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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알 만한 사람치고, 아니 배웠다는 사람치고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이순신 등등의 급은 아닐지 몰라도 그 아래 등급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인 중의 한 분이 터이다. 정약용에 대한 서적들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이 잔뜩 있다. 나는 정민 선생이 쓴 <다산성생 지식경영법>이란 책과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보유하고 있고, <목민심서>란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유명하신 분의 '평전'이 아직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다산은 학문 분야가 넓고 광범위했을 뿐만 아니라 해박하고 정밀하며 전문성이 높고 치밀하여 그에 대해 정확하게 정리하고 분석하여 평가를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 것도 사실이다. 다산 서세 178년이 지났고, <여유당전서>가 간행된 지 76년이 되었는데, 본격적인 다산의 평전이 출간되지 못했음은 역시 이 나라 학계가 지적받을 사안의 하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느 누구도 선뜻 착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14쪽)
그렇다.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감히 누가 평가하겠는가? 단군 평전을 못봤고, 이성계나 이순신, 세종대왕 평전이 견문이 적은 탓으로 보질 못했다. 단군은 자료가 부족할 탓을 테고, 다른 분들은 너무 뛰어나서 평가의 칼을 들이대기 겁이 나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설프게 들이댔다가는 본전도 못찾고 욕만 잔뜻 먹기 딱 좋다. 대단한 각오와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고, 적확하게 평가할 능력 또한 갖추어야 하기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평전을 쓰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해도 평전이 하나 없는건 그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우리 무지대중들에 대한 애민정신의 부족일 수도 있는 일이라, 우리 학계는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을 박석무가 맡았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전을 쓰려면 잘 써야 했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 쓰기, 쉬운 작업이 아닌, 지난한 일이다. '평전'의 사전적 의미는 '평론을 곁들인 전기'이다. 어떤 인물의 인생과 학문에 대한 일대기인 전기에 가치 판단인 '평론'을 곁들이는 일은 누구의 경우에도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인물이고 탁월한 학자인 데다 삶 또한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하여 그 일생을 정리해 내고 평가를 내리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어서 '지난'한 일이라고 했다.(13쪽)
평가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평전을 쓰면서 평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과연 정약용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리려 하기에 이렇게 거듭 엄살을 부리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일단의 저자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리라-생각했다.
서문격인 '들어가면서'로 책을 시작하는데 서문에 정약용의 일생과 저술 등을 일목요연 잘 정리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서는 정약용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고자 순행적 구성이 아닌 역순행적 구성, 그러니까 시간적 재구성을 통해 약간의 시간적 변화를 주어 정약용의 젊은 시기 암행어사로서의 활약상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 흥미있는 구성 전략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흥미롭게 읽어가면서, 정약용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부분을 재확인하기도 하고, 잘 몰랐던 세세한 일화들에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터에, 불현듯 정약용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언제 나올까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평가에 주목하면서 이 평전을 읽어가는데, 요약하자면, 아니 요약할 필요도 없이, 책 표지에 있는 그대로 뿐이었다.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이 외의 어떤 평가를 찾아 볼 수 있었는지 다른 분들께 물어보고 싶다.
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먼저 선행연구를 정리하는 것이 기본인데, 저자도 서문에서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칭찬의 평가만 많아 비판한 내용을 많이 찾지 못하는 아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비판점을 찾아 제시했어야 했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만의 긍정적 평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만 재삼재사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다산 이전이나 이후의 오랜 시가 동안 고을의 수령인 목민관은 고을의 주인이고 권력자로 여겨져 수령의 다른 호칭으로 '성주'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니, 그런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한 번쯤 되짚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다산 또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논리로 실제 행정을 폈으면서도, 역사의 발전 주체를 국민이 아닌 국왕에게 두고 국왕이 선정을 펼쳐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다산도 인간적 한계를 보였으며 시대적 제약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234쪽)
저자가 제시한 정약용의 한계, 과연 타당한가?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당대를 평가한 것이고, 그 시대 모두에게 적용될 한계일 터이다. 정약용을 이 시대 민주주의의 선각자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인데, 민주주의의 잣대를 정약용에게 적용해서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평가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정약용의 민본은 현대의 민주와 그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에 대한 아쉬움과 애석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산은 몇백 년 전에 이미 순수한 우리 한글로 그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조를 남겨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여실히 증명했는데 고산의 6대 외손이던 다산은 훨씬 뒤의 인물임에도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는 까닭이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보다 훨씬 뒤의 후손으로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계승하지 않은 점은 유교주의자의 한계로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 다산의 한문시들이 내용 면에서야 송강이나 고산에 뒤지지 않은 점이 많지만, 표현의 수단으로 한자만을 사용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시대로 보면 훨씬 진보적이어야 하건만, 후진적인 점은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이 없다. 문학가와 사상가의 차이로도 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 다산의 한계는 숨길 수가 없다.(436쪽)
이게 말이 되는가? 다산이 한글 작품을 짓지 않은 것이 후진적이라니? 고산의 자손이니 한문이 아닌 한글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건 무슨 논리인지, 고산이나 송강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려면 강호자연을 노래하거나 임금님 찬양을 노래하는 가사나 시조를 정약용이 지었어야 했다는 말인가? 한자만 쓴 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더 연구했어야 했고, 한글을 써야 문학가고 한문을 쓰면 사상가라고 규정할 바에야 아에 규정을 말았어야 했다.
다산의 한글을 쓰건 한문을 쓰건 그건 다산의 자유이면서, 도산이나 송강이 한글을 쓴 건 노래로 읊기에 유리하면서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글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에도 사상이 담긴 말은 죄다 한자인걸 모르나? 정약용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내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그런 사회 비판을 통해 백성들의 참상을 위정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핍진하게 시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글보다도 당시에는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해던 것이 아닐까?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당시의 귀한 우리말 표현을 최대한 살려낸 점을 칭찬할 일이지, 한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진적이고 한다면, 이런 어불성설이 또한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법을 전공한 학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 간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대학에서 석좌, 석좌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는 프로필에 나와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은 게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문학적 평가에는 매우 부족한 능력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한글, 한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붙인 해설과 평가는 그저 일반적 수준에 불과하고, '그냥 좋다'식의 평가 뿐이다.
다산의 나이 50세이던 1811년에는 평안도 정주 지방에서 지역 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홍경래가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기하였다. 다산은 귀양지에서 이런 소식을 듣고서 민란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전라도민에게 고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했다. 왕조 정권 아래의 백성 입장이던 다산은 그 일에 대해 대처하지 않았어도 크게 탓할 일이 아니었는데, 왕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임을 나타내려는 뜻에서 그런 글을 지었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민중 사관으로 보면 다산 개인의 한계이자 시대적 한계를 드러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는 좋은 집안의 출신인 기득권자였고 상당한 지위의 관료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80쪽)
다산이 <창의통문>을 지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해설을 보면, 다산이 백성 입장이었다는 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당시의 다산이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러한 다산의 행위를 설명하고 평가하려면 다산의 저술을 분석하고 다산이 <창의통문>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내야 했다. 민중 사관으로 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저자 말대로라면 홍경래의 난을 보고도 다산은 입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가? 정약용도 양반이고 관리출신이니까 그랬을 거야? 정권에 잘 보여서 유배나 빨리 풀자고? 아니면 잠깐 정신이 나가서?
나는 박석무의 이 책이 정약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유일한 책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좀더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 뿐이다. 평전이라고 해서 인물을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탐구, 사상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탐구와 그에 대한 저자의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제대로된 평전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추신
1. 정약용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천주교와의 관련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긴 한데,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 그리하여 천주교에서 벗어난 것은 저자의 판단에 동의하지만, 한번이면 족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러곳에서 천주교 얘기를 하면서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좀 과한 느낌.
2. 평전에서 평가의 내용을 주로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여 채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책 말미에 참고문헌으로 정리는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3.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언제부터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했는지, 왜 그런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책에는 별반 내용이 없어 아쉬웠음.
4. 그외 아쉬움 점은 생략.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