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은행나무들이 순금빛 해의 비늘들을 눈부시게 털어내고 있었다. 플라타나스 이파리들은 이미 녹물이 들어 오그라든 채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노인들이 기울어지는 시간속을 걸어와 가을 유배자들처럼 쓸쓸히 공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며칠간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이 높아져 있었다. 높아진 하늘 변두리로 새털구름 몇 자락도 가벼이 떠 있었다

 4년전 영면한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첫 부분이다. 어떤 작가가 가을 풍경을 묘사했을 때 <벽오금학도>의 이 대목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이 대목을 천천히 읽으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탑골공원의 가을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라는 첫 문장이 나는 좋았다. 평이하게 가을이 왔다가 아니라 당도했다는 서술어에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 저절로 오는 가을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어서 탑골공원으로 아무도 모르게 오고 있었던 가을이 어느날 도둑처럼 홀연히 와있는 장면.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에도 이와 결이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일년.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이미 한여름 속에 와 있다


 어느날 문득 예고 없이 당도해 있는 가을이지만 이미 한여름 가장 뜨겁고 울창할 때 서늘한 기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다 그럴지도 모른다. 가장 좋고 아름다울 때는 그렇지 않을 때를 전제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가을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겨울의 냉기는 서서히 짙어지겠지만 겨울이 당도하기 전까진 가을이다. 계절이 끝남을 알기에 단 하루의 가을도 소흘히 보낼 수 없다.

가을이 오면 항상 떠오르는 이 대목이 실린 소설 <벽오금학도>를 구입하던 그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2년 10월 정도일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했는데 책을 다시 꺼내 인쇄정보를 보니까 1992년 5월 초판이었다. 경북 영천의 S서점은 나의 단골 책방이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니 서점 주인이 매대에 진열해놓은 책이 곧 베스트셀러였고 따끈한 신간이었다. 그날 <벽오금학도>가 서점 어디쯤에 놓여 팔리고 있었는지 지금도 정확히 특정할 수 있다. 서점 맨 안쪽에 왼쪽 매대였다. 주로 신간 소설이 놓이는 자리였다.


 이 책은 표지 디자인부터 너무 잘 되어 있었다. 강렬한 원색으로 그려진 산 위에 새빨간 해가 떠 있는 그림인데 지금 봐도 참 예쁘고 신비롭다. 책날개 안쪽에는 “때로는 신화보다 현실이 몇 배나 더 신비스러울 경우가 있다”라는 문구가 세로로 박혀 있었다. 이 책을 지금 당장 사라고 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듯 했다.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4천 얼마를 내고 <벽오금학도> 들고 나서는 그때가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던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부러운게 없었다. 서점을 나와 다리를 건너 버스 정류장쪽으로 걸을 때 내가 한가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멈춰 섰다. 버스 차비가 없었다. 차비까지 싹 털어 책을 샀기 때문이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때의 갈등이 선명하다. 책값을 지불할 때 차비가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았지만 책 구매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순간순간 대단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정이 있었다. 책에 환장한 바보였던 것일까? 차비가 없다면 집까지 50리 길인데 어쩌자고 책을 샀단 말인가? 완행버스 이외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은 없던 시절이다. 집까지 걸어간다면 5시간 이상이 소요될 거리다. 당장 돌아가서 책을 환불해야 될 처지였는데 그러지 않았다. 내 자신에게 황당해하면서도 환불하러 가지 않았던 내 기괴한 고집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의가 없을 뿐이다. 그때 책을 사지 못하면 다시는 그 책을 사지 못할 것 같은 터무니 없는 미신이 나를 지배했던 모양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는 아무나 붙들고 차비를 빌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침 다리 반대편에서 몰몬교 선교사들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미국에서 온 브래드베리 일행이었다. 그들은 항상 두 명씩 짝을 지어 까만 양복을 갖춰 입고 한 손에는 몰몬 성경을 들고 다니며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던 사람들이었다. 지난번에도 다리 위에서 브레드베리와 짧은 영어회화를 연습하고 몰몬경 한 권을 얻었던 터였다.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구해 읽던 나였으니 몰몬 성경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성서도 내겐 그저 읽을거리중에 하나였지만 미안하게도 몰몬경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진 못했다. have no money, going home, please give me... 개떡같은 영어로 브레드베리한테 처지를 대충 설명하니 찰떡같이 알아듣고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내 주었다. 버스비를 하고도 남을 돈.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갚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다시는 브레드베리를 볼 수 없었다. 아마 선교 사역 기간이 만료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이겠지. 여기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했던 그의 짧은 말이 기억났다. 그 날 이후 브레드베리 일행 대신 또 다른 양복쟁이 둘이 다리를 건너 다니며 사람들한테 말을 거는 모습은 여전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1992년 10월 차비까지 털어 기어코 책을 사버린 고집 쎈 남학생에게 차비를 빌려줬다. 빌린 돈으로 버스를 타고 가던 어느 가을날 오후 국도옆 노란 은행잎들이 반짝이는 풍경은 얼마나 눈부셨던가. 버스에서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책의 첫 문장은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였다. 지금도 가을이 당도하면 차비를 빌려줘서 고마웠던 미국인 선교사 브레드베리가 떠오르는데 그가 빌려주었던 것은 그저 돈 몇 푼 뿐이었을까? 나는 그가 빌려준 돈 덕분에 책에 대한 내 열정이나 낭만이 좀 터무니 없긴 해도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살게하는 생존 원리임을 자처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에 좀 사치를 부려도 괜찮구나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해야하나.


 그 날 이후로도 책은 몰몬교 선교사 브레드베리처럼 내 인생의 거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세주였고 희망이었다. 앎에 대한 갈증의 해결도 좋았지만 책 그 자체에 대한 추앙은 내가 제일 자신있게 즐길 수 있는 낭만이었다. 차비까지 털어 책을 안고 나오던 눈부신 그 가을날에 느끼던 설렘과 희망, 환희를 누구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던 내가 그토록 책에서 위안을 느낀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책을 펼치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솔직하게 하는 이야기들 때문이었으리라. 특히 이외수의 에세이들이 그랬다. 외롭고 적적한 깊은 가을밤, 쌀자루와 늙은 호박이 쌓여있던 시골방에 홀로 앉아 침잠하면 귀뚜라미 울음조차 그치고 마침내 들려오는 형광등 타들어가는 지~이잉 하는 소리. 그때 내가 읽은 글들에서 발견한 보석같이 환하게 빛나던 문장들. 젊은날의 이외수 그도 나처럼 홀로 밤새우면서 형광등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지독히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의 글들은 외로움, 가난, 굶주림, 추위, 그리움, 슬픔, 비애로 가득차 있었지만 어쩐지 그 말들이 너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 하고 걸어오는 반가운 말걸기였다. 요즘 말로 하면 선톡이다.


 나는 그 시절에 읽었던 책들에서 얻은 위안과 기쁨, 설렘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손 가는대로 책을 사 모으거나 그 때 읽던 책들을 다시 뒤적거리는 이유는 그때의 그 환한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비가역적인 소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대하는 내 태도는 그때 차비까지 털어내던 대책없고 순종적인 맹목적 추앙과 달라진 건 크게 없다. 지금은 책보다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책만큼 나를 오랫동안 가슴 저리게 하는 존재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책이라면 설렌다. 도서관에 갈 때도 그렇고 서점에 갈 때도 그렇다. 마음에 담아두고 좋아하는 사람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칠 때처럼 늘 설레지만 희한하게도 식상하거나 질리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연애다. 사람은 이렇게 오래전 자그만 행복감을 평생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 나선다. 올해 가을에는 어떤 책이 또 나를 설레게 할지 밤마다 스탠드 조명을 밝히고 책상 앞에 앉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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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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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난 7월 23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인은 대장암. 8월 초 폭염이 한창일 때 그날도 습관적으로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접속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적힌 팝업창이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잘 못 본 것인가 싶어 인터넷서점 앱을 종료하고 다시 열어봐도 같은 팝업창이 떴다. 그가 죽었구나!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네이버를 열어 검색어를 넣어보니 대장암에 걸려 향년 68세로 별세했다고 한다. 비통한 심정에 잠시 묵념을 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제 더는 그의 신작 소설을 볼 수 없겠구나. 그의 소설 공장은 이제 문을 닫는구나. 그의 소설 덕분에 일본소설이라는 신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고 책읽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는 소설을 생산하고 신작을 내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읽는 속도보다 신작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였다. 물론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고 그의 작품을 부지런히 읽지 않았다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그래도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면 항상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소설이 소개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소설 창작은 24시간 365일 가동되는 반도체팹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더는 그의 신작 소설이 인터넷서점에 소개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허망하고 아쉽고 슬펐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106권의 단행본을 집필했다고 한다. 20대 중반부터 글을 썼다면 대략 45년의 필력인데 연간 2~3권의 책을 꾸준히 낸 셈이다. 그야말로 소설을 끊임없이 찍어내는 팩토리 수준이었다. 이렇게 다작을 한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 수준과 편차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 듯 하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망설임없이 구매한 최신작 <투명한 나선>을 단숨에 읽어치웠는데 오래전에 읽은 <나미야 잡화점>이나 <용의자 X의 헌신>만큼의 밀도있는 이야기로 인해 최근 가장 즐거운 독서 경험을 했다. 이번에 <투명한 나선>을 선뜻 구매한 동기는 그의 별세에 대한 일종의 조문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책 값 1만8천원은 큰 돈은 아니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의였다. 그의 작품을 읽고 단조로웠던 삶이 풍족해지고 즐거워지는 경험에 비하면 책값 1만8천원은 너무 싸게 느껴진다. 나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음원등을 저작권에 맞게 정식으로 구입하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일이 얼마나 큰 공력과 노력이 들고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와 좋은 글, 좋은 음악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들은 충분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을 살만한 어떤 이유도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쓴 어떤 작품을 골라도 결코 실망하는 일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국에서는 추리, 미스터리 소설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의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만큼 그의 작품은 읽는 재미와 중독성을 보장하고 밤을 새게할만큼 독보적이다. 그의 작품은 읽기 시작해서 중도에 그만두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읽지 않음이 있을진대 읽게 된다면 끝을 보지 않고는 그만두지 못하리라. 그가 이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 그리고 그가 없는 지금도도 그의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사실 일본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이외에는 아는 작품이 거의 없었고 오래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읽다가 질려버린 경험을 한 이후로 일본 추리소설이나 장르소설에 흥미를 잃었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곁가지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꾸역꾸역 읽고 있으니 시간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껍질처럼 끝없는 곁다리가 이야기가 이어지는 홍명희의 <임꺽정>처럼 <모방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소설 전체와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모래알 같았다. <모방범>을 읽는 내내 먼저 읽었던 페이지를 수시로 펼쳐서 앞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몰입도와 소설적 재미를 크게 떨어뜨렸다. 소설 읽기가 아닌 사전찾기나 색인찾아보기 같은 작업이 되어버린 <모방범> 읽기는 2권째 읽다가 포기해 버렸고 한동안 일본추리소설은 재미없고 지루해라는 선입견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다가 십여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시작으로 일본 장르소설에 새롭게 미친듯이 빠져들었다. 어렵고 복잡한 책들은 잠시 한켠에 제쳐놓고 일본소설 읽는 재미에 매료된 시기였다. 원래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고 장르소설이라 불리는 추리나 스릴러, 공포, 판타지 분야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부터 시작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13계단> 같은 작품을 읽고 나서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일본 소설이 많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다카노 아키아즈의 <제노사이드>는 방대한 전문자료를 토대로 한 지식오락물의 절정 그 자체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의 사랑과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깊게 파고든다는 점이 좋았다. 


 이런 미친 정신 나간 사랑도 있을까 할 정도로 극단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묘사한 <용의자 X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나는 추리소설을 가장한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 사랑의 형태와 변주의 극단이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수학이라는 이데아에 탐닉하다가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천재수학자이자 수학교사 이시가미. 어느 날 그의 이웃집에 이사 온 모녀. 이시가미가 탐닉한 순수에 대한 의지는 아름답고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순백은 늘 때가 타고 변색 되기 쉽고 맑은 물은 더러워지 쉬운 법. 소설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시가미의 헌신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한국에서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판 용의자x가 제작되었다. 방은진 감독,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 주연이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원작의 묘미와 의도를 잘 살린 수작이었는데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의 연기가 좋았고 방은진 감독의 연출도 좋았다. 이시가미 역을 맡은 류승범의 연기는 원작소설보다 더 잘 된 것 같다. 한국판 용의자x는 원작과 결말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판 영화 용의자x는 결말이 원작과 어떻게 다른지 집중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오버사이즈 무채색 양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에 도시락 가게에 들러 이요원이 파는 도시락을 수줍게 사서 털레털레 학교로 출근하는 지독하게 외로운 이시가미(류승범)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 가슴아린 캐릭터다. 내가 류승범의 연기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이 한국판<용의자X>를 본 이후부터이리라. <용의자X>에서 천재 수학자가 보여준 사랑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비현실적,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들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사람은 심지어 사람뿐만 아니라 로봇, 사이보그, AI와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용의자X의 헌신>처럼 맹목적 사랑 이야기 뿐만 아니라 딸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와 상실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후벼파는 <방황하는 칼날>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도 한국에서 정재영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국판 <방황하는 칼날>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딸을 가진 부모님들은 이 소설이나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게 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철없는 일진 고등학생들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 이야기.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체제에서 살 고 있는 우리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도 역시 빠르게 잘 읽힌다.


또 <새벽거리에서>에서는 탐욕적 불륜이라는 소재로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처절하고 집요하게 파묘해 나간다.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결말의 반전이 대단히 충격적이다. 작가는 불륜에 대한 호오를 말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마지막 몇 십장까지 통속적인 불륜소설처럼 보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 독자들 뒷통수를 무자비하게 후려친다. 결말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불륜은 희미한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처럼 불륜남녀가 동반자살을 하는 비극적 선택은 없지만 불륜이라는 행위 그 자체는 진짜 실감나게 묘사된다. 소설을 읽는 내 자신이 불륜의 당사자가 된 것처럼 들킬지 말지 조마조마하다. 영화로 제작되도 좋을 스토리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대표작 <나미야 잡화점>을 빠뜨릴 뻔 했다. 살아오면서 읽은 최고의 소설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이<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포함될 것이다. 읽으면서 눈시울이 무섭게 뜨거워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 소설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철도원>이후 처음이었다. 오락성과 작품성을 모두 겸비한 최고의 소설이다. 현실과 과거를 잊는 종이 편지라는 설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한국영화 시월애도 이런 설정이었음)요즘 종이편지는 공과금 청구서와 다를 바 없는 시대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편지에 사연과 이야기를 적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쓴 펜팔 편지처럼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미야 잡화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환상 편지에 희망과 사랑을 담는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놓았다. 일본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던 과거와 현대, 그리고 환광원이라는 고아원 출신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요즘 한국소설에서 잘 찾아볼 수 없었던 서사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재미와 진한 감동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작품. 누구한테나 추천하고 싶다.


이번에 읽은 <투명한 나선>은 혈통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얽어놓은 카르마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매력적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투명한 나선>인가. 책을 읽어 보신 분이나 앞으로 읽게 될 분은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의 제목 <투명한 나선>은 바로 DNA이중나선을 문학적으로 변형시킨 표현이라고 보는게 중론이다. 실제로 일본의 출판사에서도 <투명한 나선>은 DNA이중나선을 뜻한다고 한다. <투명한 나선>은 바로 생명과 혈통을 유전하는 물리적 실체인 디옥시리보핵산이 화학적 상보성으로 결합된 모습인 이중나선이다. 이 책의 내용이 자식을 보육원에 버린 한 여인이 수 십 년 뒤 그 아이를 다시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고 그 과정에서 혈통과 출생에 얽힌 사람들의 거짓과 탐욕, 핏줄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빚어내는 파멸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DNA 이중나선은 극미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물리적 실체여서 인간들의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이라 할 만하다. 이 투명한 나선은 보이지 않지만 혈통이라는 유전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하면서 인과 연이라는 업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고 창조하는 씨앗이다. 소설에서는 히데미라는 여인이 자신의 딸을 보육원에 맡긴 뒤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성취하지만 자신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딸을 찾아나섰다가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되는데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히데미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딸의 자식, 즉 손녀가 자신의 친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손녀를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는다. 이 상황에서 합리적 인간이라면 손녀가 정말로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친자확인 작업을 하겠지만 히데미는 그러지 않았다. 인간은 혈통이라는 결정론적 인연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지만 히데미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어떤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지만 히데미는 주저 없이 그 믿음을 밀고 나가 스스로 살인자가 되고 만다. 히데미라는 여인은 결국 유전적 핏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 매몰된 인물이었다. 그 매몰이 바로 투명한 나선이고 마음의 길이었다. 이런 설정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인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이미 동일하게 반복되었던 적이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할 날만 꿈꾸던 천재수학자 이시가미가 우연히 마음을 나눈 옆집의 여인에게 자신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는 어이없는 행동을 이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행위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선이라는 마음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가식 없이 진정으로 행동하고 뭔가에 미치도록 빠져든 인간이 가는 길은 투명한 나선의 홈이다. 종교가 없어도 모종의 믿음 체계는 모두에게 있기 마련이고 그 믿음이 인생의 토대가 되는 게 인간들이 가진 고유한 삶의 양식이다. 그 믿음은 자신만이 품은 고유한 이야기나 서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이 작품에서 히데미가 품은 이야기는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완전한 가족이라는 서사였다. 딸을 보육원에 버린 뒤 술집을 차려 크게 성공하지만 껍데기일뿐인 삶이었고 가짜였던 인생이었다. 히데미 자신이 꿈꾸던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끝내 키우지 못한 딸에 대한 죄책감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히데미를 움직이게 하는 추동력이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결핍된 존재다. 결핍을 깨달을 때 자신이 품을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크지 못한 자식을 평생 그리워한다. 부모님을 일찍 잃은 사람은 식당에서 부모님을 닮은 노인이 있으면 노인의 식사비를 기꺼이 부담하는 일도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다. 그런 결핍으로 인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순전히 인과적으로 결정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하고 확고한 자유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투명한 나선(이야기)은 아주 잘 이해되기도 하고 전혀 이해 할 수 없어 완벽한 부조리로 보일 때도 있다. 투명해서 훤히 보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보일 수도 있는 나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투명한 이야기 타래를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서로 얽고 풀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의 제목 <투명한 나선>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보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 작가이므로 작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반전이 있는 결말은 늘 독자에게 지극한 즐거움을 준다. 작가는 연관성이 부족한 사건과 이벤트를 레고블럭처럼 차곡차곡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전체적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데 이 과정을 그려내는 작업이 너무 능숙해서 천의무봉이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 이번에는 또 어떤 기막힌 설정이나 반전이 있을지 무척 설렌다. 무려 106권의 작품을 쓰면서 얻어진 내공이고 그를 미스터리의 대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SNS에서 우연히 본 글인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첫 문장을 쓴다, 그 다음 문장을 이어서 쓴다. 이 두 가지 과정을 무한 반복하면 소설이 한 편 완성된다” 정말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확인 할 수 없지만 그 두 과정의 무한반복이라는 작업 없이는 어떤 글이든 글이 나올 수 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두 과정의 단순 반복 작업 이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 십년 간 해왔던 이야기 만드는 비밀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많다. 시골길을 걷다가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오래된 옛집을 보면 그 집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다. 소설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가 허구라도 이야기로서 흠결은 전혀 없다. 이야기는 듣거나 말해질 때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마음을 울리거나 서늘하게 한다면 그 이야기의 가치는 충분하다.


 한 명의 작가가 세상을 떠나도 그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살아 생전의 인연으로 빚어낸 106권의 소설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말과 글이 세월이 지나도 이어진다면 그의 글도 잊혀지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잠시 같이 살았고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읽어서 더없는 행운을 누렸다. 아직 읽지 않는 그의 책이 많음은 다행인 것일까? 다시 한번 히가시노 게이고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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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혜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9
크누트 함순 지음, 안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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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90 년즈음, 북유럽, 노르웨이의 황무지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었다.

경상도 사나이처럼 무뚝뚝하고 억센 남자 이사크. 이사크는 아무도 없는 공유지에 들어가 혼자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나무와 풀을 베고 감자를 심고 염소를 기르고 오두막을 짓는다. 이사크는 힘이 좋고 부지런하여 순식간에 황무지는 각종 농작물로 가득차고 풍성해진다. 이사크는 집도 땅도 가축도 있었지만 일을 도와줄 하녀는 없었다. 친절하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목소리는 거칠어서 짐승 같았다. 그래서 혼자 살 수 밖에 없었다. 외롭고 고생스런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날 이사크를 도와줄 사람이 우연히 찾아왔다. 키가 크고 피부가 그을린 여자였고 큰 체격에 손이 단단한 서른에 가까운 여자였다.


이사크와 잉에르의 첫 만남을 묘사한 대목은 이 소설의 백미다. 투박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담담하게 그려내는 두 사람의 만남을 그려내는 대목부터 나는 이 소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잉에르랍니다"

"그쪽은요?"

"이사크요"

"이사크라, 여기 사시나요?"

"그렇지요,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삽니다"

"괜찮네요"

그녀가 칭찬하며 말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이 갖고 온 음식을 좀 먹고 그가 내놓은 암소젖을 마셨다. 그러더니 따뜻하게 싸 온 커피를 데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아늑한 시간을 보냈다. 자리에 누운 그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고, 그녀는 그에게로 왔다.


아침이 되어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고, 낮이 되어도 머물렀다.


여자의 이름은 잉에르였고 남자의 이름은 이사크였다.


 외로운 남자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여자에게서 흠잡을 것이라면 발음이 또렷하지 않고 언청이라서 늘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것뿐이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입술이 아니라면 그녀는 그에게 오지도 않았을테니, 그녀의 토순은 그에게에는 행운이었다. 그 자신은 어떤가. 그에게는 흠잡을데가 없던가? 수염은 뻣뻣했고 체구는 땅딸막했으며, 생김새는 울퉁불퉁한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흉측했다. 그는 언제라도 날강도로 변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잉에르가 도망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가 나갔다가 돌아오면 잉에르는 오두막에 있었다. 둘, 오두막과 그녀는 하나가 되었다.

                                                                                                                                   -p16-



 잉에르는 이사크와 같이 농장을 일구어 나간다. 둘은 어느새 서로 믿고 의지하는 동반자가 된다. 잉에르는 언청이였다. 그런 잉에르를 이사크는 땅처럼 사랑한다. 잉에르는 마을에 가서 자신이 키우던 소 금뿔이를 데려온다. 금뿔이는 송아지 은뿔이를 낳고 잉에르도 아이를 여럿 낳아 땅의 혜택으로 키워간다. 이사크 부부는 늙어 마침내 대농장의 영주가 된다.


 소설에서 끊임없이 묘사되는 것은 이사크와 잉에르 가족의 노동이다. 그들은 황무지에서 풀을 베 건초를 만들고 돌을 걷어내고 나무를 자르고 염소젖을 짜 치즈를 만들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오두막과 가축우리를 만든다. 일상의 노동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노동은 수고롭고 고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기찻길의 침목처럼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자 고갱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고단했던 한국 시골 농부들이나 화전민의 삶이 그려지기도 하고 산업화 시대에 땅을 지키려 했던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나기도 한다. 묵묵히 땅을 지키는 이사크 가족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감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지만 흥미롭게도 함순은 소설 곳곳에 불안감을 일으키는 복선을 깔아 놓았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작품을 읽는 내내 이사크와 잉에르에게 불행한 일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져서 페이지 넘김을 서두르게 된다. 


 이사크가 터전을 잡은 곳은 공유지였고 국가소유의 땅이었다. 이사크의 농장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잘 되고 있을 때 지방행정관 게이슬레르가 나타난다. 게이슬레르는 이사크가 현재 무단으로 농사짓고 있는 국가소유의 땅에 대해 소유권 이전을 제안한다. 이 대목에서 혹시 이사크가 게이슬레르에게 사기를 당해 농장을 전부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결국 게이슬레르라는 인물도 땅의 혜택을 믿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이사크의 농장에서 구리광산이 발견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이사크가 종사하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의 대척점에 있는 광산업과 상업의 물결이 이곳에도 휩쓸려 오기 때문이다. 돈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사크는 농장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이사크의 아내 잉에르, 그녀는 대단히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인물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제일 매력을 느꼈던 인물이 그녀였다. 그녀는 순수해 보이면서 가슴 가득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다. 언청이라는 결점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탓일까? 그녀는 자신의 딸을 죽인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가는데 거기서 언청이 수술을 받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출소한다. 이사크도 몰라보게 예뻐지면서 그녀는 이사크 몰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잉에르에게 교도소 경험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새로운 날개였던 셈이다. 그러나 잉에르는 결코 농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잉에르가 농장을 떠났던 것은 단 한번, 감옥에 갔을 때 뿐이었다.


 잉에르가 교도소에서 풀려나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이사크의 설렘, 잉에르가 교도소에서 낳은 딸과 셋이서 그들의 농장 셀란로를 향해 가는 여행길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잉에르가 농장 셀란로와 이사크를 끝내 떠나지 않는 이유는 언청이였던 자신을 받아준 이사크를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세기 말 노르웨이의 시골을 그린 작품이다. 멀고 생소한 북유럽의 노르웨이의 시골이지만 과거 산업화시절 우리의 시골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 이사크의 농장은 셀란로라는 이름이 붙고 이웃 악셀 스트룀의 농장은 모네란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려진다. 농장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 전통 농촌에서 집집마다 택호를 붙이던 관습과 비슷하다. 집주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그의 집과 농사짓는 땅 전체를 아우르는 별도 이름(택호)를 붙이는 관습이 그 먼나라 노르웨이의 옛 시골에도 있다니 인간의 삶의 양식에는 확실히 보편성이 있다.


 80년대 방영하던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디지털 문명에 지친 내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땅과 자연에 대한 동경이 더 커졌다. 실제로 함순이 이 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1920년.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으니 전쟁에 대한 환멸과 공포에 극도로 시달리던 때. 그때와 지금도 여전한 게 있다면 또 다른 경제전쟁이 끝도 없이 사람들을 피곤하고 소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변하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고단하지만 소박하고 작은 세계에 만족하는 소설 땅의 혜택이 가지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을 소유해야하고 일과 쉼이 구분되지 않아 만성적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처방은 작고 소박한 이사크의 농장이면 충분할 듯 하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자는 곳.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소득도 있었다. 북유럽의 먼나라 노르웨이의 시골모습을 마음껏 상상하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아는 세계가 훨씬 더 넓어진 풍성하고 경험을 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황무지를 일구며 이사크와 잉에르가 노르웨이의 깊은 산골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북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면 노르웨이를 맨 먼저 가보려고 한다. 다만, 함순은 이사크의 농장이 위치한 곳의 구체적인 지명을 소설에서 설정하지 않았던 점은 아쉽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 곳을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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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앱에서 20년 전 인연이 끊어진 옛친구를 만났다. 만난 것이 아니라 발견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다른 모임 구경도 해보자 싶어서 이런저런 모임을 둘러보는 중 알고 있던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엔 동명이인 인가 싶었다. 프로필을 클릭해보니 역시 그였다. 본인 사진을 프로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뭔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와 인연이 끊어질 때 좋지 않게 헤어졌고 심한 말다툼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정확히 특정할 수 없었지만 아마 내 잘못이 더 컸을 것이다. 말다툼할 때 심한 욕설도 오고 갔었다. 그의 사진을 보고 놀랐던 이유는 그와의 마지막 연락을 기억에서 삭제시켜 버릴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일을 다시 떠 올리는 일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 그도 그랬을까? 아마 그도 나에 대해 다시 떠 올리기 싫은 혐오스런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 나름 나의 유일한 절친이자 지기였고 책을 좋아하고 전공이나 철학쪽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라 이야기가 잘 통했지만 성격이 깔끔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일을 대책 없이 벌려놓고 수습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 듯 했지만 학과 리포터를 제때 제대로 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마감기한이 다 돼서 내 리포터를 기웃거렸다. 내 자취방에 와서 며칠씩 묵으면서 나를 불편하게 한 적도 많았다. 전기밥솥 솥을 철 수세미로 박박 긁어 설거지해서 밥솥 코팅을 다 벗겨 못쓰게 만든 일이 생기자 나는 그를 내 자취방에서 영구 추방해 버렸다. 밥솥 사건은 그 이후로 그가 나를 비난할 때마다 되풀이하는 좋은 먹이감이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지만 술과 담배를 마음껏 즐기다가 주일마다 교회 가서 참회기도 한 번으로 깨끗하게 도덕 세탁을 하는 모습도 보기 싫었지만 결국은 나도 그와 같은 부류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스스로 셀프 사면을 해 왔다는 것. 그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있자니 또다시 온통 그를 비난하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내 모습도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닌듯싶다. 그래서 다시 기억을 복원해 보니 좋았던 일, 고마운 일이 훨씬 많았다. 좋은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나는 그와의 추억을 부정적으로 편집해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속해있던 그 모임에 가입해서 그에게 연락을 시도해 볼까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와는 인연이 끝났지 않은가? 지금 와서 그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인간은 육체적 생노병사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생노병사가 있다는 말을 누군가 했었고 나는 그 말을 정말로 확실하게 믿는다. 아니 믿음이 아니라 그말은 엄연한 사실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잘 관찰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친 듯이 사랑하던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 죽는 순간까지 영영 볼 수 없는 상황들은 전혀 생소하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다. 친구 간의 우정도 마찬가지고 부모 자식 관계도 역시 그렇다. 죽음이 관계를 소멸시키기도 하지만 죽음과 상관없이 소멸되는 관계가 사람들에게는 훨씬 많을 것이다.


 그는 어딘가에서 잘 살아 있겠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연락과 소통이 단절되면서 완벽하게 끝이 났다. 관계의 생노병사에서 死의 단계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없고 걸어서도 안된다. 역으로, 웃기는 상상이지만, 그가 내 연락처를 알아내서 내게 말을 건다 해도 나는 응하지 않을 참이다. 이렇게 독백으로 그를 추억하는 일만이 그와 소멸된 관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합당한 일이라고 본다.


 그때는 그가 미웠지만 지금은 그 미움이라는 감정보다는 당시 미숙했던 내 인간관계 요령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대학시절부터 10년의 인연이었고 그 후 20년이 흘렀다. 나는 이제 20년만에 그 옛 친구와의 관계를 홀가분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에게 빚진게 있어 내 몫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때 내 친구여서 정말 고마웠다. 이 짧은 글은 그를 마지막으로 소환해서 내 기억에서 완전히 소멸시키는 리추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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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부모님과 살던 집.

아랫목에 자식들 양보하고 아버지는 늘 창호지 발린 문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주무셨다.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잦아들면 겨울바람에 문풍지 바르르 떨리는 소리.


 새벽에 방이 식어 잠이 깨면 창호지문 밖에 빨간 군불 그림자 화르륵 솟구친다. 아버지는 늘상 새벽에 일어나 군불을 넣어 방을 다시 데워줬고 그 온기에 사르르 아침잠 늦게까지 달게 자곤 했다.


 아버지의 그 수고로움 이제는 잘 아는데 그 고마움 전할 아버지 안 계시고 기억도 희미해져 간다. 가스보일러 돌리면 후끈한 아파트 방은 외풍도 없고 어깨도 얼굴도 안 시린데 군불 때고 들어오시던 아버지 외투에 묻어있던 그 서늘한 새벽 냉기는 왜 그리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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