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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영혼의 거울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6
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최지영 옮김 / 다빈치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이번 달 초부터 스페인의 화가 고야를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에 고야의 삶과 미술 세계를 소개한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5년 전에 읽었던 《고야, 영혼의 거울》도 오랜만에 펴봤다. 《고야, 영혼의 거울》은 2001년에 출간되었고 10년 뒤에 개정판이 나왔다. 재미있게도 《고야, 영혼의 거울》 구판의 서평을 마지막으로 쓴 사람은 나였다. 서평을 읽어 봤다. 역시 몇 년 전에 쓴 글을 읽으면 마치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벌거벗은 채 찍었던 돌 사진을 보는 것 같다. 고작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부끄러움이 벌써 내 얼굴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1799년)
《고야, 영혼의 거울》 개정판을 다 읽고 난 다음에 5년 전에 썼던 서평을 읽어봤다. 서평 내용이 부실했다. 책, 아니 고야를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고, 중구난방 고야의 그림 달랑 몇 점 소개하는 데 그쳤다. 그림을 제멋대로 해석한 채 고야의 미술 세계를 함부로 단정하는 오류도 저질렀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1799년)가 수록된 판화집 「변덕」(Los Caprichos)은 미신과 흑마술에 사로잡혀 이성이 압도당한 인간상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인간 본성의 추악함과 사회의 부조리가 만나서 생긴 사회의 불순물은 우스꽝스럽거나 그로테스크한 인간 혹은 추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관람객 앞에 등장한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이성을 지배하는 몽상과 환상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도 환상과 이성이 만나면 새로운 예술이 등장할 것임을 예찬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나는 그림 제목만 보고 몽상에 마비된 이성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썼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카를로스 4세 가족」(1800년)
지금까지 나는 《고야, 영혼의 거울》 한 권만 읽고 나서 고야를 제대로 안다고 착각했다. 고야를 친 프랑스파라고 단정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정에 개입하면서 유럽 패권을 향한 탐욕의 손을 뻗치려고 했을 때, 고야는 수석 궁정화가로서 왕족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계에 몸을 담은 귀족들까지도 깊이 친분을 맺고 있던 터라 고야의 주변에는 구체제를 옹호하는 기성세력과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매료되어 구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유주의 세력이 있었다. 카를로스 4세가 다스리던 스페인도 프랑스에서 휘몰아치는 혁명의 바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울리는 변화의 진동에 무감했으며 통치 능력이 부족했던 카를로스 4세는 스페인의 재상이자 왕비의 내연남인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통치를 위임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프랑스의 개입 앞에 힘을 제대로 못 쓰는 식물 국가가 전락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왕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지배계층의 권력욕에 신물이 나던 고야는 궁정화가 임무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왕실의 그림 주문을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인 스페인 왕 조제프는 구체제 타파에 목표를 두는 노선을 추구했으니 고야는 반신반의 그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심은 스페인을 쥐락펴락하는 프랑스를 외면했고, 나폴레옹은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스페인 민중 앞에 총칼을 들이댔다. 이 시기가 고야에게는 내적으로 무척 혼란스럽고 복잡했던 시기였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1808년 5월 3일」(1814년)
고야는 궁정 사람들을 위해서 화려한 그림을 그리면서도 스페인 민중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프랑스군과 이를 묵인하는 친프랑스파 세력을 경멸하여 동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까지 제작했다. 수석 궁정화가 고야의 업적만 본다면 그를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예술 창작욕을 채우는 기회주의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전쟁의 참화」나 「1808년 5월 3일」(1814년) 같은 전쟁의 광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면 붓을 무기로 삼은 고야의 저항 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고야를 무조건 친프랑스파 혹은 기회주의자로 보는 것은 편협한 평가다. 스페인의 최고 화가로 군림했던 고야도 재정적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부채에 시달리던 고야는 수입을 얻기 위해 왕 앞에서 손에 붓을 쥐어야 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마르틴 사파테르」(1797년)
고야와 마르틴 사파테르의 우정은 고흐와 테오 형제와 함께 서양미술사에서 기억해야 할 브로맨스(bromance)다.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보년 편지글은 고야 한 사람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헌자료이다. 고야와 사파테르의 서신 왕래는 사파테르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고야의 편지에는 그림 작업의 진전 상황이나 가족 안부 그리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과 함께했던 사냥 활동까지 사소한 일상들을 일일이 보고하듯이 적혀 있다. 고야는 사파테르를 아내나 연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썼는데, 사파테르와의 각별한 우정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주고 있다. 고야가 얼마나 사파테르를 좋아하느냐면, 자신의 아내가 예정일보다 일찍 출산하게 되자 사파테르를 일찍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감정을 드러낼 정도다. 고야의 아내는 고야가 이름을 날리기 전에 수석 궁정화가로 인정받았던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이다. 성공에 대한 집념이 뚜렷했던 고야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바예우와 친분을 맺었지만, 바예우가 자신보다 조금 더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바예우 때문에 자신의 앞길이 막힐 뻔한 일에 자존심 상한 감정을 사파테르에게 보내는 편지에게 드러내기도 했다. 고야 입장에서는 처남에 대한 불만을 아내에게 쉽게 터놓을 수 없었다. 바예우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아내와의 사랑보다는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파테르의 우정을 더 중요시하게 여긴 듯하다. 사파테르는 성공과 명예를 얻기 위해 이미 전쟁 같은 삶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던 고야를 제대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어쩌면 고야는 하루하루 내면에서 일던 감정의 폭풍우를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휴식같은 친구'를 더 가까이 두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