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시집의 서평/리뷰/독후감은 어떻게 써야 할까? 시집을 읽고 나서 그 느낌을 문장으로 옮길 때가 제일 어려웠다. ‘시가 좋다라는 표현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유려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 텍스트를 해석하거나 평가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렇다 보니 내가 시를 읽은 건지 아니면 분석하는 건지 혼동할 때가 있다. 별것도 아닌 시의 행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시 속에 시인이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발견한 무언가를 서평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시집을 덮는다. 이렇게 여러 번 읽다가 덮은 시집의 수는 지금까지 작성한 시집 서평의 수의 2배나 된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시인이 동료 시인의 시집에 남기는 발문이다. 시집의 발문은 시인과 그 작품에 대한 해설 역할을 하는 텍스트다. 그런데 시집의 발문은 왜 어려운 것일까? 오히려 시보다 시집의 발문이 더 난해하게 느껴진다. 시인들은 관심법을 터득한 특별한 사람 같다. 동료 시인의 마음을 꿰뚫어서 시가 이렇게 쓰였다는 식으로 소개하는 거 보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시 세 편만 선정해서 글을 쓰면 가까스로 A1 용지 한 장 분량 정도 채우는데, 시인들은 화려한 수사와 비평 방식 등을 총동원하면서 다섯 쪽 이상의 내용을 뽑아낸다. 나도 저런 관심법이 있으면 시집 서평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해본다.

 

시집 서평을 쓰는 방식을 찾으려는 고민은 정답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시집의 발문이 시집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무조건 도움을 주는 텍스트로 볼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똑같은 텍스트일지라도 독자들이 거기서 얻어내는 메시지는 저마다 다르다. 창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내적 자질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집착하면, 자신만의 색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활동이 제한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시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시를 자유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암기식 시 해석에 길든 학생은 시를 난해한 텍스트로 인식하게 되고, 창작자의 의도와 문제 출제자의 의도를 동일시하는 오류에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 출제자가 만든 네모난 테두리 속에 시가 갇혀버리는 순간, 텍스트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학생들은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한정된 시간 내에 빨리 찾아내야 한다.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문제) 위의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우울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2) 대립적 가치를 통해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3)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선명한 인상을 준다.

 

(4)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5) 배경 묘사를 통해서 화자의 정서를 암시하고 있다.

 

 

최승호 시인이 직접 이 문제를 풀었는데,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정답은 2번이다.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맞혔다고 해서 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를 못 맞혀서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시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도 교사들은 문제를 풀지 못한 학생을 공부가 부족한 학생으로 인식한다. 이건 정말 불행한 일이다. 잘못된 교육 방식이 당연한 차이를 기이한 차별로 만든다.

 

 

 

 

 

(사진출처: [우리가 맨날 풀었던 언어영역, 국어영역 문학 문제들. 정답이 도대체 뭔가요?]

<스브스뉴스> 2016년 6월 10일)

 

   

 

캐나다 출신의 비평가 노스럽 프라이는 시를 쓰도록 격려해서 유명 시인을 배출하는 것보다는 시에 대한 사랑을 먼저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가 시인의 원고지에 빠져나와 시집으로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독자의 몫이 된다. 독자의 상상력이 무한히 확장되는 즐거운 순간이다. 특히 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유쾌한 자유를 즐길 수 있다. 나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창작자의 텍스트를 함부로 개입해서 오독할 까봐 두려워했다. 말도 안 되는 정답을 찾아야 하는 문학 수업 시간에 대한 추억 덕분에 나는 텍스트를 너무 신중하게 대했다. 난 정말 바보처럼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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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6-1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기사를 보고 집에 가서 단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저 기사의 문제의식(정답을 강요하는 시 교육)에는 동감하지만 시 해석에서 저자의 해석이 유일무이한 권위인 양 말하는 기사의 어조가 불편했어요. 최승호 시인이 자기가 쓴 시에 대한 문제를 못 풀었다는 근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해석 중에 저자나 출제자의 의도가 우위를 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건 독자의 몫인 거죠. 시집 서평은 저도 항상 고민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봤자 제대로 리뷰 써본 건 한 번뿐이지만..

cyrus 2016-06-11 17:17   좋아요 0 | URL
뉴스 보도 방식의 문제점에 동감합니다. 뉴스가 독자들이 수능 문제를 푸는 과정까지 소개했으면 시인의 해석 권위에 대한 느낌이 덜 했을 겁니다.

저만 혼자 고민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님도 저와 같은 심정을 겪어본 적 있으시군요. 아무님만의 생각이 채워진 단상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

아무 2016-06-11 17:54   좋아요 0 | URL
집에 갔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못 쓸지도 모릅니다^^;; 그런 적이 많거든요.. 제가 처음 알라딘서재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이,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무조건 한 편 이상 쓴다였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서 엎은 적이 많습니다..ㅎㅎ

오거서 2016-06-11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니 국어시간에 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네요. 시를 낭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시를 즐길 수 있겠어요. 저 역시 바보처럼 시를 대해 왔군요.

cyrus 2016-06-11 17:19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하면 시 전문을 외우는 수업 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를 못 외우면 벌을 주고, 평가점수에 반영했습니다. 최악의 수업 방식입니다.

단발머리 2016-06-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 시집의 발문이 더 어렵다는 의견에 완전 동의합니다^^

cyrus 2016-06-12 18:08   좋아요 0 | URL
시가 이해되지 않으면 발문을 읽었는데, 오히려 시가 더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발문을 안 읽어요. ^^;;

yureka01 2016-06-1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시의 감상법을 망쳤죠..ㅠ.ㅠ
영원히 시와 멀어지게 한게 학교에서 시험출제용 시 배우는 것이었죠 ....

사실 국어선생님들도 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으니....

cyrus 2016-06-12 18:12   좋아요 0 | URL
한때 국어 교사를 장래희망으로 생각한 적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 시험 준비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학습법을 가르쳐야하는 교육 현실이 짜증났습니다.

수이 2016-06-1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시를 바보처럼 읽은 건 마찬가지인데_ 그래도 그때 문학수업때_ 들었던 시, 외웠던 시 덕분에 시에 대한 사랑이 조금씩 생겼어. 물론 방법은 바보 같았지만_

cyrus 2016-06-12 18:1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누님은 평소에 시집 많이 읽습니다. 누님이 준 시집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어요. ^^

방랑 2016-06-11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집을 읽고 서평을 쓰기가 어려웠어요.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물론 지금도요. 시집 뒤에 있는 동료 시인의 말도 그리 도움되는건지는 의문이에요, 마치 그들만의 언어처럼 또 다른 시가 되어버려서..

시에 대해서 한 가지 얘기해보고 싶은 것은 저작권에 대해서인데, 다른 갈래에 비해 시는 저작권 보호가 약한 것 같아요. 예전에 알라딘에서 친히 메일을 보내셨는데 북플에 올린 글 중 일부가 저작권 문제로 일부 발췌 글을 내려달라구요. 그런데 시는 한번도 문의가 없는 것 같아요. 시를 통째로 올리는 것은 내버려두면서 왜 소설의 일부나 인문서 일부는 발췌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요? 시는 아무도 안보고 돈도 안되기 때문일까요..

cyrus 2016-06-12 18:24   좋아요 1 | URL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발문이 도대체 누구 보라고 쓴 건지 모르겠어요. 특히 철학 용어를 써가면서 시를 접근하는 발문은 싫어합니다. 현학적 언어 때문에 독자들이 시를 어려워 합니다.

저는 시 전문을 인용하면 항상 시집 제목과 쪽수를 적습니다. 일반 도서의 문장을 인용할 때도 이 원칙을 지킵니다. 제가 예전에 출처를 안 밝히고 써서 표절 의심 받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오해가 풀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출처 표시의 중요성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시를 올바르게 인용하려면 출처를 밝혀야하고, 행과 문장 표현 같은 사소한 것도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행 구분이 잘못 배치된 시를 인터넷에 공유하고,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시집 제목을 밝힌 블로거는 많이 본 적 없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시집을 안 읽고, 인터넷에 떠도는 시를 긁어 모아서 인용하는거죠. 저는 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보는 느낌과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시를 보는 것 느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