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자 : 김동인 단편전집 1 - 배따라기, 태형, 광염 소나타, 배회, 약한 자의 슬픔 외 36편 ㅣ 한국문학을 권하다 3
김동인 지음, 구병모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한자의 슬픔> 김동인 처녀작
1919년 2월 3일 김동인 자신이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에 발표한 소설. 이 소설을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2025년인 지금부터 무려 106년 전에 쓰여진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척 재밌게 쓰여진 소설이었다. 김동인의 처녀작이라고 하는데 처녀작치고는 너무나 완성도가 높지 않은가? 게다가 김동인이 1900년 생이므로 이 소설은 김동인이 불과 약관의 나이에 쓴 첫소설.
이 소설이 발표된 1919년 2월 3일이면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한달전. 당시 조선 전국토가 일본제국주의 군화에 짓밟히고 신음하던 시대였다고 역사 교과서는 말하고 있고 당시 모든 조선인들은 오로지 식민지 독립만을 열망하고 있었을 거라고 여겼으니 문학이니 낭만이니 이런건 사치에 불과하지 않았던 시대였지 않았나하는 내 편견을 말끔히 때려부순 작품. 국어 교과서 지문에서나 부분 부분 조금씩 접할 수 있었던 근대 한국문학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김동인의 이 처녀작 하나만을 읽었을 뿐인데 당시 한국문학 수준이 이 정도로 높고 성숙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온몬에 전율이 일었다. 당시 문학가들의 문학적 성취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한국 문학작품 읽을거리가 없었던 터라 우리 근대문학이라는 새로운 읽을거리 발견에 즐겁기도 했다. 김동인하면 <감자>,<배따라기>가 너무나 유명하지만 내가 지금 내가 읽는있는 김동인 전집은 그의 작품을 발표순으로 편집해서 처녀작<약한자의 슬픔>을 맨먼저 읽게 되었다. 이 소설에 대해 내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
권력과 재력이 있는 가문에서 방과후 선생 노릇을 하면서 숙식을 제공받아 학당에 다니는 스므살 여자. 부모도 형제도 없는 고아출신인 듯한데 당시 여자나이 20살까지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엘리자베트가 당시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신여성임을 짐작케한다.
이 소설은 처음에 평범한 로맨스 소설같아 보였는데 읽어나갈수록 꽤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 양반집 주인 남작이 엘리자베트의 방을 찾아오면서 모든 비극과 갈등이 시작된다. 남작과 육체적 관계를 맺어가는 대목이 무척 흥미로운데 적극적으로 남작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어느새 그녀는 남작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간다는 묘사. 그럴만하다. 비록 신교육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근대의 악습과 관행이 힘을 쓰던 시대였고 여자가 독립적으로 살기엔 어려웠을 것이니 가난한 시골출신의 엘리자베트에게는 남작의 부정행위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에서 엘리자베트는 똑똑한 신여성으로 묘사되지만 그녀 역시 세속적 인간이고 원초적 욕망을 가진 인간임을 김동인은 놓치지 않았다. 남작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은 제법 에로틱하다. 남작의 욕정을 채우는 비극적 순간에 난데없이 에로틱한 느낌이란 또 무엇인가? 그런데 그 비극적 상황에서 스며나오는 정념에 이질감이나 거부감이 들지않는 점도 신기하다. 근대문학사 책들을 보면 김동인은 극단적인 문학지상주의자, 탐미주의자라고 평가하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묘사없이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만으로도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기법에 능해서 읽는 내내 김동인이라는 작가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탐미주의자 김동인, 이 작품 주인공 엘리자베트 불과 20살의 여인이었고 남작의 아이를 지우려 병원에 가는 동안 전차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기도 하고 병원 의사가 진찰하면서 자신을 만지는 동안 의사의 손길에서도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묘사들.. 당시 억압된 성에 서 눈을 떠가는 신여성들의 모습이었던가. 하지만 김동인은 진취적인 신여성들을 혐오했다고 하는데 소설속 엘리자베트의 이런 이중적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는 단편소설이라는 분량의 한계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
엘리자베트는 남작의 아이를 지우는데 실패하는데 병원 의사가 가짜약을 줬기 때문이다. 가짜약이라니.. 여기서 소설적 재미와 긴장감이 배가된다. 아이를 지우는 약이 당시 있었을까?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정상적으로 아이를 지웠다면 소설의 행방과 결말은 어찌되었을까? 엘리자베트는 아이를 지우고 못하고 결국 남작의 집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시골로 가서 남작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 서생아의 승인, 신문상 사죄광고 게재 청구소송을 걸게 되지만 재판부는 엘리자베트의 주장에 신빙성도 없고 증거도 없다며 재판자체를 기각해버린다. 재판에 패소하여 그 충격으로 앓아눕게 된 엘리자베트. 신열을 앓다가 결국 아이를 사산하게 된다. 사산한 핏덩이를 손에 쥐고 그녀는 약한 자의 슬픔을 생각한다. 자기의 설움, 열패자의 설움, 좀 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피력하지 못했던 약함, 그 약함을 엘리자베트는 표본생활 20년이라고 했다. 자신의 20년 인생이 약한 자의 슬픔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한 것이다. 그녀는 유산후 더욱 날카로워진 이성을 가동하여 뜬금없이 인류애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다, 나도 시방은 강한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다. 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 어찌 알 수 있으리요?(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중략-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에 널려있는 사랑, 자연에 퍼져있는 사랑,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 그렇다 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 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 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 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 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 올랐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엘리자베트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뜬금없이 거대한 사랑 담론이 펼쳐지긴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몰락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에 나도 즐겁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엘리자베트를 은근히 응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1900년 태어나 1951년에 사망했다. 지금의 내 나이에 죽은 것이다.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않은듯하다. 약물중독(아마 마약인듯)과 지병에 시달렸는데 6.25 한국전쟁때 그는 몸이 아파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가지 못했다. 몸져누운 상태서 북한군에게 심문을 당했고 그 다음해 사망했다고 한다. 불과 50년 남짓 생존했던 김동인, 생전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을 발표한 다작 작가였다. 그의 짧은 삶에서 아쉬운 것은 그가 너무 일찍 타계하여 말년에 집필중이던 장편역사소설<을지문덕>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단편전집은 애플북스라는 출판사에서 <김동인단편전집1>, <김동인단편전집2> 총 2권 출판되어 있다. 내가 지금보고 있는 김동인 전집이다. 김동인 단편전집에는 얼마전 영화화된<파과>로 유명한 구병모 작가가 쓴 김동인 소개글 '바랜 붉은 빛'이라는 글도 정말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다. 김동인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병모의 추천글을 읽어봤으면 한다. 김동인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질 것이다.
김동인이 말년에 약간의 친일행적을 보인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친일행적이 그의 문학적 성취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리 짙어 보이지는 않는다. 동시대 활동했던 춘원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이 이광수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무색해진 것에 비해 김동인의 작품에 계몽주의 이념이 크게 녹아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의 친일행적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이것은 물론 내 개인적 느낌일 뿐이지만 앞으로 계속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가면서 확인해 볼 숙제로 남겨둔다. 그의 친일이 말년에 약물중독과 망가진 신체에서 정신이 무너져 내린 결과의 과오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 그의 친일에 대한 공과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다. 역사가와 문학평론가들이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연구나 논평을 해왔을 것이므로..
오늘은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이다. 당시 식민지 시대를 견뎌낸 우리 선조들의 고단했던 몸과 정신을 생각해본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은가..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삶에 매진했던 선조들에게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약한자의 슬픔>줄거리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 시골출신, 약관의 나이, 경성에서 학당을 다니며 양반집 자제 방과후를 돌봐주면서 그 집에서 기숙한다. 엘리자베트는 매일 등굣길에서 마주치는 청년 이환을 편연(짝사랑)하지만 감히 고백을 하지 못하고 애태우기만 한다. 한편 자신이 기숙하는 양반집 주인 남작은 엘리자베트를 밤마다 찾아와 육체적으로 유린한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저항한번 해보지 못하고 급기야 남작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만다. 남작의 후처가 될 수도 없고 정조를 잃은 상태로 짝사랑하던 청년 이환도 포기하고 학업조차 그만두고 파멸하게 되고 경성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서 남작에게 손해배상의 재판을 청구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녀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결내리고 패소한 그녀는 신열을 앓다가 뱃속의 아이를 유산한다. 유산되어 쏟아진 자신의 아이, 그 핏덩이를 안고 약한자의 슬픔을 오열하다가 마침내 강한자가 되기로 한다. 하기싶은 일을 자유로이 하는 자가 비로소 강한자가 될 것이고 거기서 사랑과 진리를 발견하게 되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