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인간의 행동 기저에는 욕망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욕망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으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무의식은 대개 역동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욕망에 심각한 결핍이 생기면 병리적 차원으로 이행돼 삶이 짓눌릴 뿐 아니라 거기에 압도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속 주인공은 욕구 결핍을 채우려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낙담해 사방이 완전히 차단된 밀폐된 방에서 혼자 음악을 듣고, 멀리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그는 욕망의 빈 곳을 채우려는 동경에서 실패해 음악으로 달랜다. 욕망의 빈 곳이란 일종의 심리적 결핍, 애정 결핍을 의미한다. 여기서 콘트라베이스는 주인공이 욕망의 결핍을 없애고, 심리적·정신적 안정을 받으려고 정복하는 대상이다. 주인공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상황을 콘트라베이스와 동일화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큰 몸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악기다.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를 세상에 있는 모든 악기 중에서 제일 못생기고, 우아하지 못한 악기라고 말한다. 오케스트라 악단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고,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을 스스로 잘 알기에 괜히 애꿎은 콘트라베이스를 경멸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바라는 인정과 사랑의 욕망은 간단하게 충족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오페라의 단역배우 세라는 유명한 성악가의 식사초대를 받아 값비싼 생선요리를 먹으러 다니는 도도한 여자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을 마련한다. 유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연주 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것이다. 주인공은 용기만 있다면 무모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얼핏 보면 세상 언저리에 맴돌기만 했던 주인공이 희망을 원하는 몸부림을 펼칠 거라는 기대감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과 세라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주인공은 더블베이스와 음악을 사랑했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불행하게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욕망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충족에 집착하는 욕망의 원인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주인공의 정상적인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삶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과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좌절 때문에 과도한 욕망은 제 생각 이상으로 변환되거나 변질해 혼란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생각하면 욕망과 결핍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원인을 누가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욕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매우 잔인한 법칙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현실과 동떨어진 욕망에 더욱 이끌린다. 위험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의 무의식에서 약동하는 욕망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에 압도돼 욕망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신도 모르게 소외감의 원인을 남 탓 또는 콘트라베이스로 돌리는 주인공의 투사적 행동이나 태도가 바로 주인공의 내면에서 약동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력으로서의 욕망이다.

 

욕망이 결핍을 부르고 결핍이 다시 욕망을 부추긴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고 계속 반복해서 느끼는 욕망의 결핍은 배고픔과 갈증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느끼기 때문인데, 이런 시각에 어머니와의 관계를 지나칠 수 없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였지만, 주인공 본인은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은 가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주인공은 공무원이 아닌 예술가가 되리라 결심했고, 독주가 흔하지 않은 악기로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콘트라베이스의 형상은 허리가 잘록한 여성의 신체와 흡사해서 여성스러운 악기로 인식한다.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의 형상에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상상한다. 어린 시기와 관련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은 명쾌하지 않은 점이 문제지만, 어머니의 가슴과 그 대체물이 아이를 안심시키고 쾌락을 가져다준 최초의 대상으로 본다. 적어도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충족을 원하는 심리적 특성이 충족으로 지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 외에도 일반심리학조차 성장하는 아동기의 신체접촉 결핍이 정신적인 결핍으로 이어진다고 인정한다. 성장기에 어머니와의 친밀한 접촉이 부족한 경우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는 문제가 생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공한 애착이란 대개 안전함, 따뜻한 사랑의 열기, 다른 사람이 그를 맞아줄 때 느끼는 자기애에서 나오는 확증함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안정감이다. 칼 융은 술을 많이 마시는 행동이 모성애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다. 주인공이 말하는 도중에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그가 모성 결핍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들려주면서 독자들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는 주인공의 모습은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만 울리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요즘 자신의 신체 부위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SNS에서 감상평을 주고받는 몸매품평 놀이가 유행이라고 한다. 자존감이 낮거나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해 이 놀이에 더 잘,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자신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는 콘트라베이스 선율을 독자들 앞에서 들려주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한다. 주인공은 이 세상에서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준 유일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애정결핍 증세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건강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블랙홀처럼 뻥 뚫려 있는 욕망의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기 전에 먼저 아직 남아 있는 상처와 결핍의 문제를 진실하게 인정하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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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6-2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으론 <콘트라베이스>와 <좀머씨 이야기>, 두 작품을 읽었어요.
님의 서재에서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댓글 남깁니다. 오래된 책이라...

<콘트라베이스>는 어느 부분에서 꽤 감동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보잘 것 없음의 승리? 뭐 그런 메시지를 받었던 기억이 있어요. 맞나요?
정리를 해 놓지 않으니 제 기억력을 믿을 수 없지만... 아, 이래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그랬던 기억은 확실히 있어요.

cyrus 2015-06-24 20:32   좋아요 0 | URL
저는 <콘트라베이스>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마도 페크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같을 겁니다. 주인공이 무대 위에서 세라의 이름을 외칠 거라고 다짐하면서 모노드라마가 끝이 납니다. 저는 그 부분이 희망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주인공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불쌍했습니다. ^^;;

qualia 2015-06-23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과 결핍의 문제는 현대 신경과학과 뇌과학적 설명을 곁들이면 더욱 흥미로워질 듯합니다. 프로이트/융 학설도 신경정신분석학으로 (일부) 증명이 되고 있다고 하던데요. 앞으로 cyrus 님의 글쓰기에 신경과학/뇌과학적 지식이 접목되리라 예상되는군요~.

cyrus 2015-06-24 20:33   좋아요 0 | URL
제가 신경과학, 뇌과학에 박식하지 못해서 수준 높은 글을 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qualia님의 말씀 덕분에 이번 기회에 뇌과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슬비 2015-06-2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시사인을 읽고 있는 부분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에 관한 내용을 읽고 다시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cyrus님 페이퍼를 보니 더 반갑네요.^^

cyrus 2015-06-24 20:37   좋아요 0 | URL
<콘트라베이스>가 쥐스킨트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향수>와 <좀머씨 이야기>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낮고, 쥐스킨트의 소설 중에서 재미없는 이야기로 평가받습니다. 사실 모노드라마 같은 무대극은 직접 공연으로 봐야 재미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명계남 씨가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 역을 맡아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연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만약에 다시 공연할 기회가 있으면 꼭 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