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을 접속하면 궁금한 것이 많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따지고 싶습니다. 이쯤 되면 저는 ‘알라딘 오지랖퍼’ 같습니다. 북플의 문제점에 관심 없는 분이라면 다른 회원분들의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궁금한 점. 북플이 알려주는 ‘활동이 많은 회원들’의 기준이 뭘까요?

 

북플은 틈만 나면 ‘활동이 많은 회원들’이 누구 있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받아보고 싶다면 친구 신청을 하라고 권합니다. 저는 이게 뜨면 삭제합니다. 이미 저는 하루에 ‘좋은 글’ 수십 편 이상 많이 읽고 있으니까요. 저는 북플 공지에 소개된 회원들이 얼마나 많이 활동하는지 궁금해서 한 번 확인해본 적이 있습니다. 친구 관계는 아니지만, ‘화재의 서재글’이 자주 오르는 회원뿐만 아니라 생소한 닉네임의 회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처음 보는 회원의 북플에 들어가 봤는데 글이 한 편도 없었습니다. 글은 없고,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은 책’ 소개만 잔뜩 있었습니다. 이 회원의 서재 블로그에 들어가 봤습니다. 당연히 ‘마이리뷰’와 ‘마이페이퍼’ 수가 ‘0’입니다. 글이 없는 회원을 ‘투명 회원’ 혹은 ‘유령 회원’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회원의 글을 보는 일이 편한 회원이 있을 겁니다. 그분들이 글 한 편 안 쓴다는 이유로 게으르다고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를 만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유령 회원처럼 활동했습니다. 처음엔 제 글이 다른 회원들에게 노출되는 상황이 낯설었습니다. 알라딘 서재가 제 생애 첫 블로그였거든요.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북플이 생각하는 ‘활동이 많은 회원들’의 기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은 책’을 입력하는 것은 개인을 위한 사소한 활동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입력된 책들이 공개된다고 해서 이게 다른 회원들과 교류하는 의미의 ‘활동’과 거리가 멉니다. 제가 생각하는 ‘활동이 많은 회원’은 생각날 때마다 쓰고 싶은 글을 남기고, 가끔 다른 회원들의 글을 읽으면서 댓글을 남기는 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서재지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글 한 편 남기지 않은데도 서재지수 상위권에 있는 회원이 있습니다. 그 회원의 북플에 보면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은 책’ 기록이 많습니다. 하루에 책 입력을 많이 하면, 서재지수가 많이 오르는 건가요? 저보다 꾸준히 글을 남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와 ‘친구’ 관계가 아니더라도 조용히 글을 남기시는 분들 몇몇 알고 있습니다. 비록 댓글 하나 없는 조용한 서재지만, 저는 이런 분이야말로 ‘활동이 많은 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서재지수를 많이 받아야 하고, 하루마다 순위가 달라지는 ‘서재의 달인’ 상위권에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끔 ‘서재글 0편’ 회원이 ‘서재의 달인’에, 그것도 중상위권에 포함된 경우가 있습니다. 글을 작성하지 않고, 북플만 열심히 활동하면 ‘서재지수’가 향상되는지 내일 서재지기님에게 물어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 궁금한 점. 별점 평가 없이 ‘읽은 책’ 회원 입력이 많아지는 현상이 과연 좋은 걸까요?

 

어떤 책을 검색하면 ‘읽고 싶어요’, ‘읽고 있어요’, ‘읽었어요’ 회원이 누구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별점평가를 하지 않아도 북플로 ‘읽었어요’를 입력 가능합니다. 이건 정말 획기적인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책에 ‘읽었어요’ 회원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책이 사람들이 많이 사고 읽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아시다시피 책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아보려면 직접 서점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거나 아니면 그 책을 읽은 분이 남긴 독자서평을 봐야 합니다. 모 알라딘 회원님은 알라딘 서재는 ‘좋아요’ 수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읽었어요’ 회원 수도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전에는 책을 팔기 위해서 출판사 직원들이 인터넷 서점 회원 계정을 만들어 100자평을 남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명 ‘서평 알바’라고 합니다. 이제는 무식하게 글을 남기지 않아도 됩니다. 출판사 직원은 북플 계정을 만들어 자사 해당 도서에 ‘읽었어요’를 입력합니다. 서평이 없는 책에 ‘읽었어요’ 회원 수가 꽤 많이 있으면, 이 책을 고르려는 독자는 ‘읽었어요’ 회원 수가 책에 대한 다른 독자들의 관심이 반영되었다고 믿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읽었어요’ 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회원은 아직 나오지도 않는 예약판매 도서를 ‘읽었어요’라고 입력했더군요. 당연히 그분의 별점 평가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저와 ‘친구 관계’였는데, 하루에 20권 이상의 책에 ‘읽었어요’를 누르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바로 친구 관계를 끊었습니다.

 

 

 

세 번째 궁금한 점. ‘친구 관계’를 먼저 끊은 회원이 다시 ‘친구 요청’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A’라는 닉네임의 회원이 저에게 먼저 ‘친구 요청’을 했습니다. 받아줬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난 뒤에 A 회원이 친구 관계를 끊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경우면, A 회원은 ‘친구’ 목록에서 ‘팔로잉’ 목록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면 저는 A 회원의 ‘팔로워’가 됩니다. 종종 이런 회원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상대방이 먼저 친구 관계를 끊으면 저도 미련 없이 ‘팔로잉’을 해제합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읽기가 싫어서 친구 관계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쓰는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아요’를 안 눌러도 됩니다. 이미 ‘좋아요’를 누른 상대방의 글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으면 글의 허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아요’를 취소하면 됩니다. 저는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친구 관계’를 먼저 해제한 회원이 다시 ‘친구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생기면 저는 난감합니다. 물론, 실수로 잘못 눌러서 ‘친구 관계’가 해제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사정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실수로 잘못 눌렀다고 해도 저로서는 그분이 제 글이 보기 싫어서 친구 관계를 해제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넘어갑니다. 그리고 제 북플 계정에 ‘팔로워’를 하면 ‘친구’ 수락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제 글의 분량은 깁니다. 북플에서 보기 불편합니다. A1 용지 한 장 반을 채우는 글을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면 시력이 나빠집니다. 그래서 제 글은 대충 봐도 괜찮습니다. 만약에 노래가 있는 동영상이 있는 글이 있으면, 그냥 노래만 듣고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글을 안 읽을 거면서 ‘친구 요청’하거나, 글 안 읽고 무조건 ‘좋아요’ 누르는 분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글을 보는 일에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저보다 서재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의 글을 읽거나 아니면 책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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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6-1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저도 궁금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더군요. 좀더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어요. ^^

cyrus 2016-06-14 19:05   좋아요 0 | URL
제가 사소한 것을 너무 꼼꼼하게 보는 성격이라서 북플에 글을 읽다 보면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자주 봅니다. 북플이 무조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시스템 자체 평가 점수를 매긴다면 60, 70점을 주고 싶습니다. ^^

syo 2016-06-14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북플의 발전을 위해 힘쓰시는 사이러스님의 노고ㅠㅠ 잘 읽었습니다.

별점 시스템에 관한 사이러스님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전 얼마전까지 제가 읽은 책에 별 다섯개와 별 한개를 제외하고는 별점을 안 매겼어요. 개인적으로 정말 이 책은 추천하거나 절대 이 책은 안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없었습니다. 2개 3개 4개는 너무 자의적이고, 심지어 내가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달라질 수 있는 건데, 강력추천과 강력비추를 제외한 별점들이 다른 분들께 객관적인 척도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리뷰를 동반한 별점이라면 다르겠지만 그냥 별점만 띡 매기는 것은 자기에게는 유용한 기록일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 크게 도움이 안된다고 봐요.

만약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고 알바를 고용해 읽었어요를 누르게 하는 식으로 조작을 할 마음을 품었다면 당연히 3개 4개 혹은 5개의 별점을 주라고 시킬텐데요. 왜 읽었어요만 누르고 별점은 안매기게 할거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cyrus 2016-06-14 20:19   좋아요 1 | URL
별점을 매기지 않는 회원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나쁘게 보는 제 주장이 문제점이 있어 보입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더 듣고나서 반대 의견이 더 나오면 두 번째 의견을 삭제해야겠습니다. 솔직한 의견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syo님 말씀처럼 별점을 주는 동시에 `읽었어요` 수를 올릴 수 있겠죠. 저는 별점 없이도 `읽었어요` 수를 높여서 조작이 가능하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너무 개인적인 의견이라서 두 번째 의견을 쓸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회원 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별점을 주지 않는 회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예전 알라딘 서재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플 시스템을 거부하는 심리 반응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알라딘 서재와 북플이 조화롭게 운영되는 분위기를 바라는데, 제 눈에는 알라딘은 북플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느낌이 듭니다. 옛날을 선호하는 제 입장이 `알라딘 보수주의자` 같군요. ㅎㅎㅎ

302moon 2016-06-1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 읽고 댓글 달기 위해 서재로 달려왔습니다. (북플에서 댓글 달기는, 저는 불편해서요.)
제가 종종 글을 읽고 ‘좋아요’ 누른다는 걸 알리려고요.(;) 단 한 편이라도 글은 끝까지 읽습니다.:)

cyrus 2016-06-15 13:01   좋아요 0 | URL
저도 북플에서 댓글 달 때 조금 불편합니다. 긴 글을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눈이 금방 피로감을 느껴요. 정독하지는 않지만, 스마트폰으로 글을 보는 것보다는 컴퓨터로 글을 봐야 집중력이 생겨요.

무해한모리군 2016-06-1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수로 좋아요를 취소해본적은 있지만 친구를 끊기는 어려울거 같은데 미스테리네요 ㅡㅡ 저는 딱히 별의견이 없어 댓글을 달기 어려운글도 잘읽었다는 뜻으로 좋아요를 누릅니다.

cyrus 2016-06-15 13:03   좋아요 1 | URL
상대방의 글이 정말 좋은데, 이 느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좋아요’만 누릅니다. 맨날 ‘OOO님의 글. 좋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댓글에 남기면 성의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수이 2016-06-14 2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점 매기는 건 좀 달리 생각해_ 아는 알라디너도 별점은 정말 주관적이다 싶어서 거의 매기지 않는다 하시더라고_ 나도 읽은 책에 정말 크나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예 별점 건너뛰고_

읽은 책이었는데 어떤 분의 북플에 그 책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좋아요_ 누르고 그러다보면 어떤 날에는 읽은 책 일고여덟 권이었던 적도 있어서 그런 거에도 좀 무심한 편_

북플 시스템이 궁금해서 나도 한번 그냥 막 좋아요_ 눌러봤더니 그날 서재지수인가 그거 1위 한 적 있음. 아 완전 개판이다_ 그날 깨달았어. 알라딘 계속 욕 먹지 않으려면 시스템 개편 좀 해봐야할 터인데 말야_

2016-06-14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5 13:07   좋아요 0 | URL
알라딘 제도의 허점 때문에 회원만 불이익을 받아요. 알라딘 제도에 문제 제기를 하는 건데 선량한 회원은 ‘내가 서재 활동을 하는 것에 문제가 있구나’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러면 알라딘 제도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속 시원하게 지적하기가 어려워요. 괜히 회원들 간의 오해를 빚고,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요.

sslmo 2016-06-14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정말 궁금한게 서재 방문자 수는 딸랑 2명 3명인데 좋아요 수는 열몇개씩 되는건 어쩐 일이랍니까?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별점은 후한 편입니다. 그리고 별점을 세개 미만으로 줘야한다 싶으면 그냥 페이퍼로 돌려 버리게 됩니다. 뭐 제가 주는 별점이 영향력을 미친다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 대한 예우 차원이랄까 그런 걸루다가요.
그리고 전 댓글 다는데 인색한 대신, 직장에서 댓글을 달려다 보면 호흡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걍 좋아요로 잘 읽었습니다 정도로 느낌 표현을 해요. 그 정도로 치어 업 정도는 삶의활력소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모두가 서재 지수에 뭔기 반영되는가 보군요?

cyrus 2016-06-15 13:13   좋아요 0 | URL
서재 방문자 수와 북플 방문자 수가 동일하게 카운터 되는지 잘 모르지만, 서재 방문자 수가 적게 나와도 북플 접속자 때문에 ‘좋아요’ 수가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무꾼님의 서재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면 서재지수가 향상됩니다. 몇 달 전에 글을 안 쓰고, 하루에 ‘좋아요’를 엄청 많이 누른 회원이 저보다 서재지수가 높게 나온 거 보고, 서재지기에 제기한 적 있었습니다. 서재지수를 없앴으면 좋겠어요. 서재지수에 반영되는 활동 내역의 기준이 모호하고, 나무꾼님 같은 분들이 ‘주간 서재의 달인’ 하위권에 있는 상황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주에 글 한 편씩 쓰는 회원이야말로 ‘활동이 많은 회원’으로 봐야하는데, 여기 알라딘 회사는 ‘좋아요’ 수를 많이 누르면 회원을 ‘활동이 많은 회원’으로 봅니다.

북프리쿠키 2016-06-1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에 궁금했던 이야기를 풀어서 논리적 혹은 감성적으로 차근차근 이야기할수 있는
내공이 돋보입니다. 또 배우고 갑니다

cyrus 2016-06-15 13:17   좋아요 0 | URL
어제 쓴 글은 추측과 편견에 의지해서 쓴 겁니다. 논리적으로 썼다고 보기 어려운 글입니다. 저보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

2016-06-14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5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6-1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친구 요청 오면 대부분 다 받아주는데,
갑자기 팔로잉으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네요.

오~ 궁금해라~

cyrus 2016-06-15 13:20   좋아요 0 | URL
회원이 먼저 저에게 친구 요청하는 상황이 많지 않아서, 팔로잉, 팔로워를 매일 확인하지 않습니다. 가끔 친구 요청한 분이 누군지 확인할 때, 팔로잉과 팔로워 상태도 같이 확인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친구’로 되어 있는 회원이 ‘팔로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Postumus 2016-06-1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경우는 알라딘 블로그를 늦게 시작해서 읽은 책에 비해 ˝읽었어요˝ 누른 책 수가 엄청 적은데, 이걸 몰아서 다 누르자니 좀 이상해보이고 해서 그냥 그 책이 뉴스피드에 뜰 때만 누르고 있습니닿

cyrus 2016-06-15 13:21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입력한 책 정보를 삭제합니다. 북플에 읽은 책, 읽고 싶은 책을 입력하는 내용을 ‘좋아요’도 하지 않습니다. 공들여 쓴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

보물선 2016-06-1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니아 점수, 순위 정말 궁금하더라구요.

cyrus 2016-06-15 13:22   좋아요 1 | URL
직원에게 물어봐도 ‘안알라줌’으로 일관합니다. 예스24는 스타지수 산정 방식을 공개했더라고요. 알라디너들이 예스24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2016-06-15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5 13:23   좋아요 1 | URL
싫다기보다는 그분들의 정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ㅎㅎㅎ

syo 2016-06-1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저는 거진 100권 되는 시집을 읽었지만 시 부문 마니아의 말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공력이 부족해서 그런걸까요?ㅜ

cyrus 2016-06-15 13:26   좋아요 0 | URL
syo님의 공력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알라딘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책을 안 읽어도 페이퍼에 책 표지만 올리면, 그 책 혹은 책을 쓴 저자 마니아지수가 받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읽고 써도 부실한 내용의 페이퍼를 쓴 회원의 마니아 지수보다 낮은 상황이 생깁니다.
 
10억 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 - 지질학자, 기록이 없는 시대의 한반도를 찾다
최덕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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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언제 만났더라?’ 바쁜 현대인은 며칠 전의 일도 깜박하곤 한다.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에 묻혀 며칠, 몇 달 전의 시간조차 기억에 붙잡아두기가 쉽지 않다. 다른 곳에선 수십억 년의 시간을 계산하며 과거를 캐는 사람들이 있다. 먼 과거에서 찾아온 화석과 암석의 연대를 추적하는 지질학자들이다. 그들이 아주 먼 과거를 알아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이테가 나무의 나이를 기록하듯이 자연은 언제나 시간의 기록을 남긴다. 분침과 시침이 일정하게 움직이듯이 지구에 수십억 년마다 움직이는 시계가 숨겨진 채 존재한다. 그 ‘시계’가 바로 암석이다. 지질학자들은 자연에서 그 시계를 발굴해 그동안 흐른 시간을 밝혀낸다. 암석에는 ‘지질학적 사건’이 일어났던 중요한 시간이 새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지질학자는 자연에서 일어난 지질학적 사건의 발생 시기와 상황 그리고 자연의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탐정과 비슷하다. 암석 속에 새겨진 기록이 ‘지질 수사(조사)’의 단서가 된다. 한편으로 지질학자는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최덕근 명예교수는 지질학자들만 누렸던 지구 시간 여행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10억 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은 우리가 사는 한반도 땅덩어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저자기 직접 목격한 국내 지질학 역사의 현장까지 살펴보는 ‘타임머신’ 같은 책이다.

 

지질조사의 결과는 지질도 하나로 정리된다. 그야말로 지질학자들에게 지질도는 각별하다. 그래서 지질도는 오랜 연구 노력 끝에 나온 연구 성과를 빛나게 해주는 ‘지질학의 꽃’이다. 지질도는 암석을 종류와 나이에 따라 구분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전국 방방곡곡마다 조금씩 말과 문화가 다르듯 암석도 다르다. 지역별로 정확히 분포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곳을 대표하는 암석들이 있다. 우리나라에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한 돌은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깊은 땅속에서 서서히 식으며 굳어진 돌이라 검은색 등을 띠는 결정의 크기가 크다. 그 결정들로 이뤄진 무늬가 화려하고 가공이 편리해 석재로 애용된다. 대리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형성된 석회암이 열과 압력을 받아 변한 암석이다. 과거 바다였던 지역에 대리암이 많은 이유다. 제주 하면 단연 현무암이다. 현무암은 땅속의 마그마가 화산 폭발로 인해 나오면서 이산화탄소 등 해로운 물질들이 빠져나간 뒤 굳어진 돌이다. 그 흔적이 현무암에 숭숭 뚫린 구멍들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도로변의 깎인 암석들엔 대개 수천만, 수억 년의 시간이 간직돼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반도엔 캄브리아기 이전부터, 고생대, 중생대 그리고 신생대까지 갖가지 나이의 암석들이 어울려 있다. 한반도는 거대한 지질학 교과서이다.

 

일반적으로 지질학 지식은 우리 생활에 직접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원 확보나 국토 개발 또는 환경 보존 등에 이용된다. 그러나 땅에 매장된 자원을 찾는 것보다는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또는 일어났던 자연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지구는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구 내부는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과정을 겪어서 현재와 같은 한반도의 모습에 이르렀을까 하는 내용이다. 과학적인 지질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태백산지구 지질도는 1961년에 만들어졌다. 이 지질도가 제작되는 데 걸리는 기간은 불과 4개월이다. 태백산지구 지질도는 과학적인 목적보다는 태백산 자원 분포를 확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보다 지질학 역사가 긴 영국에서는 완벽한 지질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과거 70년대 국민적 병리 현상이었던 ‘빨리빨리’ 문화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정확한 지질도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여전히 ‘빨리빨리’ 성과를 내려는 사회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세밀하게 암석을 관찰하고, 분석해야 하는 지질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점점 비좁아지는 취업 관문으로 인해 지질학자의 길을 걷으려는 젊은 세대가 많지 않을 것이다.

 

지질학자 양성이 시급해 보인다. 나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암석의 나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줄 아는 유능한 인력이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다. 지질학자는 지하자원의 위치를 찾아내는 보물 사냥꾼이 아니다. 지질학자는 지형의 역사를 파악할 줄 알고, 미래에 일어날 지형 변화까지 예측하는 시간 여행자다. 국내 지질학자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지하자원 혹은 싱크 홀이 있는지 찾고 있을 때, 외국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지구상의 대륙은 우리가 느낄 수는 없지만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뜨거운 지구 내부가 천천히 이동하는 탓에 겉가죽에 해당하는 대륙 역시 덩달아 움직인다. 대륙이 오랜 기간 꾸준히 움직이다 보면 서로 부딪치고 합쳐지기도 하는데 약 1억 년 후에는 한반도를 포함해 온 대륙이 모이게 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서로 만나 한 개의 땅덩어리가 된다. 그 결과 동해는 사라지게 되는데, 앞으로 1억 년 후의 일이라 다행이다. 지질학적 시곗바늘을 조금만 뒤로 돌리면 지구가 움직인 증거가 한반도 내륙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 시rPt바늘을 볼 줄 알고, 뒤로 돌리는 법을 아는 지질학자가 많아야 한다. 한반도의 단층 구조와 지층 안정성에 관한 연구와 예측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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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다닐때..지구과학을 아주 좋아했던 과목이었어요...지질학...이게 좀 매력있어요...천문학도 ^^..

cyrus 2016-06-13 21:46   좋아요 1 | URL
고등학교 과학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으로 나누어졌는데, 지구과학이 배우기 쉬웠어요. 나머지 과목은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았던 것 같아요. ^^

오거서 2016-06-12 2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질학자는 매년 일정한 수만큼 배출되고 있어요. 전국 대학을 통해서요. 외국에 유학하는 석박사도 적지 않아요. 그러나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서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 문제지요. 현실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진로를 변경한다는 거지요. 특히 국내에서 자연과학도가 연구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봐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 절대 부족하니까요. 현실적인 대안이나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바라는 바는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지질학이 참 인기 없는 학문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꿋꿋하게 공부하고 있는, 지질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견할 따름이에요.

cyrus 2016-06-13 21:49   좋아요 2 | URL
지질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까봐 걱정입니다. 지질학은 장기적으로 연구해야 성과가 나오거든요. 지질학 전공 학생들 입장에서는 진로 결정에 고민이 많을 거예요.

transient-guest 2016-06-14 0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질학도 참 대접을 못 받는 학문인 듯 합니다. 빅뱅이론에서 Sheldon Cooper가 언젠가 ˝Geology is not a science˝라고 외치곤 도망하는 scene이 있는데, 이걸 보면 미국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리도 중요한데도 말이죠.

cyrus 2016-06-14 18:19   좋아요 0 | URL
T-guest님의 인용이 아주 적절한대요. ㅎㅎㅎ 미국의 지질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영국 지질학 역사는 이 백년이라고 합니다. ^^;;
 

 

 

 

 

 

한때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시집의 서평/리뷰/독후감은 어떻게 써야 할까? 시집을 읽고 나서 그 느낌을 문장으로 옮길 때가 제일 어려웠다. ‘시가 좋다라는 표현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유려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 텍스트를 해석하거나 평가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렇다 보니 내가 시를 읽은 건지 아니면 분석하는 건지 혼동할 때가 있다. 별것도 아닌 시의 행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시 속에 시인이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발견한 무언가를 서평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시집을 덮는다. 이렇게 여러 번 읽다가 덮은 시집의 수는 지금까지 작성한 시집 서평의 수의 2배나 된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시인이 동료 시인의 시집에 남기는 발문이다. 시집의 발문은 시인과 그 작품에 대한 해설 역할을 하는 텍스트다. 그런데 시집의 발문은 왜 어려운 것일까? 오히려 시보다 시집의 발문이 더 난해하게 느껴진다. 시인들은 관심법을 터득한 특별한 사람 같다. 동료 시인의 마음을 꿰뚫어서 시가 이렇게 쓰였다는 식으로 소개하는 거 보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시 세 편만 선정해서 글을 쓰면 가까스로 A1 용지 한 장 분량 정도 채우는데, 시인들은 화려한 수사와 비평 방식 등을 총동원하면서 다섯 쪽 이상의 내용을 뽑아낸다. 나도 저런 관심법이 있으면 시집 서평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해본다.

 

시집 서평을 쓰는 방식을 찾으려는 고민은 정답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시집의 발문이 시집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무조건 도움을 주는 텍스트로 볼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똑같은 텍스트일지라도 독자들이 거기서 얻어내는 메시지는 저마다 다르다. 창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내적 자질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집착하면, 자신만의 색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활동이 제한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시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시를 자유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암기식 시 해석에 길든 학생은 시를 난해한 텍스트로 인식하게 되고, 창작자의 의도와 문제 출제자의 의도를 동일시하는 오류에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 출제자가 만든 네모난 테두리 속에 시가 갇혀버리는 순간, 텍스트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학생들은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한정된 시간 내에 빨리 찾아내야 한다.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문제) 위의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우울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2) 대립적 가치를 통해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3)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선명한 인상을 준다.

 

(4)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5) 배경 묘사를 통해서 화자의 정서를 암시하고 있다.

 

 

최승호 시인이 직접 이 문제를 풀었는데,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정답은 2번이다.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맞혔다고 해서 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를 못 맞혀서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시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도 교사들은 문제를 풀지 못한 학생을 공부가 부족한 학생으로 인식한다. 이건 정말 불행한 일이다. 잘못된 교육 방식이 당연한 차이를 기이한 차별로 만든다.

 

 

 

 

 

(사진출처: [우리가 맨날 풀었던 언어영역, 국어영역 문학 문제들. 정답이 도대체 뭔가요?]

<스브스뉴스> 2016년 6월 10일)

 

   

 

캐나다 출신의 비평가 노스럽 프라이는 시를 쓰도록 격려해서 유명 시인을 배출하는 것보다는 시에 대한 사랑을 먼저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가 시인의 원고지에 빠져나와 시집으로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독자의 몫이 된다. 독자의 상상력이 무한히 확장되는 즐거운 순간이다. 특히 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유쾌한 자유를 즐길 수 있다. 나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창작자의 텍스트를 함부로 개입해서 오독할 까봐 두려워했다. 말도 안 되는 정답을 찾아야 하는 문학 수업 시간에 대한 추억 덕분에 나는 텍스트를 너무 신중하게 대했다. 난 정말 바보처럼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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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6-1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기사를 보고 집에 가서 단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저 기사의 문제의식(정답을 강요하는 시 교육)에는 동감하지만 시 해석에서 저자의 해석이 유일무이한 권위인 양 말하는 기사의 어조가 불편했어요. 최승호 시인이 자기가 쓴 시에 대한 문제를 못 풀었다는 근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해석 중에 저자나 출제자의 의도가 우위를 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건 독자의 몫인 거죠. 시집 서평은 저도 항상 고민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봤자 제대로 리뷰 써본 건 한 번뿐이지만..

cyrus 2016-06-11 17:17   좋아요 0 | URL
뉴스 보도 방식의 문제점에 동감합니다. 뉴스가 독자들이 수능 문제를 푸는 과정까지 소개했으면 시인의 해석 권위에 대한 느낌이 덜 했을 겁니다.

저만 혼자 고민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님도 저와 같은 심정을 겪어본 적 있으시군요. 아무님만의 생각이 채워진 단상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

아무 2016-06-11 17:54   좋아요 0 | URL
집에 갔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못 쓸지도 모릅니다^^;; 그런 적이 많거든요.. 제가 처음 알라딘서재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이,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무조건 한 편 이상 쓴다였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서 엎은 적이 많습니다..ㅎㅎ

오거서 2016-06-11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니 국어시간에 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네요. 시를 낭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시를 즐길 수 있겠어요. 저 역시 바보처럼 시를 대해 왔군요.

cyrus 2016-06-11 17:19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하면 시 전문을 외우는 수업 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를 못 외우면 벌을 주고, 평가점수에 반영했습니다. 최악의 수업 방식입니다.

단발머리 2016-06-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 시집의 발문이 더 어렵다는 의견에 완전 동의합니다^^

cyrus 2016-06-12 18:08   좋아요 0 | URL
시가 이해되지 않으면 발문을 읽었는데, 오히려 시가 더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발문을 안 읽어요. ^^;;

yureka01 2016-06-1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시의 감상법을 망쳤죠..ㅠ.ㅠ
영원히 시와 멀어지게 한게 학교에서 시험출제용 시 배우는 것이었죠 ....

사실 국어선생님들도 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으니....

cyrus 2016-06-12 18:12   좋아요 0 | URL
한때 국어 교사를 장래희망으로 생각한 적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 시험 준비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학습법을 가르쳐야하는 교육 현실이 짜증났습니다.

수이 2016-06-1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시를 바보처럼 읽은 건 마찬가지인데_ 그래도 그때 문학수업때_ 들었던 시, 외웠던 시 덕분에 시에 대한 사랑이 조금씩 생겼어. 물론 방법은 바보 같았지만_

cyrus 2016-06-12 18:1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누님은 평소에 시집 많이 읽습니다. 누님이 준 시집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어요. ^^

방랑 2016-06-11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집을 읽고 서평을 쓰기가 어려웠어요.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물론 지금도요. 시집 뒤에 있는 동료 시인의 말도 그리 도움되는건지는 의문이에요, 마치 그들만의 언어처럼 또 다른 시가 되어버려서..

시에 대해서 한 가지 얘기해보고 싶은 것은 저작권에 대해서인데, 다른 갈래에 비해 시는 저작권 보호가 약한 것 같아요. 예전에 알라딘에서 친히 메일을 보내셨는데 북플에 올린 글 중 일부가 저작권 문제로 일부 발췌 글을 내려달라구요. 그런데 시는 한번도 문의가 없는 것 같아요. 시를 통째로 올리는 것은 내버려두면서 왜 소설의 일부나 인문서 일부는 발췌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요? 시는 아무도 안보고 돈도 안되기 때문일까요..

cyrus 2016-06-12 18:24   좋아요 1 | URL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발문이 도대체 누구 보라고 쓴 건지 모르겠어요. 특히 철학 용어를 써가면서 시를 접근하는 발문은 싫어합니다. 현학적 언어 때문에 독자들이 시를 어려워 합니다.

저는 시 전문을 인용하면 항상 시집 제목과 쪽수를 적습니다. 일반 도서의 문장을 인용할 때도 이 원칙을 지킵니다. 제가 예전에 출처를 안 밝히고 써서 표절 의심 받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오해가 풀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출처 표시의 중요성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시를 올바르게 인용하려면 출처를 밝혀야하고, 행과 문장 표현 같은 사소한 것도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행 구분이 잘못 배치된 시를 인터넷에 공유하고,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시집 제목을 밝힌 블로거는 많이 본 적 없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시집을 안 읽고, 인터넷에 떠도는 시를 긁어 모아서 인용하는거죠. 저는 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보는 느낌과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시를 보는 것 느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noboby여도 좋고, anywhere여도 그만이다

 

 

 

 

 

 

 

 

 

작년 헌책방에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번역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번역본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누구나 제목만 보면 프루스트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 뒤편에 소설 원제가 있습니다. ‘Rue Des Boutiques Obscures’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작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84년 한국출판공사에서 나온 번역본입니다. 펼쳐 보면 세로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제가 자주 가는 헌책방에 가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오래된 책이라서 새 주인을 만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 책을 책장으로 모셔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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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6-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이라고 할 만 하네요

cyrus 2016-06-11 16:35   좋아요 0 | URL
의외의 발견이었습니다. 알라딘에 없고, 아무도 모르는 책을 찾는 것이 헌책방의 묘미입니다. ^^

yureka01 2016-06-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제목에서 받는 뉘앙스 차이가 참 크네요.ㅎㅎㅎ

어두운 상점의 거리라니,,,의외네요....

cyrus 2016-06-11 16:39   좋아요 0 | URL
역자 입장에서 번역보다 제일 힘든 일이 제목을 정하는 일일 겁니다. 원작 제목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의역을 하거나 역자가 임의대로 제목을 정합니다. ‘obscure’라는 단어를 불어사전을 찾아봤는데, ‘무명의’, ‘이해하기 힘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김화영 교수는 ‘어두운’으로 옮겼어요.

북깨비 2016-06-11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출판된 세로 쓰기 책이라고 하시니까 어릴 때 부모님 책장에서 보던 세로쓰기로 된 문학전집이 기억이 나네요. 읽진 않고 말그대로 그냥 보기만 봤던.. ^^;; 양장은 양장인데 지금 생각하면 종이질은 뭔가 골판지 같은 느낌? 한 권 한 권 사전처럼 삼면으로 된 상자에 들어 있었던 거 같아요. 요즘처럼 고급 판형은 아니고요 그냥 한자가 나와서 어른이 되야 읽을 수 있나보다 생각하고 저는 어린이 전집만 팠지요. ㅎㅎ 뭔지도 모르고 헤세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수레바퀴 아래서를 펼쳐본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될 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전집이 언제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그냥 처분하시게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요. ㅠㅠㅠ 이 책 보니까 옛날 생각나고 그러네요.

cyrus 2016-06-11 16:4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 작가의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전집인데 총 12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데, 책이 너무 오래 돼서 책 전체가 누렇습니다. 다행히 이 책을 버리지 않고, 박스에 담아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어렸을 때는 책의 가치를 몰랐는데, 세계문학에 눈을 뜨면서부터 뒤늦게 알았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꺼내기가 힘든 상태입니다. ^^;;

alummii 2016-06-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cyrus 2016-06-11 16:44   좋아요 1 | URL
누구나 책을 좋아하게 되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


yamoo 2016-06-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프루스트의 주저 제목처럼 당당히 표지에 인쇄되어 있네요...ㅎㅎ
이런 옛날책이라니~ 좋은 발견 하셨네요^^

cyrus 2016-06-11 16:51   좋아요 0 | URL
저 책을 처음 본 순간, 프루스트 소설 요약본인 줄 알았습니다. ㅎㅎㅎ

sslmo 2016-06-13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저 님 서재 명`개썅 마이 리딩`보고 리썅이 떠올랐다나 어쨌다나~(,.)
혹, 그런 의도로 지으신건 아니겠죠?
암튼 전 개리와 길, 음악 들으러 갈랍니다여~^^

전 세로버전 잘 읽어요. 소싯적엔 대부분 세로 읽기가 대세였죠~^^
암튼, 전 님 여러가지 의미루다가...
넘 멋진거 같아요~^^

cyrus 2016-06-13 21:52   좋아요 0 | URL
서재 이름은 아무도 안 볼 줄 알았는데 나무꾼님이 알아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ㅠㅠ

리쌍의 음악은 좋아하는데 가수와 전혀 관련 없어요. 인터넷 은어 `개샹마이웨이`에서 따온 겁니다. 뜻이 `남들이 뭐라 해도 내 갈 길 가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
 

 

 

길에 새끼 고양이가 힘없이 쓰러져 있더라.”

 

지나가 버린 수요일. 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내게 고양이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는 내가 오기를 엄청 기다렸는지 한동안 입에 꾹 담았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집 건너편에 어린이집이 있다. 그 날 오후에 어머니가 어린이집 앞을 지나가다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소리 나는 곳을 가봤더니 봉고차가 세워진 어린이집 울타리 쪽에 축 늘어진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 다리 부분만 하얗고, 몸 전체가 검은색 빛깔을 띤 고양이였다. 어미를 애절하게 부르는 새끼 고양이가 불쌍해서 어머니는 우유를 담은 작은 접시를 내놓았다. 새끼 고양이를 처음 발견한 지 한 시간 후에 어머니는 고양이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확인해봤다. 새끼는 우유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새끼 고양이의 상태로 봐서는 곧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농담으로 새끼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건강하게 키우자고 말했다. 내가 새끼를 직접 보니까 몸 상태가 생각보다 아주 심각했다. 새끼 크기가 남성 성인의 주먹만 했다. 새끼는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햇살과 공기를 마음껏 느끼는 듯한 자세였다. 그렇게 처절하게 바짝 올리던 고양이의 머리가 점점 바닥 쪽으로 내려갔다. 새까만 털 색깔 때문에 새끼가 눈 뜬 건지 감은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살짝 새끼의 머리를 건드려봤다. 새끼는 내가 가까이 오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새끼에게 더 이상 머리를 들 정도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받으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새끼를 살리고 싶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죽어가는 새끼를 그대로 놔두고 갈 수 없었다. 그래도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찾으러 다시 올 거로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제발 어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 집은 1층이다. 생각날 때마다 발코니 창문 쪽으로 가서 새끼 고양이가 발견된 장소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저녁에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봉고차 밑으로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그 고양이가 새끼를 찾으러 온 어미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새끼 고양이는 내가 마지막에 봤던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새끼 머리 주변에 개미 몇 마리가 기어 다녔다. 아마도 어미는 병든 새끼를 키울 수 없어서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전날 내가 봤던 얼룩무늬 고양이가 새끼의 진짜 어미라면, 새끼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그곳을 다시 찾아왔을 수 있다.

 

나는 새끼 고양이 사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120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콜센터 상담원에게 사체를 수거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길거리에 로드킬당한 개, 고양이 사체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지역 번호+120’으로 전화하면 된다. 사체가 있는 장소 위치나 주소를 정확히 알려주면 상담원이 해당 구청으로 바로 접수한다. 그러면 구청 소속 담당 직원들이 사체를 수거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물을 각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직접 사체를 땅에 묻기도 한다. 그런데 동물 사체를 땅에 묻는 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적발될 경우, 벌금을 내야 한다. 사체에 질병을 유발하는 세균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사체에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

 

 

 

 

 

 

 

 

 

 

 

 

 

 

 

 

 

산속에 동물 사체를 발견하면, 그대로 놔두면 된다. ‘자연의 장의사들이 사체 부패를 돕는 역할을 한다. 사체는 송장벌레, 딱정벌레, 구더기가 좋아하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우리는 사체 주변에 달라붙은 구더기나 동물들을 혐오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즐거운 생명의 축제다. 다른 생명의 죽음은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삶의 영양분이 된다. 만약에 송장벌레와 구더기가 너무 싫어서 모조리 박멸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과연 우리는 구더기 없는 깨끗한 세상을 살게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썩지 않은 동물 사체 그리고 인간의 시체가 많아진다. 사실 인간은 구더기, 송장벌레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남긴 쓰레기, 그리고 죽으면 남게 될 육신을 그들이 뒤처리해주니까.

    

 

 

 

 

 

 

 

 

 

 

 

 

 

 

 

 

 

인간도 언젠가 죽는다. 죽음 앞에 마주치면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래서 세월의 힘을 받으면서 생긴 신체 변화를 느끼면 한숨을 푹 쉬거나 애써 잊으려고 한다.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타인의 약점마저 불편하게 느낀다. 이는 차별과 억압, 그리고 혐오라는 감정으로 형성된다. 옛날 의학 교수는 인체 해부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옛날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가 발견한 해부학 지식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레노스 해부학 지식의 결함이 많았다.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만든 엉터리 지식을 의학 교수는 답습하고,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기독교 중심의 유럽 사회에서 인체 해부는 종교 규율을 어기는 금기 행위였다. 합법적으로 시체에 손을 대고 해부하는 일은 비천한 미용사들의 몫이었다. 미용사가 시체의 배를 가르면, 의학 교수는 해부한 시신에 지휘봉을 가리키면서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인체 해부를 혐오하는 의학교수의 마음속에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이 컸을 것이다. 의학교수의 원초적 혐오는 차별이 되어 시체를 해부하는 일을 맡은 미용사의 존재를 배제했다. 이로 인해 해부 경험이 많은 미용사가 외과 의사가 되는 일이 드물었다. 의사들은 의사 일을 겸하는 미용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혐오가 차별로 변형되는 위험한 감정은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 깊게 내재화되어 있다. 시체를 대할 때, 그리고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시체 앞에 벌벌 떨면서 공포심을 느끼는 자는 시체를 정면으로 대하는 자를 혐오하고 차별한다. 사람들은 직원들이 동물 사체를 보신용으로 해먹거나 식당에서 판매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편견이다. 현행법상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 사체는 생활폐기물로 분류된다. 동물 사체 수거 직원들이 폐기물을 보신용으로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근거 없는 편견은 궂은일을 하는 직원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처럼 인간은 혐오라는 감정에 쉽게 휘둘려서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타자를 차별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믿는다. 혐오는 차별을 만들어내는 위험한 감정의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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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6-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역번호120 알아둬야 겟네요.
사드의 유언은 자신의 시체를 뭍지말고 버리라고 했는데, 본받고싶은 유언이었습니다.

시체를 산에 놔두면 자연이 알아서 거두어가거든요 ^^

cyrus 2016-06-11 10:45   좋아요 0 | URL
사드가 네크로필리아를 위해서 큰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요? ㅎㅎㅎ

‘지역번호 128’으로 전화해도 되는데,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래서 120을 눌렀는데, 통화 연결되었습니다. ^^

표맥(漂麥) 2016-06-1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역 번호 120. 기억하겠습니다.^^

cyrus 2016-06-11 10:46   좋아요 0 | URL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동물 사체를 발견하면 ‘누가 치우겠지?’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럴 때 120으로 전화하면 됩니다. ^^

페크pek0501 2016-06-1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0을 누르는 것, 배워 갑니다. 몰랐어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동물이 가엾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cyrus 2016-06-11 10:50   좋아요 0 | URL
동물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이 아픕니다. 왠지 모르게 죄책감도 느낍니다.

yureka01 2016-06-1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견 유기묘들이 너무 많아요..아고...그것들도 다 생명인데.....

cyrus 2016-06-11 10:53   좋아요 1 | URL
최근 뉴스에서 동물 보호소가 부족한 국내 실정을 보도하더군요. 저도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정말 끝까지 보살필 자신이 없어서 키우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책 읽느라 움직이기 귀찮은 성격의 사람은 동물과 같이 놀지 못해요. 반려동물을 두 마리 이상 보살피는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

찔레꽃 2016-06-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마나님께서 그 고양이를 봤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봤어요. 음.................................

cyrus 2016-06-11 10:57   좋아요 0 | URL
멀쩡한 새끼 고양이는 어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병든 상태가 아니라면 어미가 새끼를 데리러 다시 온다고 합니다. 수요일에 본 새끼 고양이는 딱 봐도 허약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의 새끼를 만나면 갈등이 됩니다. 보살펴주고 싶은데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 같고, 그냥 모른 척 하고 가면 죄책감이 들어요.

yamoo 2016-06-1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 정보네요~! 저두 배워 갑니다..ㅎ

파트라슈 2016-06-11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기된 개나 고양이 구조해달라고 119에도 전화 많이 하는데 고양이 새끼같은 경우 멀쩡하게 어미가 새끼쳐서 잘 기르고 있는 것을 괜히 철없는 사람들이 구조해달라고 119전화해서 사람들이 손으로 건드려놓으면 고양이 본능상 자기새끼들한테서 인간들 냄새 난다고 물어죽여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나 고양이 놔두면 그냥 알아서 다 잘 살아갑니다. 유기견이나 들고양이도 얼마든지 도시에서 산에서 들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일일히 모두 관리하고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 불쌍해보일진 몰라도 개나 고양이 자신들의 입장에선 새끼가 도시의 시궁창에서 태어나 자라는게 이상할 것도 없죠. 그냥 그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다만 들고양이나 유기된 개가 사람한테 위험할수도 있고 전염병의 매개체가 될 수 있으므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한 관찰과 관리는 필요하긴 하죠. 그리고 하루빨리 개나 고양이를 도축법에 포함시켜 개나 고양이의 도축도 법적으로 규제되고 관리되어야 합니다. 먹지 마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왕 먹을거면 법적으로 확실히 규제해서 위생적으로 먹는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cyrus 2016-06-12 18:28   좋아요 0 | URL
저도 멀쩡한 상태의 새끼 고양이를 어미 없다고 해서 몰래 집으로 데려오는 것에 반대합니다. 사람들이 새끼가 귀여워서 키우고 싶어하는데 다 자랄 때 유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고양이의 삶을 망치는 것입니다. 파트라슈님 말씀처럼 그냥 놔두는 것이 좋습니다.

孤로운늑대 2016-06-26 11:40   좋아요 0 | URL
˝ 먹지 마라고는 할 수 없으니...˝
먹지말라고 할 수도 있지요. 복날 꼭 개나 닭을 먹어야 하나요? 나는 채식주의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개를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하긴 고양이를 잡아먹는 미친 인간들도 있으니...
타협안 => 개고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제발 때려잡지는 맙시다. 여러분이 식인종에게 잡혔을 때 몽둥이로 때려죽여야 맛있다고 무작정 패거나 산채로 뜨거운 물에 끓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