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책이 교보문고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어 대문에 걸렸다. 책을 낼수록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자는 생각하게 된다. 그다지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한 저자의 자괴감에서 생긴 감정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학생들에게는 지나간 시험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시험에 대비하라는 잔소리를 늘 하면서도 나는 늘 지나간 결과물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매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인터넷 서점의 판매 포인트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버릇이 한 십 년은 넘은 것 같다. 이게 무슨 내 경력에 도움이 될까 싶다.

 

차라리 앞으로 쓸 원고를 좀 더 생각하고 가다듬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지. 지난 책 뉴스를 검색하고 판매 현황에 신경을 쓸 시간에 지금 쓰고 있는 문장 하나를 더 살펴보는 것이 결국 좀 더 좋은 책을 내는 지름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처럼 굳이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좋은 책이라는 칭찬은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늘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출판사에도 도움이 되겠거니.

 

아마도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는 내가 쓴 책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책일 것이다. 이 책을 쓸 때만큼은 오로지 이 책에 집중한 것 같다. 글 쓰는 것을 늘 취미로 삼았는데 이 책은 글을 쓰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할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재미나게 쉽게 쓸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늘 내가 쓴 책을 다시 보지 않는데 이 책만은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쉽고 재미나다. 처음으로 내가 쓴 책을 부끄럽지 않게 제자에게 서명해서 선물할 생각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26-10-0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10-11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한 학생이었다. 출판사에서 과학 고전에 관한 책을 써보라고 해서 어찌어찌 쓰긴 했는데 오늘 숨이 턱 막히는 연락을 받았다. 부산의 모 중학교에서 이번에 나온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것. 저자인 나도 어제 막 전달받은 신간을 언제 또 살피고 이런 제의를 한 것인지 모르겠다. 전교생 5명인 학교의 영어 교사인 내가 전교생 5백 명인 학교에서 과학 고전을 이야기한다? 누가 봐도 예쁜 그림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요새 중학생들 나도 무섭다. 신통찮고 산골에서 온 나를 향한 그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이 실시간으로 그려진다.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놈들도 많겠지. 격렬하게 사양하고 싶다. 그런데 나를 믿고 책을 맡긴 출판사를 생각하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하다. 일단 가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이길 수 없는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6-10-01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해보세요. 응원합니다.

박균호 2026-10-01 07:12   좋아요 0 | URL
선생님 응원 감사합니다!
 

과학 고전을 사 놓고도 끝까지 읽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첫 장부터 수식과 낯선 개념이 이어지면 책을 읽다가 시험을 치는 기분이 든다. 이해 못 하는 나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될까 봐 아예 펴지 않게 된다.

나도 그랬다.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 공부를 하던 아이였고,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문학을 공부했다. 그 아이가 자라 30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 지문에는 과학이 자꾸 섞여 나왔고, 피해 온 과학을 교실에서 매년 다시 만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작 뉴턴과 찰스 다윈, 에르빈 슈뢰딩거를 비롯한 과학 고전 27편을 소개하는 책을 냈다.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다.

학생들도 그 지문에서 막혔다. 눈이 글 위에서 헛돌았고, 문제 하나를 풀고 넘어가도 비슷한 지문에서 같은 곳에 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설명하는 순서를 바꿨다. 만유인력과 자연선택, 지동설을 시험에 나오는 용어로 먼저 외우게 하지 않고, 그런 생각이 처음 어떤 질문에서 나왔는지부터 이야기했다.


'쉽게 쓴 책'이라는 말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독자도 있다. 이것마저 이해하지 못하면 정말 내가 과학에 약한 사람인가 싶어서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과학자에게는 당연한 설명이 문과 출신인 내게는 중간 한 단계가 빠진 듯 느껴졌다. 그래서 구구단도 못 외우는 문과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초등학생이 할 만한 '왜?'를 이어 갔고, 그렇게 확인한 설명을 한 단계씩 풀어 썼다.

DNA는 왜 김밥일까

이를테면 DNA 이중나선이다. 교과서 그림을 들여다봐도 왜 그런 구조가 되는지는 머리에 남지 않는다.

"김밥으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겉의 김과 밥이 전체 모양을 잡고, 안쪽에는 단무지와 햄, 달걀 같은 속재료가 줄지어 들어갑니다. 속재료를 아무렇게나 넣으면 김밥 굵기가 울퉁불퉁해지고 썰었을 때 모양도 흐트러져요. DNA도 바깥의 뼈대가 모양을 받치고, 안쪽의 염기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맞물려야 안정된 구조를 이룹니다." - 69쪽

큰 염기끼리 만나면 그 부분만 불룩해지고, 작은 염기끼리 만나면 가운데가 헐거워진다.

개념이 만들어진 과정만큼이나 책이 나오기까지의 사연도 만만치 않다.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영국 왕립학회가 직전에 <물고기의 역사>라는 도감을 내느라 출판 예산을 거의 다 써 버렸다.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자기 돈을 털어 인쇄비를 댔고, 왕립학회는 핼리에게 줄 보수마저 남아도는 물고기 책으로 치렀다. 만유인력이 물고기 도감에 밀릴 뻔했다.

화학책에 괴테의 연애소설이 등장하는 까닭

과학 고전이라고 해서 과학자 이야기만 나오지도 않는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로얼드 호프만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에는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악보와 고야의 그림이 실려 있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장편소설 <선택적 친화력>도 등장한다. 소설 초반에 귀족 부부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가 화학의 '친화력'을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대위는 어떤 물질들이 만나면 서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원래의 짝을 떠나 새로운 물질을 만든다고 설명해요. 두 쌍의 물질을 AB와 CD로 놓으면, 서로 짝을 바꾸어 AD와 CB가 된다는 것입니다." - 169쪽

얼마 뒤 에두아르트는 샤를로테의 조카 오틸리에에게 끌리고, 샤를로테는 대위에게 마음이 기운다. 괴테는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 이 대화를 뒤이어 벌어질 네 사람의 관계와 겹쳐 놓았다.

과학과 문학이 만나는 작품은 또 있다. 27편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넣었다. 두 소설은 생명을 만든 사람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바꿔도 되는지를 실험실보다 일찍 따졌다.

2028 수능, 문과라고 과학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출간 시점이 제도 변화와 맞물렸다. 2028학년도 수능부터 국어·수학·탐구의 선택과목이 사라지고, 탐구 영역에서는 모든 수험생이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을 함께 치른다. 문과 성향 학생도 과학의 기본 개념을 비켜 가기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수능 대비용 문제집으로 쓰지는 않았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2003년 도나 해러웨이의 글까지 약 460년을 따라가며, 과학사와 과학철학도 함께 담았다. 다루는 폭은 넓지만 문장은 지하철에서 낄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나게 썼다.

27편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우주가 궁금하면 <코스모스>부터, 생명이 궁금하면 <종의 기원>부터 펼치면 된다. 막히는 편이 나오면 덮고 다음으로 넘어가도 된다. 앞의 편을 읽지 않아도 뒤가 막히지 않는다. 읽는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공식도 거의 넣지 않아, 책 전체에 남은 공식은 F=ma와 E=mc² 둘뿐이다. 고전 한 편이 12쪽 남짓인데, 재미에 끌려 읽다 보면 지하철 몇 정거장 만에 한 편이 끝난다. 그 끝마다 생각할 거리 두 가지와 이어 읽을 책 세 권을 실었다.

이 책을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과학자나 질문 하나를 만나 원전을 펼쳐 보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 공부를 하던 나도 그렇게 27편을 읽었다. 어디에서 막히는지 여러 번 겪어 본 사람이 쓴 책이니, 두려워 말고 이 책을 펼쳐 들길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26-09-28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9-29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 - 인간관계부터 커리어까지, 생각이 많은 나를 위한 철학 수업
크리스토프 크바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은 이상한 학문이다. 흔히 철학이라고 하면 많이 배운 학자들이 책상 앞에서 펼치는 어려운 이론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철학이 붙지 않는 영역은 거의 없다. 일에도 철학이 있고, 공부에도 철학이 있으며, 장난과 휴식,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저마다의 철학이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 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은 바로 그 지점을 잘 보여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철학자의 이름과 사상을 어렵게 설명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살면서 한 번쯤 부딪히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만 잘 살 수 있을까?”, “악의 없는 거짓말은 괜찮지 않을까?”, “놀며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을까?”, “부모가 늙으면 돌보는 게 도리일까?”, “소원을 들어주면 아이가 행복할까?”, “선물로 돈을 주어도 될까?”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아무리 철학책은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이 목차를 한 번 훑어보면, 슬쩍 펼쳐 보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질문들이 너무 생활 가까이에 붙어 있어서, 내 고민 하나쯤은 반드시 들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은 철학을 거창한 이론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키르케고르, 아퀴나스, 칸트, 니체, 세네카, 플라톤, 아렌트, 벤담, 레비나스, 요나스,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시험공부용 지식으로 머물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사람이 겪는 불안, 관계, 일, 사랑, 부모 자식 문제, 정치, 환경, 종교의 문제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철학이 멀리 있는 학문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고 견디게 해 주는 도구처럼 느껴진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키르케고르의 ‘자신이 되기’에 관한 대목이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이 책은 자신이 된다는 것이 완성된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는 순간, 오히려 자기 자신과 멀어질 수 있다. 이미 어느 정도 살아왔고, 교육을 받았고, 사회화 과정을 거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 그런데 그 자기를 끝없이 고치고 계발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삶은 쉽게 절망으로 기울어진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 역시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계발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는지, 그 선택 뒤에 어떤 생각과 가치관이 놓여 있는지 살피는 태도다. 결국 철학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묻는 힘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다룬 장도 좋았다. “소원을 들어주면 아이가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얼핏 당연해 보인다. 부모라면 아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책은 행복이란 누군가 대신 만들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소원을 모두 들어주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자기 삶을 만날 기회를 열어 주는 부모다. 삶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 기회를 주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하고, 스스로 문을 열어 보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선물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선물로 돈을 주어도 될까?”라는 질문도 흥미로웠다. 이 책은 돈 선물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

지 않는다. 돈은 상대에게 좋은 기회를 줄 수도 있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고르게 해 줄 수도 있다. 다만 돈 봉투가 늘 좋은 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물의 가치는 가격보다 마음을 전하는 데 있다. 아무 말 없이 건네는 돈보다, 서툴더라도 상대를 생각하며 고른 선물이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생일 선물, 입학 선물, 명절 용돈처럼 익숙한 장면 속에서도 우리는 이미 어떤 가치 판단을 하고 있었다.


철학은 현실과 상관없는 학자들의 유희나 말놀이가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나를 잃었을 때, 타인과 부딪힐 때, 일과 놀이 사이에서 흔들릴 때, 사랑과 우정이 헷갈릴 때, 가족 관계가 버거울 때, 사회와 자연과 종교의 문제 앞에서 막막할 때 철학은 뜻밖에 실용적인 대답을 건넨다. 정답을 대신 골라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는 또렷하게 보이게 해 준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철학이야말로 수영이나 요리처럼 익혀 두어야 할 하나의 생존기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배워 두면 갑자기 물에 빠졌을 때 몸을 지킬 수 있고, 요리를 할 줄 알면 낯선 곳에서도 최소한의 삶을 꾸릴 수 있다. 철학도 다르지 않다. 흔들리는 순간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해야 하는지 가늠하게 해 준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떠날 때 가이드북을 챙기듯,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도 곁에 두고 펼쳐 볼 책이 필요하다. 『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은 그런 의미에서 여행 가방 한쪽에 넣어 두고 싶은 책이다. 길을 잃었다 싶을 때마다 꺼내 읽으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다시 걸어갈 방향을 조용히 알려 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딸내미 회사에서 만든 작품은 웬만하면 챙겨보는데(이혼숙려캠프만 빼고) 모자무싸는 영~ 땡기지 않는 드라마였다. 일단 나는 배경이 어두컴컴한 드라마를 싫어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밝고 따뜻하고 잔잔한 드라마를 좋아한다. 언제나 자사 드라마를 방송 전 먼저 보는 딸아이는 재미있다고 자부했는데 우리 부부는 딸아이의 식견을 거꾸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다. 역시 초반은 재미없더라. 그냥 보고 있으면 암 걸릴 것 같고. 그런데 7화부터인가 본격적으로 챙겨보기 시작했는데(하도 집사람이 챙겨보길래) 이 드라마는 마치 300쪽 분량 중 200쪽이 빌드업인 고전 소설 같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소중하고 재미나다. 각 캐릭터는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 숨 쉰다.


10화를 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드라마 속 대배우 노강식이 오정희에게 역할을 뺏기자, 홧김에, 황동만의 똘끼에 반해서 출연계약서에 서명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가 한 악마의 계약을 떠올렸다. 히트작을 낸 유명 작가이지만 도박 빚으로 끼니를 때우기 힘든 도스토옙스키에게 한 출판업자가 6천 루블짜리 계약서를 내민다. 조건은 1866년 11월 1일까지 즉 일 년 안에 장편소설을 완성해야 하며 이를 지키지 못할 시 9년 동안의 출판권을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글을 쓰는 작가로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계약인데 ‘움직이면 더 배가 고플까 봐’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아마도 노강식과 같은 표정으로 서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영부영하다가 마감일 26일이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이제 막 속기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20살짜리 처녀 안나를 만나 무사히 원고를 넘긴다. 이 원고가 <도박꾼> 또는 <노름꾼> 정도로 번역된 작품이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 즉 40대 중반에, 간질병이 있으며, 의붓자식이 딸린 홀아비와 결혼하여 그의 빚을 모두 해결하고 향후 작품활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도박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여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渼沙_常水 2026-05-18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대사중에 철학이 숨어 있는 내용이네요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시기, 질투, 열등감이라는 어두운 감정 덩어리를 품고 삽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고상한 척 숨기거나, 오히려 상대를 깎아 내리며 자기방어를 하죠. 동만이는 그 감추지 않고 날것의 심리를 그대로 인정함 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좁은 마음에서 해방 되고픈 욕망덩어리 인듯 하네요
변은아의 캐릭터에서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을 모습을 보았고, 해방일지의 김지원 배우가 보였는데 알고보니 같은 작가의 작품이네요
배우를 캐스팅하는 작가와 감독의 능력과 찰떡같이 표현해 내는 배우들의 능력이 대단해 보이네요

박균호 2026-05-18 16:2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 나의 아저씨를 쓴 작가라서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분이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