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의 물성을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새책주의자다. 절판이라 새 책으로는 도저히 못 구할 때 만 헌책을 산다.
그런 내가 쓴 열여덟 번째 책, 〈100문장으로 쓰고 배우는 청소년 필수 고전〉은 개인적으로 오래된 로망 하나를 실현한 책이다. 띠지가 있는 책!!r교보문고 MD 구환회 작가 책 〈독서를 영업합니다〉에서 띠지 이야기를 읽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띠지 하나가 ‘안 살 책’을 ‘사는 책’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취지였는데, 그 문장이 묘하게 오래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띠지가 있으면 책이 한층 더 예뻐진다. 좋은 띠지는 책에 버버리 코트를 입혀주는 것 같다. 실용성과 멋이 동시에 붙는다.
소규모 출판사이지만 대규모 출판사처럼 움직이는 그래도봄 출판사 오혜영 대표가 “책을 예쁘게 만들어야겠지요”라고 했을 때부터 마음이 들떴는데, 진짜로 표지에 공을 들이고 후가공을 하고, 띠지까지 만들어줬다. 진흙 같던 원고가 사람 구실을 하게 된 느낌이다. 책이 ‘내용’만이 아니라 ‘모양’까지 갖추는 순간이 이렇게 고맙구나 싶었다.
요즘 내 책 화면을 매일 캡처한다. 교보문고에서는 국내도서 순위권에 들어가 있고, 예스24 판매포인트는 6,500점을 넘겼고, 알라딘은 4,500점을 넘겼다. 이런 숫자들이 내 책에 찍히는 경험은 처음이라서 자꾸 확인하게 된다. 여러모로 감사한 나날이다.


아주 오래전, 포대에 둘러싸여 누워 있던 조카를 보며 세상 따뜻한 미소를 짓던 매형이 떠오른다. 요즘 이 책을 바라보는 내 표정이 아마 그때랑 비슷할 것이다. 집에 두면 마음이 밝아지는 물건이 있다면, 이 책이 딱 그런 쪽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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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6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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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5-12-16 20:42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고맙습니다 !!!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교사도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면에서 '고비용 저효율'적인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느끼는 '늙은 교사'의 장점이 딱 하나 있다. 웬만해서는 학생들의 일로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 끓는 미혼 시절엔 아이들의 예의 없는 말투 하나에도 울컥하고 혼을 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내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학생들을 좀 더 관용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를 교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인지, 자식 농사가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학생을 지도하면 할수록 아이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학생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면 화가 나기보다는 '저 아이가 왜 저럴까, 무슨 사정이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교사가 먼저 말을 예쁘게 하면, 학생도 결국은 예쁘게 말을 하기 마련이니까.

<100문장으로 쓰고 배우는 청소년 필수 고전>도 딱 그런 '부모의 마음', ' 교사의 마음'으로 썼다. 고전이 어렵고 지루한 훈계가 아니라, 오늘의 청소년이 고민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는 '재미난 옛이야기'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자상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기왕이면 교과서 속 고전을 다뤄서 성적에도 도움이 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소 난해하고 배경지식이 필요한 고전 한 줄을, 청소년이 넙죽 받아먹을 수 있도록 내가 대신 오물오물 씹어서 줄이고 더했다.

가령 이런 문장이 그렇다.
"조금만 더 가면 기쁨과 영광이 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인가? 이제 우리의 마음이라는 작은 배는 더 나은 물결을 향해 돛을 올렸으니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다."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이 문장을 두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목표를 향해 가다 보면 가장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요. 그 고비는 종종 '끝이 가까웠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국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기쁨이 여러분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순간입니다." (본문 282쪽)

고전이 회초리를 든 훈장님이나 잔소리하는 꼰대가 아니라, 힘들 때 가장 먼저 손을 건네는 따뜻한 친구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 책이 아이들의 작은 배가 순항하는 데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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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 - 우주 불평등 시대를 항해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긴박한 질문들
최은정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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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문연구원 우주위험감시센터 센터장 최은정 선생의 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조금 충격을 받았다. ‘우주라고 하면 당연히 우리 모두의 것, 인류 전체의 공동 재산쯤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마치 땅을 팔라는 미국 대통령에게 이 땅과 이 공기를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느냐라고 되물었다는 시애틀 대추장의 연설이 떠오르듯, 넓고 넓은 우주는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문과적인 생각이 내 안에 아주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라는 이 제목 한 줄은, 내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온 우주는 모두의 것이라는 믿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책을 읽어 보니, 이 문장은 단순히 자극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저자에 따르면 우주는 돈을 주고 사고파는 부동산은 아니지만, 깃발을 먼저 꽂는 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선점의 각축장이다. 이는 마치 제국주의 시절, 열강들이 앞다투어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었던 풍경과 섬뜩할 정도로 닮았다. 저자는 우주의 불평등이 바로 궤도(Orbit)’에서 시작됨을 지적한다. 과학 유튜버 궤도가 자신의 닉네임을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길이라는 뜻에서 따왔듯, 궤도는 위성에 생명선이자 유일한 길이다. 지구와 가까운 저궤도부터 중궤도, 그리고 방송·통신 위성이 머무는 정지궤도까지, 이 보이지 않는 하늘길은 한정된 자원이다. 모두가 갖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이 길목을 차지하기 위해 지금 우주는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문제는 이 한정된 도로에 너무 많은 차가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 차원의 경쟁을 넘어 스페이스X 같은 민간 기업들까지 수천 기의 위성을 쏘아 올리며 우주는 그야말로 극심한 교통 체증을 앓고 있다. 궤도는 이미 포화 상태다. 도로가 막히면 사고가 나듯, 우주에서도 충돌 위험은 일상이 되었다. 수명을 다한 채 방치된 유령 위성들과 그들이 부서져 만들어낸 수만 개의 파편들, 우주 쓰레기는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궤도를 떠돌며 살아 있는 위성들을 위협한다. 저자의 말대로 우주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난개발과 폐기물로 신음하는 위험한 쓰레기장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어서 지속성이라는 화두를 꺼낸다. 보통 지속 가능한이라는 말은 환경 문제와 함께 쓰이는 말인데, 그것을 우주에 붙여 쓰니 처음에는 다소 낯설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지속 가능한 우주는, 단순히 우주를 쓰레기로부터 보호하자는 수준의 구호가 아니다. 우주 개발에는 반드시 궤도 역학적 지속 가능성이라는 과학적 기준이 내재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이를 위해 최소 에너지 경로를 최적화하고, 인공위성이 임무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소멸하도록 설계하며, 특정 궤도에만 위성을 몰아넣지 않고 궤도 배치를 분산하고, 다중 사용자가 동시에 이용하는 환경을 전제로 시스템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처럼 엉망진창으로 막히고 부딪히는 하늘길이 아니라, 교통 신호에 따라 차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도로처럼, 우주의 움직임 자체를 처음부터 지속 가능하도록설계하자는 이야기다.

 

이어서 저자는 시선을 달로 옮긴다. 이 책에서 달에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는, 달이야말로 인류의 우주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달 탐사의 역사가 곧 인류 우주 탐험의 역사와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흥미로운 사례와 논의를 거쳐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분명하다. 달 궤도 역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관리되고 배분되어야 할 공간이자 자원이라는 점이다. 더 빨리 올라가는 나라가 먼저 차지하는 선착순 놀이터가 아니라, 임무의 중요도와 공공성을 기준으로, 궤도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할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위성이 스스로 위치를 조정하는 자율 기동 기술, 충돌 회피 기술, 안정적인 달 주변 통신 인프라 구축이 필수이며,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국제법과 거버넌스 모델, 규범을 만들어 가는 전략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달 탐험의 역사를 따라가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느낀 대목은 현대 로켓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달 탐험에 결정적인 토대를 놓은 치올콥스키가 열일곱 살에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읽고 우주 비행의 꿈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15소년 표류기80일간의 세계 일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쥘 베른이다. 얼핏 듣기로, 오늘날 우주 개발의 선두에 서 있는 일론 머스크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책 가운데 하나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 식민지 독립 혁명을 그린 고전 SF 소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리다 보면, 인류의 기술 혁신이라는 것이 어쩌면 과학자보다 먼저 문학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마음껏 그려 내면, 과학자는 그 무모한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설계도로 바꾸는 사람들인 셈이다. 결국 이과의 기술과 문과의 상상력은 따로 떨어진 두 영역이 아니라, 앞에서 끌어당기고 뒤에서 밀어주는 하나의 몸처럼 서로 연결되어 움직인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나만의 해석이지만, 달과 우주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의 출발점에 언제나 한 편의 소설과 한 사람의 독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0세기 후반까지 우주 개발은 말 그대로 기술·과학·국가 체계가 총동원된 총력전이었다. 군사 중심의 과시적 기술 경쟁이자, 정부 주도의 우주 개발, 이른바 올드 스페이스의 시대였다. 그런데 이제는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같은 인물이 상징하듯, 민간 기업이 우주 개발을 주도하는 뉴 스페이스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스페이스X가 보여 주는 저비용·고빈도의 소형 발사체 운용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여기는 우주 자본주의’, 그리고 그에 기반한 우주 경제 생태계의 등장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공공 자산이어야 할 우주 공간이 일부 기업과 국가에 의해 상업적으로 독점될 위험, 국가 간 우주 개발 격차가 더 벌어지는 문제는 전혀 가볍지 않다.

 

디지털 주권을 말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우주 주권이 새로운 국제적 이슈가 되었지만, 후진국들은 애초에 우주에 발을 들이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우주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개방된 인류의 공공 영역으로 다시 정의하고,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틀과 인류 모두의 우주를 위한 우주법 체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이렇게나 중요한, 우리의 미래를 가를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훨씬 더 널리,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느꼈다. 모두가 지구가 네모라고 믿던 시대에 조용히 아니다, 지구는 둥글다라고 말했던 코페르니쿠스처럼, 이 책은 우주는 모두를 위한 곳이라는 안일한 믿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갈릴레오의 말을 끝내 외면했던 사람들처럼 다시 행동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시점의 새로운 우주 질서를 다룬 이 책이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저자 또한 비슷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지 않을까 짐작하게 되는 이유는, 중학생만 되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친절한 언어로 우주 정책과 기술, 법과 거버넌스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우주 미래 전략 부재가 안타까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부담 없이 읽히게 만드는 저자의 필력에 감탄했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는 단순한 우주 교양서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떤 우주를 선택하고 어떤 우주 질서를 지지할 것인지 묻는, 드물게 소중한 질문을 던지는 책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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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영업합니다 - 온라인서점 MD의 읽고 파는 이야기
구환회 지음 / 북바이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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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쓴 책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독서가에게 서점 주인, 사서, 작가, 출판사 직원이 쓴 책이 재미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독서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은퇴 후에, 동네에 조그마한 서점을 하고 싶어 하고, 죽기 전에 한 권의 책은 내고 싶어 하고, 사서가 되어 좋아하는 책 속에 묻혀 살고 싶어 하고, 출판사를 차려 도저히 번역이 안 되는 명작을 직접 번역·출판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직업들은 책을 좋아하다 보면 한 번쯤은 어렵지 않게 대면할 기회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책의 유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우리 독서가들에게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직업이 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빨리 신간을 접하고(간혹 책을 쓴 작가보다 빨리), 작가와 출판사보다 더 간절하게 책이 잘되길 바라며, 작가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직업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마치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포경선 선원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드는 고래기름이 없다면 고귀한 양반들이 촛불조차 켤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없으면 출판계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인터넷 서점 MD들이다. 그들은 너무나 소수이고 대외적으로 노출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출판계를 움직이는 엔진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가깝다. 작가인 나도 서점 MD를 단 한 번도 알현한 적이 없다. 그런데 책을 내다보면 그들이야말로 책의 성공을 좌우하지는 않지만 좋은 책을 찾아내는 신통한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일하고 책을 어떻게 바라볼지 언제나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이 나라의 최고 노른자 땅에 돈 안 되는 서점을 운영하여 수많은 독서가로부터 존경받는 교보문고 MD 구환희 님의 <독서를 영업합니다>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독서를 영업합니다>를 읽다 보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서점 MD의 세계와 실상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마치 염라대왕처럼 36개의 계단 위 옥상에 앉아 고개를 잔뜩 숙이고 처분을 기다리는 출판사 직원들 앞에서 책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그들도 작가나 출판사처럼 아니 더 간절하게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출판계의 수레바퀴였다. 일찍이 MD뭐든지 다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들은 바는 있지만, 그들이 오프라인 행사도 주관하면서 모객을 어떻게 하면 더 모을지 고민하고, 몰려드는 책더미가 무너지는 책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책 쌓기 아트를 수련하는 고달픈 직업이라는 것도 알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질 정도로 많은 책이 모였다면 이제는 책을 비우거나 서가에 꽂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책 쌓기 기술에는 MD의 자존심이 걸려있다. ‘다시는 너를 무너지게 두지 않겠다라는 신념을 불태우며 MD는 온 힘을 다해 책 탑을 복원한다. 사실 일이 많아 바쁘므로 예술혼을 빙자해 책을 방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건 예상한 바 있지만 신간이 나오고 책을 홍보하려는 출판사 직원과의 미팅이 분 단위로 쪼개지고, ‘잠깐 책만 전해주고 갈게요라고 말하는 출판사 직원이 왜 공포스러운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그들은 책의 재판관이 아니라 책을 팔아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책과 작가를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들이라니.


책을 파는 MD에게 저자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 모든 MD는 저자가 쓴 책을 팔고, 모든 독자는 저자가 쓴 책을 읽는다. 1차 직업 주체인 저자가 집필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MD 같은 2차 직업은 사라진다. (작가님 덕분에 월급을 받습니다...) 따라서 업무 때문에 책을 말해야 할 때 비판이나 비난은 잘 하지 않는다.


이제 이 책의 금싸라기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대체 서점 MD들은 어떤 책을 주목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독자, 작가, 출판사 직원 모두에게 귀한 조언이자 가이드가 될 것이다. 서점 MD야말로 가장 다양하게 그리고 빨리 읽을만한 책을 고르는 일종의 사금을 거르는 채와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첫째, 상을 받은 책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니고 노벨상, 부커상, 전미 도서상, 서점대상, 휴고상과 같은 상을 받은 책이다.


둘째, 추천사가 뛰어난 책이다. 나는 유명한 사람의 추천사가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추천사 내용이 뛰어난 책이란다. 그러니 유명 인사를 섭외해 출판사가 쓴 초안을 그대로 싣는 것은 크게 도움이 안 되겠다. 무명작가일지라도 신형철 평론가나 황정은 작가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극찬을 했다면 일단 귀가 솔깃해진다고.


셋째, 제목이 좋은 책이다. 호기심을 자아내거나 감각적이고 신선한 언어 사용이 인상 깊은 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제목력이야말로 출판사와 작가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가령 광화문 그 사내를 출판사가 칼의 노래로 제목을 바꾸지 않았다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그들의 운명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초대형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아무리 요리조리 변용을 해봐야 신뢰도를 떨어뜨릴 뿐이다.


넷째, 표지가 강렬한 책이다. 나도 이 부분에 공감한다. 대체 왜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서점 MD와 마찬가지로 일반 독자들은 표지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만 생각하면 되겠다. 책 좀 읽었다는 사람은 표지만 봐도 자비로 출판된 책이라는 것을 한눈에 안다.


다섯째, 첫 문단이 강렬한 책이다. 첫 문단이 강렬한 책은 웬만해서 실패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의 띠지로 넘어가자. 독서가들은 대체로 띠지를 귀찮아한다. 오죽하면 띠지를 만든 자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저주가 나왔을까. 그래서 독자들 사이에서는 띠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고찰이 끊이지 않는다. 구환희 MD는 띠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가 생각하기에 띠지는 수상 이력, 추천사를 실을 최적의 공간이며 책을 버려질 위기에서 구원해 주는 하나님이 건네준 일종의 생명의 밧줄일 수 있다.


눈치를 챈 사람이 없겠지만 이 서평은 이 책을 반만 읽고 쓴 것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읽다가 반만 읽고 이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마치 <모비딕>에 고래에 관한 백과사전식 지식이 가득 찬 것처럼 출판, 독서, 글쓰기 등에 관한 보물이 쏟아져 나와 도저히 한 수레에 싣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읽을수록 뼈와 살이 되는 귀한 내용이 나와서 어떤 내용을 빼야 할지 내 아둔한 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으른 서평이라고 비판 마시라.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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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0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른 서평이라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왜 이렇게 글을 잘 쓰셨냐고 원망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책에 대해서는 소개하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 느낍니다.

오래전 출판사 영업자로 일했던 시절 만났던 여러 MD들이 떠오르네요.

박균호 2025-12-06 16:52   좋아요 0 | URL
네 글도 내용도 좋은 책이었습니다 !!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에는 남편과 불화 끝에 억울하게 죽어간 귀족 부인의 유령 이야기가 나온다. 가문의 몰락을 예고하는 유령의 발소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는 유령이야말로 집안의 전통과 고귀함을 상징하는 특권이라는 대사를 통해서 귀족사회를 꼬집는다


놀랍게도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으로 돈을 번 신흥 부르주아가 등장하자 몰락해 가는 전통 귀족들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증명할 게 오래된 핏줄전설밖에 없었다. 그래서 돈 좀 벌었다고 다 귀족인가? 우리처럼 수백 년 된 저택과 전용 유령(family ghost) 정도는 있어야지 진짜 명문가지.” 뭐 이런 마인드였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한 독살당한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는 장소도 엘시노어 성이었다. 대체로 서유럽의 유령은 가난한 민중이 아니고 거대하고 오래된 저택이나 성이 무대였다. 가난한 자에게는 유령도 사치였고, 지켜야 할 성과 재산이 있는 귀족 정도는 되어야 유령이 붙어있을 자격(?)이 생긴다. 아마도 찰스 디킨스는 이런 클리셰를 빌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러시아의 유령은 서유럽의 유령과 사뭇 다르다. 서유럽의 유령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러시아 유령은 힘없고 가난하며 착취당한 서민들의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다닌 공병학교가 있고 그가 작품활동을 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화려한 건축물에는 유령 이야기가 넘쳤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향하는 창으로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애초에 도시를 건설할 장소가 아니었다. 늪지대였기 때문이다. 이 늪지대를 나무와 돌을 맨손으로 메운 것이 수많은 민중이었다. 이들의 한이 유령으로 표출된 것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유령이었던 셈이다. 러시아 유령의 활동무대는 저택이나 성이 아니라 춥고 습한 거리, 비좁은 하숙방, 네바 강변이었다.

 

고골의 외투는 가난한 유령을 다룬 대표작이다. 가난한 말단 관리는 힘들게 장만한 외투를 도둑맞자 죽어 유령이 되어 자기 외투를 찾아 달라며 지나가는 고관대작들의 외투를 빼앗는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천명한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어김없이 가난한 유령을 등장시켰다. 사실 가난한 유령의 기초를 다진 것은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이다.

 

그의 서사시 청동 기마상에는 가난한 하급 관리 예브게니가 등장한다. 그는 결혼 준비로 모은 모든 재산과 약혼자를 네바 강의 홍수로 잃자 미친 상태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배회한다. 살아 있는 유령이었던 셈이다. 이 예브게니가 나중에 진짜 유령으로 돌아온 것이 고골의 외투의 하급 관리 유령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가 유사하다. 푸시킨과 고골이 러시아 민중들에게 추앙받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고전 소설을 읽다 보면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흥미로운 살아 있는 역사가 펼쳐진다. 이 고전 속 역사를 파고드는 것은 무척 흥미로울 뿐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학습이기도 하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전 속 인물의 이야기가 곧 오늘날 인물의 이야기이고, 고전 속 인물의 고민이 곧 현재 우리들의 고민이다.

 

100문장으로 쓰고 배우는 청소년 필수 고전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전만을 다뤘다. 놀랍게도 이 책에서 다룬 33권의 고전 안에는 현대 청소년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 빠짐없이 담겨있었다. 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못하더라도, 한 문장씩 따라 쓰다 보면 고전 속 인물의 고민이 오늘 내 마음속 고민과 자연스럽게 겹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서 옛 천재들의 현명한 해답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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