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9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이제 9월호 글을 한참 여미는데

문득 떠올라서 뒤늦게 걸쳐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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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4. 타다



  몇 살 적 일인지 떠오르지 않지만 꽤 어릴 적이었습니다. 한창 부엌일로 바쁜 어머니가 저를 부릅니다. 두 손 가득 반죽이 묻은 어머니는 입으로 저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저기, 밀가루 좀 가져와.” 어머니 말대로 밀가루 담긴 자루를 찾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한 마디 보탭니다. “새것 타지 말고, 쓰던 것 옆에 있어.” 우리는 입으로 말할 적에 임자말을 으레 건너뛰고, 꾸밈말도 잘 안 넣기 마련입니다. 글로만 적어 놓는다면 “새것 타지 말고 쓰던 것 옆에 있어”라 할 적에, 사이에 쉼표조차 안 넣으면 도무지 뭔 소리인가 알쏭달쏭할 만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말할 적에는 높낮이랑 밀고당기기를 하면서 소리를 내니, 이 말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저한테 심부름을 시킨다면서 살짝 곁들인 한 마디 ‘타다’는 아마 그때 그 자리에서 처음 들은 낱말 쓰임새였을 테지만,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타다 1 ← 화재, 연소, 소각, 전소, 발화, 변하다, 변색

타다 2 ← 승차, 탑승, 등산

타다 3 ← 연주

타다 4 ← 선천, 태생, 선천적, 수령, 수취

타다 5 ← 조합, 혼합, 배합

타다 6 ← 부착, 영향, 당하다

타다 7 ← 분리, 개봉, 절개, 절단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타다’라는 한국말이 여러 갈래로 나옵니다. 우리는 그냥그냥 ‘타다’를 말하면서 살 테지만, 막상 ‘타다’는 한 낱말이 아닙니다. 이런 ‘타다’가 있고 저런 ‘타다’가 있어요. 소리도 모습도 같으나 쓰임새나 뜻이나 결이 사뭇 갈리는 온갖 ‘타다’가 있습니다.


  “새것 타지 말고”라 이야기한 어머니는 ‘타다 7’, 그러니까 ‘새것을 뜯지 말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개봉’쯤 되겠지요.


  어머니 심부름말을 듣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때에 “박을 타는” 대목이 나와요. 어릴 적에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타다’라는 낱말을 썩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이러다가 아이들하고 모깃불을 태우면서, 또 아이들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저자마실을 다녀오면서, 아이들은 어떤 ‘타고난’ 아름다운 빛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밝히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또 아이들이 악기를 ‘타’면서 저마다 싱그러이 노래를 베푸는가 하고 즐기면서, 또 아이들하고 매실물을 누리는 이 여름에, 게다가 “여름을 타”고 “가을을 타”고 “흐름을 타”는 우리 삶을 곱씹다가, 이 ‘타다’가 참 재미나구나 하고 깨달아요.


  불이 나기에 탑니다. 버스에도 비행기에도 탑니다. 때로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꿈을 꿉니다. 제 등에 탄 아이들은 키가 커졌다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찻물을 그릇에 타서 마시고, 우리 아이들은 저한테 돈을 타서 씁니다.


  이것 참, 이 ‘타다’라는 낱말은 어느 자리 어느 살림에서 비롯했을까요.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롭게 쓰임새를 넓히는 이 낱말에는 어떤 힘이, 숨결이, 사랑이, 꿈이, 이야기가, 땀방울이, 눈빛이, 즐거움이, 보람이, 웃음하고 눈물이 서렸을까요.


 타는문 ← 승차문

 타고내리는문 ← 승하차문


  아직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타는문’ 같은 낱말이 안 실립니다. 우리가 눈여겨볼 수 있다면, 이제 어디를 가나 버스 앞쪽에 ‘타는문’이란 낱말이 적힌 모습을 알아챕니다. 참말로 버스마다 ‘타는문’이나 ‘내리는문’이라 적힌 지 오래되었어요. 이런 말씀씀이는 누가 시켜서 퍼지거나 자리잡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들 손길에서, 버스를 타고내리는 사람들 마음길에서, 저절로 태어나서 시나브로 뿌리를 내리는 말씨입니다.


  ‘타는문’이란 낱말처럼 ‘타는곳’이란 낱말도 제법 가지를 뻗습니다.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러 갈 적에 알림말로 으레 ‘타는곳’ 같은 말을 씁니다. 아직 ‘승강장’ 같은 한자말이나 ‘플랫폼’ 같은 영어로 알림말을 쓰는 데가 있기도 하지만, ‘타는곳’이란 말을 한결 널리 쓰는구나 하고 느껴요.


 타는곳 ← 승강장, 플랫폼


  ‘타는’을 두고 더 생각해 볼게요. 자동차를 타는 분들은 으레 “타는 맛이 있어야지.”처럼 말하곤 합니다. 똑같은 뜻으로 “승차감이 있어야지.” 하고도 말합니다.


 타는맛 ← 승차감


  말을 새로짓는 일이란 쉽습니다. 말을 하는 그대로 우리 삶을 드러내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즐겁게 주고받으면 되어요.


  이제는 버스마다 ‘타는문·내리는문’이라 글씨를 적어 넣습니다만, 처음에 이 글씨를 적어 넣을 적에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안 어울린다고 여긴 분이 제법 있는 줄 압니다. 쉬운 한국말을 쓰면 오히려 헷갈리거나 어렵다고 하는 목소리가 예전에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타는곳’ 같은 말까지 어느새 번집니다. 흐름을 타지요. 쉽게 말을 하고 글을 적으니 그야말로 쉽고 좋다고 느끼는 바람을 타지요. 어린이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같이 알아들을 만한 쉬운 말씨를 헤아리면서 쓰노라니, 참으로 즐겁고 어울리며 아름답네 하고 느끼는 기운을 탑니다.


  ‘타는맛’처럼 ‘타는멋’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고다니면서 ‘타는길’을 찾을 수 있고, 톱질을 하거나 칼질을 할 적에 ‘타는길’을 꼼꼼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매실을 설탕에 절이든 온갖 풀을 설탕에 절이든, 이렇게 절여서 물에 타서 누리는 마실거리를 놓고서 ‘타는길’을 생각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말타기를 즐깁니다. 말을 타서 ‘말타기’이든, 자동차를 타면 ‘차타기’가 되겠지요.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타기’입니다. 바람이나 물을 타면 ‘바람타기’나 ‘물타기’가 되어요. ‘물타기’란 말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재미나게 쓰지요.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살타기’를 잘 하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널빤을 바닷물에 얹어 ‘물결타기’를 하고, 겨울에는 ‘눈타기(눈길타기)’를 하면서 놀아요. 바다에서도 물결타기를 하지만,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며 ‘물결타기’를 하면서 놀 수 있어요.


  옷살림을 건사하던 어른들은 솜을 탔고, 실을 탔습니다. 어른들 곁에서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웁니다. 이러면서 어른들이 삶자리에서 조곤조곤 나누는 말을 온마음으로 배웁니다.


  우리 손을 타면서 살림이 정갈합니다. 책 하나는 여러 사람 손을 타면서 빛이 납니다. 도서관뿐 아니라 숱한 마을책집이며 헌책집은 사람들 손을 타는 책에 사람들 마음도 눈길도 타도록 징검돌이 되는, ‘마음타기 쉼터’인 셈입니다. 네 손길을 타고 이곳에 온 책은 제 손길을 타면서 아이들한테 흐릅니다. 이 흐름을 타고서 온갖 이야기가 자랍니다.


  이제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 볼까요. 저 별빛을 타고서 머나먼 누리로 마실을 떠날까요. 우리 눈을 타고 이곳에서 싹이 튼 이야기 한 자락이, 여러 사람들 손길을 타고서 골골샅샅 퍼집니다. 작은 씨앗 한 톨은 숱한 새랑 풀벌레를 타고서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저는 이 글자락에 제 걸음걸이를, 하루를, 살림꽃을 곱게 태워서 띄웁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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