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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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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약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왜 우리는 하느님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이렇게 끊임없이 '찬양'해야 하는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노예처럼 비굴한 행동 같았다. 만약 예수가 우연히 만난 맹인을 치료해줄 수 있다면, 아예 시력을 잃는 사람이 없게 만들 수는 없는 건가? 예수가 악마를 쫓아낸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악마가 사람 대신 돼지 몸속으로 들어가게 했을 뿐인데. 이건 좀 사악한 짓 같았다. 흑마법처럼. 사람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왜 아무런 효과가 없는가? 왜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심한 죄인이라고 계속 말해야 하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유해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4~15쪽)  
   

히친스가 "어렸을 때 머뭇거리며 제기했던 이 의문들"과 비슷한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내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히친스에게나 혹은 "세상에 지극히 흔하게 퍼져 있"는 이런 의문들을 품은 이들에게 "어떤 종교도 여기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든 능력이 사실 그대로라면 히친스와는 달리 "끊임없이 찬양"할 마음이 충분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의 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말부터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지고지선의 하나님이 사탄도 만들고 그와 함께 '재미난' 내기도 한다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인류가 이만큼 번성한 것은 가인이 자웅동체였거나 아담과 하와의 숨겨둔 딸과 근친상간을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외에도 나는 히친스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의문들로 가득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도 많은 인간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벌하고, 씨를 말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선악 관념이 분명해서 그렇다지만,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가 아닌가? 아가페적 사랑은 예수의 새로운 창조물인가? 예수 이전의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할 줄 몰랐나? 그건 이상한 하나님이다. 때론 TV드라마 속의 연인들처럼 사랑에 배신당하고 처절한 복수를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이 참혹하게 죽어갔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질투하는 하나님'은 어딘가 모자란 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말 연속극에 '하나님'이 언제쯤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세상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신들 중에 가장 많은 인간들을 죽인 신은 단연 기독교의 하나님일 거라는 말을 하면 불경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이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어간 인간들이 무수하게 나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성경(특히 구약)을 읽으면서 종종『삼국지』를 떠올린다. 어디에서 더 많은 인간들이 죽었을까를 헤아려보는 것은 짓궂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는 『삼국지』만큼의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재미를 느낀다. 아니 그 이상으로. 간혹 어떤 구절들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얻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를 가득 채운 인간들의 거대한 오류를 다시 볼 수 있다. <창세기>를 쓴 것이 신이 아니라 무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한 문단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모든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배할 권리'를 얻었다는 점이 바로 그 중거이다. 성경에 예를 들어 공룡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저자들이 공룡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에 유대류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오스트레일리아(중앙아메리카의 뒤를 이어 '에덴동산'의 새로운 후보자)가 지도상에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세균과 박테리아를 지배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꼭 필요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이 생물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만약 이 생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면, 그들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금방 분명해졌을 것이며, 사제들이 옆으로 밀려나고 의학 연구가 마침내 기회를 얻을 때까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은 채 그 지배권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137~38쪽)  
   

히친스의 재치있는 이런 반증말고도, 나는 성경(특히 구약)이『삼국지』보다 더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상의 인간의 가필이 성서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여간에 나는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성경의 모든 것을, 어쩌면 기독교 성립의 전제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믿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날나리 신자에 그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구약을 넘어서 신약에 이르러 예수 탄생 이후의 시나리오는 거반 마음에 들었다.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설화는 그 수준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기적은 또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신약 속에 가득한 예수란 인물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감동으로 넘친다. 그리고 그가 한 말들은 그다지 걸러낼 것들이 많지 않은 좋은 얘기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예수가 좋았고, 여전히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예수란 인물, 아니 신성을 가진 예수를 그대로 믿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선택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의 설법들은 오늘날에도 가히 혁명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어쩌면 그 혁명가적 예수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기독교가, 그리고 세상의 종교가 욕먹는 이유는, 적어도 히친스가 유쾌하게 씹어대는 세상 종교의 죄악들은 성경속의 하나님도 예수도, 그리고 알라신도 아무런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간이 썼건 신의 영감으로 지어졌건 간에, 그것을 '어리석게'도, 아니면 교묘하게도 제멋대로 이용한 것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히친스는 이 책에서 신은 단지 인간의 '형상'대로 인간적 감성으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서 창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 히친스에 대해 그게 아니고, 성경에 이렇게 저렇게 써 있으니, 이것은 거룩하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쓰셨다고 반박하는 것은 현재로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건 간에, 우리는 그에 구애받을 이유가 하등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신화나 전설이 구태에 그 창작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지 않듯이, 성경 또한 그러한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활용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성경무오류설에 입각하여 사탄, 마귀새끼를 철저히 응징하고 뿌리뽑겠다는 십자군적 망상에 사로잡힌 종교 근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종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또다른 근본주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디쯤에서 밥퍼주는 목사님이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던 성철 스님은 걸리적 거릴 것이 거의 없지 않은가?

   
  이슬람의 기원은 이슬람이 표절한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상쩍다. 이슬람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부풀리며, 추종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는 복종이나 '굴복'을 요구하고,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존중을 요구한다.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이처럼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전혀, 눈곱만큼도 없다.(195쪽)  
   

히친스의 이 말처럼, 성경을 들먹이고 코란을 들먹이며 종교를 지배수단으로 제멋대로 이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인간을 무참히 짓밟으려고 하는 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지상의 독재체제와 내세의 절대적인 통제에 무릎을 꿇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그렇게 지배체제에 종속되고 인간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으로 쓰인 종교는 원초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히친스가 말하는 종교의 악행 혹은 잘못된 쓰임은 수두룩하게 많다. '좋게 말해서' 종교가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종교란 이름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잘못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며, 심지어 "종교가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종교는 내세에 대한 허황된 기대와 염려를 팔아서 장사를 하고, 파렴치하고 반인류적인 지배체제와 타협하고 복종해 왔다. 히틀러의 친구는 저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었다. 그 뿐인가? 종교를 아동 학대를 서슴지 않았다. 구약에도 아비의 헛된 약속으로 딸은 번제가 되었고, 이삭은 죽다가 살아났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인 인간들이 제멋대로 신을 악용한 것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들은 신성한 성경이니, 코란이니 하는 것들을 들이대지만, 그것이 있는 그대로 사실이고 절대적이라고 신도들에게 강요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바다는 커녕, 집 앞에 흐르는 졸졸 시냇물 한 번 갈라보지 못했을 뿐더러, 어떤 불구덩이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주몽이 위기에 처해 도망가다가, 강물에 막혀 더는 도망가지 못하고 있을 때 거북이 들이 나와서 다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신화를 기억하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준 까치와 까마귀를 기억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럴 듯한 이야기로 여길 뿐이다. 그렇다. 우리도 성경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경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하늘에서 웃을 일이다. 아니면, 나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일이거나.

내가 볼 때, 하나님은 억울하다. 예수님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알라신도 그렇고, 부처도 어차피 피해神이다. 세상 모든 신(神)들이 히친스에 의해 이 무한한 죄의 굴레를 띄집어 쓰게 만든 것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인간이 신을 있다고 믿든, 없다고 치부하든 마찬가지다. 몹쓸 인간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를 신을 몹쓰게 이용하고 애용한 것이 죄다. 그리하여 신(神)은 무죄하다. 나는 그 무죄한 신을 선별적으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예수의 사랑을, 하나님의 그 어리석음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도올 김용옥이 떠올랐다. 그 특유의 삡싸리 나는 굉음이 섞인 '이~게, 이게'하면서 내뱉은 우습기까지한 신랄한 욕설과 독설이. 히친스의 이 시니컬한 종교비판은 도친스를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도킨스를 읽으면서 느꼈다 묵중함 보다는 히친스를 읽으면서 보다 유머러스하게 시니컬한, 그래서 도킨스의 것보다 더 재밌게 읽혔다. 아무튼 이 책은 히친스의 역작이고, 대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종교인으로서는 뼈저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분 나쁜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히친스가 김용옥의 얼굴을 하고 그 기분나쁜 얼굴로 독설을 퍼붓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재밌게 말이다. 히친스가 말한 대부분을 수긍하면서, 내 연약한 마음은 인간을 미워하되 신은 미워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신은 무죄하다. "우리가 담론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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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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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삼한 시대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그러니 언제나 이곳은 신성한 곳, 성지(聖地)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속세의 어떤 힘도 이곳을 범할 수 없었다.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권역이 이 '소도'라는 곳이었다. 주지하듯이 '솟대'로 경계지어진 이곳에 죄인이 도망쳐 오면 누구도 그를 잡아갈 수 없었다. 역사 이래 이런 신성불가침의 권역들이 종종 존재했던 것 같다. 그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절대적 권역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종교적으로 신성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곳에는 속세의 권력이 침범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런 신성불가침의 위엄은 곧잘 역사적 위인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등이 그러한 예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종이나 이순신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트집을 잡는다면 거의 예외없이 무시무시한 댓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공로가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되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비판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그런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마더 테레사(Agnes Gonxha Bojaxhiu, 1910~1997) 수녀를 들 수 있다.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교도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 이르기까지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가난에 대한 봉사와 선교활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지고 있다. 그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는 가난과 굶주림이 있는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 그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며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간주된다.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불문하고 이 사랑의 선교회로 많고 적은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그들의 후원금을 좋은 곳에 써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이런 공로를 높이사 1979년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 2003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반열에 오르고 이후 시성절차가 진행중이라는 데 아직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지는 과문하여 잘 모르겠다. 그녀의 이런 공로와 사랑의 실천에 어느 하나 존경은 못할 망정 누가 감히 비판하겠는가? 함부로 나서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성절차를 진행하면서 교황청에서는 '악마의 변호인'(시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검사 역할을 하는 증성관(證聖官))을 선임했다. 교황청이 선임한 '악마의 변호인'은 히친스였다. 몇 년 전 영미권 지식인 중 5위에 오른 이 뛰어난 저널리스트는 거침없이 이 '악마의 변호인'을 맡았다. 아마도 이 증성관 역할이 히친스에게 오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정중한 고사를 거친 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히친스를 증성관으로 선임한 교황청은 어쩌면 악수를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더 테레사가 성인을 반열에 오르는 데 치명적 결격사유를 히친스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 『자비를 팔다』(원제 The Missionary Position)가 그것이다.

'The Missionary Position'이란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면적 의미로는 '선교의 입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이 가지는 다른 의미는 '선교사의 체위', 즉 섹스의 '정상 체위'를 뜻한다. 이 원제는 이 책의 영미권 출간 당시 "책 내용에 관한 논란과는 별도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제가 보여주는 그 이중적 의미의 층위는 어쩌면 히친스가 비판하고 까발리는 마더 테레사라는 인물의 감추어진 이면들과의 그 이중성을 절묘히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테레사 수녀의 봉사와 헌신의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히친스가 지적하는 저급한 정상체위, 그녀의 선교의 입장이 된다고 말이다.

원제가 가지는 물의를 피하기 위해 한국어판의 제목은 '자비를 팔다'가 되었다. 이 한국어판 제목 또한 히친스가 제공하는 물의를 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고자 했던 그 이중성, 마더 테레사의 역설적 이중성을 적절히 담고 있는 고급한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자비'는 베풀어질 때 성립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그것이 판매된다면 더 이상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역설적 제목 '자비를 팔다' 또한 히친스가 담고자 하는 마더 테레사의 이중 플레이를 유효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히친스가 비판하는 그녀의 봉사와 헌신적 활동 이면에 그 어떤 저급함이 있을까? 150여 쪽의 이 짧은 책자에서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의 여러 활동들을 추적하고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돕고 사랑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녀의 온화하고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몇 장의 사진들과 함께 그것이 어떻게 연출되고 어떤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차분히 밝히고 있는 히친스의 지적을 읽는다면, 그녀의 그런 봉사와 헌신에 우리는 의문을 심하게 품게 된다.

이 책의 표지 사진으로 쓰인 80쪽과 81쪽 사이에 수록된 몇 장의 사진 중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어떤 가난한 이로 보이는 남자가 테레사 수녀의 손을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지만, 테레사는 뭔가 차갑게 초탈한 듯 그를 외면하고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콜카다의 선교회에서" 찍은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히친스는 그녀가 사실상 다른 목적으로 이 가난을 이용하고 세상에 팔아왔다고 말한다. 한 장을 넘기면 테레사 수녀가 "아이티에서 미셸 뒤발리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미셸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일인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부인, 그러니까 아이티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다. 이 사진은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선전지인 「공격」 1981년 1월호에 실렸다.

   
 

  잡지를 펼치면, 둥글게 부푼 아이티 '제1시민'과 그의 유명한 신부 미셸 뒤발리에의 결혼기념일에 대한 길고 경애하는 글 옆에 커다란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미셸은 백인 및 크리올 엘리트의 지도자로서 태연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팔찌를 찬 그녀의 팔을 다른 여인이 정답게 감쌌고, 이 여인은 존경과 복종으로 가득 찬 눈빛까지 바치고 있다. 사진 옆에 인용된 그녀의 말을 보면 자신의 아첨성 행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영부인은 느끼시고, 아시며, 자신의 사랑을 말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행동으로써도 보여주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이 외침은 이어진 사회 페이지의 헤드라인에서도 메아리친다. "영부인님, 나라가 당신 필생의 사업으로 진동합니다."(19쪽)

  CBS 다큐멘커리 프로그램 「60분」이 방영한 이 필름에서 마더 테레사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미셸 뒤발리에에 대해, 살아오는 동안 많은 왕과 대통령들을 만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의 우두머리와 이토록 친근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 내게는 아름다운 배움의 경험이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밖의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마더 테레사는 아이티 국가훈장 레종 도뇌르를 받았다. 지배자 부부에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의 단순한 증언은 국영 TV 방송에서 매일 밤 최소 일주일 동안 방영되었다.
  훈장을 받은 때부터, 아이티 국민이 장-클로드 및 미셸과 너무도 '친근한' 나머지 그 부부가 자기들의 짐가방을 국고 재산으로 채우고 프랑스 리비에라로 영영 도망치는 데 시간이 아슬아슬했을 정도였던 시기까지 마더 테레사가 이 필름에 대해 항의를 제기했다는 얘기는 알려진 바 없다.(20쪽)

 
   

그 옆에는 MSIA라는 이름을 지닌 광신집단의 지도자로서, "사기 행각은 가히 초서급"인 존-로저와 '존-로저 성실상'을 수상하고 1만 달러를 기부받은 테레사 수녀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고, 콜카타의 가난한 이들은 나중에 덧붙"인 것이다. 한 장을 다시 넘기면 "1995년 6월, 새로 문을 연 북서 워싱턴 입양의 집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몇 장을 더 넘겨 보면 "80년대 말 미국을 뒤흔든 저축대부조합 도산 사태 때 사기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찰스 키팅과 웃으면서 악수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테레사 수녀는 그에게 100만 달러 이상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외의 정치적 거물들과 찍은 사진들이 다수 있다.

마더 테레사는 찰스 키팅이 사기죄로 기소되자, 재판의 담당 판사인 랜스 이토 판사에게 탄원서를 보낸다. 말하자면 찰스 키팅이 "주님의 빈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필요가 생길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울 태세였다는 점"에서 그를 선처해 달라는 것이다.(102~103쪽에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 전문이 실려 있다.) 이 편지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지방 검사보로서 키팅 사건의 기소 담당자 중 하나였던 폴 털리"는 마더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냈다. 키팅이 사기 친 "대부분은 재산이 많지 않고 대형 금융 거래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의 돈, 그러니까 키팅이 선심 쓴 100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고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가 죽을 때까지 어떤 답변도 보내오지 않았다.

이런 갖가지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의 이 이중생활을 폭로한다. 이쯤되면 악마의 변호인으로서 그의 역할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더 테레사가 성인이 되는데 지장이 없다면 이상할 일이다. 마더 테레사는 순박하고 아무 것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위해 아이티의 독재자 부인과 손을 잡고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인 찬사를 보냈을까? 또한 가난한 자들을 사기쳐 번 돈으로 선심 쓴 키팅의 기부금으로 마더 테레사는 누구를 도왔을까? 우리가 마더 테레사는 속세를 떠난 고귀한 성인으로서 오로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생각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그 노구에도 불구하고 굵직굵직한 정치적 현안이 존재하는 장소에 어김없이, 절묘하리만치 교묘하게 등장한다고 히친스는 지적한다. 이런 그녀가 아이티의 독재자 부부의 실체를 몰랐을까? 키팅이 엄청난 사기를 치고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도, 아직도 그가 "주님의 빈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필요가 생길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울 태세"였다고 믿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는 얼마가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기부금과 후원금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에 수용되어 있는 가난한 이들은 별반 그 생활이 나아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수용소에 다름 아니다. 그 막대한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책의 히친스의 고발에 따르면 간단한 수술이면 해결될 어린 아이의 병도 단지 방치될 뿐이고, 최소한의 기본 의료도 무참하게 제공만 된다. 주사기도 물로 대충 씻어낼 뿐 소독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지병을 치료하게 위해 세계 최고의 병원에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 그 막대한 돈은 그렇게 쓰였고, 세계 곳곳에 사랑의 선교회란 이름의 수용소만 지어댈 뿐이었다. 아직도 스위스의 비밀 금고에 그녀가 모금한 어마어마한 돈이 꿈틀대고 있일지 모를 일이다.

히친스가 이렇게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마더 테레사의 'The Missionary Position'의 저급함은 바로 가난을 이용하고 위선적 자비를 팔아가면서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악마의 변호인 히친스는 바로 '근본주의 종교-사업가'로서의 테레사 수녀의 위선을 기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소는 기각된 듯 보인다. 왜? 히친스가 악마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까? 주간지 「뉴욕 프레스」는 이 책에 대해 촌평하면서 다소 익살스럽게, "지옥이란 게 있다면, 히친스는 이 책 때문에 거기에 가게 될 터이다"라고 농을 친다. 이 책 때문만은 아니고, 아무튼 지옥이란 게 정말 있다면 무신론자이고 적극적인 반종교주의자인 히친스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다만, 그가 지옥에 갔을 때, 그곳에서 히친스를 마더 테레사가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까? 히친스는 후기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녀의 성공은 겸손과 소박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미신적인 유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교활한 자와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하는 자들이 소박하고 겸손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기댄, 천년왕국 이야기의 또 다른 장이다.(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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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3-0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주문해서 오늘 받았어요! 리뷰는 다 읽어보고 읽어야지 ㅎㅎ
은근 멜기님이 추천해준 거 이것저것 접하고 있는 ㅋㅋㅋ
(제가 좀 스폰지같아요 ㅎㅎㅎ)

순오기 2008-03-06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단체나 성금이란 명목으로 방송매체에 얼굴을 휘날리며 후원하는 거부들이, 실은 가난한 종업원들의 임금을 착취하거나 혹은 비리로 받은 부정한 돈을 보낸다는 것 많은 이들이 알지만...마더 데레사에 대해선 맹신하는데, 이책은 그런 점을 잘 부각시켜줬군요. 일단은 추천하고 찜합니다!

김서늬 2008-03-1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모든 것은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죠.
진실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같이 기술은 좋은 시대에 온갖 진짜같은 가짜, 가짜같은 진짜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대중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게 할 것인가를 (나쁜 뜻으로는)조종하고, (좋은 뜻으로는)선도하는 역할의 책임을 맡은 것이 바로 글쟁이들이 아닐까요. 마더 테레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히친스도 테레사의 추종자들도 아무도 모르겠지요. 마더 테레사 본인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는 오직 자신만의 판단을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멜기세덱 2008-03-17 21:30   좋아요 1 | URL
저는 히친스가 우리들과 다른 위치에서 마더 테레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고 할까요? 히친스는 좀더 공을 들여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판단은 이것때문에 수정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구요.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
김광하 지음 / 운주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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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은 첫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본시 '첫경험'에 대한 설렘이나 흥분같은 것은 발동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디뎌놓기 전의 어떤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이 약간은 있었던 것같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나 스스로는 날라리이긴 해도 기독교신자임을 항상 표명하고 살아왔다. 그런 내게 불교는 어쩌면 금단의 세계였다. 이런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두려움일 수 있다. 모든 첫경험에는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대체로 기우일 뿐이다. 비정상적인 첫경험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이 첫경험은 비교적 정상적이었다고 해야겠다. 이제 그 두려움은 어느 정도 가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라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었다. 제대로 불교에 대해 접해본 적 없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비치는 불교, 지나다니며 보게 되는 불교,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내가 아는 불교의 전부였다. 『반야심경』의 몇 구절정도를 아무 뜻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일 수 있겠다. 그래서 불교 관련 서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을 들춰보다보면 그 중에 불교와 관련한 책들도 제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정통 불교 서적까지는 아니지만 오롯한 불심을 담은 책을 읽기는 처음, 첫경험이다.

먼저 내가 그 전에 저질렀던 불교에 대한 짓궂었던 행위를 반성해야 하겠다. 간혹 지하철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던 스님들 앞을 지날때면 '마귀, 사탄의 역사'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얄궂게 주기도문 정도는 입으로 읊으며 지나갔다. 이것은 조금은 무례한 짓이었다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또 간혹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치며 떠들썩한 이들에게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론 내가 중얼거릴 수 있었던 반야심경의 몇 구절을 염불하기도 했었더랬다. 이것으로 면죄부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반성은 매우 깊다.

이 책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를 읽게 된 것은, 내가 모시는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을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저자 김광하는 얼마 전 뵙게 되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고, 나의 선생님의 친한 친구분이기도 하다. 얼핏 듯기에 저자의 결혼전 함을 지고 박완서 선생댁으로 들어간 것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한다. 나의 선생님께서는 오랜 친구인 저자가 보내온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깊게 느낀바가 크다고 하셨다. 한학자인 본인이 부끄러울 정도로 각종 불교서적은 물론 노자의 『도덕경』까지 번역하며 끊임없이 학문과 불심을 닦으며 많은 결과물을 내어 놓고 있다. 그런 저자의 직업이 중소규모의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높이 사야할 것은 그런 저자의 수행의 깊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의 선생님께서 이 친구분을 높이 사는 것 또한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주장하며 온 세상에 정치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 어느 세상이 사랑과 우정,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를 존중하는 체제인지 물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없으면 어떤 사회라도 아직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그가 지금껏 불자로 살아오면서 닦아 온, 깊은 불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는 재가불자로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고민과 수행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가 된 듯하다. 흔히 인간의 삶을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그 가는 길에 뜨거운 '화두'는 하나씩 품고 가야하지 않을까? 저자는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마음을 성찰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길 위에 하나의 화두를 던져놓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저자가 재가불자이기에 그 화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불교적 시각으로 세상에 던지는 화두를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하나씩 받아들어 음미해봄은 그리 손해날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그간의 불교에세이랄 수 있는 것들은 다섯 마당으로 모아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부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첫째 마당에, "현실의 여러 갈등을 만날 때 불교적인 인식과 판단"이 어떠해야 하는 지의 에세이는 둘째 마당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소개"한 세째 마당, "수행 한담"이라는 넷째 마당, "불자로서 살아가기"의 다섯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부처의 역사적 모습을 찾아본다. 석가모니가 인도의 한 작은 왕국의 왕자였다는 사실 정도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우리가 부처님을 신격화하기 이전의 석가모니라는 한 수행자의 사실적 면모들을 살펴보면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겨야할 귀한 가르침들을 몇몇의 화두로 던져준다. "부처님께서는 29살에 출가하셔서, 35살에 그분이 가진 고민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과문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얼핏 예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이라고 느껴진다. 문득, 나는 이제 29의 나이가 몇달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면서,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이끄는 종교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특히 부처님께서 네 가지 집착, 즉 욕취(欲取;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 견취(見取; 견해에 대한 집착) · 계금취(戒禁取; 미신, 관습과 타부에 대한 집착) · 아어취(我語取; 나라는 이론에 대한 집착)를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하십니다.(46쪽)

부처님은 출가 후 새로운 사상을 대표하는 당대의 여러 스승들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 등에게 제자로서 이들의 가르침을 직접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의 교리가 윤리적 행위를 가져오는 합리적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이들을 떠납니다.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은 인간사회에 선한 행위를 가져오지 못하는 맹목적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76쪽) 

 
   

조금 간추려 본 것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부처님의 삶을 통해 저자는 유익한 깨달음들을 전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될 때 이천 여년 전의 부처의 그런 깨달음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익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마당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불교 에세이는 저자의 불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현 사회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재가불자로서의 저자의 삶이 지극한 불심과 현실에 대한 자비심으로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있게 하는 대목이다. "현실 삶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실체와 조건이 무엇인가를 먼저 해명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문제인 것을 인정하고 일단 멈추는 태도입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고[止], 우리 삶의 조건을 성찰[觀]하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겸허히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도 미래에서의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해야 하고 끝없이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문화가 심지어 생명을 가꾸는 농업과 종교, 시민단체까지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의 지속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있지요. 이런 동기가 있을 때, 과연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가 평화로울까요? 이런 삶을 버려둔 채 닦는 수행이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격을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 종교이며 그 실천이 종교적 수행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이 과연 종교적 수행일까요? 아니면 이 시대의 삶이 혹 우리의 수행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138쪽)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의 여러 모습들의 부조리함을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서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죽음에 대한 성찰, 노숙자에 대한 관심 등 저자는 우리 사회 곳곳의 현실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피고, 절실한 화두를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쌓은 모든 공부를 버리는" 것이 바로 이 하심이다. 하심은 달리 말하면 겸허해 주고 겸손해 지는 것이며, 나의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소유로 이어지고, 무상, 무위로 이어지는 기초의 관문이랄 수 있겠다. "하심은 깨달음에 관해 습득한 지식이나 분별을 내려놓는 것[放下心]"이기도 하다. "그동안 처음과 중간과 끝, 무명과 깨달음, 문 밖과 문 안, 법(法)과 법을 닦아 얻은 여러 경지 등 모든 계단이나 사다리를 놓아 버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의지해 왔던 모든 방법이나 평생 쌓아온 수행을 버리는 것이다."

   
  다급한 것은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눌려 있는 우리 생명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살리는 일에 계급적인 장벽을 앞세우거나 사회의 변화가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두려움과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고통받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눌려서 끙끙거리는 생명에 대한 창문을 활짝 열고 숨을 쉬는 태도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곳곳에서 던져주는 이런 화두들을 오롯이 내것으로 챙겨넣기에는 내게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 김광하가 세상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불심으로 연민하고 자애하며 절실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묻고 또 물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는 있다. 이런 저자가 던져주는 화두들을 그 하나라도 잡고 늘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그가 친절히 소개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것과 무에 다르다 하겠는가?

이 책에서 쓰이는 불교 용어들이 많이 낯설어 읽는 동안에 제법 걸리적 거렸던 것은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아마도 불교신도들을 대상으로 이 글들을 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용어들이나 불교고적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각주들을 붙여 놓았더라면 나같은 사람에게 보다 유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자가 던지는 화두를 우리가 받아내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세 가지의 새로운 무재보시", 즉 무재삼시(無財三施)가 있어 이것마저 소개해야겠다.

무재보시란 "재물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시"다. 이것에는 7가지가 있다는데, "부드러운 말과 웃음 띤 얼굴"로 하는 '언시(言施)'와 '화안시(和顔施)' 등이 있다. 여기에 저자는 새로운 무재보시를 제안한다. 우선 '경청시(傾聽施)',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보시"다. 다음으로 '발언시(發言施)', "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보시"다. 마지막으로 '공의시(公義施)'가 있다. 이는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대중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모임의 대화로 받아들여주는 보시"라고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 세 가지의 새로운 보시는 지극히 개인화되고 이기적이 되어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 곧 부처님의 자애와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는 참으로 절실한 보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 안들고 힘 안드는 이런 보시로도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저할 이유가 없겠다. 오늘부터라도 이 무재삼시를 실천해 보자. 저자의 이 책은 불교건 아니건 간에 한번쯤 깊게 음미해 볼 좋은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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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신 없는 종교는 가능한가 고정관념 Q 11
리오넬 오바디아 지음, 양영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도 일종의 익숙해-지기다. 어떤 것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서로 길들여가고,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익숙하다의 '익숙'은 한잣말이겠거니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해당되는 한자는 보이지 않는다. 순우리말인가 하니 또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고어에 '닉숙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닉(다)'와 '숙(熟)'의 결합니다. 고어 '닉다'는 오늘날 '익다'로 쓴다. 熟도 대표 훈음이 '익을 숙'이다. 삶은 계란을 생각나게 한다. 물에 계란을 넣고 끓이면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가 서서이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익숙해지는 가장 기본적 의미는 아닐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어떤 것에 능란하고 숙달된 상태, 눈에 익어 잘 아는 것, 혹은 가깝게 잘 아는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잘) 안다'라고 종종 표현한다.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하고, 서울 지리를 잘 '안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나는 내 오랜 친구를 잘 '안다'. 그래서 익숙한 것은 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최종의 익숙한 상태란 없다. 더 익숙해지고, 더 잘 알 수 있는 상태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알지만, 나보다 더 자전거 잘 탈 줄 '아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고 알아 가는 것이다. 진행형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익숙한' 것, 혹은 그러한 상태가 진행형이어야 함을 종종 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종종 '너무' 또는 '아주'와 호응하는데, 이른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는 듯 뻐기는 경우다. 내겐 너무나 익숙하기에 뒤도 볼 것 없이 너무나 자명하다. 여기서 나오는 것은 고정관념이고, 이것은 때론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런 익숙하고 자명한 것들에 의문부호를 붙여주어야 한다. 상식이라는 그 익숙하고 자명한 지식은 그래서 자주 부패하고 상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물음표를 달고 다닐 때 그것은 보다 유효한 지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것, 익숙한 것,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떤 도움을 얻는다면 조금은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친구로서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고정관념Q>시리즈는 제격일 수 있겠다. 현재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것으로 '종교, 예수, 이슬람, 세계화, 이집트 문명'이 있고, 앞으로 다룰 것으로 '동성애, 왼손잡이, 피카소, 유대인, 팔레스타인, 석유' 등이 있다고 한다. "역사 · 문화 · 사회 · 예술 · 과학 · 건강 등 너른 분야에 걸친 깐깐한 문답은 상식의 틀을 께고 즐거운 지식을 찾을 수 있는 검색창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획의도에 맞게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다루려 하고 있다.

이중 나는 관심사항 중 하나인 『종교』를 읽었고, 『예수』를 현재 주문중이다. 이 책 『종교』는 그 주제의 무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가볍다. 그래서 빨리 읽힌다. 속독이 특기가 아닌 나같은 사람도 한 두 시간이면 너끈하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것말이다. "종교는 비이성적이다", "종교는 인간 소외의 근원이다", "신은 죽었다" 등.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문장들인가? 이책의 각각의 소주제들만으로도 책 한 권씩은 충분히 뽑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다소간 이 책이 너무 거대한 것을 건드려서 이도저도 아닌 게 된 듯한 느낌, 말하자면 계륵(鷄肋)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책 『종교』는 우리가 흔히 종교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 그러니까 너무 뻔해서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종교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하나씩 친절히 물음표를 붙여놓는다. '모든 생물 중 인간만이 종교를 가진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방점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 찍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각각의 소주제들은 우리가 종교에 관해 익숙한 문장들이지만 여기에는 모두 물음표를 붙여놓고, 차분히, 그리고 가볍게, 그러면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라는 그 자체는 인류역사와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렇게 가볍고 쉽게, 그러면서도 한 두 시간만에 후다닥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다룬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듯이 이 책은 그 불가능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가능한 만큼에서까지는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고정관념'은 이렇게 의심하고 회의하라는 방법들을 시범보이고 있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은 아니고, 이것을 통해 보다 익숙해지는 과정의 선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괜히 부담을 갖지 않고도 이 주제 '종교'에 대해 한번 훑어보자고 한다면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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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교에 관한 스무 가지의 흥미로운 주제들
    from centris 2008-11-24 20:39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종교가 존재 치 않았던 적은 없었다. 이성적, 과학적 사고가 ‘진리’에 가깝게 대접받는 현대에도 이성과 합리주의 앞에서 종교는 여전히 건재하다. <고정관념Q: 종교>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으로 예측했던 종교가 현대 사회에 들어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우리가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순오기 2007-10-23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로부터 해방되고 싶은데요...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로부터 해방의 자유!
하지만 서평에 공감하며 꾹~~~~~

멜기세덱 2007-10-24 00:3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종교로부터 해방되시길 하나님께(누군가에겐 누군가의 신에게) 기원합니다.ㅎㅎ
추천 감사하고요.ㅎㅎ

마늘빵 2007-10-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요새 책 많이 읽으시는데요? ^^ 올라오는 책들이 다 제 관심사라.

멜기세덱 2007-10-24 00:40   좋아요 0 | URL
아마 선후가 바뀐 것일지도 몰라요.ㅎㅎ 아프님은 언제나 저의 최대 관심사였으니까...ㅋㅋㅋ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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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화제의 책 『만들어진 신』을 읽는 내내 당황스럽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때문이었을까?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리뷰쓰기를 주저했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리되지 못한 채 혼란스럽다. 리처드 도킨스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그래, 신은 없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 못난 자존심 같은 것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의도가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가 뜻한 바를 전부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내 안의 충격은 나를 도킨스의 손을 잡기 가까운 쪽으로 밀어버렸다.

도킨스의 논리는 너무나 명쾌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나같은 범인으로서는 그를 반박하고 싶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굳이 반박하려 애쓴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라고 매도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악마의 사도가 내민 선악과를 이미 한입 깨어물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하는 7개의 스펙트럼 속에서 나는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나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 책을 한 번 더 읽는다면 그 아래로 더 내려가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었나?"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 시작은 내 의지와만 상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태신앙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나이때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던 듯 하다. 그 어린 기억속에는 교회가기 싫어 이른 아침부터 떼를 쓰다가 매를 맞은 가슴아픈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교회를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면서 나는 당연스레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어떤 영적체험의 기회를 갖게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영적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고, 지금은 아예 교회를 나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애써 '날라리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열성적으로 교회를 나갔다. 고등학생 때쯤인데, 그때는 온갖 교회의 일들을 맡아서 참으로 열심히 했다. 학교와 집과 교회 밖에 모를 정도였다. 성가대도 하고, 학생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주일학교에서 보조교사로 봉사하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기도회도 열심으로 나갔다. 여러 부흥집회에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나섰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런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배때는 교인들 앞에 나가 찬양인도까지 '정열적'으로 도맡았다. 그러나 거기에 흔히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는 찾지 못했다. 의구심이 들었고 회의감이 나를 휘감았다. "내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회의를 하게 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때 그 회의 속에 성령이 찾아와 위로하고 뜨거운 영적 체험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의 그 지독한 회의감은 열심으로 나가던 교회를 끊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정확히는 예수를 사랑한다.

왜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일까? 지독한 회의심은 교회와 예수를 분리하게 만들었고, 단지 교회를 나가기 위해 열심이었던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 열심 가운데 예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찾으려 했고 교회를 끊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간절히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에 대해 전부터 회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경의 첫 구절부터 나는 믿지 못했다.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성경의 그 어느 기사와 이적도 믿지 못한다. 반대로 이 사실을 초장부터 인정하고 가면 성경의 어느 구절도 믿지 못할 바가 전혀 없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천지창조보다는 미약해 보이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교회를 다니는 내내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신화적으로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천지창조라니? 어느 신화가, 전설이, 그 어떤 환타지 소설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가정으로 시작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것이 내 회의감의 원인이 되지는 못했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 나는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는 여전히 부확실하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나는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정말이지 그것은 그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말이다. 난 그의 말들을 사랑했고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행위를 사랑했다. 그런 예수가 있다면, 그것이 상상속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믿고 싶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후엔 그 말에 더욱 동의하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또한 그런 망상,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을 상상한다는 것을 나는 그리 무력하게 보지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가 신을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망상이 일으킨 백해무익의 결과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예수라는 망상, 아니 상상은 어떤가? 그것 마저도 유해할까? 나에게 그것은 결코 유해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어디까지는 전통적 예수관과는 다를 것이긴 하다.

얼마전 김용옥으로 한국기독교계가 떠들석 했다. '구약폐기론'은 운운했느니 안 했느니하면서 분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김용옥을 불편해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마저도 그런 불편한 감정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가 앞으로도 리처드 도킨스를 따라 읽는다면 언제고 리처드 도킨스에게 설복되고 말 것만 같다. 그의 논리는 철저하고 명확하다. 너무 쉽지 않은가? 그의 논증은 너무나 당연한 설법이고 빈틈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독교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으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망상의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난 단지 '사랑의 예수'만을 상상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진정한 예수'를 찾아내는 날이 온다면 행복하겠다.

이 책 『만들어진 신』을 우리는 기독교 비판서로 읽어도 좋을 듯 싶다. 그가 일반적인 신을 공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논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를 대상으로 한다. 나는 충분히 기독교 비판서로서 이 책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많은 기독교인이 보아도 좋지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었다. 그리고 『죽은 신을 위하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끝끝내 기독교를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련의 책들을 통해 보다 의미있는 예수를 상상할 수 있을 것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아직까지 날라리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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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까지 겨우... 날긋날긋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정도지요.

일련의 서적들을 읽으면, 저도 기독교를 아주 떠나지 싶어요.
교회에 의미를 둔다는 건, 거의 접은 상태랍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멜기세덱 2007-09-16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교회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교회에 의미를 두고 있고요.ㅎㅎ
아무튼 이게 홀가분하게 시원스레 떠나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더 편하겠어요.ㅎㅎ

프레이야 2007-09-16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라리 기독교인(멜기님보다 더더 심한) 여기 하나 추가요.
무신을 증거하는 일은 신을 증거하는 일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아직 이 책, 사두고 안 읽고 있지만..
신의 존재에 회의감과 의심이 들어 더욱 더 기도로 간구한 마더 테레사처럼
님이 말씀하시는 '상상의 예수'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6 17:3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유신과 무신의 논쟁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제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믿는 예수가 그 대목에 심각하게 걸린다는 게 문제지요.ㅎㅎ

순오기 2007-09-1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를 믿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정의한다면, 현재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교회 출석 방학 4년째..)전 당당하게 종교란에 기독교인이라 적습니다. 내 마음에 그분이 자리하고 있기에...교회를 다니는 일이 예수를 위한 일인지 목사를 위한 일인지 많은 회의가 들어 현재는 방학중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더 많은 비판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데 동감입니다.
기독교인들끼리만 용납하고 이해되는 종교라면 별 의미가 없다 생각...생활속에서 이웃의 비기독교인에게 감동줄 수 있어야 그들이 감화될테니까요.

멜기세덱 2007-09-16 17:38   좋아요 0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예수의 향기'를 찾아야 그 존재의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과 신앙 2007-09-1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공감하는 바도 많고, 님과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그 어떤 설득력 있는 말을 해 줄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저의 비참함이 다시 떠오릅니다. 교회의 후배가 제게 진화론이 맞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면서, 예수님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고 내게 강하게 말했을 때, 저는 아무런 답변도 못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저는 이 방면에 책을 읽게 되었고, 지금은 최소한 제 자신에게 만큼은 기독교 신앙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답니다. 또한 자주 다른 사람에게 제 확신에 대해서 말해 주기도 한답니다. 책 선택을 신중하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될 수 있으면, "예수는 역사다" "창조 설계의 비밀" 등의 책이 참 좋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는 책들로는 "기독교 지성으로 이해하라" "김용옥의 하나님 VS 성경의 하나님"(도서출판 누가) 이 책들입니다. 이냥 책 읽기를 즐겨하는 분 같아 보이시니, 제가 추천해 주는 책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라 여기서도 주제 넘게 긴댓글을 달았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님께서 기독교 신앙에 확신있는 삶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6 17:47   좋아요 0 | URL
고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전에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읽어 왔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도 그 중 일부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신실한 신자'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여러번 읽었구요. 어쩌면 이전까지의 독서가 다소 기독교쪽으로 치우는 면이 커보입니다. 지금은 그 치우침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소개해 주신 책은 감사히 제 다음 독서목록에 포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기독교에 대한 이성적 확신(혹은 감성적 확신까지도)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확신을 추구하는 것은 다분히 위험할 수도 있기때문이죠. 지극한 회의로 나아가는 것도,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로 나아가는 또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7-09-16 21:50   좋아요 0 | URL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은 저도 갈급한 부분입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군요 :)

누에 2007-09-1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전 추천만 누르고 갈래요. ^^

지성과 신앙 2007-09-17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과 체셔고양이님께
제 댓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삶되세요.

(주)사랑 2007-09-1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고민이 제가 했던 고민과 비슷하리라 생각되기에 몇 자 적어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회의를 합니다. 특히, 한 때 교회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의 경우, 회의감이 찾아오면 정말 미칠 노릇이죠.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저 역시 신을 부정하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2-3년 정도 방황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 교회는 매주 나갔지만, 이미 저의 영혼은 방황 중이었던 것이지요.
그 방황 속에서 저는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정신만큼은 본받겠습니다."라고요..
적어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나 정신은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간디나 체게바라,마틴루터킹 목사, 등등..많은 위인들의 정신을 높이 사고 그분들을 추종하는 것처럼 - 그 정도 수준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의 고백이었죠.

하지만, 고민의 고민 속에서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의 실존이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실존만큼은 아직도 과학이 풀지 못하는 영역이지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영적 존재인 신이 있다는 까닭이기에
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영적인 부분입니다.
영의 세계에는 영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요..
신(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담이지만(아주 위험한 발언이지만..)
'하나님', 즉, 이 세상의 주관자에 대해
어떤 사람은 '도'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주의 기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성리학의 용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영적인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표현이 등가의 가치를 지니느냐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학문적 시각으로 봤을 때엔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미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오셨기에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영적 실존을 알고 나서는 영적 세계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 고민은
신(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라기 보다
그분의 법칙,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회의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부분 때문에 기독교가 비기독교인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기도 하고요..

모든 종교는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그러기에 인간은 교만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야 할 뿐입니다.

또한 내자 부족한 자이기에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처럼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교만합니다.
마치 영적 진리를 다 소유한 양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이 오신다면 똑같이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갈구하고, 더 많이 찾읍시다.
그리고 찾았다면, 그에 맞게 삶을 삽시다. 세상을 사랑하며...

참고. 도킨스의 책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결론은 하나입니다.
영적 영역의 실체는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분은 '스스로 말미암아 계실' 수밖에 없다는 것!

멜기세덱 2007-09-20 01:03   좋아요 0 | URL
고견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저의 '회의'을 당분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ㅎㅎ

Dreamer 2007-10-0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서평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님이 신앙의 체험과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든 말이죠^^) 출 33:11, 창세기 18:22-32, 요나서 등도 한번 읽어보시길..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죠. 책에 대해 궁금해서 서평을 읽었거든요. 꼭 사서 읽어볼게요.

심술보 2007-10-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말고 성직자 말고 예수 그 분의 말과 행동을 믿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종교일지 신념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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