 ..  (76쪽)


 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 얼굴은 저보다 훨씬 허여멀겁니다. 안양에 닿아 찾아간 사무실에서 일하는 공무원들 얼굴은 더더욱 허여멀겁니다. 아주머니 할머니는 얼굴에 허옇디허연 화장품을 바르고, 젊은 아가씨도 얼굴에 하얗디하얀 화장품을 바릅니다. 얼굴 하얀 서양사람처럼 되어야 살결 곱고 예쁜 사람으로 보인다고 느껴서 이리 할 텐데, 서양사람도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은 살결이 까무잡잡합니다. 기록사진으로 남아 있는 1900년대 첫머리, 또는 1800년대 끝머리 서양사람들 살결을 보면 우리가 ‘깜둥이’라고 하는 사람들 살결하고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화기 무렵 우리 나라 백성들 사진을 살펴보면 모두들 까만 얼굴에 까만 손에 까만 발입니다. 이 무렵 임금과 높은 신하들 사진을 살펴보면 퍽 허여멀건 얼굴에 허연 손입니다.


.. “오늘 하늘의 빛은 코발트로 칠하고,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은 오렌지색이네? 이렇게 드문드문 가로 점을 찍은 다음, 굵은 붓에 맑은 물을 묻혀서 슬슬 가로 퍼뜨리면 시원하게 그려졌지? 그리고 수건을 손가락에 감고 찍어내면 구름이 되는 거란다. 마른 뒤에 구름의 표정에 조심스럽게 그늘을 넣어 볼까?” “우와∼ 쉽다. 나도 선생님처럼 저 구름을 그려야지.” 아무리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애를 써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오묘한 광선과 바람을 어찌 그릴 수가 있겠는가.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없이 즐거워하며 행복을 만끽하며 자연을 흉내내듯 그리는 것도 자연이 내려준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인 것이라 생각한다 ..  (139쪽)


 잠깐 일을 멈추고 제 손을 바라봅니다. 서른네 살 먹은 아저씨 손을 봅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넓게 박혀 있습니다. 자전거를 못 타고 있음에도 굳은살은 그대로입니다. 손마디에는 주름이 굵직하게 패였고, 손가락이며 손등께며 불그스름합니다. 손끝은 빨갑니다. 책을 읽는다며 또 글을 쓴다며 할 때 보면 손이 시려서 자주 비빔질을 하고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끼고 녹이곤 합니다. 날이 풀렸다고 찬물로만 빨래를 하다 보니 두어 점 손빨래를 하고 나면 손끝까지 쩡쩡 얼어붙어 살짝 아픕니다.

 어릴 적을 더듬어, 우리 어머니가 제 나이였을 때 손이 어떠했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때 어머니 손을 보면서, ‘어머니 손은 왜 이렇게 누래요?’ 하고 여쭈곤 했습니다. 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불긋불긋한 가운데 누릇누릇합니다. 그때 어머니 손이 왜 누랬는지 알 만합니다.







 (2) 우리 어머니


 환갑 나이가 된 어머니한테 ‘어머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지요?’ 하고 여쭈면, 으레 ‘알잖아?’ 하면서 ‘없어.’ 하고 끊어버립니다. 하긴, 누군가 저한테 무슨 먹을거리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글쎄 …… 없는데.’ 하고 대답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안 그러느겠느냐만,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있을 텐데, 당신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오셨지 싶습니다. 당신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즐길 틈이 없이 사는 가운데 그예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아니, 당신 머리속 한켠에 아주 조그맣게 숨겨 두고는 다시 들추어낼 생각을 못하시지는 않는지.

 입가림이 많아서 반찬을 골고루 못 먹던 저였습니다. 어머니는 걱정도 많고 다그침과 꾸지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웬만해서는 봐주며 제 입에 무엇이 맞나 찾아 주려고 애쓰셨습니다. 우유도 못 마시지 치즈도 못 먹지 버터도 게우지 배추김치는 못 씹지 김은 숨막히지 찬국수에는 속이 뒤집히지 ……(우유는 몇 번 물똥을 누고 나서 입에 맞으면 즐겨먹게 되지만, 한 주쯤 안 먹고 끊다가 다시 마시면 꼭 탈이 났고, 배추김치는 영 삼키기 힘들어 했습니다. 이제는 다 잘 먹고 있습니다만). 어린 그때를 생각하면, 밥먹는 자리는 바늘방석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눈치밥을 먹어야 하나, 오늘은 또 얼마나 울면서 억지로 삼켜야 하나.

 꼭 저 때문은 아니지만, 저를 비롯해 다른 두 식구가 먹지 않고 남기는 반찬이 있을 때면 어머니는 그 반찬을 꼭꼭 남김없이 드셨습니다. 날짜가 지난 우유는 벌컥벌컥 들이키셨고, 두 형제와 아버지가 지저분하게 먹고 남긴 물고기 반찬도 뼈까지 우걱우걱 씹으면서 마무리를 지으셨습니다.


..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아낙네들 서너 명이 무엇인가를 심고 있었다. 저 멀리 울멍줄멍한 산 위에 청명한 하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상태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집에 가서 빨랫감을 놓고 그림도구를 가지고 오겠다면서 돌아섰다. 하지만 이내 집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되돌렸다. ‘말도 안 돼! 신랑이 입고 나갈 와이셔츠를 빨아야 하잖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몇 번 되풀이하던 끝에 결국, 지난해의 잡초가 말라 있는 자리에 털퍼덕 앉아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폈다. 그런데 그 순간 두 눈에서 더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것은 무슨 조화였을까. 그 얼굴을 남들이 보기라도 했다면 무어라 했을지. 그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어, 이렇게 좋은 풍경화를 어디서 샀나?”라고 내게 물어 보았다. “제가 그린 거예요.” ..  (25∼27쪽)


 남은 밥이나 반찬을 뒤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모습을 늘 보면서 마음에는 죄스러움과 미안함이 쌓입니다. 밥상머리에서 늘 꾸지람을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막내아이 몸이 걱정되어 어떤 먹을거리를 주어야 하느냐로 마음앓이 많으셨겠지요. 이런 걱정 저런 마음씀은 제 몸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가 지나는 동안, 그 어린 날에는 몸에서 안 받는 여러 가지가 몸에 받게 되고 잘 먹게 됩니다. 지금도 물고기 대가리는 못 먹습니다만, 꼬리와 지느러미와 내장만 빼고는 깨끗이 먹습니다. 반찬 남기는 일이 없고 밥풀 하나 흘리는 일이 없습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밥그릇에 밥풀 하나라도 남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어쩌다가 바닥에 밥풀을 흘렸으면 곧바로 주워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밥알 하나 함부로 여기지 말고 옳게 간수하라는 뜻이었고, 밥 한 그릇 비우는 고마움을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내 소중한 목숨을 이어가도록 나한테 바쳐진 다른 목숨을 먹는 일이 밥임을 깨닫게 해 주는 뜻이었습니다.


― [육아일기] 현애를 나았을 때의 엄마(1947)
: 25세 때였다. 모든 것이 내 힘에 벅찼든 때였다. 나라의 상태도 그렇지만 나 개인의 사정도 힘들어 내가 무한히 좋아하는 그림과 글씨를 못 그린 기간이였다. (55쪽)



 허구헌날 병치레요, 툭하면 비실대니, 바람 잘 날 없는 막내둥이입니다. 그러다가 육학년 때, 저한테도 마마가 찾아와서 여러 날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서 밥 한 술 못 뜨며 열이 잔뜩 올라 앞뒤 못 가리며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일기장 숙제가 걱정되어(일기를 안 쓰면 학교에서 얻어맞았으니까) 어머니한테 애타게 부탁을 했고, 어머니는 저 대신 일기장을 채워 줍니다.

 “1987년 5월 27일 수요일 날씨 맑음. 종규에게 - 몸이 약한 너의 모습을 볼 때, 엄마는 걱정이 많이 된단다. 선생님의 열의에 감동도 되고, 숙제를 하느라 잠도 모자라겠지? 그렀지만 열심히 노력을 해야지 종규야, 힘 내도록 열심히 먹고 열심히 운동도 해야지? 너의 편식은 너무 심해져가니 어떻게 하면 좋겠니? 엄마는 몹시 걱정이란다. 아들아, 노력하는 성실한 어린이가 돼길…….”


..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 가슴이 뛰도록 기쁜 것이 더 대단한 재주일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공감하는 가슴을 갖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168쪽)


 제 머리가 닿는 대로 되새겨 보면, 어머니는 언제나 일하는 어머니였고, 저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고 훨씬 늦게 잠들면서도 쉬지 않고 일손을 놓지 않아서 집안에 있을 때는 딴짓을 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놀 수가 없었습니다. 어영부영 시간죽이기 하며 놀다가 문득문득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가 생각이 나 매무새를 바로잡게 됩니다. 밖에 나가 동무들하고 놀다가도 어머니가 생각이 나고 아무 허튼 짓을 하면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국민학생 때까지는 호되게 구두주걱질을 받아서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만, 여느 때에는 늘 말없이 부업 일감을 한 아름 떠안고서는 바삐 지내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달이 틈틈이 떨어지는, 저와 형 독후감 숙제나 만들기 숙제를 무던히 도와주었습니다. 반공 글짓기, 과학 만들기, 저축 감상문 따위를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해내겠으며, 스무 가지 서른 가지 식물채집을 도시에서 어찌 해내겠습니까. 방학 때 탐구생활 라디오듣기 숙제를 놓치게 되어도(밖에 나가 노느라) 어머니는 집에서 혼자서 듣고서는 찬찬히 알려주셨습니다. 이때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개집니다. 낮은학년(2학년) 때에는 그림일기 숙제를 어머니가 그려 주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어머니 자국을 옛 일기장이며 쪽지며 원고지며 돌아볼라치면, 맞춤법도 틀리고 하셨지만, 글씨는 참으로 반듯하고 그림도 빛느낌이며 어우러짐이며 참 곱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어머니가 교과서 겉에 쓴 글씨(달력으로 교과서를 싸서 겉에 쓴 글씨)며, 공책에 적은 이름이며, 그림일기에 그려 준 어머니 그림이며를 보면서, “종규 어머니가 글씨를 참 잘 쓰시는구나, 그림을 참 잘 그리시는구나” 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난 언제쯤 어머니처럼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공부끈을 바지런히 붙잡습니다.








 (3) 《나의 수채화 인생》에 담긴 이야기


 2005년에 한 번 읽었던 《나의 수채화 인생》을 세 해 만에 집어들어서 또 한 번 읽습니다. 마침, 인천 동구 화평동에 자리한 박정희 할머님 ‘평안수채화의 집’을 찾아뵈어 말씀을 듣고 사진도 찍고 여러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사들고 읽던 때에는, 여든 넘기신 할머님이 참 곱게 늙으시면서 당신 좋아하는 그림을 저렇게 즐기시는구나 하고만 여겼습니다. 할머님 아버님인 박두성 선생님 삶과 발자국만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할머님을 몸소 뵙고 당신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우리 어머니가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그리고, 한글 점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장님들 마음눈을 틔워 준 박두성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훌륭하지만, 박정희 할머님은 또 할머님대로 훌륭한 대목이 있는데, 미처 못 보고 있었다고 느낍니다. 열 평이나 될까 싶은 조그마한 집에 스물세 식구가 다닥다닥 모여서 살아야 하는 살림을 꾸리면서도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즐겁게 살았다’고 할 만큼 알뜰히 보내온 당신 발자국을 느끼면서, 당신 어머니 처녀 적 사진부터 해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하면서 그때 그 이야기들을 올올이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놓고 우리들한테 차곡차곡 들려주면서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모습을 보면서, ‘남들은 다 쓰레기라고 버리지만 나는 못 버린다’고 하는 천쪼가리 종이쪼가리를 주워모아서 멋진 손가방을 만들어내어 쓰고 있다면서 보여주실 때,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면서 무릎을 칩니다. 사람들이 인천 동구 화평동을 한낱 ‘세숫대야 냉면거리’로 잘못 알리고 잘못 알면서 찾아가는 발걸음이 어떻게 뒤틀려 있는가를 여태 못 깨닫고 있었네 하면서 뒷통수를 칩니다.


.. 내게 있어서 그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마법과도 같다 ..  (185쪽)


 나이가 들어갈수록 당신 스스로도 당신 그림이 더욱 나아진다고 느끼신다는 박정희 할머님. 앞으로 백 살까지 꾹꾹 눌러채우며 몸 튼튼히 마음 튼튼히 살아 주셔야지요. 아니, 꼭 백을 채우기보다는 백하나나 백둘이 더 나으려나.


.. 소원컨대 부디 건강하게 즐겁게 지내다가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으면 한다. 그래서 같이 살아 주고 보살펴 준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에게 고마웠다고 인사하며 잠들고 싶다 ..  (216쪽)


 인천시는 스무 해쯤 앞서 진작에 송암 박두성 선생 살던 율목동 집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따지는 목소리는 인천시장이나 인천시 공무원 귀에 가 닿지 않았고, 귓등에 살짝 스친 목소리는 모기 앵앵 소리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화평동 박정희 할머님 그림집(평안수채화의 집)마저도 ‘재개발해야 하니 도장 찍어 달라’고 하는 판입니다. 화평동 한켠에 쉰 해 가까이 ‘평안의원’ 간판을 걸고 있던 이 집을, 그 뒤로는 ‘평안수채화의 집’ 간판으로 바뀐 채 처음 모습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집을, 인천시에서는 문화재로도 동네 삶터로도 바라보는 눈이 없습니다. 인천 바깥에서는 ‘그림 할머니’며 ‘육아일기 할머니’며 높이 사고 훌륭하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나, 할머님뿐 아니라 할머님 아버님 삶과 발자취를 높이 기리고 모시고 있으나, 인천에서 문화 행정을 하는 이들은 눈이 멀었습니다. 역사 행정을 하는 이들은 귀가 먹었습니다.

 하긴, 함세덕 선생 생가가 버젓이 있음에도 인천시는 이 집을 사들여서 고유한 문화유적지로 삼지 않고 있는 판인데(지금 이 집은 소주방으로 쓰입니다). 우리 나라 첫손 꼽는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 발자국도 살려 놓고 있지 않는 터인데.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일장기 지운 사건(손기정 님 마라톤 우승)’을 일으킨 사진부기자이자 한국 사진밭을 처음으로 개척한 신락균 선생 기리는 어떤 것 하나 없는 형편인데. 여기에다가 ‘존슨 별장’을 엉터리로 되살리려 하고, ‘만국공원(자유공원)’도 패키지관광코스로 까뭉개는 재생사업을 하려 하는 가운데, 인천 서민 오랜 땀방울과 피눈물이 서린 배다리 골목길을 한꺼번에 날려 없애려고 하는 인천시이니, 말 다한 셈인가요. ‘자유공원’이 아닌 ‘만국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아닌 함세덕, 고유섭, 신락균, 박두성, 현덕, 조봉암 같은 분들 동상이 서야 할 텐데, 참말로.

 역사가 있어도 역사를 보지 않고, 문화가 있어도 문화를 느끼지 않고, 주민 삶이 있어도 함께 살려고 하지 않으니, 배다리이든 박정희 할머님 ‘수채화 인생’이든, 몇 해 지나지 않아, 어쩌면 2014년 아시안게임을 맞이하여, 티끌 하나로도 남지 않고 갈갈이 찢겨진 채 땅속에 깊이깊이 파묻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4341.3.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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