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때 서양미술사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 수업은 교양과목이 회화과 2학년 학생들이 수강하는 전공필수과목이었다. 내 전공은 행정학이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과감하게 타과 전공 수업을 신청했다. 수강인원 50명 중에 나를 포함해서 남학생은 단 3명이었고, 회화과 전공이 아닌 학생은 4명이었다. 성적을 잘 받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회화과 여학생들과 이런 학생들이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하는 교수의 보이지 않는 텃세(?)가 신경 쓰였지만, 이미 독서를 통해서 서양미술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진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교수는 수업내용을 척척 알아듣고 이해하는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양미술사 과제는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었다. 회화과 학생들은 그림을 제작하고, 제출해야만 졸업할 수 있기에 언제든지 그림 제작에 사용할 소재들이나 습작들을 포트폴리오 형태로 준비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림 제작을 위한 기본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나도 회화과 학생들처럼 포트폴리오를 제작했으며 학생들 앞에서 공개 발표까지 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형' 연구 3부작」 중 일부 (1962년)
서양미술사 수업을 듣는 회화과 학생 중에 머리가 똑똑한 친구가 있었다. 여학생이었는데 수업을 듣는 자세가 다른 학생들보다 바른 편이었고, 교수도 그 학생의 재능을 유심히 눈여겨 봤다. 교수는 똑똑한 학생들을 뽑아서 발표를 시켰다. 당연히 그 여학생도 포트폴리오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여학생이 공개한 습작은 빈방 한가운데 돼지고기가 덩그러니 놓인 상태를 그린 것이었다. 여학생은 이 그림을 축 늘어진 돼지고기가 세상과 단절되어 빈사 상태에 빠진 고독한 현대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교수는 30분 동안 진행된 여학생의 발표를 말없이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습작에 대한 평가를 밝혔다. 여학생의 돼지고기 그림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떠올린다고 말했다. 이어서 여학생의 제작 의도는 좋았으나 그림 소재가 된 돼지고기가 이미 베이컨이 사용한 적이 있어서 독창력 면에서는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교수는 여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학생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요?" 여학생은 베이컨의 그림이 좋아서 도록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교수는 대가의 그림을 무조건 모방하기만 하면 다음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 여학생의 착각을 지적했다. 대가의 그림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일부를 제 것인 마냥 사용하면 절대로 독창적인 그림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창작을 위한 모방이 아닌 남의 것을 그대로 베낀 표절이 될 수 있으니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 점을 꼭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이때 당시 교수의 뼈 있는 지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회화과 학생은 과연 몇이나 되려나. 교수는 서양미술사를 가르치면서 모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위대한 화가들은 정식으로 화가가 되기 전, 그러니까 수련생 시절에는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끊임없이 모사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가나 스승의 작품을 베끼는 것은 그림 제작에서 중요한 훈련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표현력에 감탄하여 그의 그림을 모사했고, 마네를 존경했던 모네는 마네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대한 화가들은 그림 실력이 출중해서 단번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름 그림을 잘 그리려고 몇십 년 동안 남의 그림을 베끼던 시절이 있었다. 대가의 그림을 반복적으로 모사하면 대가의 능숙한 표현력이 자연스럽게 손에 배게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대가의 표현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갖춘 화가가 성공의 길을 걸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80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종교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80년)는 오늘날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야의 걸작이다. 이 그림은 젊은 고야가 이제 막 정식 화가로 발돋움하기 직전에 그려진 초창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고야는 원래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유럽에 귀족이나 왕족들이 선호하는 고급 실내 장식품이 유행이었다. 고야는 직업상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화가'가 아니었다. 평생 태피스트리 밑그림 제작하는 일에 전념하면, 이름 없는 '장인'으로 남을 뿐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성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고야는 세상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여 화가가 되리라 결심한다. 고야의 목표는 궁정화가가 되는 것. 궁정화가가 된다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일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무명의 고야가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당시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는 독일 출신의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였다. 멩스의 신고전주의적 화풍은 스페인 왕족들을 흡족 시켰고, 멩스는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오늘날에 멩스는 잊혀진 화가가 되었지만, 고야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멩스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멩스가 1779년에 사망하자, 궁정화가와 왕립 아카데미 회원직에 공석이 생겼다. 이 기회를 고야가 그냥 놓칠 리가 없다. 고야는 명예로운 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그림을 제출하기로 했다. 제출한 그림이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인정받으면 정식으로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고야가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다. 이 그림 덕분에 고야는 아카데미 회원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고야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화가로서의 꿈의 목표인 수석 궁정화가 자리를 얻기까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고야는 기어이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631년, 왼쪽)
안톤 라파엘 멩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61~1769년, 오른쪽)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잘 그린 그림에 속하지만, 고야만의 표현력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고야의 걸작들과 비교하면 작품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그림 속에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싶은 무명의 태피스트리 밑그림 제작자의 열망만이 보일 뿐이다. 고야의 세속적 열망 때문인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에 겨워하는 예수의 자세는 마치 십자가에 억지로 매달린 마네킹을 보는 듯하다. 그림을 좀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야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눈에 익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가면 고야의 예수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고야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기존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에 불과하다. 고야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에 대가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대놓고 차용했다. 고야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그의 그림을 모사했다. 1631년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예수 그림을 고야는 틀림없이 봤을 것이다. 또 스페인 내에서 알아주는 멩스의 예수 그림을 고야가 전혀 모를 리 없다. 벨라스케스와 멩스의 그림을 고야의 그림과 비교해보라. 고야가 두 점의 그림에서 빌린 표현법을 확인할 수 있다. 어두운 배경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하늘 위로 고개를 향하면서 괴로워하는 예수의 표정은 멩스의 그림에서 빌렸다.
이 정도면 고야는 대가의 그림을 베낀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고야를 남의 그림이나 베끼는 데 능숙한 최악의 화가라고 욕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에도 아카데미로부터 큰 호평을 얻었다. 아카데미는 고야가 대가의 그림을 베껴 그린 사실을 다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고야는 창작을 위한 모방을 능숙했기 때문에 아카데미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했다. 아카데미가 원했던 것은 대가의 표현 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그릴 줄 아는 화가였다. 고야는 아카데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만약에 고야가 숙련되지 않은 실력으로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예수를 그렸다면, 아카데미 회원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옛날 화풍을 선호하고 고집하는 아카데미의 심미안 덕분에 고야는 성공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한 고야는 왕족과 귀족 들이 좋아할 만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벨라스케스와 멩스 같은 자신이 존경했던 과거의 대가를 뛰어넘기 위해서 개인적인 표현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후부터 고야는 과거 화풍에서 벗어난 그림들을 그렸고 전보다 많은 명성을 얻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1508~1509년, 왼쪽)
라파엘로의 그림 복사본 (오른쪽)
우리는 예술에서 창작을 위한 모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고야처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받지만, 가끔 표절로 문제 되는 경우가 있다. 마네도 고야처럼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벨라스케스의 방식을 빌려서 그림을 그렸는데 살롱으로부터 그저 대가를 흉내 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살롱의 보수적인 그림 평가에 불만을 품은 마네는 다음번에 열리는 살롱에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림 한 점을 제출했다. 그 그림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였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라파엘로의 그림 복사본과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1508~1509년) 일부를 빌려서 고전적 양식을 따랐다. 여기에 관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나체를 그려 넣어 고전적 방식을 과감하게 변주했다. 지금까지 그림 속에 벌거벗을 수 있는 여자는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만 가능했다. 마네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인을 그림 속에서 옷을 벗기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시대를 앞서간 마네의 도발적 표현은 당연히 살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 그림으로 마네는 근대 회화의 시발점을 알리는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미술에서 모방은 관대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창작과 동일하게 보는 모방과 남의 것을 자신이 만든 것처럼 흉내를 내는 표절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윌컴퍼니, 2015)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카롤린 라로슈는 창작을 위한 모방의 조건을 명시한다. 화가는 선대 화가 중 한 명을 전적으로 인정하여 선대 화가의 그림을 모방했음을 밝혀야 한다. 여기서 그림을 모방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이제 화가는 선대 화가의 기량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라로슈의 말처럼 위대한 화가들은 선대 화가의 옛 방식을 답습하되, 단점을 발견하면 이를 새롭게 바꾼 방식을 구사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린 마네처럼 말이다. 표절 논란에 휩싸인 작가 신 모 씨의 변명 입장을 보면서 3년 전에 회화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곱씹는다. 아무리 좋은 문장, 좋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모방에만 그친다면 훌륭한 걸작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신 모 씨는 창작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