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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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김제동 어록(語錄)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어록 중에 하날 가져오면 이런 식이다. “키가 작았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의 키를 땅으로부터 재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작은 키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자신의 키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시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에 그다지 특별한 재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말은 참 빠르고 재미나게 잘하는 김제동의 어록이 연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화제가 되었던 데에는 이런 식의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반전과 당대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일순간 꺾어버리는 단순명쾌한 사고의 역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폴레옹의 일화를(그것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케도 찾아와 다만 입으로 옮겨놓았을 따름인데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주옥과도 같은 교훈을 주고 있기에, 김제동만의 어떤 호소력을 높이는 말하기 방법이 곁들여져서이겠지만, 한때나마 화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서 흔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유행이 되었다. ‘누구누구 어록’이라고 해서 재미난 말들, 혹은 말실수들 같은 것을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을 탔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내가 아는 것 중 하나는 전거성, 즉 전원책 변호사가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 한 발언들을 모아놓은 어록이다. 그 사람 말은 참 황당무계한 면이 없지 않지만, 가히 격분에 찬 말하기 모습은 너무 웃기게 재밌다. 아무튼 이 어록의 유행이 다만 웃기는 말모음 정도로 저급화되긴 했지만, 그 유행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김제동의 말모음은 충분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지니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스런 의미에 값하는 것이지 싶다.

  정민 선생도 이 어록의 유행을 감지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무슨 어록이니, 누구 어록이니 하는데, 누구누구 말실수나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에 ‘어록(語錄)’이란 거창한 명칭을 붙여놓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정민 선생은 이 어록 유행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이다. 어록(語錄), 말씀 어(語)에 기록할 록(錄)을 쓰는 이것은 그냥 흔하디흔한 말들을 기록하여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말 중에서도 말씀이 될 만한 것을, 그러면서도 그것을 베끼어 써서 책으로 만들어 낼 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민 선생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이 저급화된 어록의 유행에 종지부를 찍을까?

  그것은 바로 정민 선생이 엮고 첨언(添言)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최근 다산을 연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내보인 정민 선생이지만, 다산의 말과 글들이 어찌나 높고 귀한지 그 방대한 저술을 하고도 끝내 남은 귀한 말씀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에 모아 엮어 놓은 것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는 오롯이 다산 선생의 방법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다산은 이황의 『퇴계집』을 “매일 한 편씩 아껴서 읽”으면서 마음으로 공감한 귀한 글귀들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들을 덧붙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엮었다. 다시 정민 선생은 다산의 방법 그대로 다산의 글귀들을 모아 “말게 감상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펴낸 것이다. 말하자면 정민 선생의 「다산사숙록」인 셈이다.

  ‘다산어록(茶山語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어록이야 말로 어록의 지존(至尊)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어록이라는 것이 ‘귀한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때, 그 귀한 말씀이란 것은 금가루를 갈아 먹인양하여 쓴 글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록으로 남겨 고이고이 간직하고 세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읽고 또 듣고, 길이길이 남기고 되새길 만한 그런 말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제동의 그 ‘말씀’들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도 좋게 보아줘도 그것이 세대를 넘기고 세월을 넘겨서까지 어록일성 싶지는 않다. 진정한 어록이란 이런 것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을만한 ‘말씀’들이 어디 한갓 연예인의 입에서 쏟아진 것들이어야 쓰겠는가 하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오는 그런 불순한 발상에서만은 아니다. 시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우리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귀한 말씀들이 분명히 여기 있기에 그런 것이다.

  ‘청상(淸賞)’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맑게 감상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이의 자세를 나타내는데, 감상하는 그 대상이 분명 맑고 청아하게 울릴 때에야 비로소 청상(淸賞)이 가능한 것이다. 정민 선생이 ‘청상’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그렇게 맑게 감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귀한 말씀’이다. 다산의 방대한 저술들 중에 “삶의 자세 전반에 관한 성찰과 충고”를 추려 엮은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손에 들고 한 말씀 한 말씀 되새기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의 복이요”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나누고 싶다.”

  200년 전 쯤에 살았던 다산 선생의 말씀이 그 당시에도 그러했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人與骨俱朽, 一簏之書無所傳, 猶之無生.)” 여기에 정민 선생은 좀 더 격하게 덧붙인다. “마음공부를 하라 하면 ‘한가한 소리 하고 앉았다’고 빈정댄다. 책을 읽으라면 ‘따분한 말 좀 그만 하라’고 한다. 온통 돈 벌 궁리,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 생각뿐이다. 결국 이룬 것 없이 죽어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과 같이 잊혀진다. 자식들은 그 재물을 두고 싸움질을 한다. 세상을 살다 가는 보람은 그런 것들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속에 품은 생각의 크기가 대인과 소인을 가른다. 개돼지도 배부르면 기뻐한다. 개돼지도 별 걱정 없이 살다가 간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돈만을 좇아가는, 썩어질 것들에만 충성하는, 물신(物神)의 광신자들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말이 주는 울림이 적다고 하겠는가?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뉘우침에 달려 있다.(其聖其狂, 唯悔吝是爭.)”라거나 “진실로 부모에게 능히 효도하는 사람은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苟於父母能孝者, 雖曰不學, 吾必謂之學矣.)”는 다산의 어록에는 날카로운 칼날로 찔러오는 그 무엇이 있다. 항상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미친놈이 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된들 무엇 할 것인가? 이 시대 재주가 뛰어나고 박사들이 넘쳐난다지만 그 중에 사람구실 제대로 하는 진짜 사람을 몇이나 될까? 제 부모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 말씀들은 가히 촌철살인, 그 자체다.

  특히 다산 선생은 독서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다산의 말씀들 중에 독서에 관한 언급은 책 한 권으로 따로 엮어내어도 충분할 만큼 어느 하나도 소중한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 다산은 독서의 방법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읽을 때는 구름 가고 물 흐르듯 해도 괜찮다. 하지만 백성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을 때는, 단락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깊이 따져 대낮 창가에서 졸음을 쫓는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凡無益於世之書, 讀之可如行雲流水. 若其書有裨於民國者, 讀之須段段理會, 節節尋究, 不可作午牕禦眠楯而已.)” 여기에 정민 선생의 이런 첨언도 또한 명쾌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산의 어록을 읽으면서 정민 선생이 청상(淸賞)한 바를 또한 훔쳐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평생 가까이에 두고 스승으로 삼을 책 한두 권을 갖는 것이 독서의 큰 보람이요 행복이다.” 정민 선생의 ‘청상(淸賞)’ 중에 하나를 좀 길지만 옮겨보자. “과문은 과거 시험장에서 쓰는 글이다. 실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문(吏文)은 아전들이 행정 실무에 쓰는 실용문이다. 요령만 있으면 된다. 고문은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다. 배우기는 고문이 가장 쉽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과문만 공부한다. 고문을 공부하라고 하면 시험에 안 나오는데 왜 하느냐고 되묻는다. 고문을 열심히 익히면 과문은 저절로 잘 써진다. 과문에만 힘 쏟으면 고문도 안 되고 과문도 안 된다. 글은 테크닉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쓴다. 테크닉을 아무리 익혀도 정신의 뒷받침이 없이는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과문을 배우는 지름길은 고문을 천천히 익히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생각의 힘을 길러라. 글쓰기의 기술과 잔재주를 익히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기본기를 충실히 닦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다산 선생의 말씀을 좀 더 쉽게 옮기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논술이라는 감옥에 빠져버린 어린 학생들에게 일침을 주는 또 다른 어록이다. 다산과 정민을 함께 읽는 두 배의 즐거움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에 있다.

  이 밖에도 구구절절한 다산의 어록이 많다.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만 후손까지 미친다네.(樂不亟享, 延及耄昏. 福不畢受, 或流後昆.)”,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것은 베풂만 한 것이 없다.(凡藏貨秘密, 莫如施舍.)”, “대저 이미 동서남북의 가운데를 얻었다면 어디를 가든 중국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동국으로 본단 말인가? 대저 어디를 가도 중국이 아님이 없을진대, 어찌 이른바 중국으로 본단 말인가?(夫旣得東西南北之中, 則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東國哉! 夫旣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中國哉!)” 등의 말씀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렇게 200년 전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의 어록은 오늘날에도 구구절절이 유효하고 새롭다. 오랜 세월을 묵혀 읽어도 새롭게 발효되는 말씀이고 나서야, 진정한 어록이라 이름하는데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김제동 어록이 따라올 수 없는 지경에 다산의 어록이 있음을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민 선생이 정리하여 첨언한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은 다만 인터넷 검색으로 간단히 찾아 여흥삼아 읽고 보는 김제동 어록을 비롯한 누구누구 어록과는 달리, 책상 위 한 곳에 고이 모셔두고 하루하루 읽고 되새기며 ‘맑게 감상’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어록이지 싶다. 이쯤 돼서는 일전의 어록 유행도 더는 나대기가 어렵지 않겠나? 연암(燕巖) 어록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가에는 3, 4천 권의 책을 꽂아두고, … 마루에 올라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하나가 있다. 붓과 벼루, 책상과 도서의 배치가 고아하고 정결해서 기뻐할 만하다.(揷架書三四千卷, … 上其堂入其室, 有琴一張, 投壺一口. 筆硯几案圖書之觀, 雅潔可喜.)”는 다산의 말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은지 너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40세 이전에 4천 권의 책으로 방안의 네 벽을 채우고, 책상 위에는 볼펜과 연필을 채운 단정한 필통이 한 곁에 놓여 있고, 한 쪽엔 컴퓨터가 있으며, 한쪽 구석엔 기타와 피아노가, 또 다른 쪽엔 바둑판과 바둑알이 놓여 있는 곳, 들어서면 오랜 된 책 향기가 깊게 배어나오는 그런 서재 하나 갖고 싶은 내 마음이 간절하다. 다산이 기뻐했던 그런 공간과는 많이 다르면서도 그 맥은 다르지 않은 그런 공간, 그런 곳을 하루 빨리 마련하여 다산의 그 마음과 나의 이 마음이 서로 통하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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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신 없는 종교는 가능한가 고정관념 Q 11
리오넬 오바디아 지음, 양영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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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도 일종의 익숙해-지기다. 어떤 것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서로 길들여가고,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익숙하다의 '익숙'은 한잣말이겠거니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해당되는 한자는 보이지 않는다. 순우리말인가 하니 또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고어에 '닉숙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닉(다)'와 '숙(熟)'의 결합니다. 고어 '닉다'는 오늘날 '익다'로 쓴다. 熟도 대표 훈음이 '익을 숙'이다. 삶은 계란을 생각나게 한다. 물에 계란을 넣고 끓이면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가 서서이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익숙해지는 가장 기본적 의미는 아닐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어떤 것에 능란하고 숙달된 상태, 눈에 익어 잘 아는 것, 혹은 가깝게 잘 아는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잘) 안다'라고 종종 표현한다.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하고, 서울 지리를 잘 '안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나는 내 오랜 친구를 잘 '안다'. 그래서 익숙한 것은 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최종의 익숙한 상태란 없다. 더 익숙해지고, 더 잘 알 수 있는 상태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알지만, 나보다 더 자전거 잘 탈 줄 '아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고 알아 가는 것이다. 진행형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익숙한' 것, 혹은 그러한 상태가 진행형이어야 함을 종종 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종종 '너무' 또는 '아주'와 호응하는데, 이른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는 듯 뻐기는 경우다. 내겐 너무나 익숙하기에 뒤도 볼 것 없이 너무나 자명하다. 여기서 나오는 것은 고정관념이고, 이것은 때론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런 익숙하고 자명한 것들에 의문부호를 붙여주어야 한다. 상식이라는 그 익숙하고 자명한 지식은 그래서 자주 부패하고 상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물음표를 달고 다닐 때 그것은 보다 유효한 지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것, 익숙한 것,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떤 도움을 얻는다면 조금은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친구로서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고정관념Q>시리즈는 제격일 수 있겠다. 현재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것으로 '종교, 예수, 이슬람, 세계화, 이집트 문명'이 있고, 앞으로 다룰 것으로 '동성애, 왼손잡이, 피카소, 유대인, 팔레스타인, 석유' 등이 있다고 한다. "역사 · 문화 · 사회 · 예술 · 과학 · 건강 등 너른 분야에 걸친 깐깐한 문답은 상식의 틀을 께고 즐거운 지식을 찾을 수 있는 검색창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획의도에 맞게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다루려 하고 있다.

이중 나는 관심사항 중 하나인 『종교』를 읽었고, 『예수』를 현재 주문중이다. 이 책 『종교』는 그 주제의 무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가볍다. 그래서 빨리 읽힌다. 속독이 특기가 아닌 나같은 사람도 한 두 시간이면 너끈하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것말이다. "종교는 비이성적이다", "종교는 인간 소외의 근원이다", "신은 죽었다" 등.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문장들인가? 이책의 각각의 소주제들만으로도 책 한 권씩은 충분히 뽑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다소간 이 책이 너무 거대한 것을 건드려서 이도저도 아닌 게 된 듯한 느낌, 말하자면 계륵(鷄肋)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책 『종교』는 우리가 흔히 종교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 그러니까 너무 뻔해서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종교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하나씩 친절히 물음표를 붙여놓는다. '모든 생물 중 인간만이 종교를 가진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방점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 찍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각각의 소주제들은 우리가 종교에 관해 익숙한 문장들이지만 여기에는 모두 물음표를 붙여놓고, 차분히, 그리고 가볍게, 그러면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라는 그 자체는 인류역사와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렇게 가볍고 쉽게, 그러면서도 한 두 시간만에 후다닥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다룬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듯이 이 책은 그 불가능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가능한 만큼에서까지는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고정관념'은 이렇게 의심하고 회의하라는 방법들을 시범보이고 있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은 아니고, 이것을 통해 보다 익숙해지는 과정의 선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괜히 부담을 갖지 않고도 이 주제 '종교'에 대해 한번 훑어보자고 한다면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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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교에 관한 스무 가지의 흥미로운 주제들
    from centris 2008-11-24 20:39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종교가 존재 치 않았던 적은 없었다. 이성적, 과학적 사고가 ‘진리’에 가깝게 대접받는 현대에도 이성과 합리주의 앞에서 종교는 여전히 건재하다. <고정관념Q: 종교>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으로 예측했던 종교가 현대 사회에 들어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우리가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순오기 2007-10-23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로부터 해방되고 싶은데요...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로부터 해방의 자유!
하지만 서평에 공감하며 꾹~~~~~

멜기세덱 2007-10-24 00:3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종교로부터 해방되시길 하나님께(누군가에겐 누군가의 신에게) 기원합니다.ㅎㅎ
추천 감사하고요.ㅎㅎ

마늘빵 2007-10-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요새 책 많이 읽으시는데요? ^^ 올라오는 책들이 다 제 관심사라.

멜기세덱 2007-10-24 00:40   좋아요 0 | URL
아마 선후가 바뀐 것일지도 몰라요.ㅎㅎ 아프님은 언제나 저의 최대 관심사였으니까...ㅋㅋㅋ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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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근작 『바리데기』를 읽었다. 잘 알다시피 서사무가 <바리공주> 이야기를 차용한 소설이다. 황석영의 그간의 글쓰기의 맥을 이어가는 작업이었다. 『손님』이라든가 『심청』이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 <바리(데기)공주> 이야기를 많은 이들은 한두번쯤은 들었을 법한 설화다. 어쩌면 듣지 않았어도 그 내용 쯤은 여하히 추측해 내고도 남을 만큼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설화다. 이 이야기는 현재 7차교육과정 중등 국어 2학년 2학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 만큼 이 널리 알려진 설화가 어떻게 변용되고 차용되는지 황석영이 내어 놓은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겠다.

헌데, 이 책을 읽은 것은 이달 초다. 읽어내기까지 근 보름이 걸렸다. 잘 읽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워서도 아니며, 별반 재미가 처져서도 아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럭저럭' 혹은 '그저그런' 정도라고 해야할까?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황석영이란 이름이 가지는 소설적 재미의 보증상표를 가지고 태어난 이 소설의 기본적 재미를 느낄 수는 있다는 점에서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겠고, 그 외에는 별반 얻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저그런'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황석영을 꾸준히 읽어 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는 소설가로서의 지위와 권위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어서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틈틈히 지켜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일찍이 황석영에 대한 어떤 외상外傷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그의 초기 단편들, 그러니까 그의 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한 「삼포 가는 길」등의 작품을 읽고 심심찮은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어렸을 적에 읽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의 작품의도 등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은 영 지루한 감을 떨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그의 장편들은 어느 정도 이런 외상의 공포을 떨올리지 않을 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작품 『바리데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그런 외상의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이번 작품이 앞서 말한대로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차용하여 전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이 작품은 보름이 넘게 걸려 마침내 읽어 내었다. 왜일까? 김훈의 『남한산성』도 하룻밤을 지새우며 다 읽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황석영의 이번 소설도 하루만에 읽어내기에 충분한 이야기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별반 어렵지 않은 필치로 짜여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하루쯤 손에도 놓아도 좋을 만큼 빠져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내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황석영은 내가 기대하기에는 그의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현대적(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떨떠름하지만)인 변주를 읽는 약간의 재미도 찾아 볼 수 있지만, 북한과 중국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 제법 잘 구성한 요소들(이를테면 9·11테러라든가, 아프간 전쟁 등)을 짜맞춘 소설가의 재능에 탄복하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을 찾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책 말미에 작가의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제가 19세기를 배경으로 『심청』을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바리데기』를 쓴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19세기의 제국주의와 21세기의 신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언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것은 <바리공주>이야기의 그 익숙함 만큼이나 상투적인 신자유주의의 면면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비참함과 폭력성 등의 폭로들 말이다. 이것은 현실 그자체로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소설가가 그걸 작품으로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뭔가 다른 깨달음(혹은 해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의문에 대해서 이 작품에 물었을 때 여간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리'는 <바리공주> 설화에서의 그 바리데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 서사무가에서의 바리데기는 하나의 영웅의 일대기 구조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이 구시대적 영웅설화의 모티브까지도 있는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 즉 바리는 서사무가의 그 바리데기와 그 모든 것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바리데기』에서 바리는 영웅인가? 또한 그렇다면 작가가 신자유주의의 비참함을 폭로하고 그것을 분쇄하는 데에 얼마만큼 이 바리가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결국 아쉬움은 그거다. "분열과 증오와 죽임의 21세기 지구촌에서 생명의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란 물음에 황석영은 '숨은그림찾기'라며 어디 한 번 니들이 찾아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숨은그림찾기에는 분명 '숨은 그림'이 있다. 하지만 여기 『바리데기』에는 숨은 그림은 없고 뻔한 그림만 있다. 이것이 못내 아쉬운 점이다. 바리가 신비하고 영험한 어떤 무속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마치 이 신자유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어떤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서사무가에서 보이는 영웅의 구조처럼 이 사회에서도 그런 영웅의 존재가 출현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애써 옛날 옛적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차용하여 새로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뭔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변주하고 변용하였어야 했다. 새로운 모색이랄까? 그런 것이 없다. 이번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말이다.

황석영은 소설을 시작하기 전 진도아리랑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네". 바리의 일생이 그렇다는 것일테다. 우리 인생도 무수한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수심이 가득할 것이다. 같은 노래에 이런 구절도 있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구부야 구부가 눈물이고나". 바리도 그렇고 우리네들도 험하고 험한 고개를 넘고 넘어 눈물의 세월을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 『바리데기』가 애잔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진도아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며 그 많은 수심과 고개들을 흥겹게 넘어가고 있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저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나 가세"라며 흥을 돋우기도 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치부를 들어내며 농을 떨기도 한다. 진도아리랑에는 그렇게 해학도 있고 재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마저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진한 아쉬움은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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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조용히 추천하고 가요.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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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초엔가, 서울 교보문고엘 심심풀이차 왕림한 적이 있었더랬다. 한 바퀴를 풀코스로 도는 데만도 한 시간을 족히 잡아먹고도 남음이 있으니, 이는 내 심심파적을 여한없이 달래주기에 딱 알맞은 놀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대면하는 곳은 신간서적 코너다. 이날도 신간들을 어영부영 살펴보던 차에 눈에 확들어오는 책이 있었더랬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禁止를 금지하라』, 멋있는 제목이라고 해야할까? 왠지 단순히 멋지다고만 할 수 없는 어떤 포스를 담고 있는 것같았다. '무슨 책이지?'란 의문이 들어 집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새겨있었다. 딱 봐도 알만한 사람들말이다.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를 비롯 <PD수첩>의 PD들. 이 사람들이 왜 이리 한데 모여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지승호의 열 번째 인터뷰집'이란 안내로 이내 풀렸다. 그런데 지승호? 과연 못 들어본 이름이다. 탓하자면 나의 귀가 과문한 책임이지만, 지승호란 이름은 못 들어본 대로 지나쳐도 좋았다. 흥미를 끄는 책 제목과 관심을 끄는 인터뷰이들이 충만했으니 말이다.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대강 목차정도를 훑어보고는 책장 한켠에 모셔져 있었다. 인연이 아직 아니었던 것일까?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아서였던 것일까? 순서가 아직 안 왔다는 것은 그 전에도 사 놓은 책들, 그러니까 읽어주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 이미 줄줄이 예약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인연이 아직 아니었다는 것은 아마도 지승호란 인터뷰어와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그 예약된 목록들을 다 소화해 낸 것도 아닌데,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연은 얼렁뚱땅 시작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지 싶다. 어쩌면 그와의 인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든가, 『마주치다 눈뜨다』, 『7인 7색』이란 인터뷰집이 이미 내 눈에 걸리기만 고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승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쟁쟁한 인터뷰이들 때문에, 나는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피할 수 없고 말았다.

최근에 나온 지승호의 인터뷰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은 그 주범이고 말았다. 그 주범은 박노자, 한홍구, 진중권, 손석춘을 '납치해 심문'하고 나를 협박하고 있었으니 내가 어찌 피해갈 수 있었겠는가? 박노자나 한홍구는 내가 꾸준히 구해 읽는 1순위 저자들이고, 진중권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던 이고, 손석춘은 얼마 전 읽은 그의 책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때문에 호감을 갖고 있던 이다. 결국 지승호는 알게 모르게 내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피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아니 유혹의 그물망으로 나를 덮쳐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승호의 이 협박과 유혹의 구렁텅이에 풍덩 빠져버린 것에 그 어떤 불만이나 피해보상을 요고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령 "대학등록금 문제는 국민적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학생들이 학교가 자신을 현금지급기로 취급해온 것을 더 이상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30쪽), "이것이 더 이상 투자라기보다는 자본에 돈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무료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나의 천부인권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되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자본하고 거래를 해서 뭘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31쪽)라는 박노자의 날카로운 지적을 속시원히 듣게 해준 데 대해서는 감사해야 하는 것이 지당하기만 하다.

한홍구는 어떤가? "피폭당해 죽은 한국 사람이 히로시마에 3만, 나가사키 1만, 모두 4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걸 안 가르칩니다. 20세기 우리 역사가 정말 울퉁불퉁했다지만 하루에 3만 명이 죽은 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4만 명이 죽었는데 이걸 역사 시간에 안 가르친다니까요.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미군의 핵무기가 우리한테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핵무기가 이렇게 나쁜 거라는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아직도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반도의 핵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려면 이런 문제를 얘기해야죠."(193쪽)라는 말씀에 가만히 귀기울이게 된다. 이 아니 감사한 일 아닌가?

진중권의 인터뷰에서는 또한 실망시키는 않는 차갑도록 유쾌한 언설이 있다. "사람들이 미래를 못 보니까 자꾸 과거를 보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프로젝트가 없으니까 기껏 정치권에서 나온 유일한 프로젝트가 운하를 파겠다는 거잖아요. 독일에도 운하가 있는데요. 석탄 나르는 것 외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석탄 나를 일은 없잖아요."(299쪽)라거나 "인구의 99퍼센트가 영어 해서 뭐해요. 자기 직업상 필요해서 하는 거라면 좋은데, 그게 아니잖아요. 재는 거잖아요, 성적으로 자르는 거. 일종의 과거 시험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하는 거죠. … 사람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해도 무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발음 막 굴리는 무식한 애들 있잖아요.(웃음)"(303쪽)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 외에도 그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귀한 이 책의 미덕이다. 홍세화, 김규항, 심상정이 그들이다. 막연했던 심상성의 이미지를 얼마간이라도 좋은 내용으로 채워넣을 수 있었고, 내 독서목록에 홍세화나 김규항의 책들을 집어넣어야만 하게 만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구구절절이 인터뷰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밑줄 그어가면서 읽는 내내, 참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만의 모자람에서 오는 갈증을 또다른 것으로 채우게끔하는 그런 달콤한 유혹 혹은 맛보기로서 말이다.

인터뷰가 본시 영어인데, 영문으로는 interview라고 쓴다. 이게 'inter-'와 'view'의 합성이다. 'inter-'는 상호(相互)를 의미하고 'view'는 '보다'라는 뜻이 된다. 합쳐보면 '서로 보다'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게 보면 인터뷰는 어원적으로 '서로 보는' 행위를 전제하는 것이 된다. 서로 보며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쳐다보면서 대화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때론 상대의 말씀을 경청해 듣는 것 아니겠는가? 근래에 우리가 인터뷰라고 하면 기자가 어떤 특정인을 상대로 무언가를 캐묻는다던지, 대학입시나 취업시험에서의 면접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대면하여 물음으로써 상대의 그 어떤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찾아보니 'view'에는 '조사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조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살펴 알아내는 것이다. 알고싶은 것을 밝혀 끄집어 내는 것 말이다.

이 인터뷰집도 본시 그런 것이지 싶다. 무언가를 끄집어 알려내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집의 생명은 인터뷰어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 이 책의 인터뷰어가 누구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은 별 일이 아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박노자의 이야기, 내가 들을 수 없었던 한홍구의 또다른 이야기, 내가 알지 못했던 진중권의 재치와 위트 혹은 독설, 그리고 한편으론 그동안 관심두지 않았던 또다른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가지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이 인터뷰집에 담겨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인터뷰집의 인터뷰어를 다시 보게 만드는 무언가로써 충분하지 않은가? 지승호. 그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것인가?'를 항상 심도있게 고민하고, 결국은 그것을 말하게 하는 능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와의 인연을 이렇게 흥미롭게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고, 또한 거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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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0-2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 책 구입했어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금지하라는 '조정래'편만 읽었는데, 요 리뷰 읽으니 빨리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멜기세덱 2007-10-20 19:46   좋아요 0 | URL
저도 금지를 금지하라 빨리 읽어봐야 되는뎅...ㅎㅎ 특히 조정래 선생 편이요..ㅋㅋ

2007-10-20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0-20 19:46   좋아요 0 | URL
저도 잘 알고 있는 걸요..ㅎㅎ
 
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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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반포 561주년을 기념하는 한글날이 며칠 전이었다. 5백여년 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땅에 태어난 우리의 문자는 그 자체로 일대 사건이었다. 28개의 글자로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적어낼 수 있는 문자가 우리 손으로 탄생한 것이다. 음소문자에서 한층더 진화하여 자질문자의 탄생이었다. 과학적이며 논리적 체계로 가장 단순하고 간명하면서 그 소리의 가짓수는 풍부한 문자가 탄생한 것이다. 이전에도 우리에겐 말이 있었지만, 훈민정음의 탄생과 더불어 새로 태어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500여년을 지내오면서 어느덧 전국민의 90% 이상이 문자생활을 영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의 어느 문자도 이렇게 단기간에 최강의 성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한자를 보자. 기원전 2~3세기에 한반도에 전해졌다고 하지만, 수천년을 지내었어도 그 문자를 아는 사람은 30%에도 지나지 않았다. 로마자는 또한 어떠한가? 그 문자의 역사도 수천년이다. 그러면 그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한글을 아는 이에 못미친다. 사실 한글의 전래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조선왕조 내내 미약하게나마 전달되었을 뿐 그 사용이 전폭적인 것은 아니었다. 언문, 반절이란 다소 저급스런 이름으로 불리우면 아녀자들의 규방에서나, 어린 아이들의 글놀이에서나 쓰여 왔을 뿐, 그 시대의 지배적 문자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문자가 전국민의 90% 이상에게 사용될 수 있었던 시간은 최근 100년 간의 일이지 싶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말의 제2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개화기말 제국열강의 위협속에 시달리던 시절, 일본 제국주의의 먹이감이 되어 강제 합방을 당하게 된 시 시절에, 이 반도의 지식인들은 저마다의 국민 계몽을 꿈꾸었다. 부국강병을 외치기도 하였도, 전 민족적 각성을 외쳤다. 그런 지식인들의 한편에서는 또다른 계몽과 각성의 일환으로 우리말 우리글을 정리정돈하는 일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조선의 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자 열망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말은 또한번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고, 그 당시의 사전편찬의 과정과 경위를 조사하여 밝힌 저자 최경봉은 말한다. 여기 이 책 『우리말의 탄생』을 읽고 나면, 어느새 저자의 그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말의 제2의 탄생. 그것은 어느 개인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사전을 만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당시 어떤 체계나 자료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 나라의 말을 총체적으로 수집 정리한다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들은 헤딩하기로 마음먹었다. 각계의 인사들 또한 우리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사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계파를 막론하고 이 사전의 발간을 후원했는데, 여기에는 최남선의 이름도 보인다.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이 모여 만든 조선어학회를 위시해서 우리말 사전 편찬을 위한 여러 노력들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의 매우 번거롭고 힘겨운 것들이었다.

각계의 후원과 동조가 있긴 했지만, 일제 강점하의 시기에서 위축될대로 위축된 우리말의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일제시기에 그 사전이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일제의 억압에 의해 일제말기에는 사전 편찬에 치명적인 사건, 즉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사전 편찬에 각고에 노력을 다한 이윤재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옥사를 하기까지에 이른다. 우여곡절의 사전 편찬 작업은 이런 사건으로 인하여 그 원고까지 잃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숲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해방과 함께 잃어버렸던 원고를 다시 찾으면서 결국은 그 사전이 해방후 빛을 보게된다. 사전은 총 6권으로 10여년에 걸친 작업끝에 완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왜 이런 피나는 노력을 그들은 했던 것일까? 그깟 사전이 무슨 소용이길래 이렇게도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을 감수했던 것일까? 그것은 어떤 사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듯이, 이 당시의 지식은들도 우리말을 통한 조선 민중의 각성을 통해 다시금 잃어버린 민족과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가히 우리말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었다. 그것이 민족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었던 일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끝내 그 시작을 함께한 이들이 그 사전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대를 이어 결국은 빛을 발하게 된데에는 그들의 이런 정신과 사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얼마전 금강산에서 남북의 지식인들이 통일 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는 어쩌면 우리말의 제3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가 이 통일사전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있어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말과 글을 아우르는 이 사전은 또 한 번은 우리말의 탄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반포 561돌을 지내면서 세종대왕의 위대한 유산인 한글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임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우리말, 우리글의 가치를 더욱 높인 것은 일제시기 우리말 사전에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들이다. 그 노력은 아직 끝나서는 안된다. 통일 사전을 위하여, 우리말이 다시금 새롭게 태어날 날을 위하여, 우리 모두 최초의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정신을 되새김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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