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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박노자를 좇아온 세월이 벌써 8년여가 되어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충격에서 시작하여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박노자를 따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그 비정(非情)한 역사의 굴곡들로부터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탐욕적 이데올로기의 잔재들이 발가벗겨진 그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의 수치를 면치 못함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그렇게 나에게, 또한 우리에게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함을 일깨우는 죽비 소리와도 같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전근대적, 국가주의적 추태들을 들추어내어 우리들의 진정한 대한민국, 곧 “다양성의 나라, 평등한 나라”로 거듭날 것을 부르짖는다. 이어서 그의 작업은 우리안의 편견적 폭력과 차별의 일상화를 비판하고(『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우리 스스로가 제국주의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제국주의적 면모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하얀 가면의 제국』). 역사학자로서의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탐구하며, 그러한 역사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당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리하여 오늘날의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의 근현대 수난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당대적 현실에서의 ‘수난’의 반복을 피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작업들은 『우승열패의 신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등에서 계속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폭력적, 파쇼적, 전체주의적, 군사주의적,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을 끊임없이 추적해온 박노자. 그런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 유효함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까발리는 폭로성 작업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이 단지 아무런 목표와 지향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것일까? 그간 8년여의 세월 동안 그를 좇아 온 우리에게 그는 그간의 작업들의 중간 기착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저서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비판적 자기성찰이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성찰로부터 이루어낼 수 있는 발전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 모델이라는 것은 저자 박노자가 이 책을 일컬어 “‘반란적 동아시아’에 대한 지역 연대 지향적인 보고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연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의 작업들은 이 ‘동아시아의 연대’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수반되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반(反)동아시아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서야 그 연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발전적 지향 없는 성찰과 반성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은 그런 성찰과 반성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자의 지금까지의 작업이 성찰과 반성이었다면, 이번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의 작업은 그것을 토대로 한 발전적 지향, 곧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인 것이다. 새로운 대안으로 내어 놓은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과연 얼마나 될까? 박노자를 따라서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동아시아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박노자는 서두에서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반란적 동아시아’가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동아시아의 기존 권력과 가치는 지극히 서구적이면서도 제국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란’이란 그런 “권력에 대한 반란, 기존 가치에 대한 반란”이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풀뿌리 동아시아가 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반란’을 꿈꾸어야 하다. 그럴 때에 박노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연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 연대의 뿌리는 곧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박노자는 과감하게 선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의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외침의 소리를 다시 듣는 듯도 하다. 여전히 공산당하면 치를 떨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이승복들이 많은 이 사회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말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또한 ‘사회주의’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도 아직은 여전하다. 어쩌면 그간 우리 안의 이러한 편견을 혁파할 것을 박노자가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체적 동아시아인으로서 ‘반란성’을 회복하고, 그간의 추상적 ‘동아시아’ 담론에서 벗어나 ‘실감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며, 그 구체적 모델로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박노자의 ‘동아시아 연대’ 구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 구상과 구체적 모습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탐색을 동아시아 역사의 뿌리에서부터,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역사적 실재에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동아시아”에서부터 찾아가고 있는 것이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란 제목은 이제는 우리가 동아시아에 대해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주의가 사회 곳곳에 내재해 있어 몰랐던 개인과 종교의 자유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이었음(「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니체보다 ‘이지’가 빨랐다」등)을 설파한다. 동아시아의 근대에 있어서 망령(妄靈)으로 지목되는 ‘유교’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보성이 강한 많은 유교 사상가들”이 있었음을 ‘무시’했고 알지 못했다. 니체보다도 빨랐던 이지(李贄)의 ‘열린 개인주의’도 있었다. 동아시아 담론에서 배제된 ‘이슬람’과의 공존은 이미 우리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존재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수많은 동아시아적 가치들을 깨달을 때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민중운동과 연대하는 길”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국적의 신비화’가 얼마나 반동아시아적인지, 근대 권력과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들, ‘관습’을 들먹이는 지배세력들의 자구책, ‘민족자본’이라는 미명 아래 숨어 있는 재벌자본가들의 논리, 뿌리 깊은 ‘숭미주의’,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 등등 20세기에 이식된 ‘망령’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얼마 전 까지 학교에서 ‘교련’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기도 하는, “국가적 상징 세계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을 만날 수도 있다. 오늘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준 열사’가 열사만은 아니었음을, 그 이면에는 친일의 모습도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충격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파시즘’을 명쾌하고 비판한 ‘1930년대 논객 김명식’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우리 역사의 자랑 ‘화랑’의 동성애 가능성을 읽는다거나, 미적 기준의 변화들, 필자의 경험담이 섞임 ‘국제결혼’에 대한 이야기, 개화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들은 더욱 이 책의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우리가 영원한 우방일 것이라고 여기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연대’를 위한 박노자의 작업은 오늘날에 있어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한미FTA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신식민지로서 재편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주창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박노자의 이번 작업이 그 무모성을 가리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담론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탐구에서부터 가능성을 엿보았다면, 그것은 토대로써, 뼈대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 토대에 건물을 세우고, 뼈대에 살을 붙일 때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은 더 이상 가능성의 담론이 아니라, 실제적 담론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 나아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모델의 좋은 설계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