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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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남겨 주고 싶었던 가족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드리기 위해서 샐리 타티스테일이 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을 읽어 볼 만하다.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실질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샐리 티스테일가 주는 조언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죽음을 애써 부정하고 감추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빅토리아 시대만 해도 아이들이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심지어는 시신을 처리하는 것까지 도와준 것을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사람이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 또한 가정에서 치렀던 시절에는 아이나 어른에게 있어서 시신이나 장례절차가 지금처럼 낯선 대상이 아니었다. 장례식장이 보편화 되면서 장례와 시신에 관련된 일은 전문가의 업무가 되었고 유족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르며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도 ‘지켜보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수월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죽음과 죽어감에 관련된 일을 병원과 장례업자에게 일임하다 보면 죽어가거나 죽은 가족들의 ‘죽음의 질’이 소외될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가 말하는 죽어감과 죽음을 대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가족을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보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샐리 티스테일의 첫 번째 조언은 ‘경청하기’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노력의 반을 ‘말 들어주기’에 쏟아야 한다. 쉽고 단순한 조언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을 하지 죽어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소홀하다. 


듣다가 궁금하거나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그 이야기는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 주세요”라는 질문으로 부탁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사람도 자신의 말을 많이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보호자는 문지기 역할도 해야 한다. 환자를 병간호하다 보면 누구나 동의하게 되는데 방문객들의 언사는 천차만별이다.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신묘한 약과 치료법을 알려주겠다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환자 앞에서 다른 사람을 격하게 비난함으로써 환자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지나치게 정이 많아서 몇 시간을 죽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신세타령하는 사람도 있다. 


적당히 둘러대는 말로 환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문객을 서둘러 보내는 문지기의 역할도 중요하다. 보호자가 환자를 방문할 때는 미리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 요양원에 계시는 내 어머니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 조언은 중요하다. 내 어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늘 내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지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피곤한 것은 아닌지 신경을 썼다. 아예 처음부터 오늘은 몇 시간 정도 여기에 있다가 간다고 말을 해두면 좀 더 환자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내게 된다.


또 언제 또 오겠다는 언질을 주는 것도 좋겠다. 환자가 보호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도 있다. 환자를 병간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하는 잘못이 ‘음식’이다. 이런 병에는 이 음식이 좋으니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라든가 많이 먹어야 빨리 낫는다는 식의 ‘훈계’를 하며 권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혼자 밥 먹기가 유행하는 것은 핵가족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산물일 뿐 음식은 함께 먹어야 맛이 나는 법이다. 


더구나 식욕이 일반 사람보다 좋을 수가 없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가족들이 마치 자신을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서 음식을 먹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뼈아픈 잘못을 했었다. 요양원에서 어머니와 여러 번 언성을 높인 적이 있는데 모두 음식 때문에 생긴 사단이었다. 어머니가 자꾸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으라고 시키는데 그걸 순순히 하지 않았었다. 내가 사 온 음식이고 어머니가 드셔야 하는데 자꾸 나보고 꺼내 먹으라는 어머니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번 거절했는데도 마구잡이식으로 권하니 버럭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와 나란히 음식을 나눠 먹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 


죽음을 눈앞에 둔 가족을 둔 가족들은 그동안 섭섭하게 해드린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가 기억하지도 못 하는 일을 꺼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에 대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보다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환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느끼도록 대해주는 쪽이 낫겠다.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은 안전사고에도 주의해야 한다. 가령 사지를 본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 경우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데 잠을 자다가도 침대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또 병 때문에 쇠약해졌지만 건강했을 때의 습관처럼 활동하려고 하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관을 열어두고 장례 예배를 올리는 서양에서 주로 생기는 문제인데 시신에 대한 과도한 화장이나 치장도 고려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복원술 아카데미’가 있을 만큼 이 분야가 발달 되어 있는데 시신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혈색이 좋고 머리숱은 풍성하며 심지어는 평소에도 하지 않는 화려한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다면 유족들이 보기에 그리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족들이 보는 마지막 고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쁜 기억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적당한 화장과 복원은 필요하겠지만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유족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시골에 살면서 수십 년 동안 화장을 하지 않고 살았던 고인의 시신에 화려한 립스틱이나 매니큐어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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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 엄마를 보내고, 기억하며 삶과 이야기 1
이상원 지음 / 갈매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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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려다가 ‘50세의 딸과 80세 엄마가 한 달 동안 남미를 돌아다니다’라는 문구에서 한동안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2년 전에 나는 50세의 아들이었고 내 엄마는 80세였다, 이미 2002년에 중풍으로 한 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내 엄마는 17년 동안 환자로 사셨고 나는 간병인과 보호자로 살았다. 어머니와 하는 여행.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다. 17년을 환자로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었던 시절의 꿈만 같았을 것이고, 나는 엄마를 보러 가거나 생각하지 않는 일요일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엄마는 늘 ‘네가 왜 왔어?’ 라든가 ‘일요일인데 쉬지 왜 왔나’라는 말로 에둘러 반가워했고 나는 묵묵히 내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요양원 주변을 산책했다. 요양원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드리고 아무 말 없이 둘이서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던 그림을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내가 기껏 생각했던 소풍이란 엄마를 모시고 고향 마을에 다녀오는 것, 요양원 아래에 있는 절을 다녀오는 것 따위였고 엄마를 위한 계획이란 좀 더 좋은 요양원을 물색해보자는 것 뿐 이었다.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의 저자 이상원 선생은 복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함께 남미 여행이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지의 풍경이나 문화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통찰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있더라. 국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적을 하나의 가정으로 보는 우리와는 달리 필요에 의해서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남미 사람들의 국적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설명한다든가 스페인어의 중심지는 스페인이 아니고 남미라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감탄을 하게 되는 대목이 많았다.

두 번째 여행은 남미를 여행했으니 북미를 여행하려나 생각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엄마와 남미 여행을 마치고 온 다음 날 엄마는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두 번째 여행은 7개월간의 이별 여행이었다. 이상원 선생을 동정하였다. 나는 17년간을 엄마의 간병인과 보호자로 살아왔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엄마가 살아계셔서 몹시 좋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몇 달 후에 돌아가실 운명이 지워진 엄마를 지켜보는 7개월을 어떻게 버티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이상원 선생은 슬기롭고 무리 없이 어머니를 잘 보내드린 것 같다. 본인만큼 간병에 열중하지 않는 형제자매에게 서운함을 느꼈을망정 엄마에게 형제간에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다른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가 원하는 방향대로 생을 마무리 하게 도와주었으며,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 몹시도 숙련된 가톨릭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드렸으니까 말이다.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에는 야심한 시각이나 이른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 그러니까 병환이 있는 노부모님을 둔 자식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경험이 많았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식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밖 에 없는 상황들을 어떻게 하면 잘 꾸려 나갈 수 있는지 도움이 되는 책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 번째 여행은 우연히 발견한 엄마의 일기를 통해서 어머니가 살아온 길을 추억하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은 그러니까 여행기도 아니고 간병기도 아니다. 50년을 이 세상에서 함께 산 엄마를 향한 그리움으로 읽힌다. 엄마가 프랑스에 유학하고 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처럼 과거의 흔적뿐만 아니라 엄마의 속마음을 읽을 때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동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은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오래 쓴 이력이 유감없이 발휘가 된 책이다. 

거의 혼자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간병한 이상원 선생에게 감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올해 초 돌아가신 내 엄마를 생각해보면 가장 원통한 것이 하필이면 독감이 유행해서 엄마를 보러가지 못한 3주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다. 엄마를 혼자서 오래 간병한 것은 엄마와 그 만큼 더 많은 추억을 나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은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만 사무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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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2-1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여름 어머니를 보내드린 지인 생각이 나네요.
아직까지 저의 엄니는 건강한 편이긴 하지만 나도 언젠간
저 입장이 되겠지 싶어 남 일 같지가 않더군요.
지난 달에 강화를 우리 집 여성 부대(언니와 조카까지) 넷이서
다녀왔는데 하루치기지만 그렇게 다녀 본 적이 거의 처음이지 않나 싶어요.
이것조차 안하면 나중에 후회하겠다 싶어 다녀온 거죠.
저 나이 먹는 것도 아찔하지만 울엄마는 언제 저렇게 늙었나 아득합니다.ㅠ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많이 슬프셨겠습니다.

박균호 2019-12-11 15:52   좋아요 0 | URL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몹시 슬프고 황망했어요. 지금도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아득히 슬퍼요.

moonnight 2019-12-1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간 남미여행을 함께 한 추억이 저자를 많이 위로할 듯 합니다.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정성껏 하셨을 박균호님을 생각해보니 뭉클합니다. 언젠가는 맞을 이별이겠지만 가능한 늦춰지기를 바랄 뿐이에요ㅠㅠ

박균호 2019-12-11 22:1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살아 계실 때 더 많이 사랑한다라고 말해드릴걸 하고 후회가 됩니다.
 

지난 겨울 장례를 치르면서 겪은 가장 무섭고 충격적인 장면은 고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입관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맞은 편 어두운 곳에 늙수그레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동굴과 같은 어둡고 좁은 공간 끝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슬픈 눈과 마주쳤다. 그 할머니는 청소 노동자였고 동물을 사육하는 공간이라고 해도 분노가 치솟을 그 못 쓸 공간은 할머니의 휴식공간이자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차갑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할머니는 매일 몇 번씩 사랑하는 가족을 좁은 관속에 모시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사람의 머리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저런 공간에서 지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그만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수시 원서 카드 6장을 오로지 본인이 원하는 학과에 지원한 딸아이는 대체로 본인이 원했던 대학에 합격했다. 별일 없으면 합격할 것이라는 대학에서 쓴잔을 마셨지만 결국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나는 모든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심지어는 대학원서 마감 날이 언제인지도 딸아이의 최종 내신 성적도) 딸아이는 수능을 앞두고 ‘눈에 불이 나오도록’ 열심히 했다는데 그 불이 집에 와서도 다 꺼지지 않아서 우리 부부는 딸아이에게 쉽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한 국립대학에 원서 한 장을 배정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딸아이의 결정이었다.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대학에 합격할 때는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운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원서만 냈으면 합격했을 다른 대학을 생각하니 그랬다. 하나뿐인 자식인데 말이다. 추운 겨울 새벽에 예비대학 캠프를 떠나는 딸아이를 서울까지 데려다주었다. 딸아이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서다가 ‘학교가 정말 작긴 작구나’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래서 별명이 고등학교 구나 라는 말까지.


아내라고 왜 아쉬움이 남지 않겠는가. 서로에게 화를 냈고 홧김에 갈라섰다. 캠퍼스 이곳저곳을 따로 걸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했고 좁다는 캠퍼스는 오밀조밀 걸을 곳이 많더라.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다는 건물을 살펴보고, 이름이 따로 있다는 학교에 서식하는 고양이도 구경했다. 


낯선 땅 서울에서 추위를 유난히 타는 우리 부부는 서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2명이 20분을 따로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넓은 학교라는 것을 인식한 나는 좀 전의 발언에 대해 사과를 할 용의가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심전심으로 예비학교를 떠나는 딸아이를 배웅하면서 부부싸움을 한 잘못에 대해서 고회성사라도 할 생각이었나 보다. 우리는 성당을 함께 구경했고 장차 딸아이가 공부할 건물도 다녀보았다. 난방을 따로 하지는 않았지만, 건물 안은 따뜻했다. 문득 내 눈앞에 보이는 사무실 명패가 눈에 띄었다. 내가 장례식 때 보고 놀란 그 좁고 어두운 동굴과도 같은 공간과 같은 용도로 쓰이는 넓고 밝은 공간이었다. 



그리 평범한 공간을 보고 감동을 한 적이 있었을까. 사람을 중요하게 사람답게 대하는 학교라는 생각에 감격했다. 이런 학교에 내 자식이 다닌다고 생각하니 더욱 자랑스러웠다. 지금이라고 아쉬움이 왜 남지 않았겠는가. 다만 어찌 보면 딸아이의 품성과 잘 맞는 대학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많이 달래진다. 화려하고 크지는 않지만 점잖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교.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가득한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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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2019-12-09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따님, 멋진 부모님이네요. 저는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대학은 머나먼 얘기 같은데 주위를 보면 아이들이 어릴때부터 모든걸 부모가 개입해서 아이들이 자율성이라고는 없어보이더라구요.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다는 따님은 정말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듯해요. 저희 아이들도 따님과 같았음 좋겠어요. 그리고 따님이 다닐 학교에 저런 공간을 놓치지 않고 보셨다는것도 넘 놀랍네요. 따스함이 느껴지는 글이 기분좋게 하네요 감사합니다.^^

박균호 2019-12-09 17:17   좋아요 0 | URL
그냥 아이들 뜻 존중해주고 부모로서 따뜻한 사랑만 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요 ㅎㅎㅎ 좋은 말씀 감사해요..

moonnight 2019-12-14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장한 따님이십니다. 훌륭한 부모님이 반듯하게 잘 키우셨어요. 제 조카아이들도 저렇게 컸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박균호 2019-12-14 14:34   좋아요 0 | URL
따뜻하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애머런스 보서크 지음, 노승영 옮김 / 마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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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 서재에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는 것은 책을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읽는 속도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단 사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더 이상의 용도가 없어져서 그냥 아무렇게나 내 팽겨 둔 이유가 더 크다.

좋은 책은 사두면 언젠가는 읽게 되겠다는 기대는 별로 없다. 유혹하는 책을 발견하고, 주문하고, 택배를 기다리고, 도착한 택배를 열어서 새 책을 만지작거리는 몇 분 정도까지가 책과 관련된 나의 즐거움은 거의 끝난다. 철이 없는 것은 알겠는데 호사스러운 취미는 아니다. 한 달에40만 원 정도의 투자로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취미 생활이 책 구매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책을 사는 것은 왜 그토록 재미날까?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애머런스 보스크가 쓴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에 나온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은 처음 만나는 장난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독자들(아이이건 어른이건)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다. 알록달록한 무늬와 색깔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것이 책이라는 말랑말랑한 장난감이다. 나처럼 어른이 되고 늙어가면서도 책 사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좀 더 오랫동안 책과 함께 놀았기 때문일 테고 많은 시간에 걸쳐서 책이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자책이라는 라이벌이 처음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종이 책이 종말이 다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반면 책이라는 장난감을 좋아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은 코웃음을 치었다. 전자책은 쓰다듬고 냄새를 맡으며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원래 용도는 장난감이 아니고 ‘사람의 지식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의 형태로 배포하기 위한 저장고이기도 하면서 기호를 배치함으로서 정보를 전하는 매개체’ 이었다. 수메르 인들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이동 가능한 저장 장치로 유크라테스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을 선택했다. 


진흙을 사용하기 편하게끔 납작하게 만들다가 결국 점토판이라는 ‘수첩’까지 진화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석처럼 크지 않았다.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필경사의 손바닥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성냥갑에서 큰 휴대폰 크기까지 다양하였으며 앞 뒤 면만 쓸 수 있는 오늘날의 종이와는 달리 좌우면도 쓸 수 있었다. 제작도 간단해서 대부분 햇볕에 말리는 것이 제작 과정의 전부였다. 


점토 책은 또 다른 장점도 있었다. 문서를 보관해 두는 보관소(도서관)에 대화재가 났을 때 두루마리는 유실되었지만 불에 타지 않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점토 책은 끄떡없었다. 다만 점토판 도서관의 주인인 왕들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점토판 책에는 빌려갔다가 당일 반납하지 않으면 혼찌검을 내주겠다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식을 저장하고 전달하는 휴대용 장치’를 발전시킨 수메르 인처럼 이집트인들도 나일 강 유역에서 흔히 자라는 파피루스를 책으로 개발하였다. 파피루스 책의 빈번한 용도중의 하나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매장한 ‘이집트 사자의 서’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내세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200개의 주문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이게 빈부에 따라서 차별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화려하고 정교한 그림이 그려진 고객 맞춤형을 그렇지 않은 보통사람들은 기성제품을 사용해야했다. 맞춤형은 고객이 디자인을 직접 선택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사전에 제작된 저가용 두루마리 빈칸에 죽은 사람의 이름만 기입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파피루스가 원시적인 형태의 저장장치였지만 오늘날의 최첨단 정보 취득 장치인 인터넷과 책의 현대적인 형태의 기원을 제공했다. 두루마리가 영어로 스크롤 (scroll)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두루마리는 길이가 9~12미터였으니 한눈에 모든 내용을 다 볼 수 없었고 위아래로 펼치면서 쓰고 읽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모니터의 한 면에 모든 내용을 다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위아래로 커서를 움직이면서 읽거나 보는 행위를 스크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두루마리의 겉면에 내지의 내용이나 첫 구절 또는 저자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책 표지의 기원이 되었다. 


파피루스에 이어 등장한 신기술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였다. 양피지가 비록 파피루스보다 더 질기고 매끄러운 고급소재였지만 수세기 동안 파피루스를 밀어내지 못하고 공존했다. 양피지가 좋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제작하는데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고 짐승을 도살해야 하는 만큼 비용도 많이 드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자책을 비롯한 혁신적인 형태의 책이 나타나더라도 최소한 몇 세기는 종이 책과 공존할 확률이 높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나타났다고 해서 분명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옛 매체를 단번에 밀어내지는 못한다.


메소포타미아인,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책을 만들었다. 중국인은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를 끈으로 엮어서 이른바 간책을 만들었다. 간책은 중국 최초의 휴대용 정보 저장 및 전달 장치였다. 한자 책(冊)은 글자를 새긴 대나무를 엮은 모습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다. 


드디어 채륜이 종이라는 최첨단 제품을 발명했는데 놀랍게도 5세기 내내 종이와 대나무 책 즉 간책은 불편한 동거를 했다. 결국 종이가 정보 저장 및 전달 매체의 지배자로 등극하게 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편리한 종이가 불편한 간책을 서서히 밀어낸 것이 아니라 황제 환현이 더 이상 낡아빠진 간책을 사용하지 말고 신제품인 종이를 사용하라고 칙령을 내림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종이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큰 책은 지식을 취득하는 매개체라는 본연의 목적보다는 자랑질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큰 책을 ‘커피 탁자 책’(coffee-table book)부르는데 한 손에 들고 읽기 힘들기 때문에 탁자위에 올려두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세시대에 이런 책들은 수도원이나 부잣집에서 다리가 긴 탁자위에 과시용으로 올려두기만 하고 읽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경외심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금테를 두르고 보석을 박는다면 그 효과는 더 컸으리라. 


중세 말기 때는 발달된 인쇄술 덕분에 소맷부리나 호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크기의 기도서가 출간되었다. 생각 날 때 마다 꺼내서 기도를 올림으로서 자신의 부와 신앙심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현대인이 시간을 보는 척 하면서 명품 시계를 남에게 쓱 보여주는 경우와 비슷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책을 상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 속속 등장했다. 다른 인쇄업자가 만든 책과 자신이 만든 책을 구별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출판사 로고 비슷한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책 내용을 독자들에게 맛보여주고 홍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가능한 긴 제목을 정했다. 우리가 <돈키호테>라고 알고 있는 소설의 원래 제목은 <기상천외한, 기지가 넘치는, 재능이 넘치는 라만차 출신의 돈키호테>이다. 18세기에 들어서 이 마케팅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원제목을 알려줄 테니 놀라지 마시라.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가까운 무인도 해변에서 28년 동안 홀로 살다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그려낸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 이 정도면 제목이 곧 줄거리이자 요즘 말로 스포일러다. 


책의 ‘서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출판업자와 저자들은 독자들과 친밀감을 높이는 사적인 공간으로 ‘서문’을 만들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기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이지를 이야기함으로서 친밀감을 높이려고 애썼다. 이른바 메인 공연을 하기 전에 바람잡이 공연으로 관중들의 시선을 끌어오려는 마케팅이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귀족과 왕족 그리고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책은 모두의 문화가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책이 대중화 되면서 인쇄업자간의 경쟁도 치열해졌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저작권’이다. 16세기에 이미 책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가 인정이 되었고 매매도 이루어졌다. 인쇄업자들은 새 책을 내면 왕이나 교황에게 저작권을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해야 했다. 승인 권을 가진 권력자들은 정부에 고분고분한 인쇄업자와 그렇지 않은 인쇄업자를 차별함으로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삼이나 담배 사업자를 지정해서 관리하듯이 성서나 교과서 같은 꾸준히 잘 팔리는 책에 대한 소유권은 선별된 소수에게만 부여했다. 


책에 대한 권리가 물건으로서의 책이 아니고 책 속에 담긴 내용(텍스트)로 넘어가는 법률적 변화도 일어났다. 오늘날 출간계약서에 저자가 갑, 출판사가 을로 표기되는 기원이 이때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평범한 책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눈길을 끄는 표지 디자인, 저자와 책 제목이 한눈에 보이도록 인쇄된 책등, 뒤표지에 인쇄된 ISBN 바코드는 1980년대 대형 오프라인 서점이 호황을 누릴 때 형성되었다. 가능한 많은 책을 보기 좋게 전시하고, 독자들이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도록 상품에 가능한 많은 정보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책이라고 부르는 상품 중에서 가장 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가장 비참하게 쇠태를 한 것은 백과사전이다. 최초의 백과사전인 드니 디드로의 17권짜리 <백과전서>가 1751년에 출간되었는데 무려 수천 명의 인력이 투입된 대공사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백과사전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저가용 보급판을 따로 판매했다고 한다. 1990년대 시디롬 형태의 디지털 백과사전이 등장할 때 까지 200년 이상의 영광을 누리고 장렬히 사라졌다. 한 때는 교양 있고 돈 꽤나 버는 가정이라면 위풍당당하게 서재에 꼭 꽂혀 있었는데 요즘은 가구 전시장의 소품으로 전락했다. 마치 수많은 관중 앞에서 우승을 밥 먹듯이 한 경주마가 동네 놀이공원에서 효도관광을 하러 온 노인을 태우고 다니는 늙은 말 신세라고 해야 될까. 


최근의 출판시장에 관한 잘못된 선입견 하나를 바로 잡는다.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2016년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전자책의 판매량이 감소했고, 2015년 미국에서의 종이책 판매량이 3.3 % 증가했다. 세부 수치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은 아동용 보드북 판매량이 무려 7.4% 늘었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를 역행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운동능력을 연습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만지고, 놀 수 있는 촉각적 사물이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전자 기기로 정보를 얻고 학습하는 것보다 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동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부모들이 알아차리고 있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를 읽으면서 알게 된 간단하지만 재미있는 지식 하나는 book이 예약하다는 동사의 뜻으로 쓰이는 이유가 예약 내역을 장부에 기록한 옛날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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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내가 쓴 책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 아내와 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내와 딸은 내가 책을 몇 권을 냈는지 모를 수가 있고 나는 그들이 내 책의 출간 현황을 어느 정도 아는지 모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부끄럽다.

작년인가 집으로 우송된 소득세 청구서를 보고서야 아내는 내가 직장에서 원천 징수되는 것 말고도 별도로 ‘소득세를 내는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된 새 책>을 출간했을 때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겠다는 날이 되어서야 아내는 내가 책을 냈고 집에서 인터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젠 책을 7권이나 냈으니 ‘대놓고’ 글을 쓰는 편이다. 여전히 책에 대해서 대화는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우리 가족의 불문율이 친척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여지없이 깨진다. 작은할아버지가 수필가이셔서 책을 내기도 하셨고, 매년 수필 동인지를 세대별로 나눠주셔서 책을 내는 것이 별다른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친지 분들이 내가 쓴 책 이야기를 하시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숙모님이 ‘조카, 혹시 자네 술 마셨나’고 하문할 정도였다. 특히 참기 어려웠던 순간은 날 더러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부를 때였다. 민망함과 ‘진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는 죄책감으로 그냥 땅으로 꺼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내 전매특허인 ‘버럭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가 나섰다. 아내는 나처럼 숨는 것이 아니고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렷또렷하게 이렇게 말하더라.

“이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에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입니다.”(명쾌하다)

“네이버에서 박균호를 입력해보세요”(아내는 내 이름을 네이버에서 입력해봤구나)“

<독서 만담>이라는 책을 썼어요” (아내는 숭고하다. 자신을 못된 아내로 생각할 수도 있게 만드는 책을 나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해서 쓴 내용이에요” (심지어 아내는 내가 쓴 책을 읽어 봤구나)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가 내가 쓴 책에 대해서 가장 긴 발언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몇 마디로 친지들은 더 내가 쓴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며칠 뒤 아침에 <고전적이지 않은 고전 읽기>가 세종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아내에게 그 소식을 자백했다. 3쇄를 찍게 되었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 숨기기에는 ‘제법’ 큰 뉴스이니까. 아내는 이례적으로 ‘축하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이게 유시민이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간 것이구나”라는 말을 했다. 당연히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수 있는 밖 에. 아내가 전날 밤에 유시민 선생이 내 서재에 와서 나와 같이 놀다가 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여러 명의 친척에게 ‘칭찬 조리 돌림’을 당했을 때도 참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로또를 사지 뭘 했냐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샀단다. 5천 원에 당첨되었다고.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아내에게 미안해졌다. 아내가 꾼 대박 꿈을 내가 빼앗은 것 아닌가. 세종 도서에 선정되고 3쇄를 찍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하려던 나는 기운이 빠졌다. 잘 자라는 이모티콘을 조용히 누르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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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12-02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내분이 참 현명하고도 사랑스러우십니다 호호^^

박균호 2019-12-02 20:5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당.

잔느 2019-12-0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분이 참 자랑스러우시겠어요. ㅎㅎ

박균호 2019-12-10 06:30   좋아요 0 | URL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