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의미와 원리에 관하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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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충 그 개념은 어지간히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 개념을 머리로만 아는데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개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새로울 것 없기' 때문은 아니다. 분명 '똘레랑스'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일 순 없었지만, 하나의 '새삼스러운 각성'일 수는 있었다. 그간 치우쳐 두었던 것이었기에, '아 그런 게 있었지', '그거 당연히 좋은 거지' 정도의 각성이랄까, 일깨움 말이다.

흔히 '관용'으로 번역할 수 있는 '똘레랑스'하면, 타인을 존중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말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차별하고 '틀린 것'으로 규정하여 폭력을 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면 모를 수 있는 그런 인지상정(人之常情)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추앙받아온 성인의 말씀 중에 '和而不同'이 있으니, 이것은 차이의 조화로움에 대한 지극한 경지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런 화이부동의 자세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견지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의 이상일 뿐으로 치부해 왔던 것이다. 그 치부되어 온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 그것이 홍세화가 던져 준 '똘레랑스'였다.

지금 우리사회에 이 '똘레랑스'가 또한 새삼스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그것이 현재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새삼스레'에 강조점이 찍힌다. 새삼스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암묵적으로 혹은 아주 절실하게 '화이부동' 내지 이 '똘레랑스'가 요구되어 졌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똘레랑스' 혹은 '관용'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새삼스럽'지만, 그런 만큼 항상 현재적이고 절실하게 요청되어지는 개념인 것이다. 아니 지금까지 개념으로만 머물러 왔던 이것이 이제 실천적 운동으로 생동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책세상문고>판의 얄팍한 책자 하나가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시리즈의 72번째 책자를 우리는 유심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하승우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이다. 하승우는 "홍세화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또 공감한다"면서

   
  외세와 기득권 세력에 시달려 위축되고 경직된 한국 대중에게 이성을 길잡이 삼아 현실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필요하다. 제국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 군부, 재벌 등 많은 상대와 싸우다 보니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진보 세력에게도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차이를 환대하는 똘레랑스의 개념이 요구된다.(8쪽)  
   

고 천명한다. 그는 이 똘레랑스를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잘못된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적극적인 관용"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마냥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담겨있다. 그러나 '똘레랑스'의 번역어로서의 '관용'이 우리가 익히 들어아는 '관용'과 다르다는 번역의 엄밀성을 따져 묻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게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어떻게 다르다는 개념적 논의에서 한발 나아가 '똘레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개념이 어떻게 우리의 실천적 자세로서 활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점을 분명히 한다. "똘레랑스가 죽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개념"이길 바라고 그러하기에 "그 개념이 등장하고 성장한 구체적인 맥락"과 "그 개념이 자리 잡기까지의 시행 착오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실천적 '사회 윤리'로서의 '똘레랑스'가 가능하게끔 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동기하에 이 소책자에 가히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여 담아내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 분명히 그 욕심은 이 얄팍한 책자에서 풀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책세상문고>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똘레랑스'의 모든 것을 찾게끔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할 따름이다. 그 안내자로서 충실히 성공하기 유해서는 다분히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책세상문고> 시리즈가 이런 역할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런 점에서 충분히 성공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은 얼핏 지난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을 얼마나 압축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느냐와 동시에 흥미까지 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 관건을 하승우의 이 책은 어느 정도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제1장 '똘레랑스의 등장과 형성'에서 그는 똘레랑스의 기원을 고대 아테네로까지 확장시키면서 볼테르와 헨드릭 빌렘 반 룬의 논지들을 언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해서 고대 아테네 사회에서 우리는 똘레랑스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중세의 종교 분쟁'에서 비롯된 톨레랑스의 탄생(혹은 재발견)의 비극을 전한다.

   
  똘레랑스는 피의 연못에서 개화했다. 똘레랑스를 꽃피운 결정적인 계기는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만 3,000여 명의 신교도가 죽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2만 명 가량의 신교도가 학살되었다.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한 반격을 시작했고 종교 전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비극적 사건의 연속을 통해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살육을 멈추고 피의 비극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다분이 종교적 관용이라고만 정의내릴 수 없다. 종교적 관용일 뿐 사회 정치적으로 이것이 적용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중세의 종교적 요구가 곧 정치적 사회적 요구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해결된다. 곧 종교적 똘레랑스는 곧 정치적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 '광신에서 이성으로'의 변화의 시대에 똘레랑스는 "자신의 삶과 환경을 주체적으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신념"으로 변해간다. "밀에게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 실현뿐 아니라 사회의 화합과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런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확대되었던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하승우는 "사회주의는 똘레랑스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똘레랑스의 기원과 탄생, 그 사회적 필요성의 요구, 똘레랑스 확대의 과정 등을 고대 아테네에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에까지 걸쳐 살펴본다. 그러나 그런 방대해 보이는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흥미를 놓치지 않게하는 간단명료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라는 것의 모습은 크게 2가지로 대별된다. 미국산 탈러런스와 유럽산 똘레랑스가 그것이다. 미국으로 넘어간 똘레랑스는 미국식 발음으로 탈러런스(tolerance)가 되면서 똘레랑스와 발음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하승우는 그 차이를 구분하면서 탈러런스는 "타협을 추구하는 관용"이고 똘레랑스는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탈러런스가 가지는 위험성이 부각되는데 "미국 사회의 탈러런스는 이성적인 것(타협을 하려면 이익을 계산할 이성이 필요하다)이고 다원주의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조절을 내세우는 다원주의의 현실은 사실 부패한 정치와 자본의 결탁으로 얼룩져 있다". 반면 똘레랑스는 탈러런스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관용'이지만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뜨거운 이성'이"고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며,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라고 하승우는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하승우는 우리 사회에 탈러런스적인 관용이 아닌 똘레랑스적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탈러런스와 똘레랑스의 구분을 짚고 가는 것이며, 자세히는 아니지만 번역어로서의 '관용'과 동양적 똘레랑스의 냄새가 나는 '화이부동'이나 '중용(中庸)' 등과도 다소간 다르다는 것은 살짝 언급하고 있다.

하승우가 우리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똘레랑스, 즉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관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똘레랑스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그 작동 원리를 알아야 "희망의 사회 윤리"로서 똘레랑스가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그 기본 원리를 5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에서 똘레랑스는 출발한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할 때 독선과 독단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똘레랑스가 작동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하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원리들을 나열하면 똘레랑스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가 요구되며,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해 작동된다. 이와 함께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이다.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와 자유의 실현'을 목적으로 똘레랑스는 작동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공화주의와 파트너를 이룬다. 그리고 공화주의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공화주의는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 똘레랑스는 참견할 수 있는데도 참견하지 않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인내의 다른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기를 신중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똘레랑스는 덕(virtue)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68쪽)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키기려 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72쪽)

 
   

 그러나 이러한 똘레랑스의 기본 원리를 토대로 똘레랑스가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똘레랑스하지 않을 것인가, 즉 무엇을 앵똘레랑스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극단을 앵똘레랑스하는 것이 똘레랑스의 원리인데 사실상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는 의문이고, 그런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자칫 탈러런스와 같이 권력과 자본에 결탁하여 사회 정의는 커녕 개인과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계층에 복종하는 부작용을 낳기 십상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똘레랑스가 어떻게 그 한계를 넘어 현실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승우의 이 얄팍한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현실 사회에 어떻게 이러한 똘레랑스를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한 제4장 '똘레랑스와 접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승우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을 바꾸는 힘은 대중의 실천"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접붙이기 작업이 꼭 필요함을 역설한다.

사실 "홍세화는 이미 그런 접붙이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승우도 우선 홍세화가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소개하고 한국 사회에 그것을 실험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것은 "한 번의 시도로 완성될 수 없기에" 이런 성찰을 통해 새로이 "평가하고 보완"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똘레랑스가 이 현실 사회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하는 똘레랑스'가 제시된다. 그것은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로서 정당한 차별이고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동양에서 차별은 차이에 대한 억압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차별이 전제가 되어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기서 차별은 사물들로 하여금 각기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혼란스럽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제자리를 찾게 한다는 것은 신분으로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위와 개성, 재능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구분하고 합당하게 함으로써 부당한 간섭이나 강제 없이 공동체의 삶이 유지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차별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가하는 처벌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질서를 바로잡는 차별이다.(118쪽)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을 통해서 똘레랑스가 접붙여질 땅이 조성되면 이어서 '시민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로 숙성시키며, '자신의 가치를 되새기는 존엄'란 물을 주어 똘레랑스가 완전히 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똘레랑스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이 사회에 정의를 지켜내는 사회 윤리로서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이런 원대한 희망을 아주 간단히 소책자에 담아내고 있지만 그것이 그만큼 간단한 문제이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책자가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의 필요성을 다시금 각인시키고 그것의 실천적 생동을 요구하는 경적으로서의 가치는 크다. 하승우가 이 책의 제목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라고 한 데에는 그 희망의 절실함과 그 이룸의 어려움을 함께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똘레랑스가 한국 사회에 접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씨앗의 발아라는 필연적 과정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저자의 이후 작업이 요청된다. 이 책에 안내된 참고문헌을 통해서 똘레랑스를 찾아 읽고 있게 된 것은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희망처럼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희망의 사회 윤리'가 될 수 있는 마음이 간절해 진다. 그래서 이 소책자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희망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공유할 때, 그래서 똘레랑스가 이 사회에 뿌리내릴 때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을 하기에 이 얄팍한 책자는 부족함이 없다. 다음은 하승우의 제안이다. 그와 함께 우리도 '같이 걷자.'

   
 

제법 긴 여행을 했다.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생명을 얻는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개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은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고도 집을 떠났다. 홍길동은 개인의 만족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역적으로 몰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싸웠다. 똘레랑스는 홍길동이 나섰던 그 길고 긴 길 위에 있다. 미래의 청사진 같은 건 없다. 걸어가며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긴 과정과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을 뿐.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다. 같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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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
김광하 지음 / 운주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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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은 첫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본시 '첫경험'에 대한 설렘이나 흥분같은 것은 발동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디뎌놓기 전의 어떤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이 약간은 있었던 것같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나 스스로는 날라리이긴 해도 기독교신자임을 항상 표명하고 살아왔다. 그런 내게 불교는 어쩌면 금단의 세계였다. 이런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두려움일 수 있다. 모든 첫경험에는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대체로 기우일 뿐이다. 비정상적인 첫경험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이 첫경험은 비교적 정상적이었다고 해야겠다. 이제 그 두려움은 어느 정도 가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라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었다. 제대로 불교에 대해 접해본 적 없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비치는 불교, 지나다니며 보게 되는 불교,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내가 아는 불교의 전부였다. 『반야심경』의 몇 구절정도를 아무 뜻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일 수 있겠다. 그래서 불교 관련 서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을 들춰보다보면 그 중에 불교와 관련한 책들도 제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정통 불교 서적까지는 아니지만 오롯한 불심을 담은 책을 읽기는 처음, 첫경험이다.

먼저 내가 그 전에 저질렀던 불교에 대한 짓궂었던 행위를 반성해야 하겠다. 간혹 지하철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던 스님들 앞을 지날때면 '마귀, 사탄의 역사'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얄궂게 주기도문 정도는 입으로 읊으며 지나갔다. 이것은 조금은 무례한 짓이었다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또 간혹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치며 떠들썩한 이들에게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론 내가 중얼거릴 수 있었던 반야심경의 몇 구절을 염불하기도 했었더랬다. 이것으로 면죄부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반성은 매우 깊다.

이 책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를 읽게 된 것은, 내가 모시는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을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저자 김광하는 얼마 전 뵙게 되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고, 나의 선생님의 친한 친구분이기도 하다. 얼핏 듯기에 저자의 결혼전 함을 지고 박완서 선생댁으로 들어간 것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한다. 나의 선생님께서는 오랜 친구인 저자가 보내온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깊게 느낀바가 크다고 하셨다. 한학자인 본인이 부끄러울 정도로 각종 불교서적은 물론 노자의 『도덕경』까지 번역하며 끊임없이 학문과 불심을 닦으며 많은 결과물을 내어 놓고 있다. 그런 저자의 직업이 중소규모의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높이 사야할 것은 그런 저자의 수행의 깊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의 선생님께서 이 친구분을 높이 사는 것 또한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주장하며 온 세상에 정치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 어느 세상이 사랑과 우정,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를 존중하는 체제인지 물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없으면 어떤 사회라도 아직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그가 지금껏 불자로 살아오면서 닦아 온, 깊은 불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는 재가불자로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고민과 수행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가 된 듯하다. 흔히 인간의 삶을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그 가는 길에 뜨거운 '화두'는 하나씩 품고 가야하지 않을까? 저자는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마음을 성찰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길 위에 하나의 화두를 던져놓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저자가 재가불자이기에 그 화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불교적 시각으로 세상에 던지는 화두를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하나씩 받아들어 음미해봄은 그리 손해날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그간의 불교에세이랄 수 있는 것들은 다섯 마당으로 모아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부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첫째 마당에, "현실의 여러 갈등을 만날 때 불교적인 인식과 판단"이 어떠해야 하는 지의 에세이는 둘째 마당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소개"한 세째 마당, "수행 한담"이라는 넷째 마당, "불자로서 살아가기"의 다섯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부처의 역사적 모습을 찾아본다. 석가모니가 인도의 한 작은 왕국의 왕자였다는 사실 정도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우리가 부처님을 신격화하기 이전의 석가모니라는 한 수행자의 사실적 면모들을 살펴보면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겨야할 귀한 가르침들을 몇몇의 화두로 던져준다. "부처님께서는 29살에 출가하셔서, 35살에 그분이 가진 고민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과문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얼핏 예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이라고 느껴진다. 문득, 나는 이제 29의 나이가 몇달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면서,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이끄는 종교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특히 부처님께서 네 가지 집착, 즉 욕취(欲取;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 견취(見取; 견해에 대한 집착) · 계금취(戒禁取; 미신, 관습과 타부에 대한 집착) · 아어취(我語取; 나라는 이론에 대한 집착)를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하십니다.(46쪽)

부처님은 출가 후 새로운 사상을 대표하는 당대의 여러 스승들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 등에게 제자로서 이들의 가르침을 직접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의 교리가 윤리적 행위를 가져오는 합리적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이들을 떠납니다.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은 인간사회에 선한 행위를 가져오지 못하는 맹목적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76쪽) 

 
   

조금 간추려 본 것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부처님의 삶을 통해 저자는 유익한 깨달음들을 전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될 때 이천 여년 전의 부처의 그런 깨달음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익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마당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불교 에세이는 저자의 불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현 사회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재가불자로서의 저자의 삶이 지극한 불심과 현실에 대한 자비심으로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있게 하는 대목이다. "현실 삶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실체와 조건이 무엇인가를 먼저 해명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문제인 것을 인정하고 일단 멈추는 태도입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고[止], 우리 삶의 조건을 성찰[觀]하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겸허히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도 미래에서의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해야 하고 끝없이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문화가 심지어 생명을 가꾸는 농업과 종교, 시민단체까지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의 지속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있지요. 이런 동기가 있을 때, 과연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가 평화로울까요? 이런 삶을 버려둔 채 닦는 수행이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격을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 종교이며 그 실천이 종교적 수행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이 과연 종교적 수행일까요? 아니면 이 시대의 삶이 혹 우리의 수행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138쪽)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의 여러 모습들의 부조리함을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서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죽음에 대한 성찰, 노숙자에 대한 관심 등 저자는 우리 사회 곳곳의 현실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피고, 절실한 화두를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쌓은 모든 공부를 버리는" 것이 바로 이 하심이다. 하심은 달리 말하면 겸허해 주고 겸손해 지는 것이며, 나의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소유로 이어지고, 무상, 무위로 이어지는 기초의 관문이랄 수 있겠다. "하심은 깨달음에 관해 습득한 지식이나 분별을 내려놓는 것[放下心]"이기도 하다. "그동안 처음과 중간과 끝, 무명과 깨달음, 문 밖과 문 안, 법(法)과 법을 닦아 얻은 여러 경지 등 모든 계단이나 사다리를 놓아 버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의지해 왔던 모든 방법이나 평생 쌓아온 수행을 버리는 것이다."

   
  다급한 것은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눌려 있는 우리 생명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살리는 일에 계급적인 장벽을 앞세우거나 사회의 변화가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두려움과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고통받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눌려서 끙끙거리는 생명에 대한 창문을 활짝 열고 숨을 쉬는 태도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곳곳에서 던져주는 이런 화두들을 오롯이 내것으로 챙겨넣기에는 내게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 김광하가 세상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불심으로 연민하고 자애하며 절실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묻고 또 물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는 있다. 이런 저자가 던져주는 화두들을 그 하나라도 잡고 늘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그가 친절히 소개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것과 무에 다르다 하겠는가?

이 책에서 쓰이는 불교 용어들이 많이 낯설어 읽는 동안에 제법 걸리적 거렸던 것은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아마도 불교신도들을 대상으로 이 글들을 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용어들이나 불교고적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각주들을 붙여 놓았더라면 나같은 사람에게 보다 유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자가 던지는 화두를 우리가 받아내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세 가지의 새로운 무재보시", 즉 무재삼시(無財三施)가 있어 이것마저 소개해야겠다.

무재보시란 "재물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시"다. 이것에는 7가지가 있다는데, "부드러운 말과 웃음 띤 얼굴"로 하는 '언시(言施)'와 '화안시(和顔施)' 등이 있다. 여기에 저자는 새로운 무재보시를 제안한다. 우선 '경청시(傾聽施)',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보시"다. 다음으로 '발언시(發言施)', "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보시"다. 마지막으로 '공의시(公義施)'가 있다. 이는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대중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모임의 대화로 받아들여주는 보시"라고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 세 가지의 새로운 보시는 지극히 개인화되고 이기적이 되어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 곧 부처님의 자애와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는 참으로 절실한 보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 안들고 힘 안드는 이런 보시로도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저할 이유가 없겠다. 오늘부터라도 이 무재삼시를 실천해 보자. 저자의 이 책은 불교건 아니건 간에 한번쯤 깊게 음미해 볼 좋은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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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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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징가 계보학』? 무슨 시집 제목이 이래? 내가 이 시집을 처음 보게 된 것이 언제, 어디서인지 모르겠다. 2005년 9월에 출간되었으니, 한 몇 달은 전에 있었던 일이었을 게다. 아마도 어느 서점의 시집 코너에서 스쳐가는 눈길을 이 독특한 제목의 시집에 멈췄던 것이 분명하지 싶다. 그렇게 눈길로 담아두고 오래 묵히다가 최근에야 이 시집을 사 읽었다. 그 첫 만남 즈음에는 독특은 했었어도 선뜩 시집에 손길주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던 것이지 모르겠다.

  이 책을 주문하여 받아보는 즉시, 표제시 「마징가 계보학」을 펼쳐 보았다. 제1부 두 번째 수록된 시였다. 전문을 옮기자니 너무 길다. 그래서 옮기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는 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짱가, 그랜다이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마징가를 비롯한 그의 후예들은 전날의 그 마징가 들이 아니었다. 마징가 Z, 그 “기운 센 천하장사”는 “우리 옆집에 사”는 술고래였다. 고철을 모아 파는 이 마징가는 밤만 되면 술 먹고 아내를 그 굳센 팔로 두들긴다. 이보다 더 대단한 마징가, 그레이트 마징가는 마징가Z의 그 지겨운 소란을 “오방떡 기계”로 무마시킨다. 이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 그레이트 마징가의 마누라는 아마도 짱가를 찾아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마지막 그랜다이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부분의 소제목이 ‘4. 그랜다이저’다. 왜 그랜다이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무언가 숨어있기는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이 마징가Z부터 그랜다이저까지의 계보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웅 로봇들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 먹고 마누라는 패는 사내, 그 사내의 소란을 못마땅하게 여겨 때려눕힌 사내, 그 사내를 두고 도망간 아내, 그리고 그 사내들과 아내들이 저 우주 너머 외계에서 그랜다이저가 만들어준 그런 행복한 공간에서 거했으면 하는 인간사다.

  

  사뭇 재미있는 형식의 시도다. 만화 주인공을 끌어다가 이런 인물들을 표현하고 있는 그 자체로 처음에는 웃음을 짓게 한다. 그러나 읽어가면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한다. 그래서일까? 독특한 제목이 준 호기심뿐이었다면 이 시를 나는 시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들이 사는 배경을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어느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저소득층의 서민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그대로의 현실이지만, 그들은 어쩌면 마징가나 그랜다이저가 그런 것처럼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그런 비현실적인 모습들이다. 이런 비현실적 인물들이 전 시대, 혹은 현 시대에도 여전히 현실로서 살아가고 있다. 비현실성과 현실성의 만남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웃음과 애잔함의 교차, 쓴웃음으로 마감되는 이 시는 결국은 모순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고 노래했던 시인과 촌장은 한 사람이다 나도 그랬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부르며 귀가할 때마다 나는 출가한 붓다였고, 샴쌍둥이처럼 그녀의 몸에 세들어 살고 싶을 때마다 나는 늑대인간이었으며, 출근하기 싫어 장판에 들러붙을 때마다 나는 그레고르 잠자였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나는…… 이라고 쓰는 나는……    -「모순」부분

 

  

  이 시에는 아수라 백작과 헐크, 육백만 불의 사나이가 등장한다. 그들은 모순을 내재한 인물들이다. 양성구유의 아수라 백작, 괴물로 변하는 데이빗 배너 박사, “제 안에 제 것 아닌 걸 데리고 사는” 스티브 오스틴 대령. 모순을 내재한 이 인물들로부터 “좌익과 우익을”, “안팎의 경계”를 배우고, “초당 9.8미터를 더한 속도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아이들”이 생겨났다. 좌우, 안팎은 그 사이에 모순을 내재한다. 이 모순은 뛰어내려서는 안 될 옥사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작게는 다리에 부러지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상처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화자 개인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여러 모습들이 각각의 상황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튀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별난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러할 테니까. 결국 현실이란 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다.

  이 시집의 저자 권혁웅의 기법은 하나의 모순어법이다. 패러독스라고도 한다. 「마징가 계보학」이나 「모순」에 등장하는 만화나 공상 영화 속 주인공이든, 그에 비견되는 현실 속 인물들이든 모두가 이 모순으로 형상된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마징가로 대표되는 시인의 인물 군들은 비현실성을 대표하면서도 강력한 현실성으로 모든 시에서 표현된다. 때론 희극적으로 때론 애잔하게, 어쩌면 비극적으로 말이다. 그랜다이저가 만드는 세상, 곧 저 외계의 행복한 공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곧, 시의 화자가 살았고, 살아가고 있는 공간은 현실 그 자체이고, 그 안에서의 모순된 현실은 다분히 비현실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현실인식이 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시 「드라큘라」에서 “지금 서울엔 마늘 시세가 똥값이다 십자가는 동네마다 있다 그리고 나는 아파트에 산다//그분들처럼 이 동네 사람들도 밤이 되면 층층이, 나란히, 눕는다”는 언술은 그런 현실인식을 대표한다. 만화 같은 세상, 영화 같은 세상으로 시인을 현실을 파악하지만, 그것이 다만 만화나 영화처럼 허무맹랑한 것들로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시인이 살아오면서 보고 경험했던 현실 그자체가 그것들과 함께 모순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보자.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이, 애숙(愛淑)이, 양숙(良淑)이, 현숙(賢淑)이, 경숙(京淑)이, 남숙(南淑)이, 난숙(蘭淑)이, 미숙(美淑)이, 정숙(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정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뜨거운 주전자 물을 뒤집어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거지꼴을 한 동방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쑥대머리」전문

 

  

  말하자면 정숙이 에피소드라고 할까? 처음엔 고종석의 『바리에떼』에서 진주타령을 보는 듯도 했지만, 중간이후부터는 다분히 꽁트스러운 반전이 있다. 제목 자체에 농축되어 있듯이, 이 시는 정숙이라는 아이의 대머리 굴욕사건이라고 하면 딱인 셈이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이 ‘쑥대머리’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한참을 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정숙이란 아이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겉모습과 대머리로 대표되는 내면의 모습 사이의 모순을 깊이 간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정숙(貞淑)이란 이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래도 항상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정말 정숙(貞淑)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대머리였다. 모순을 간직한 채 살아온 아이는 그 모순이 발현된 순간 ‘그 길로’ 상처를 안고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 모순된 현실 속에 화자 자신이건, 또는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건, 그리고 정숙이건, 누구도 빠져나올 수도 없고,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혁웅 시에서의 말하기 방식은 간혹 하이개그를 구사하기도 한다. 쌍팔년도 개그라고 욕먹기 십상인 이 개그는 “나중에 사과해서/과수원을 해도 좋았을 친구”처럼 구사된다. 「쑥대머리」도 이런 식에 포함될 듯싶다. 이런 하이개그식 어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조소를 머금게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아이러니를 형성하는데, 이런 반어적 어법 또한 현실세계의 모순을 보다 극명히 드러내주는 데에 기여한다. 아내를 두들겨 패는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도 그레이트 마징가에게 두드려 맞듯이, 그 그레이트 마징가의 아내는 또 어딘가로 집을 떠나듯이, 이들은 아무리 보다 마징가도 아니고 그랜다이저도 아니다. 이 얼마나 반어적인가? 아이러니는 모순의 또 다른 표현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런 식이다. 가지각색의 만화 영웅들이 등장하고, 때론 에로배우도 등장한다. 야구선수 박철순도 등장하고 원더우먼과 용가리, 킹기도라 등등 각양각색의 비현실성의 대표들이 현실성과 합체되면서 변주되고, 그러면서 시인의 지난날의 경험들과 보고 들음과 어우러져 지극한 현실성을 획득한다. 이 속에는 모순과 아이러니로 꽉 들어차 있어 우리를 웃게도 했다가 씁쓸하게도 하고, 때론 울게도 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패러디의 집합처럼도 보인다. 백석의 시를 비롯해서 팝송에서도 구절구절들을 따오는 시의 작법들도 제법 많다. 그러니까 어느 곳 어디에서도 모순을 발견되고,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다. 마징가는 우리 시대 모순을 대표하는 존재의 시원인 것이다.

  황현산은 해설에서 “『마징가 계보학』은 필경 이 시집의 저자였을 화자가 서울의 가난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목도하고 살아낸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을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와 유머의 그물로 엮어낸 모욕과 굴종과 폭력의 족보”라면서 이름하여 이것을 ‘기억의 계보학’이라 칭한다. 분명 그럴 수도 있겠다. 황현산은 덧붙인다, “유쾌하고 비통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기억의 계보학’이란 표현에 맘 상했던가보다.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주름―사람들의 동선(動線)이 그어놓은―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사람들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시인의 말에 동의한다. 각개 군상들의 ‘주름’과 ‘겹으로 된 삶’의 그 지극한 속성에 대해서, 모순에 대해서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어찌 그것을 아련한 기억의 저편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시집은 그럼에도 재미있게 읽힌다. 이 시집을 읽는 내내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 웃음 공허함만을 남겨주는 단순무식 개그는 아니기에, 시집을 덮고나서 운다고 하더라도 그리 겸연쩍은 일은 아닐 것이다. 시집에 경기(驚氣) 있으신 분들까지도 일독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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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11-0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 경기 있는 제 흥미까지 끄는 독후감이었습니다, 멜기님. 혹시 정가 만원짜리 책 팔면 작가,출판사,중간상인,최종소매상이 얼만큼씩 이익을 얻는지 대충이라도 아세요?

멜기세덱 2007-11-08 22:02   좋아요 0 | URL
재밌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ㅎㅎ
제가, 출판계통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근데, 저자 인세의 경우 얼핏 잘 나가는 작가 정도가 10%를 받는다고 들은 것 같아요.
나머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은 가능할거 같아요. 최근 할인율을 10%로 제한하고 있는 걸 볼때 최종소매상의 경우 10%이상 마진을 주지 않을까요?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 쯤으로 기억한다. 대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소개하셨다. 그 강의는 <한문교육>이라는 전공 과목이었다. 전공이 국어교육이지만 한자와 한문도 국어의 일부일 수 있다는 취지의 교과과정이었을 것이다. 이 강의는 딱딱한 한자 한문 강의가 아니다. 감명 깊은 옛 문장들을 간추려 엮고, 그것을 통해 한자와 한문, 나아가 교양과 감성까지를 기르도록하는 강의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일까 매 수업시간마다 좋은 책들을 추천해지셨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책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오늘은 교내 우체국에 일을보러 갔다가 근처 구내서점에 들렀다. 진열된 책들을 돌아보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잊고 지냈던 옛 친구를 만난 느낌이랄까, 반가운 마음에 이 책을 집어들고 서점에서 나왔다. 생각보다는 얄팍하고 겉보기에 내용도 빈약해보였다. 한 번 훑어보니 한 2~3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듯 싶었다. 일을 보고 사무실에 들어와 내쳐 이 책을 펴들고 읽어내려갔다. 빠르게 읽히면서 손쉽게 넘어갔다. 정말 30분도 안되어서 다 읽게 되었다. 시집만큼 작은 책에 글자수도 보통책보다는 적게 된 이 책은 한장에 고작 11줄 정도밖에는 안 된다. 그렇게 70쪽이 이 소설의 다다. 책에는 편집자와 역자의 글이 수록되어 140여 쪽 분량이지만, 그것마저 읽기는 1시간도 남는다.

황폐한 마을, 그 마을도 이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람나는 냄새를 풍기며 어울려 지내던 곳이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황량해진 아무도 거하지 않는 비루한 곳일 뿐이다. 산이며 언덕이며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는 바람만이 싸늘하게 불어온다. 장 지오노는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 소설로 풀어내고 있다. 장 지오노가 분명해보이는 화자는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엘제아르 부피에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을 이 지역에 살면서 매일같이 황량한 들판과 언덕과 산에 나무를 심었다. 3년에 걸쳐 쉬임없이  나무를 심어 모두 10만 그루를 심었지만 자라는 것은 2만 그루에 지나지 않고 그마저도 끝내 곧은 나무로 성장하기까지는 1만그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엘제아르 부피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 땅은 변화해갔다. 황폐하던 마을에 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고 "물이 다시 나타나"고 "버드나무와 갈대가, 풀밭과 기름진 땅이, 꽃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이 땅은 이제 "삶의 이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아주 짧은 내용의 짧은 글이지만, 그 울림은 너무 크다. 장 지오노는 이 글에서 엘제아르 부피에를 한 고귀한 성자와 같은 경지로 생각하는 듯도 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달리 생각해 보게 된다. 황폐한 사막같은 곳에서 묵묵히 나무를 심은 부피에란 사람은 성자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고 말이다. 장 지오노는 이 소설에서 이 마을이 왜 황폐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짝 언질을 준다. "견디기 어려운 날씨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서로 밀치며 이기심만 키워 갈 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부질없는 욕심만 키워 가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하고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루 다투었"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부피에 같은 사람은 이상한 사람, 즉 광인이거나 혹은 성자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피에는 정상적 시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을 했던 것은 아닐까? 미친 것은 다만 세상일 뿐이다.

이 글을 통해 환경의 문제를 새삼 돌아보고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이기적이 되어가는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묵묵히 나무를 심어갔다. 그것은 황폐한 사회에 희망을 심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한 후 그것을 묵묵히 실천했던 부피에는 결국 "사람이라고는 단 세 명만이 살고 있었"던 마을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부피에에 대해 장 지오노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행복해질 수 있는 멋진 방법을 찾은 사람"이라고.

이 글이 환경 문제에 직면에 우리에게 던져주는 큰 문제의식도 있지만, 나는 내 입장에서 조금 다른 울림을 얻었다. 이 황폐한 사회를 바꾸는 방법, 이 사회에 희망을 심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사회에서 엘제아르 부피에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된 지난 강의의 교재를 찾아보았다. 메모를 해두었던 곳을 살펴보니 이 부분의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 즉, "한 해의 계책은 곡식을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십 년의 계책은 나무를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평생의 계책은 사람을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란 유명한 문장이다.

아 이거다. 나는 사람을 심는 엘제아르 부피에가 되는 것이다. 나무를 심은 엘제아르 부피에가 결국에는 온 마을에 희망을 꽃피웠던 것처럼, 나는 이 땅에 사람을 심고 기르는 것이다. 그렇게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사람들을 길러낸다면 이 땅은 희망찬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나무를 심은 부피에처럼 묵묵히 이 땅의 미래를 길러내는 사람이 되기위해 나의 능력과 심성을 닦아 나가야겠다. 사람을 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목표이다.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면, 이 땅에 복되고 희망찬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 땅은 바다보다도 넓고 깊게 행복에 겨워 살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담담한 포부처럼 내 포부도 담담하게 거창하다.(이 소설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인터넷에 많이 돌고 있으니 찾아보시면 또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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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 때 선생님의 권유로 본 작품이에요- 저는 애니메이션으로 봤었죠, 애니메이션도 짧지만 울림이 깊었고요~

멜기세덱 2007-11-07 20:25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찾아봤는데, 또 색다른 맛이 있더군요. 요즘 애들 취향은 아닌것도 같지만...ㅎㅎ

Jade 2007-11-0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꼭 12월에 시험 합격하셔서 제대로 된 사람을 기르셔요 ㅎㅎ

멜기세덱 2007-11-07 20:25   좋아요 0 | URL
내년 12월을 기대해 주세요....ㅎㅎ;;

딸기야놀러가자 2007-11-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지요, 이 책! 애니메이션도 정말 좋았어요.
이 책 읽은 뒤로 장 지오노 좋아져서 막 사다 읽고 그랬는데...
벌써 그것도 오래전 일이네요. 십년도 더 지난...
울나라에서 아주 잠시, 붐...은 아니었고, ^^;;
장지오노 탄생 100주년인가 해가지고 여러권 나온 적 있었거든요.
저는 지붕위의 기병도 좋았고, 또... 암튼 다 좋았는데
'폴란드의 풍차'는 넘 다른 느낌이어서 놀랐었어요. 그것도 함 보세요.
애니메이션도 마음에 들어서 프레데릭 바크(캐나다 감독) 작품 구해다 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멜기세덱님 언제 선생님 되시나요. 꼭 좋은 선생님 되세요! ^^

멜기세덱 2007-11-07 20:27   좋아요 0 | URL
딸기님께서 그렇게 부추기시면 어떡해요...ㅋㅋ
장 지오노에 대한 관심까지 확 높이는 책이에요...ㅎㅎ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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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인문학(人文學)이 어떻게 조우(遭遇)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 둘의 조화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끝장나야 가능했다. 이를테면, 지지리 가난한 어느 시골집 장남이 고학(苦學) 끝에 출세하여 교수가 된다거나, 학문을 한답시고 공부만 하다가 지지리 가난에 어쩔 수 없이 인문학을 끝장내고 굶어죽는 경우다. 그러니까 모 아니면 도다. 전자의 가능성은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의 수와 비슷하다. 또한 그것이 가난을 극복하고 인문학을 꽃피운 것이냐 물으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는 없다. 옛날식 드라마 줄거리가 생각나는 것은 비단 나 뿐은 아닐 것이다. 온 가족은 뼈가 닳도록 고생하면서도 장남 하나 출세시키기에 여념이 없고, 그렇게 출세하여 장남은 뽀대나게 살아도 그 나머지 가족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비극적 가족사의 줄거리는 이 가난과 인문학(비단 인문학 뿐만은 아니지만)의 접점에서 줄곧 일어나는 상황이다. 결국 가난과 인문학이 정답게 손잡는 경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방금 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 가난과 인문학이 정답게 손잡은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름하여 '희망의 인문학'이라고 해야겠다. 그간 극소수의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은 희망일 수도 있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야망의 인문학' 쯤 되려나? 이 야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에 가난과 인문학은 정답게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어떻게'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기 마련이다. 어떻게 가난과 인문학이 정겹게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맹자 왈 공자 왈 하는 이 지지리 가난뱅이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술로 중무장한 가난뱅이라도 이 험한 세대에서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을 획득하리라고 보기 어렵다. 시(詩)를 쓴다고 골방에 처박혀 원고지를 구겨 온 방구석에 널브러트린 가난뱅이가, 소설을 쓰는 청승맞은 가난뱅이가, 그림을 그린다고, 음악을 한답시고 나대는 가난뱅이가, 어찌 밥 먹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흔히 글쟁이 하겠다면 굶어죽기 십상이라고들 했다. 예술한답시면 또 그 꼴 날 거라고도 했다. 말하자면 인문학으로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리였다. 이 인문학이야 그 옛날 양반들이 하던 것이었으니, 농사 지어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이들에게 맹자 왈 공자 왈을 논하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기보다 반역에 가까운 것 아니겠는가. 인문학 그것은 굶어죽는 지름길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떻게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과 만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앞서 '왜'라는 의문사를 먼저 붙여야 하겠다. 왜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과 만나야 하는가를 풀어야, 그 다음 '어떻게'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굶어 죽겠다고? 왜? 죽을 때 죽더라도 고고하게 죽으려고? 가난해도 폼 나게 살다가 폼 나게 죽으려고? 이 또한 나는 한낱 범인에 지나지 않기에 대답을 찾을 길 없다.

왜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과 만나야 하고, 어떻게 그 둘이 조우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의 해답을 공자님도 소크라테스도 말해주지 않은 듯하다. 아마 그들의 시대에는 이 질문이 불필요한 질문이었을 게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와는 무척이나 달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 이 질문은 절실해졌다. 가난한 이들도 그들의 가난을 끝장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유는 있으되 그 자유를 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던져두는 것, 그것을 무엇으로 가능케 할 것인가? 얼 쇼리스가 말한다, "희망의 인문학"이 있다고.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왜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가? 나는 길지만, 얼 쇼리스의 그 명쾌한 답변을 옮겨야만 하겠다.

   
 

  여러분들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인문학을 배우지 못했잖아요?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올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체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공부입니다. 저는 인문학이 우리가 '정치적'이 되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선거에서 투표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는 '정치'를 '자족에서부터 이웃, 더 나아가 지역과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자들은 바로 이런 넓은 의미로 정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협상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 살기 위해, 또 힘을 얻기 위해 정치를 이용합니다. 부자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못됐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바로 부자들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류층이나 중산층들은 모두 인문학을 공부했을까요? 결코 그랬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들 중에는 분명히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었고, 그런 공부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잘 살 수 있도록, 삶을 더 즐길 수 있도록 인문학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부자로 말입니다.

  부자들은 사립학교나 비싼 학비를 내는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웁니다. 그것이 모든 단계에서의 정치적 삶을 배우는 한 방법인 셈이지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정말로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서, 그리고 사람들이 소유한 것들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힘, 합법적인 힘을 갖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문학이 도와줄 것입니다.

-얼 쇼리스,『희망의 인문학』, 217~8쪽.

 
   

내가 이 긴 문장을 인용하면서, 수십 타의 자판을 두드리는 수고를 하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았음을 강조해야 하겠다. 그 말은 어느 줄의 몇 문장은 빼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옮겨 놓고는 밑줄이라도 긋고, 굵은 글씨로 돋보이게 할 문장을 골라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포기했다. 어느 것 하나 뺄 수도 없고, 또한 무엇 하나 더하고 덜함 없이 구구절절 중요한 문장이라고 판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문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자 여러분들도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시라. 길다고 해서 대강 훑고 온 이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다. 내 리뷰는 제쳐놓고 이 인용문만이라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읽어보시라 이 말씀이다.

얼 쇼리스는 말한다. 니들은 속았다고. 우리를 이 지지리 가난 속에 얽매어 놓는 이 세상의 간악함(나는 얼 쇼리스가 어떤 '무력적인 힘'이라고 한 것을 간악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의 해법이 인문학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인문학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지지리 궁상이었다. 얼 쇼리스는 다시 말한다. 세상의 이 간악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래서 무식하게 이판사판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좀 더 똑똑해지고 교묘해 져서 이 간악함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이판사판 공사판이 아니라 "진정한 힘, 합법적인 힘"으로 이 간악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정치, 그것을 알 때에 얻어지는 이 힘을,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을 이 가난한 자들이 왜 배워야 하는지를 말하는 얼 쇼리스의 이 네 문단의 강변을 통해 나는 무릎을 치며 탄복해야만 했다.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똑똑하지 못한 가난뱅이는 지지리 궁상을 가난으로 떨어야 했다. 어쩌다가는 패악으로 치닫고 말이다. 우리 20년대의 신경향파 문학이 보여주는 대강의 줄거리가 그렇듯이 불 지르고 살인과 약탈로 결말지어지듯 말이다. 제도 외적으로 가난이 치를 떨 때, 그것은 제도권이라고 하는 세상의 간악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깨갱댈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인문학으로 똑똑해져서 이 무력적인 힘을 한번 비웃어주고 그것을 가지고 놀면서 가난을 극복해 보라고 얼 쇼리스는 말한다. 가난한 자들이여 인문학을 배워라.

그러나 '어떻게'가 남는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맹자 왈 공자 왈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저 좋은 거라니 좋은 것이려니 하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나 밥먹여 주지 않으니, 그걸 해서 무엇 하겠냐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해야 된다고 얼 쇼리스는 말한다. 그래 해야 된다고 하자. 그럼, 한 시라도 손 놓아서는 밥 먹지 못하거늘, 언제 그 지리한 인문학 노릇을 하겠는가? 바로 '어떻게'가 남는 지점이다. 어떻게 인문학과 이 지지리 궁상 가난이 만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책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해결될 수 없는 곳에 놓여있다. 말하자면 '돈'이 걸린다는 얘기다. 선생도 필요하고, 장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얼 쇼리스는 다만 보여주기만 한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지원을 받아내고 협조를 구한다. 하나씩 하나씩 시작해가면서 각계의 호응을 얻어낸다. 다분히 성공적이다. 얼 쇼리스라는 한 사람에 의해서 파생된 이 인문학 프로젝트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해를 거듭해가면서 그 효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얼 쇼리스라는 몇몇의 지성인들을 통해 가능했다는 점은 문제다. 그렇다면 이 '어떻게'의 해법을 찾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다. 얼 쇼리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그것이 사회 일각에서 작은 불빛으로 빛나고 있다면 그것을 사회적으로 큰 불이 되게 하는 방법, 곧 이 사회가 가난한 이들이 인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무력적인 힘'으로 지배되고 있지 않은가? (아 이런,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구만!) 가난한 이들이 80%가 넘으니,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어찌 보면 어렵지 않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정치적이 되었을 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그것은 인문학을 가난한 자들이 배워야 가능하고, 또, 또, 또. 자 결론은 다시 얼 쇼리스에게로 돌아가야 하겠다. 얼 쇼리스라는 사람이, 그리고 이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길이 인문학을 배워야 함을 자각한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다면 그래서 조금 늦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한 줄기 희망은 점차 큰 줄기의 불기둥으로 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간 어려운 문제다.

가난한 자들이 정치적이 돼야 하고, 정치적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통하는 길이 최선임을 얼 쇼리스가 말해주고 있지만, 얼 쇼리스처럼, 그리고 그와 동조하는 지성인들이 몸소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한 또한 그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 『희망의 인문학』이 우리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지성인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단 우리 사회에 얼 쇼리스는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번역자들인 <광명시 평생학습원>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미 얼 쇼리스처럼 이 인문학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이미 작은 불빛을 밝혀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장작도 얹어 놓고, 가끔은 기름도 들이붓고, 그 인문학 불길에 이 가난한 몸 또한 던져 태우면서, 그렇게 그렇게 차츰 큰 불줄기 만들어 가면, 되는 것 아닐까? 이 책이 이 간악한 세상에서 금서가 되지 않는 한, 또한 금서가 된다고 하더라도, 읽어야 하고, 읽혀야 한다. 『희망의 인문학』으로 우리 다시 한 번 불온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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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브리핑에서 제목을 보는 순간 희망의 인문학이겠구나,했어요- 요즘 신이내렸나 ㅋㅋ 이 책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이라니! ㅎㅎ 성공회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성프란시스 인문학교나 관악인문대학, 수원인문대학, 제주희망대학 등도 있답니다- 예스24에 여기에 책을 지원하는 모임이 있는데, 알라딘에도 리뷰를 종종 올리시는 '인식의힘' 님께서 운영하고 계신답니다.

멜기세덱 2007-11-0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인식의 힘님....내 그 분이 그럴 줄 알았아요....ㅎㅎ
좋은 일을 좋은 분들께서 하시네요...ㅎㅎ(에고 부끄~~)
알라딘에서도 그런 일을 하면 참 좋을텐데.....ㅎㅎㅎ

물만두 2007-12-1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멜기세덱 2007-12-12 01:11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7-12-1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멜기세덱님 사고 치셨군요!!! 우와와. 대형사고 쳤습니다!

멜기세덱 2007-12-12 01:11   좋아요 0 | URL
이런 일도 다 있군요. 다 아프님 덕분이에요...ㅎㅎ

아영엄마 2007-12-11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일등 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대박 터트리고 올해 마무리 하시는군요~. ^^

멜기세덱 2007-12-12 01: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임용고사 붙는 것보다 이게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ㅎㅎ

웽스북스 2007-12-1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멜기세덱님 정말 축하드려요!!!! 내년 책값은 걱정 없으시겠어요 아 부러워라~

멜기세덱 2007-12-12 01: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근데 앞으로 한 3달은 걱정 없겠네요.ㅎㅎ

웽스북스 2007-12-12 13:12   좋아요 0 | URL
아이쿠, 제가 너무 과소평가 했었나보네요- 이 자기중심적 사고 ㅋㅋ

이매지 2007-12-1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악! 멜기님이 1등 하셨네요 !!
놀라서 낼롬 달려왔어요~
축하드려요 >ㅁ<
부럽부럽부럽 ㅎ

멜기세덱 2007-12-12 01:13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도 이게 웬일인지 모르겠네요.ㅎㅎ

라주미힌 2007-12-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헉.... (기절) ㅎㅎㅎ

멜기세덱 2007-12-12 21:34   좋아요 0 | URL
(가슴을 잡고 흔들며, 따귀를 때려보기도 하고, 눈꺼풀을 뒤집어까보기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찬물을 얼굴을 확 끼얹고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듯한 라주미힌님을 보며)

주미니형.....괜찮으세요? ㅎㅎㅎㅎ

코코죠 2007-12-12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그리고 원하시는 다른 일도 분명 이루어질 것이에요. 이건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로군요^ ^

멜기세덱 2007-12-12 21:33   좋아요 0 | URL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요....
ㅋㅋ
바라지도 못하구요...ㅎㅎ

뽀송이 2007-12-1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멋지게 한 해 마무리 하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멜기세덱 2007-12-12 21: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올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좀더 기대를 해 봐야죠...ㅎㅎ
난 아직 배고푸당...ㅋㅋ

다락방 2007-12-1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부러워서 달려왔어요!! 축하합니다 :)

멜기세덱 2007-12-12 21:3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너무 늦게 오셨쎄요...ㅎㅎ
감사합니다...ㅎㅎ 모든게 다 다락방님 덕분이에요...?ㅎㅎㅎ

순오기 2007-12-1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합니다!
이런 건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달아 놔야 하지 않을까요?
축하부터 올리고 일등 리뷰도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 ^^
댓글은 주렁주렁... 추천은 짠돌이? ㅎㅎㅎ

로쟈 2007-12-13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무스탕 2007-12-1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한 건 크게 하실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chika 2007-12-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축하드립니다!! 멜기세덱님께성 원하시던 즐찾배가운동은 저절로 되겄슴다! ㅋ

프레이야 2007-12-1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세덱님^^

dalpan 2007-12-1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여세를 몰아~

리치보이 2007-12-14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마노아 2007-12-14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당선 사실을 지금 알았어요. 멜기세덱님 축하드려요! 이건 진짜 너무 부러운 일이잖아요^^

드팀전 2007-12-1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miony 2007-12-14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라로 2007-12-1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낫!!!!축하해요!!!!이제 애인만 생기면 되겠네!!!!요!!!!ㅎㅎㅎㅎ

가시장미 2007-12-1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 아.. 어떻게하면 저런 리뷰를 쓸 수 있을까요?
저도 여러모로 반성을 해보아야 할 것 같네요.
아잇! 갑자기 제 서재에서 지우고 싶은 리뷰가 막 생각나네요.
대충써서 올린 리뷰들 있잖아요 ㅋㅋ
앞으로는 썼다 지웠다,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리뷰를 써야 할 것 같네요.
멜기님께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

이름없는꽃들 2007-12-1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책을 꼭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중은 현명하다고들 말하지만, 더욱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절망을 많이 느끼는 요즘 저부터 시작해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문학을 함께 공부해 나가는 작업을 해야겠어요.

시비돌이 2007-12-2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당분간 책 값 걱정안하시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