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군생활 당시(2001~2003)에도 잘 부르지 않았던 군가 중에 '진짜 사나이'란 노래가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대중 군가'라고나 할까? 가슴아프게도 '사나이'는 할 일이 많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고 부모형제를 지키는 사나이가 바로 '진짜 사나이'라는 것인데, 이는 총과 칼로 적과 싸워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경제를 지키고 부모 자식을 먹여 살려 지키는 것까지를 포괄한다. 재미삼아 몇 절을 더 불러보자. 

   
  입으로만 큰소리 쳐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겨레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 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 고향에 돌아갈 땐 농군의 용사다.

겉으로만 잘난 체 해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진짜 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 있는 군복 입고 휴가 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 생활 알리고 오리라.
 
   

2절과 3절이다. 이게 언제적 노래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농군의 용사"란 노랫말을 봤을때 한참 전에 지어진 노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산업의 용사"쯤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다. 다를 건 없다는 뜻이다. 군 생활이 암만 새로워져도 그게 부럽다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3절은 처량하다. 아직도 휴가 간다고 군복에 세 줄 잡고, 전투화에 불광내는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여하간 '진짜 사나이'가 나라 지키고 부모 형제 지키는 나라의 일꾼이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진짜 사나이들이 너무 많아져서인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우리는 '멋진 사나이'가 되고자 한다. 역시 출처는 군대일까? 특히 해병대에서는 '멋진 사나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사랑은 뜨겁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명령에는 호랑이 대화는 정답게 (대화는 정답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적에 맞서 싸움을 잘하고 2번을 강력하게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로 여인에 대한 사랑은 '뜨겁게'하는 사나이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멋진 사나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여기서의 '싸움'은 적과의 싸움, 나아가 나라 경제의 최전선에서 벌이는 산업 전쟁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간혹 이를 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지들이 천하무적인 줄 알고 빨간 옷 입고 설치는 이들이 문제가 되기는 한다. 

군대에서도 시대의 발전상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운데, 우렁찬 목소리가 상징인 '진짜 사나이'는 그것도 때와 장소와 상대(특히 뜨겁게 사랑해야할 여인)를 가려 정다움을 내보여야 '멋진 사나이'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나이라야 '남성 넘버원'이다. 

다들 한 물 간 사나이 타령이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재된 사나이스러움이다. 나라 경제의 대들보로서 사나이, 곧 남성은 전투력을 배가시켜야 하고, 이는 나라를 지키고 내 부모와 처 자식을 지키는 원칙이다. 곧 경제력 있는 남성이 '진짜 사나이'고 여기서 좀 더 부드럽게 그러나 사랑은 뜨겁게 하는 남성이 '멋진 사나이'라는 사실, 이는 진리 아니면 자연접칙이다. 

대세는 꽃미남이라고? 짐승 아이돌이 꽃미남 얼굴에 근육질을 자랑하며 설쳐대지만, 얘네들한테서 돈을 빼놓으면 그냥 루저일 따름이다. 얼굴 파먹고 사는 것 아니고, 근육 뜯어먹고 사는 것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은가? 요즘 대부분의 매체들이 연예인들을 내세워 근육질 꽃미남을 남성의 이상형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지극히 상업적 노림의 일환일 뿐이다. 교묘한 경제력의 다른 이름이라고나 할까? 노골적으로 "돈 있냐"를 물어보기는 쑥스러우니, 우회하고 있을 뿐이다. 꽃미남은 타고나는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근육질은 솔찮이 돈을 들여야 하니 말이다. 

각설하고, 박노자 교수의 근간 중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책 한 권을 소개해야 하겠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란 책이다.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1890~190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이상적 남성성'을 추적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와 문헌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을 통해서 근대와 함께 어떠한 남성성이 요구되어지고 만들어졌는지를 끄집어낸다. 이를 통해 현대에 이어지는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계보 캐내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남성성-남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이상'을 "생물학적인 남성다움을 둘러싼 사회적 구성물, 복잡한 권력관계의 망에 의해 지탱되고 지배적인 문화의 틀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하면서 '남성다움의 담론'의 역사를 추적한다. 

1890~1900년대 세계 제국 열강의 위협과 왕조의 존망의 위기 앞에서 서구 근대적 남성성에 대한 지향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었는지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전 시기의 유교주의에 입각했던 지배계층의 전통적 이상적 남성성, 이와는 다른 측면을 보이는 일반 서민의 이상적 남성성과 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근대화와 함께 형성된 이상적 남성성은 국가에 대한 자기희생적 정신을 바탕으로한 정신적인 힘(전장에서 죽을 태세)과 신체적인 힘(무쇠골격, 팔다리 민활)을 모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부국강병을 위한 남성성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0~1900년대 이루어진 이상적 남성성의 민족주의적 재구축은, 대체로 이 같은 가치들을 차용하여 왕조국가를 "민족/국민"으로 재정의하고 이전에 효라는 관념이 차지했던 최상의 지위를 "민족/국민"에 부여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손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접목을 통해 이상적 남성성 이데올로기의 성립을 예리하고 밝혀내고 있다. 

이는 꾸준히 그 논리와 수사를 변용하면서 지속되는데, 나라 존망의 위기에서 대두되었던 강인한 체력의 훈련된 민족 전사라는 이상형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산업 전사로서 모습만을 바꾸게 된다. 조금씩의 변화는 있지만, 앞서 살폈던 대중군가(?)에서 보이듯이 오늘날의 진짜 사나이, 멋진 사나이, 스러움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상적 남성성의 요구는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 한국의 남성성 '경제화'된 남성성으로 규정한다. "학력 자본의 소유자"와 "경제 능력의 소유자"가 이상적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학력과 경제력은 오늘날 거의 등가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선 이는 곧 '경제력'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할 때, 역시나 오늘날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경제력에 다름 아닌 게 되었다. 경제력 하에서 꽃미남도 되고 근육질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뿐이다. 

씁슬한 현실이다. 박노자 교수는 미래의 이상적 남성성으로 다소 엉뚱한 제안을 내놓는다. "바람직한 씩씩한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돌봄을 할 줄 아는 남성"이어야 한다는데, 나는 다소간 뚱~하다가도, 이내 수긍이 간다. "적극적인 배려의 생활은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정기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배려는 과거의 근대적 이상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발전적 계승이다."라며 자기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군. 이를 내식대로 해석하면 이상적 남성성도 이상적 여성성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이상적 인간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여성만큼이나 남성도 피곤하고 힘겹다. 학력과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경제력자 천하지대본은 이 시대의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잖은가? 이 시대의 진정한 루저는 180이 안되는 키의 남성이 아니라,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지 못하는 남성이다. 그녀는 다만 돌려 말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상적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남성들이여 인간이 되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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