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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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인간의 행동 기저에는 욕망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욕망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으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무의식은 대개 역동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욕망에 심각한 결핍이 생기면 병리적 차원으로 이행돼 삶이 짓눌릴 뿐 아니라 거기에 압도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속 주인공은 욕구 결핍을 채우려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낙담해 사방이 완전히 차단된 밀폐된 방에서 혼자 음악을 듣고, 멀리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그는 욕망의 빈 곳을 채우려는 동경에서 실패해 음악으로 달랜다. 욕망의 빈 곳이란 일종의 심리적 결핍, 애정 결핍을 의미한다. 여기서 콘트라베이스는 주인공이 욕망의 결핍을 없애고, 심리적·정신적 안정을 받으려고 정복하는 대상이다. 주인공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상황을 콘트라베이스와 동일화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큰 몸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악기다.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를 세상에 있는 모든 악기 중에서 제일 못생기고, 우아하지 못한 악기라고 말한다. 오케스트라 악단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고,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을 스스로 잘 알기에 괜히 애꿎은 콘트라베이스를 경멸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바라는 인정과 사랑의 욕망은 간단하게 충족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오페라의 단역배우 세라는 유명한 성악가의 식사초대를 받아 값비싼 생선요리를 먹으러 다니는 도도한 여자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을 마련한다. 유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연주 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것이다. 주인공은 용기만 있다면 무모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얼핏 보면 세상 언저리에 맴돌기만 했던 주인공이 희망을 원하는 몸부림을 펼칠 거라는 기대감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과 세라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주인공은 더블베이스와 음악을 사랑했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불행하게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욕망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충족에 집착하는 욕망의 원인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주인공의 정상적인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삶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과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좌절 때문에 과도한 욕망은 제 생각 이상으로 변환되거나 변질해 혼란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생각하면 욕망과 결핍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원인을 누가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욕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매우 잔인한 법칙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현실과 동떨어진 욕망에 더욱 이끌린다. 위험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의 무의식에서 약동하는 욕망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에 압도돼 욕망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신도 모르게 소외감의 원인을 남 탓 또는 콘트라베이스로 돌리는 주인공의 투사적 행동이나 태도가 바로 주인공의 내면에서 약동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력으로서의 욕망이다.

 

욕망이 결핍을 부르고 결핍이 다시 욕망을 부추긴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고 계속 반복해서 느끼는 욕망의 결핍은 배고픔과 갈증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느끼기 때문인데, 이런 시각에 어머니와의 관계를 지나칠 수 없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였지만, 주인공 본인은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은 가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주인공은 공무원이 아닌 예술가가 되리라 결심했고, 독주가 흔하지 않은 악기로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콘트라베이스의 형상은 허리가 잘록한 여성의 신체와 흡사해서 여성스러운 악기로 인식한다.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의 형상에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상상한다. 어린 시기와 관련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은 명쾌하지 않은 점이 문제지만, 어머니의 가슴과 그 대체물이 아이를 안심시키고 쾌락을 가져다준 최초의 대상으로 본다. 적어도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충족을 원하는 심리적 특성이 충족으로 지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 외에도 일반심리학조차 성장하는 아동기의 신체접촉 결핍이 정신적인 결핍으로 이어진다고 인정한다. 성장기에 어머니와의 친밀한 접촉이 부족한 경우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는 문제가 생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공한 애착이란 대개 안전함, 따뜻한 사랑의 열기, 다른 사람이 그를 맞아줄 때 느끼는 자기애에서 나오는 확증함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안정감이다. 칼 융은 술을 많이 마시는 행동이 모성애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다. 주인공이 말하는 도중에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그가 모성 결핍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들려주면서 독자들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는 주인공의 모습은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만 울리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요즘 자신의 신체 부위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SNS에서 감상평을 주고받는 몸매품평 놀이가 유행이라고 한다. 자존감이 낮거나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해 이 놀이에 더 잘,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자신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는 콘트라베이스 선율을 독자들 앞에서 들려주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한다. 주인공은 이 세상에서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준 유일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애정결핍 증세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건강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블랙홀처럼 뻥 뚫려 있는 욕망의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기 전에 먼저 아직 남아 있는 상처와 결핍의 문제를 진실하게 인정하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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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6-2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으론 <콘트라베이스>와 <좀머씨 이야기>, 두 작품을 읽었어요.
님의 서재에서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댓글 남깁니다. 오래된 책이라...

<콘트라베이스>는 어느 부분에서 꽤 감동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보잘 것 없음의 승리? 뭐 그런 메시지를 받었던 기억이 있어요. 맞나요?
정리를 해 놓지 않으니 제 기억력을 믿을 수 없지만... 아, 이래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그랬던 기억은 확실히 있어요.

cyrus 2015-06-24 20:32   좋아요 0 | URL
저는 <콘트라베이스>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마도 페크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같을 겁니다. 주인공이 무대 위에서 세라의 이름을 외칠 거라고 다짐하면서 모노드라마가 끝이 납니다. 저는 그 부분이 희망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주인공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불쌍했습니다. ^^;;

qualia 2015-06-23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과 결핍의 문제는 현대 신경과학과 뇌과학적 설명을 곁들이면 더욱 흥미로워질 듯합니다. 프로이트/융 학설도 신경정신분석학으로 (일부) 증명이 되고 있다고 하던데요. 앞으로 cyrus 님의 글쓰기에 신경과학/뇌과학적 지식이 접목되리라 예상되는군요~.

cyrus 2015-06-24 20:33   좋아요 0 | URL
제가 신경과학, 뇌과학에 박식하지 못해서 수준 높은 글을 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qualia님의 말씀 덕분에 이번 기회에 뇌과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슬비 2015-06-2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시사인을 읽고 있는 부분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에 관한 내용을 읽고 다시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cyrus님 페이퍼를 보니 더 반갑네요.^^

cyrus 2015-06-24 20:37   좋아요 0 | URL
<콘트라베이스>가 쥐스킨트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향수>와 <좀머씨 이야기>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낮고, 쥐스킨트의 소설 중에서 재미없는 이야기로 평가받습니다. 사실 모노드라마 같은 무대극은 직접 공연으로 봐야 재미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명계남 씨가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 역을 맡아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연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만약에 다시 공연할 기회가 있으면 꼭 보고 싶습니다. ^^
 
고야, 영혼의 거울 - 개정판 다빈치 art 6
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최지영 옮김 / 다빈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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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번 달 초부터 스페인의 화가 고야를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에 고야의 삶과 미술 세계를 소개한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5년 전에 읽었던 《고야, 영혼의 거울》도 오랜만에 펴봤다. 《고야, 영혼의 거울》은 2001년에 출간되었고 10년 뒤에 개정판이 나왔다. 재미있게도 《고야, 영혼의 거울》 구판의 서평을 마지막으로 쓴 사람은 나였다. 서평을 읽어 봤다. 역시 몇 년 전에 쓴 글을 읽으면 마치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벌거벗은 채 찍었던 돌 사진을 보는 것 같다. 고작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부끄러움이 벌써 내 얼굴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1799년)

 

《고야, 영혼의 거울》 개정판을 다 읽고 난 다음에 5년 전에 썼던 서평을 읽어봤다. 서평 내용이 부실했다. 책, 아니 고야를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고, 중구난방 고야의 그림 달랑 몇 점 소개하는 데 그쳤다. 그림을 제멋대로 해석한 채 고야의 미술 세계를 함부로 단정하는 오류도 저질렀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1799년)가 수록된 판화집 「변덕」(Los Caprichos)은 미신과 흑마술에 사로잡혀 이성이 압도당한 인간상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인간 본성의 추악함과 사회의 부조리가 만나서 생긴 사회의 불순물은 우스꽝스럽거나 그로테스크한 인간 혹은 추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관람객 앞에 등장한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이성을 지배하는 몽상과 환상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도 환상과 이성이 만나면 새로운 예술이 등장할 것임을 예찬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나는 그림 제목만 보고 몽상에 마비된 이성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썼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카를로스 4세 가족」(1800년)

 

 

지금까지 나는 《고야, 영혼의 거울》 한 권만 읽고 나서 고야를 제대로 안다고 착각했다. 고야를 친 프랑스파라고 단정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정에 개입하면서 유럽 패권을 향한 탐욕의 손을 뻗치려고 했을 때, 고야는 수석 궁정화가로서 왕족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계에 몸을 담은 귀족들까지도 깊이 친분을 맺고 있던 터라 고야의 주변에는 구체제를 옹호하는 기성세력과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매료되어 구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유주의 세력이 있었다. 카를로스 4세가 다스리던 스페인도 프랑스에서 휘몰아치는 혁명의 바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울리는 변화의 진동에 무감했으며 통치 능력이 부족했던 카를로스 4세는 스페인의 재상이자 왕비의 내연남인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통치를 위임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프랑스의 개입 앞에 힘을 제대로 못 쓰는 식물 국가가 전락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왕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지배계층의 권력욕에 신물이 나던 고야는 궁정화가 임무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왕실의 그림 주문을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인 스페인 왕 조제프는 구체제 타파에 목표를 두는 노선을 추구했으니 고야는 반신반의 그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심은 스페인을 쥐락펴락하는 프랑스를 외면했고, 나폴레옹은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스페인 민중 앞에 총칼을 들이댔다. 이 시기가 고야에게는 내적으로 무척 혼란스럽고 복잡했던 시기였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1808년 5월 3일」(1814년) 

 

고야는 궁정 사람들을 위해서 화려한 그림을 그리면서도 스페인 민중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프랑스군과 이를 묵인하는 친프랑스파 세력을 경멸하여 동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까지 제작했다. 수석 궁정화가 고야의 업적만 본다면 그를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예술 창작욕을 채우는 기회주의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전쟁의 참화」나 「1808년 5월 3일」(1814년) 같은 전쟁의 광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면 붓을 무기로 삼은 고야의 저항 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고야를 무조건 친프랑스파 혹은 기회주의자로 보는 것은 편협한 평가다. 스페인의 최고 화가로 군림했던 고야도 재정적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부채에 시달리던 고야는 수입을 얻기 위해 왕 앞에서 손에 붓을 쥐어야 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마르틴 사파테르」(1797년)

 

 

고야와 마르틴 사파테르의 우정은 고흐와 테오 형제와 함께 서양미술사에서 기억해야 할 브로맨스(bromance)다.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보년 편지글은 고야 한 사람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헌자료이다. 고야와 사파테르의 서신 왕래는 사파테르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고야의 편지에는 그림 작업의 진전 상황이나 가족 안부 그리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과 함께했던 사냥 활동까지 사소한 일상들을 일일이 보고하듯이 적혀 있다. 고야는 사파테르를 아내나 연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썼는데, 사파테르와의 각별한 우정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주고 있다. 고야가 얼마나 사파테르를 좋아하느냐면, 자신의 아내가 예정일보다 일찍 출산하게 되자 사파테르를 일찍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감정을 드러낼 정도다. 고야의 아내는 고야가 이름을 날리기 전에 수석 궁정화가로 인정받았던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이다. 성공에 대한 집념이 뚜렷했던 고야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바예우와 친분을 맺었지만, 바예우가 자신보다 조금 더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바예우 때문에 자신의 앞길이 막힐 뻔한 일에 자존심 상한 감정을 사파테르에게 보내는 편지에게 드러내기도 했다. 고야 입장에서는 처남에 대한 불만을 아내에게 쉽게 터놓을 수 없었다. 바예우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아내와의 사랑보다는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파테르의 우정을 더 중요시하게 여긴 듯하다. 사파테르는 성공과 명예를 얻기 위해 이미 전쟁 같은 삶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던 고야를 제대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어쩌면 고야는 하루하루 내면에서 일던 감정의 폭풍우를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휴식같은 친구'를 더 가까이 두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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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6-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이렇게 생각의 뿌리가 다양하게 뻗으시는지! 서양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많이 배워가면서도 참 부럽습니다. 방대한 호기심 닮고 싶네요 ㅋㅂㅋ,,

cyrus 2015-06-23 19:39   좋아요 0 | URL
저는 <마의 산>을 완독하시는 해피북님의 인내심을 닮고 싶습니다. ^^

에이바 2015-06-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야의 정치관은 꽤 복잡하지요. 지난 리뷰를 돌아보는 모습이 멋집니다. 고야와 사파테르.. 소울메이트인가요?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cyrus님의 소개로만 보면 아내가 불쌍해요. 이길 수 없는 우정이여! ㅠㅠ

수이 2015-06-23 10:09   좋아요 0 | URL
우정에는 이길 수 없죠_ 사랑은_ 근본적으로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어도 우정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봅니다.

에이바 2015-06-23 10:20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어쩌면 사랑의 궁극적 모습은 우정일지 모르겠어요. 우정도 사랑을 기반한 것이고.. 제가 아내가 불쌍하다고 한건 (그 시대 보편적이었겠지만) 출세를 위한 혼인-결합이었고.. 처남에 대한 고야에 열등감이 아내에 투사되었다는 부분 때문에요. 거장의 솔직함에서 인간적 면모가 느껴지고요.

수이 2015-06-23 10:21   좋아요 1 | URL
응_ 저도 에이바님의 생각에 절대 공감_ :) 변하지 않는 우정_ 사랑은 인간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테마 같아요.

cyrus 2015-06-23 19:47   좋아요 0 | URL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동성애 관계처럼 보이는데, 아쉽게도 사파테르의 답장을 남아 있지 않아서 이들의 친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야의 아내에 관한 문헌도 없더군요. 아마도 고야는 아내를 애 낳는 여자 정도로 여겼을 것 같습니다.

라스콜린 2015-06-2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 ^

cyrus 2015-06-23 19:4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단발머리 2015-06-25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계신 cyrus님 서재에 오면, 저도 덩달아 여러 분야에 대해 귀동냥하게 되네요. 오늘은 고야 사진도 보고, 오랜만에 <1808년 5월 3일>도 보게 되구요.
잘 읽고 갑니다.~~

제 방에는 아이유가, cyrus님 방에는 고야가^^

cyrus 2015-06-26 14:2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의 댓글을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때 서양미술사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 수업은 교양과목이 회화과 2학년 학생들이 수강하는 전공필수과목이었다. 내 전공은 행정학이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과감하게 타과 전공 수업을 신청했다. 수강인원 50명 중에 나를 포함해서 남학생은 단 3명이었고, 회화과 전공이 아닌 학생은 4명이었다. 성적을 잘 받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회화과 여학생들과 이런 학생들이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하는 교수의 보이지 않는 텃세(?)가 신경 쓰였지만, 이미 독서를 통해서 서양미술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진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교수는 수업내용을 척척 알아듣고 이해하는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양미술사 과제는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었다. 회화과 학생들은 그림을 제작하고, 제출해야만 졸업할 수 있기에 언제든지 그림 제작에 사용할 소재들이나 습작들을 포트폴리오 형태로 준비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림 제작을 위한 기본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나도 회화과 학생들처럼 포트폴리오를 제작했으며 학생들 앞에서 공개 발표까지 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형' 연구 3부작」 중 일부 (1962년)

 

 

 

서양미술사 수업을 듣는 회화과 학생 중에 머리가 똑똑한 친구가 있었다. 여학생이었는데 수업을 듣는 자세가 다른 학생들보다 바른 편이었고, 교수도 그 학생의 재능을 유심히 눈여겨 봤다. 교수는 똑똑한 학생들을 뽑아서 발표를 시켰다. 당연히 그 여학생도 포트폴리오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여학생이 공개한 습작은 빈방 한가운데 돼지고기가 덩그러니 놓인 상태를 그린 것이었다. 여학생은 이 그림을 축 늘어진 돼지고기가 세상과 단절되어 빈사 상태에 빠진 고독한 현대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교수는 30분 동안 진행된 여학생의 발표를 말없이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습작에 대한 평가를 밝혔다. 여학생의 돼지고기 그림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떠올린다고 말했다. 이어서 여학생의 제작 의도는 좋았으나 그림 소재가 된 돼지고기가 이미 베이컨이 사용한 적이 있어서 독창력 면에서는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교수는 여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학생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요?" 여학생은 베이컨의 그림이 좋아서 도록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교수는 대가의 그림을 무조건 모방하기만 하면 다음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 여학생의 착각을 지적했다. 대가의 그림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일부를 제 것인 마냥 사용하면 절대로 독창적인 그림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창작을 위한 모방이 아닌 남의 것을 그대로 베낀 표절이 될 수 있으니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 점을 꼭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이때 당시 교수의 뼈 있는 지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회화과 학생은 과연 몇이나 되려나. 교수는 서양미술사를 가르치면서 모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위대한 화가들은 정식으로 화가가 되기 전, 그러니까 수련생 시절에는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끊임없이 모사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가나 스승의 작품을 베끼는 것은 그림 제작에서 중요한 훈련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표현력에 감탄하여 그의 그림을 모사했고, 마네를 존경했던 모네는 마네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대한 화가들은 그림 실력이 출중해서 단번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름 그림을 잘 그리려고 몇십 년 동안 남의 그림을 베끼던 시절이 있었다. 대가의 그림을 반복적으로 모사하면 대가의 능숙한 표현력이 자연스럽게 손에 배게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대가의 표현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갖춘 화가가 성공의 길을 걸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80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종교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80년)는 오늘날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야의 걸작이다. 이 그림은 젊은 고야가 이제 막 정식 화가로 발돋움하기 직전에 그려진 초창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고야는 원래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유럽에 귀족이나 왕족들이 선호하는 고급 실내 장식품이 유행이었다. 고야는 직업상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화가'가 아니었다. 평생 태피스트리 밑그림 제작하는 일에 전념하면, 이름 없는 '장인'으로 남을 뿐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성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고야는 세상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여 화가가 되리라 결심한다. 고야의 목표는 궁정화가가 되는 것. 궁정화가가 된다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일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무명의 고야가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당시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는 독일 출신의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였다. 멩스의 신고전주의적 화풍은 스페인 왕족들을 흡족 시켰고, 멩스는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오늘날에 멩스는 잊혀진 화가가 되었지만, 고야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멩스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멩스가 1779년에 사망하자, 궁정화가와 왕립 아카데미 회원직에 공석이 생겼다. 이 기회를 고야가 그냥 놓칠 리가 없다. 고야는 명예로운 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그림을 제출하기로 했다. 제출한 그림이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인정받으면 정식으로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고야가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다. 이 그림 덕분에 고야는 아카데미 회원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고야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화가로서의 꿈의 목표인 수석 궁정화가 자리를 얻기까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고야는 기어이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631년, 왼쪽)

안톤 라파엘 멩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61~1769년, 오른쪽)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잘 그린 그림에 속하지만, 고야만의 표현력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고야의 걸작들과 비교하면 작품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그림 속에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싶은 무명의 태피스트리 밑그림 제작자의 열망만이 보일 뿐이다. 고야의 세속적 열망 때문인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에 겨워하는 예수의 자세는 마치 십자가에 억지로 매달린 마네킹을 보는 듯하다. 그림을 좀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야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눈에 익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가면 고야의 예수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고야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기존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에 불과하다. 고야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에 대가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대놓고 차용했다. 고야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그의 그림을 모사했다. 1631년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예수 그림을 고야는 틀림없이 봤을 것이다. 또 스페인 내에서 알아주는 멩스의 예수 그림을 고야가 전혀 모를 리 없다. 벨라스케스와 멩스의 그림을 고야의 그림과 비교해보라. 고야가 두 점의 그림에서 빌린 표현법을 확인할 수 있다. 어두운 배경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하늘 위로 고개를 향하면서 괴로워하는 예수의 표정은 멩스의 그림에서 빌렸다.

 

이 정도면 고야는 대가의 그림을 베낀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고야를 남의 그림이나 베끼는 데 능숙한 최악의 화가라고 욕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에도 아카데미로부터 큰 호평을 얻었다. 아카데미는 고야가 대가의 그림을 베껴 그린 사실을 다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고야는 창작을 위한 모방을 능숙했기 때문에 아카데미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했다. 아카데미가 원했던 것은 대가의 표현 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그릴 줄 아는 화가였다. 고야는 아카데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만약에 고야가 숙련되지 않은 실력으로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예수를 그렸다면, 아카데미 회원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옛날 화풍을 선호하고 고집하는 아카데미의 심미안 덕분에 고야는 성공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한 고야는 왕족과 귀족 들이 좋아할 만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벨라스케스와 멩스 같은 자신이 존경했던 과거의 대가를 뛰어넘기 위해서 개인적인 표현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후부터 고야는 과거 화풍에서 벗어난 그림들을 그렸고 전보다 많은 명성을 얻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1508~1509년, 왼쪽)

라파엘로의 그림 복사본 (오른쪽)

 

 

우리는 예술에서 창작을 위한 모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고야처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받지만, 가끔 표절로 문제 되는 경우가 있다. 마네도 고야처럼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벨라스케스의 방식을 빌려서 그림을 그렸는데 살롱으로부터 그저 대가를 흉내 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살롱의 보수적인 그림 평가에 불만을 품은 마네는 다음번에 열리는 살롱에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림 한 점을 제출했다. 그 그림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였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라파엘로의 그림 복사본과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1508~1509년) 일부를 빌려서 고전적 양식을 따랐다. 여기에 관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나체를 그려 넣어 고전적 방식을 과감하게 변주했다. 지금까지 그림 속에 벌거벗을 수 있는 여자는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만 가능했다. 마네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인을 그림 속에서 옷을 벗기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시대를 앞서간 마네의 도발적 표현은 당연히 살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 그림으로 마네는 근대 회화의 시발점을 알리는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미술에서 모방은 관대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창작과 동일하게 보는 모방과 남의 것을 자신이 만든 것처럼 흉내를 내는 표절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윌컴퍼니, 2015)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카롤린 라로슈는 창작을 위한 모방의 조건을 명시한다. 화가는 선대 화가 중 한 명을 전적으로 인정하여 선대 화가의 그림을 모방했음을 밝혀야 한다. 여기서 그림을 모방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이제 화가는 선대 화가의 기량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라로슈의 말처럼 위대한 화가들은 선대 화가의 옛 방식을 답습하되, 단점을 발견하면 이를 새롭게 바꾼 방식을 구사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린 마네처럼 말이다. 표절 논란에 휩싸인 작가 신 모 씨의 변명 입장을 보면서 3년 전에 회화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곱씹는다. 아무리 좋은 문장, 좋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모방에만 그친다면 훌륭한 걸작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신 모 씨는 창작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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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 2015-06-2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는 느낌이네요.. 문체가 화려하고 간결한 것이.. 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고요.. 얼마나 글을 많이 써야 이런 글이 나오는지... 정말 부럽네요

cyrus 2015-06-20 22:05   좋아요 0 | URL
글을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초딩 2015-06-2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가 물고 있어서 글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 교수님이 지적한 돼지고기 이야기는 지금의 문단 뿐만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

cyrus 2015-06-22 10:24   좋아요 0 | URL
그 때 교수님의 짧은 말씀이 지금에서야 중요하게 들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음에 드는 걸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라스콜린 2015-06-22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을 위한 모방과 베끼기만 하는 표절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이 참 마음에 와 닿네요..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5-06-22 10:2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라스콜린님. ^^
 

 

 

 

 

 

 

 

 

 

 

 

 

 

 

 

 

 

"우리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각자가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 같은 기억, 같은 경험, 같은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걸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지금부터 다음 말에 ‘맞아 맞아’면 댓글에 Yes를, ‘에이, 저게 뭐야!’면 No라고 댓글을 달면 되겠습니다. 댓글을 달아! Yes or No!”

 

 


어렸을 때 외판원이 집집마다 책을 팔러 다니던 모습을 봤다. 여러분들 중에 집에 갑자기 찾아온 외판원 때문에 부모님이 할부로 전집류를 사준 적이 있다.

 

Yes or No?

 

 

앞부분은 개콘(개그콘서트) ‘말해 Yes or No’ 코너에 나오는 대사를 살짝 바꿔봤다. 옛날에 서점 등 매장에 직접 가서 책을 사기보다는 외판원의 반강제식 방문으로 전집류를 포함한 동화전집을 사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여자 외판원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 책을 사달라고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홍보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머니는 제 자식 똑똑하라는 마음에 비싼 돈을 들이면서까지 ‘학생대백과사전’과 40권에 이르는 위인전집을 구매했다.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장난감 대신에 어머니가 사준 책을 읽었다. 그때 당시에는 중역 또는 축약으로 제맛을 살리지 못한 외국 명작 모음집이나 획일적 전집류가 판을 쳤다. 웬만한 어느 집에 가면 거실에 있는 전집류 책이 꽂힌 책장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계몽사, 삼성당, 금성출판사에서 만든 전집류가 많았다.

 

그래도 7080세대라면 추억의 전집으로 학원문학출판공사의 ‘에이브(ABE) 문고’를 많이 기억한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도록 애서가를 키운 건 팔 할이 에이브 문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도 총 88권으로 이루어진 에이브 문고를 구하기 위해 헌책방이나 온라인 헌책방 사이트를 기웃거리고 확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헌책방에 가면 외롭게 책장에 꽂힌 낱권의 에이브 전집을 만날 수 있다. 헌책방 한 곳에 88권 모두 판매되는 경우는 확률적으로 희박하다. 에이브 전집 전권을 한 번에 사려면 온라인 중고장터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에이브 전집이 시중에 구하기 힘든 오래되고 진귀한 책이라서 가격이 조금 비싼 편이다.

 

나는 에이브 문고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초등학교 독서실에 에이브 문고가 꽂힌 것은 기억한다. 책 뒤표지에 큼지막하게 찍힌 검은색 알파벳 대문자 ‘ABE’가 있었다. 이때 나는 동서문화사에 나온 셜록 홈즈, 뤼팽 전집을 탐독했다. 한창 추리소설에 푹 빠졌던 시절이다. 이 전집에 ‘브레인스쿨’이라는 브랜드명이 붙여졌는데, 소설이 끝나는 책 뒤편에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능훈련’이라는 제목의 추리퀴즈가 실려 있었다. 요즘은 ‘아르센 뤼팽’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아르쎈 뤼뺑’으로 표기했다. 사실 나는 ‘루팡’이라는 이름이 친숙해서 악센트가 심하게 나는 ‘뤼뺑’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활자가 너무 작고, 삽화는 거의 사라질 정도로 출판 상태가 조악했지만, 그래도 홈즈와 뤼팽 전집을 다 읽을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이 전집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학교 도서관을 담당하는 선생님에게 전집을 달라고 부탁했다. 책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나 말고 읽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선생님은 뜻밖에 흔쾌히 나의 부탁을 수락해줬다. 지금도 우리 집 창고 안에 동서문화사판 홈즈, 뤼팽 전집을 보관하고 있다. 몇 년 뒤에야 내가 가지고 있는 전집이 전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초등학생 시절을 즐겁게 만든 최고의 책이기에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새 책》(박균호, 바이북스)에 부록으로 에이브 문고 목록이 실려 있다. 이 책 덕분에 에이브 문고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에이브 전집을 읽었던 세대가 아니라서 아직은 에이브 문고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도 에이브 문고 중에 재출간된 책은 읽어보고 싶다. 혹시 에이브 문고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서 에이브 문고 목록을 새로 만들어봤다. 《오래된 새 책》에 있는 전집 목록을 바탕으로 하여 재출간된 책 제목과 출판사명을 써 넣었다. 아동문학 쪽에 문외한이라서 하나하나 작가와 책 제목을 대조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되었거나 무지에 의해서 누락된 내용이 있을 수 있다. 내가 몰랐던 정보를 댓글로 알려주신다면 목록을 고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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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6-18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o No. 이런 답이 사실이면 어머니가 절 미워 하신건가요? ㅠㅠ ㅋㅋ

cyrus 2015-06-18 21:40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외판원이 파는 전집류들을 보면 내용이 부실한 것도 있어요. 가끔 외판원이 학교 교실에 몰래 와서 학생들에게 아동용 과학 전집을 홍보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책을 봤는데 우리 집에 방문한 외판원에게 구입한 과학 전집이었습니다. 출판사 이름만 바꿔서 내용이 완전히 비슷한 책을 팔더군요. 겉표지도 싹 바꿔서 저도 하마터면 속을 뻔 했어요. 그리고 외판원이 파는 전집류는 책값이 좀 비쌌어요. 90년대에 외판원 강제판매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를 문제 삼는 신문 보도까지 나왔어요.

간서치 2015-06-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 자라면서 제 책을 가져본적이 없었어요.. 책은 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죠. 집에 책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래도 제가 이렇게나마 책을 좋아하게 된건.. 아마도 초등학교 때 학급문고에 좋은 책들이 많이 있어서 였겠지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cyrus 2015-06-19 16:49   좋아요 1 | URL
저도 중고등학생 때까지는 용돈으로 책을 사본 횟수가 1년에 한두 번 뿐이었어요. 대학 입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반 돈으로 읽고 싶은 책을 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책 빌려 읽을 때가 좋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학급문고를 읽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만병통치약 2015-06-1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ES 모르는 외판원은 아니고 동네 아는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몽사 전래동화 명작 동화 20권짜리였죠. 첫날 서로 보겠다고 동생이랑 싸우다 얻어터진 기억이 쨍합니다. ㅋㅋ 그 책 이후 사촌형에게 물려 받은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세계명작전집을 재미있게 읽었죠. 보물섬, 송공자, 소공녀, 틈소요의 모험 등등...꽤 두꺼웠던것으로 기억나는데 청소년판과 완역판의 중간 이었던 듯합니다. 에이브판은 모르겠네요 ㅎㅎ

cyrus 2015-06-19 16:50   좋아요 0 | URL
저는 동생과 책 때문에 다툰 적은 없었어요. 동생은 저처럼 책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ㅎㅎㅎ

스윗듀 2015-06-1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새로 만드신 목록 멋지네요! 저도 어렴풋하지만 yes에요ㅋㅋㅋ나이가 나오는 건가요...?

cyrus 2015-06-19 16:51   좋아요 0 | URL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아이들은 외판원이 뭐하는 사람이 잘 모를 겁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6-1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국에 오기 전까지 읽은 책은 거의 대부분 금성출판사 등에서 어머님께서 사주신 전집류입니다. 한국/세계 위인전기, SF모음, 그리고 약 3-400권 정도로 소설/문학/위인전기로 구성되었던 계림출판사의 책이 기억나요. 지금까지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텐데, 다 남들 주고 남은건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이야기성서네요.ㅎㅎ 추억이 마구 돋아납니다..

cyrus 2015-06-19 16:52   좋아요 0 | URL
역시 금성출판사 전집류를 읽었거나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

돌궐 2015-06-19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윈터펠트 `아이들만의 도시`가 몇 년 전에 아롬주니어에서 새로 나왔어요. 목록에 절판되었다고 나와서요.
저는 에이브 문고 44권을 갖고 있었는데 `파묻힌 세계`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폼페이 발굴 등 고고학자들 이야기였는데 왜 그리 재미나던지...

cyrus 2015-06-19 16:57   좋아요 0 | URL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돌궐님이 알려주신 책 제목을 검색해보니 작가명이 ‘헨리 빈터펠트’로 나오는군요. 만약에 어렸을 때 <파묻힌 세계> 같은 책을 읽었더라면 무척 좋아했을 겁니다. ^^

박균호 2015-06-1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브 문고에 대한 `정확하고 방대한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아..다시 에이브 문고를 찾아봐야 하나...ㅎ

cyrus 2015-06-19 16:58   좋아요 0 | URL
균호님의 책이 아니었으면 에이브 문고의 실체를 몰랐을 겁니다. 사실 예전부터 에이브 문고에 어떤 작품이 있었는지 궁금했었거든요. ^^

맥거핀 2015-06-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 정말 추억돋는 글입니다. 저희집에 이 에이브 전집이 있었어요. 저희 어머니가 귀가 얇으셔서 방문판매 아저씨한테 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저야 좋았죠. 어렸을 때 정말 이 책들 많이 봤습니다. 기억을 짜내 보면 전집 중에 아예 읽지 않은 것도 있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책들도 있구요.

올려주신 제목을 보고 몇 개 기억해보면 룰루와 끼끼, 이거 펭귄이랑 북극곰 나오는 이야기였고..얼음 바다 밑 노틸러스, 이거는 중편 두 개로 된 구성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뒤에 린드버그(대서양을 최초로 비행기로 횡단한..그 이후에 유괴사건으로도 유명해진 그 린드버그) 이야기가 같이 있었죠. 저는 그 린드버그 이야기 좋아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몇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콘티키도 참 좋아했고, 페루 쿠스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건 제목이 무엇인지 잘 매칭이 안되네요. 돌이켜보면 약간 탐험심을 북돋우는 소년만화 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저는 그런 이야기는 대체로 다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들이 요새 꽤 구하기 어려운 것 같군요. 제가 가지고 있던 전집은 전부 사촌동생 물려줬는데, 그 집에 아직 있을 가능성도 희박하겠죠. 정말 저 중에 몇 권은 저도 구해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아무튼 옛 추억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 고맙습니다.^^

cyrus 2015-06-19 17:00   좋아요 0 | URL
전집류를 읽으면 계속 반복해서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이 있는 반면에, 그냥 제목과 표지만 봐도 내용이 재미없을 것 같은 작품이 있었죠. 저도 맥거핀님처럼 집에 있는 전집류를 다 읽어보지 못했어요. 어렸을 때 읽은 책을 조금이라도 기억하시다니 대단합니다. 이제는 재미있게 읽은 책 내용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

초딩 2015-06-2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개 덕분에 구매했습니다. 땡스 투가 제대러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플 로그인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장바구니에 담을 때 땡스투가 잘 안되는 경우가 있어 개발팀에 문의를했는데 뾰족한 답을 받지 못해 일일이 다시 확인을 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불안 불안 하네요 ㅎㅎ

cyrus 2015-06-22 10:28   좋아요 0 | URL
지난주에 땡스투 확인했습니다. 별 것 아닌데 직접 문의까지 하시다니... 감동했습니다. 요즘 땡스투 적립금 한 번 받기가 쉽지 않아서 거의 신경 안 쓰고 살았거든요. 아로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5-06-2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균호 작가님과 아는 사이세요? ㅎㅎ

cyrus 2015-06-22 20:14   좋아요 0 | URL
온라인 공간에서 만난지 얼마 안 됐습니다. ^^

박사장 2015-08-05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abe전집을 몰랐는데 지인이 이사하면서 전집88권중 71권을 주시고 가셨는데.. 귀한책인가보네요.. 울아이들에게 읽힐까 했는데 아직은 어려울거같고요.. 가지고 있는게 나을까요.. 아님 정리하는게 나을까요...

cyrus 2015-08-05 22: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박사장님. 만약에 박사장님과 아이들이 전집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비록 결번이 있긴 하지만, 온라인 중고 사이트에 팔면 에이브 전집을 원하는 구매자가 있을 겁니다.
 
수집의 즐거움 -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수집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두리반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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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한때 이런 말이 유행인 적이 있었다. 줄임말로 하면 ‘취존’이라고도 한다. ‘취향’의 의미가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그런데 이 ‘취향’이라는 단어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17세기 유럽에서 취향은 대상의 미적 가치를 이해하는 특별한 능력을 의미했다. 칸트는 취향을 아름다움을 판정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취향의 의미에서 ‘미적 가치’라는 핵심 단어가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취향’은 일상 속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그저 그런 단어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대상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취향에 따라 사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오덕후’라고 부른다. ‘오덕후’는 ‘오타쿠(おたく)’를 한국식으로 변형한 준말이다. 자기의 관심 분야에 몰입하고 심취하는 사람을 ‘오타쿠’라 부른다. 자기만족을 위해 관심 분야에 몰두하며 상당한 지식과 정보를 소유하거나 관심 대상을 수집한다. 그러나 너무 관심 분야에 푹 빠져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사람으로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은 여전하다. 한국에서 ‘오덕후’에 대한 인식은 일본에 비해 좋지 않은 편이다. 다 큰 어른이 애들이 볼법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거나 캐릭터 관련 장난감을 사면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덕후가 만화 애니메이션에 빠진 어른 아이라는 삐딱한 고정관념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를 늘 공유하려는 훌륭한 오덕후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하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비주류로 취급받던 시절은 지나가고, 당당하게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물건을 수집하고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오덕후’라는 단어 대신에 ‘수집가’라고 불러 보자. 흔히 ‘수집가’라면 값비싼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생각해보면 피규어를 모으는 사람도 엄연히 말하면 피규어 ‘수집가’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피규어 오덕후’라고 말한다. ‘수집가’와 ‘오덕후’, 두 단어는 서로 의미는 같지만, 전자를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모아두면 나중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을 ‘수집가’로 부르지만, 쓸데없는 물건을 모아두는 데 돈을 펑펑 쓰는 사람이 한심해서 ‘오덕후’라고 부른다. ‘수집’을 무조건 ‘돈’과 함께 연관 짓는 인식 탓에 평범한 수집품을 모으는 사람들의 열정이 무시당하기 쉽다. 그리고 수집가는 돈이 많아야 한다는 편견 또한 수집 능력을 낮춰 보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러나 수집가로 정평이 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흡연과 음주를 줄이면서까지 구매비용을 마련한다.

 

양철로 만든 장난감을 가리키는 틴 토이(Tin toy)를 수집하는 누똥바 씨(닉네임)는 수집품을 가격으로 산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름대로 고생하면서 완성한 틴 토이 컬렉션이 고작 자신의 조카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기는 친척의 농담에 실망하기도 한다. 수집가의 열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수집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남의 수집품을 ‘돈이 될 만한 것’ 또는 실용성 있는 물건으로만 생각한다. 《수집의 즐거움》에 소개되는 22명의 수집가들은 오직 재산 증식 목적으로 진귀한 물건을 모으지 않는다. 수집가는 남들보다 평범한 물건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감동할 줄 아는 특별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22명의 수집가는 칸트가 정의했던 진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공예를 사랑해서 공예품을 수집했던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처럼 22명의 수집가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김근영 씨는 코카콜라 로고와 패키지 디자인이 좋아서 코카콜라 병을 수집하고,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 씨는 앨리스 속에 실린 삽화에 매료되고 나서 나라별로 출간된 앨리스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앤티크 용품 수집가이자 ‘앤지스 앤티크 갤러리 카페’ 대료 송앤지 씨(본명 송현미)는 파손된 수집품마저 멋있게 꾸밀 줄 안다. 파손된 커피잔 조각을 버리지 않고, 의자 위에 붙여서 하나의 멋진 모자이크 무늬가 있는 테이블로 만든다. 송앤지 씨는 수집품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도 넘치고, 파손된 수집품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뛰어난 미적 안목을 가지고 있다.

 

칸트와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예술욕이 소유욕과 결합하면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영유하고 싶은 수집의 열정이 생긴다. 수집가들은 모든 사람이 평범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지금도 수집품을 모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을 함으로써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알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취향’이다. 이들의 수집 열정이 새로운 대중문화로 형성되는 과정은 기록되어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수집가의 취향을 존중해줄 수 있다. 수집가를 ‘오덕후’라고 비아냥거리는 당신에게 묻는다. 수집가를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1) 아름다운 무언가를 찾고 싶은 뜨거운 열정을 지닌 수집가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1)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 나오는 문장을 차용하여 새롭게 바꿔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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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6-17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취향과 덕후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걸 믿습니다. ^^

cyrus 2015-06-18 10:0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다양한 관심에 몰입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

보라마녀 2015-06-1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앨리스책 모은다는... 미는 무엇인가의 물음에 미학자가 미는 취향이며 취미다고 했는데 현대미술에 어울리는 정의 같아요.

cyrus 2015-06-18 10:11   좋아요 0 | URL
보라마녀님이 앨리스 책을 모으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앨리스는 내용이 어려워도 다시 읽고 싶은 매력적인 동화예요. ^^

만병통치약 2015-06-1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집가들 덕후들의 열정과 노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저 같이 게으른 사람은 구경만합니다..^^ 저는 버리는데애 취미가 있어서 틈날때마다 책 말고는 다 버려요 ㅋㅋ

박균호 2015-06-17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부족한 책을 이리도 면밀히 읽어주시고 이런 훌륭한 서평을 남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5-06-17 23:47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쓰신 저자세요?

cyrus 2015-06-18 10:1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잊고 있었던 수집욕이 생겼습니다. ^^

박균호 2015-06-1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렇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5-06-17 23:55   좋아요 1 | URL
역시 알라딘 북플에는 고수분들만 계세요. 넘 좋아요. 많이 배우고 즐기겠습니다.^^

박균호 2015-06-1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아닙니다...ㅠㅠ 여기 방금 시작한 초보입니다...ㅎㅎ 제가 많이 배워야죠..

AgalmA 2015-06-1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 때문에 뭘 모으기가 너무 버거워요ㅜㅜ...책도 꾸준히 팔고...흑))

cyrus 2015-06-18 10: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수집 공간 문제가 수집가라면 겪게 되는 숙명적인 고민이죠. ^^;;

바람향 2015-06-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집품들이 정말 멋질 것 같네요.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ㅎㅎ

cyrus 2015-06-18 10:18   좋아요 0 | URL
책 속에 정말 멋진 수집품을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

보물선 2015-06-1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도 각주에 밝히시는데!!! ^^

cyrus 2015-06-18 10:19   좋아요 1 | URL
예전에 그냥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이제부터는 신중하게 글을 써야겠습니다. 새삼 인용 출처 공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

마녀고양이 2015-06-18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덕후가 일종의 미학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수집가라는 명칭도 좋지만, 오덕후라는 명칭도 사실 맘에 들어요.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명칭 자체에서 풍기는 멋이 느껴지기도 해요. ^^

cyrus 2015-06-18 18:50   좋아요 0 | URL
사실 수집가들은 자신들을 오덕후라고 부르든지 간에 호칭에 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오덕후가 한자어라서 마고님 말씀처럼 고풍스럽고 특별한 전문가 같은 느낌이 느껴져요. ^^

붉은돼지 2015-06-1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벨수집하는 일인으로 일단 보관함으로 보냅니다.
전에는 수집에 관한 책도 수집했어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녀 수집하는 노인>까지..ㅋㅋㅋ

저도 마녀고양이님 말씀처럼 오덕후라는 호칭도 괜찮은 것 같아요
원래는 부정적 의미가 맞긴 하지만.... 무슨 오패칠웅 같은 제후와 같은 느낌...
단어 자체에서 풍기는 멋이 있어요
한자로도 좋은 의미로 쓸 수도 있을것 같구요..^^

cyrus 2015-06-18 18:5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붉은돼지님이 서재에 공개했던 수집한 병뚜껑 사진이 기억이 납니다. ^^

stella.K 2015-06-1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콜라병은 어디서 구했을까? 예쁘네.

사실 난 덕후란 말을 몰랐다가 지난 주 아는 지인한테서 알았다.
이런 따분하다면 따분한 세상에서 뭔가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좋겠지. 난 책 모으는 취미 밖에 없는데 그것도 자제하는 중이다.
늘어놓을 곳이 없어서 말이지.ㅠ

cyrus 2015-06-18 18:53   좋아요 0 | URL
저런 병, 생각보다 가격이 비쌉니다. 그만큼 희소성이 있어서 꽤 높은 가격이 책정 되요. 저도 책 구입을 자제하는 편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