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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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御製訓民正音" 『훈민정음 언해』에는 세종의 서문이 실려있다. '언해(諺解)'란 우리말로 풀었다는 얘기다.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우리말 번역서가 바로 『훈민정음 언해』다. 한문으로 된『해례본』을 우리말로 풀긴 했지만 국한혼용으로 되어 있고, 한자에는 한글로 음을 표기했다. 『언해』의 한자음표기를 되는 대로 읽어보면 대략 "솅종엉졩훈민정음"(고어 표기를 여기서는 하기가 어렵다. '엉'의 첫 소리는 꼭지가 달린 이응(옛이응)이다. 즉, 음가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게 발음할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음'은 여린 이응으로 'ㅎ'에서 위의 한 획을 없앤 것이다. 'ㅇ'과 'ㅎ'의 중간 정도의 발음이지 싶다.)의 코맹맹이 소리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안된다."

이걸 바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한자음대로라면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된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이상음을 추구했다. 그래서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갖춰야만 했다. 그래서 '세, 어, 제'에 모두 'ㅇ'을 붙인 것이다. 이를 감안하고 읽어본다면 "셰종어졔' 쯤 되겠다. 오늘날 "세종어제훈민정음"인데, 이말은 "세종이 어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제'를 빼고 이해하면 무난하다. 그런데, 문제는 세종이 '어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 엊그제 만들었는지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직의 국어교사들은 간혹 말한다. "10월 9일이 무슨 날이지?"라고 학생들에게 물으면, 많이들 잘 모른다고.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한글날이긴 한데, 한글을 만든 날은 아니고, 반포한 날이다. 북한은 1월 15일이 한글날이다.(조선글 기념일) 왜냐하면 이날이 기록상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날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가 기념하는 '한글날'이 언제인지 잘 모른다는 것은 좀 찝찝하다. 그 찝찝함의 근저에는 10월 9일이 휴일이 아니란 사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씁쓸하고 안타까운 것일까? 여하건간에 왜 한글날을 안 노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열린 날(開天) 만큼이나 백성의 눈이 열린 날도 중요할 듯 싶은데, 두 날을 다 놀면 한국 경제가 거꾸러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짜증을 나게 한다. 오늘날의 국경일 혹은 기념일은 휴일이 아닌 이상에는 그나마 기억이라도 해주는 배려를 찾기는 힘들지 않은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지 올해로 561년째다. 이 날을 기념한 것은 100년도 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가갸'날이라고 불렀다. '가갸거겨고교구규'하던 것에서 앞 두 글자를 따다 붙은 것이다. 이게 몇 해 후 한글날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11월 초였는데, 이 책에 반포일이 9월 상순으로 되어 있어 오늘의 10월 9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이날 저날, 이 이름 저 이름으로 자주 바뀌었지만, 그것은 그만큼이나 이 한글날을 어지간히도 중요히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글날을 놀았던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한글날엔 놀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그 업적을 또한 칭송해야 하겠다. 흔히들 세종대왕께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문자를 창제했다느니,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고 치켜주면서 아주 그냥 별발광을 다하도록 요란이지만, 그 요란도 나름 의미는 있다. 나는 그 요란을 떨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날만큼은 세종께 감사하고 싶다. 민중의 눈과 귀가 열린 날, 이 날 한글날은 어쩌면 개천절에 버금갈 소중한 날은 아닐까?

잡설이 길었다. 김슬옹의 이 책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은 이것이 왜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의의, 창제 과정의 우여곡절과 비하인드 스토리, 훈민정음이 있기까지의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 나아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대한 착실한 해설, 그리고 그것의 보급과 발전의 향로, 한글의 발전성까지를 작은 이 책에 꼼꼼히 담아두고 있다.

대강은 다들 아는 내용이 태반일테지만, 그 숨겨진 뒷얘기들과 보다 자세한 훈민정음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를 더해준다. ㄱ에서 ㅋ이 나오고, ㄴ에서 ㄷ, ㅌ이, ㅅ에서 ㅈ, ㅊ이 나오는 이 무척이나 단순명료한 원리가 오늘날 디지털 매체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대강 앎의 자세함을 더하게 해주기도 한다. 보다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훈민정음에 담긴 다양한 창제 배경과 세종의 노고, 그리고 그의 비전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이름에 그 대부분이 담겨 있지 않은가?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은 오늘날에도 배울 바가 농후하다. 다만 그것이 제왕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서 말이다.

이것이 가히 문자혁명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으로 당시의 혼란스럽던 한자음을 정리하고자 한 것을 들 수 있다. '바른 소리'란 이름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누구는 모란이라고 읽고, 누구는 목단이라고 읽는 것은 혼란스럽다.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이 가지고 있는 그 이전 것과의 단절의 성격을 이 훈민정음은 그리 달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이라던가, 각종 언해본 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사용한 한문에서 한자를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읽고 말하기 편하게 훈민정음을 덧쓰는 방법으로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과학적이고 우수하며, 뛰어난 문자라는 사실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주의같은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조심스럽게 우려된다. 저자가 탄식하듯이 서울대 권장도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들었느니 마느니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좀 우습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고서를 굳이 읽은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가 쓰는 이 문자의 여러 특성과 장점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우여곡절의 배경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필요하지 싶다.

전세계 상용문자 중 그 창제자가 또렷이 알려진 유일한 문자, 문자 발전 단계상 현재까지 가장 진화된 것으로 인정되는 문자, 21세기 디지털시대에 그 적용력이 단연 돗보이는 문자, 바로 한글이라는 자부심은 가져도 무리될 것은 없겠다는 소리다. 달달달 한자 외우기에 허우적 되고 있었을지 모를 이땅의 수백만 학생들에게 그 공포에서 해방시켜 준 것만으로도 이들이 한글날을 기억해주어야 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제3세계의 문자없는 나라에 한글을 전수하자는 주장들도 그리 곱게만은 들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만도 아닐 것이다. 여하간 한글을 널리 전하는 것은 보람스런 일이다. 소리문자로서의 한글의 우수성은 입증된 상태이기도 하다. 그것이 문자없는 이들에게 쉽게 자기네 말을 적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 나쁘겠는가? 우리말을 쓰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한 말이다. 세종이 대왕인 이유가 비단 훈민정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훈민정음 하나로도 충분하기도 하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를 편하게 쓰고 말하게 해 주지 않았는가? 그래, 그렇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여 편하게 하다면 세종이 웃을 일이다.

뒤죽박죽 야밤의 리뷰를 빨리 정리하자. ①한글날 놀자. ②안 놀더라도 좀 기억하고 기념해야 되지 않겠나? 요즘 애들이 10월 9일은 한글날이라는 사실을 한 대 줘박아서라도 알게는 해야지 싶다. ③한글을 좀 널리 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나름대로 귀한 일이다. ④한글이 세계최고니, 뭐니 하는 요란은 좀 자제할 필요가 있고, 한글에 대해 우리가 좀 관심을 가지고 알 필요도 있다. 자 이렇게 정리했으니, 이 책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을 찬찬히 읽어보지 않겠는가? 어느새 12시가 넘어 561년 된 한글날이 되었다. 오늘만큼은 세종도 생각하고, 그가 '어제' 만들지 않고, 오래 전에 만든 훈민정음을 되돌아보자. 이 책은 오늘 읽히어 더욱 값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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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기의 한글, 이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from 리카르도의 정보 꾸러미 상자 2007-10-09 13:27 
    #언어란 욕구의 분출 도구 (예전에도 한자어가 없어져야 한다고 적은적이 있습니다만..) 한자가 없어져야하는이유는.. 언어의 음악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선.. 영어, 또는 알파벳에서 음악이 발달하게된 이유를 생각해볼필요가 있습니다. 영어에는 랩이나 시(현대시), 또는 뮤직컬등의 운율적인 요소들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음가하나하나마다 독립적인 발달로 라임 이라는게 있어서이지요 즉 비슷한 소리의 반복이라든지, 비슷한 문장의 반복이라든지... 그런 영어나..
 
 
심술 2007-10-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고등학생 시절 한글이 세계최고라는 선생님들의 말을 냉소적으로 듣는 반항심 많은 그러나 겉으로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었는데 뉴질랜드 대학 다니면서 우연히 읽은 어느 외국 언어학자 글에서 한글이 현존 글자 가운데서는 가장 과학적이란 대목을 보고는 기뻤어요. 아무래도 외국생활 하면 사람이 애국적으로 되는 거 같아요. 그래도 멜기님의 4번엔 동의해요. 멍석 펴 주면 하던 짓도 안 한다는 옛말이 사실임을 이젠 알므로.

멜기세덱 2007-10-09 00:31   좋아요 0 | URL
동의하면, 추천은 하나 해주어야 합니다.ㅋㅋㅋㅋ

멜기세덱 2007-10-09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에서 "훈민정음을 만든지 올해로 561년째"라는 말은 좀 수정이 필요할듯하네요. 우리의 한글날 기준이 『훈민정음 해례본』반포일(집필 완성일)인 1446년 9월 상순(음력)이니까, 반포한지 561년, 창제한지 564년(창제일 1443년 12월 30일(음력))이겠네요.

심술 2007-10-09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천했시와요.

마늘빵 2007-10-09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념 리뷰군요! :) 참고루 모르는 분들 있을까봐, 한글날은 기념일에서 국경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멜기세덱 2007-10-09 10:28   좋아요 1 | URL
맞아요, 국경일이라죠...
근데, 왜 안 노냐고요? ㅋㅋㅋㅋㅋㅋ

순오기 2007-10-09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 책 서평단 신청했다가 미역국~~ 님의 글 읽고 장바구니에 담아 지릅니다!
물론 추천도 확실하게~꽉~~누르고요 ^*^
정말 노는 날 아니라고 한글날도 모른다는 건 너무해요~~ 저는 독서회에서 10월은 한글날 기념하기 위한 도서를 선정하는 것으로 저의 한글 사랑을 표현합니다!
국경일이지만 공휴일이 아니라 놀지 않는 날!

멜기세덱 2007-10-09 10:28   좋아요 1 | URL
저도 미역국~~~먹었어요. 서평단...ㅋㅋ

시비돌이 2007-10-09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지은 다음날의 보고서인가 보군요. '세종이 어제 훈민정음을 지었다'
아, 또 즐찾이 줄겠구나. ㅠ.ㅜ

멜기세덱 2007-10-09 17:55   좋아요 1 | URL
제 즐찾을 줄이시려는 음모시죠?

시비돌이 2007-10-09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구 한글을 반포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네요.

멜기세덱 2007-10-09 17:55   좋아요 1 | URL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 내신거에요, 지금....ㅋㅋㅋ
 
스포츠 키드의 추억
신윤동욱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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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말에서 스포츠(sports)는 외래어에 속할 것이다. 그것이 외국어가 아니라 외래어가 된 데에는 그만큼 우리 생활(혹은 언어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어로서의 'sports'를 우리말로 번역해보자면, 얼핏 '운동'이나 '체육' 정도가 될 텐데, 우리는 굳이 'sports'를 스포츠라 애써 말한다. 왜일까? 거기에는 스포츠와 운동과 체육이 가지는 그 어감과 어의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무언가가 있다. 근대 이후에 'sports'가 전해지면서 형성된 스포츠는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왔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각기 대중들의 일상적 차원에서 그것은 '운동'이나 '체육'과는 다른 담화상황에서 사용되어 왔다.

흔히 우리는 "운동하러 간다"고 하지 "스포츠 하러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일반인들에게 실행되어 지지 않는 '스포츠'의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니까 스포츠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 스포츠와 대비되는 아마추어 스포츠가 가지는 좁은 의미의 아마추어리즘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의 아마추어리즘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일반인들의 '스포츠 활동'을 우리는 '스포츠'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지성이 맨유 팀에서 첼시와 축구를 하면 스포츠지만, 우리 옆집 아저씨가 조기 축구팀에서 축구를 하면 다만 운동이지 스포츠가 되지 못한다. 재밌는 것은 박지성이 우리 옆집 아저씨와 함께 조기 축구팀에가서 축구를 해도 스포츠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스포츠는 보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한, 직업적 전문적 영역의 운동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와 체육 사이의 관계는 또다른 측면에서 대별된다. 체육이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 차이는 '체육 뉴스'가 아니라 '스포츠 뉴스'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운동'되어지는 대부분의 것이 체육이라면, '운동'되어지는 것들 중에 '보여지는' 측면이 강한 것이 스포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체육 뉴스'가 아닌 '스포츠 뉴스'라는 조어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두 가지에서 얻을 수 있는 스포츠의 영역은 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이며, 대중에게 보여지는 영역의 운동 혹은 체육의 일부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말에서의 스포츠는 말이다.

그래서 이 스포츠는 근대 이후의 산물이면서 국가주의의 유효적절한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근대 이전에서도 체육이 이런 기능을 담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후에 그것이 체육이나 운동으로부터 더욱 분화되면서 '스포츠'로서의 보다 강력한 영역을 구축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스포츠는 비판받아 왔다. 3S 정책으로서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하는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대에서 스포츠의 영역은 더욱 굳건해지고 그 영향력을 지대하게 확장해왔다. 이것은 스포츠가 3S 정책의 하나로서만이 아닌 그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지 않을까? 여기 그 또 다른 무엇을 증거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신윤동욱이다.

신윤동욱이란 이름을 몇 번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해서 듣게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디워' 논란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하여튼 신윤동욱은 『한겨레21』 문화부 기자로 그간 스포츠 부분을 담당해왔다. 그는 오래전부터 스포츠와의 인연을 뒤늦게 되돌아보며 스포츠 칼럼을 풀어나갔고 드디어 그것을 모아 이 책 『스포츠 키드의 추억』을 내어놓은 것이다.

   
    태극기에 갇힌 스포츠, 그것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스포츠 일러스트」의 주요한 주제였다. 거꾸로 비추니 부끄럽기도 하다. 스포츠를 이렇게 애국주의 프리즘으로 보았던 것은, 뒤집어 보면 내가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이 애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하여튼, 한국에서 그래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스포츠 보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가벼운 커밍아웃이다. 이제는 스포츠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스포츠를 좋아해?'란 질문에 의아해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6~7쪽)  
   

그에게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사실의 고백은 아직 '커밍아웃'해야 할 것의 성질이다. 여전히 스포츠에 대한 어떤 경박함의 인식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이 사회의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야기들 속에는 다분히 좌파스러운 부분이 많이 담겨있다.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좌파적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고백은 여전히 '커밍아웃'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다르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스포츠 보기에 중독된 인생, 태극마크에 대한 집착은 되도록 버리고 스포츠를 보면서 인생도 느끼고 세상도 생각하자는 뜻"(7~8쪽)에서 이 책을 엮었다고 말이다.

"스포츠를 보면서 인생도 느끼고 세상도 생각하자"는 좋은 뜻에서 대부분 스포츠를 보지만, 그 스포츠를 봄으로서 느끼는 인생이나 세상은 다분히 경쟁적이고 약육강식적인 단면들이 대부분이어서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스포츠를 전하는 주체, 곧 이 사회의 지배계극이 스포츠에 담아내고자 하는 부분들만을 전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스포츠중계에, 스포츠뉴스에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얘기"는 보다 넓은 시각에서 스포츠를 봄으로써 스포츠에 담긴 진정한 인생의 의미나 세상의 이면들을 엿보자는 것일테다. 하여튼 어느 시인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지만 신윤동욱을 키운 것은 팔할, 아니 그 이상이 스포츠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스포츠는 그를 어떻게 키웠을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스포츠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스스로를 '스포츠 키드'라고 말하는 그의 스포츠의 추억을 무엇일까? 우리가 이 책을 따라 읽으면서 공감할 부분이 무척이나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그와 함께 '스포츠 키드'이기 때문이다. "나는 농구대잔치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시절이다. 내 인생에 그토록 순수한 몰입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15쪽)라고 말하는 신윤동욱처럼은 아니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한때의 시절에 어느 하나의 스포츠가 있는 것은 대다수일 것이다.

이 책은 다만 스포츠에 얽힌 추억을 주구장창 나열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스포츠에 담긴 다양한 이면들 속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들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간혹 이런 서술을 보자. '나는 무조건 오래 뛰는 선수가 좋다. 오래 뛰는 언니들은 더 좋다. 즐기지 않으면 오래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맨날 맞고 한다면 오래 못한다. 언니들의 긴 선수 생명은 스포츠의 민주화를 상징한다."(24쪽) 우리나라 핸드볼팀의 언니, 혹은 아줌마 선수들을 보고 한 얘기다. 우리 사회의 스포츠에 담긴 어두운 이면들이 무척이나 많음을 우리는 이 책에서도 제법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체격 좋고, 얼굴 좋고, 스타일 좋은 청소년 대표팀이 좋다. '본 투 비'로다가, 애국심과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는 그들의 태도는 더 좋다. 조국에 대한 비장미가 없으니까 상대에 대한 비정함도 없다. 내가 나카타에 매료됐던 바로 그 이유로, 청소년 대표팀에 매혹 됐다. 나는 근성 없는 한국 축구가 좋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30쪽)

 
   

우리 스포츠에서의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참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어쩌다 일본에 지기라도 하면 치욕이니 어쩌니, 반면에 이기면 '도쿄 대첩'이니 하면서 얼토당토 않게 국가와 민족을 갖다 붙인다. 이 지지리 못난 궁상에서 이제는 벗어나 "애국심과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는" 스포츠를 나 또한 보고싶다. "아버지 같은 명감독에 잘 따르는 여자 선수들이라는 '가부장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유사 가부장에 유사 부녀 관계다. 한국 산업화의 눈물겨운 발전 모델과 유사하다."(58쪽)는 지적도 우리 스포츠가 여전히 품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런 우리 스포츠의 어두운 면들을 이 책은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단순한 스포츠 타령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빌 생클리 리버풀 전 감독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에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축구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축구를 생사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팬들에 의해, 축구 선수들의 생사가 위협당하고 있다. 축구의 역사는 '광기의 역사'이기도 하다.(78~9쪽)
 
   

비단 축구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 스포츠에 생사 이상을 걸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구하나 스포츠에 어느 정도 걸지 않은 사람은 드문 것도 사실이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하는 날, 나는 군생활을 걸기도 했다. 무슨 말이고 하니, 당시 스페인과의 경기 중 나는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위병소 옆에 마련된 면회실의 텔레비전을 몰래 틀어놓고 중계를 관전하느라 여넘이 없었다. 그때는 누가 오건 말건 축구가 중요했었더랬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흔하지 않는 귀중한 것들을 스포츠를 위해 간혹 희생하고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에 담긴, 위에서 언급한 어두운 이면들과 함께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스포츠에 걸고 살아가는가 하는 그 이유들을 엿보기도 하고, 정말이지 인생의 축소판같은 스포츠의 장면 곳곳에서 어쩔 수 없는 감동과 추억을 애틋하게 되돌아보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윤동욱에게는 농구가 무엇보다도 깊은 추억의 스포츠였듯이, 우리들 모두에게는 어떤 애틋한 스포츠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고, 스포츠 스타에 대한 열광과 감동 하나씩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서 저자와 함께 '스포츠 키드'였음을 자인하지 않을까 한다.

길게 쓸 리뷰가 아님에도 쓸데없이 길어졌다. 이 밖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진 스포츠 장면들을 이 책은 담아내고 있다. 이전의 기억들도 되새겨볼 수 있고, 우리가 몰랐던 스포츠의 이면들도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보는 재미가 농후하다. 저자의 필치도 재치가 넘친다. 간혹 저자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드는 '오빠'니 '언니'니 하는 언설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불악무도한 전장군의 무식한 전술에 전도된 듯한 혐오감이 없지않지만, 대한민국에 한번쯤 '스포츠 키드' 아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우리모두는 '스포츠 키드' 아닐까? 이 사실에 자못 분개만 할 것은 아닐 것같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나서는 말이다. 이 책은 떳떳하게 나도 '스포츠 키드'였음을 커밍하웃하게 해 주는 충분한 응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앞서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를 나름 짚어보았지만, 여전히 스포츠는 3S 정책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포츠 없이는 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스포츠를 즐기되 "일주일에 3번 이상, 하루 30분 운동"(269쪽)도 함께 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싶다. 그러니까 '스포츠=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포츠는 스포츠대로 운동은 운동대로 어느하나 치우치지 않는 생활건강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한가지 더 붙이자면, 저자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지만, 스포츠를 보는 맹목적 시선을 거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스포츠를 보는 보다 비판적 시선을 배울 수도 있다. 저자 신윤동욱에게서 말이다. 재밌게 읽히면서도 뼈가 있는 그런 책이라고 한다면 너무 극찬이겠지만, 약간 물렁뼈는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물렁뼈 하나쯤은 가지고들 계시라.

트집 : 이책은 편집에 약간 문제가 있다. 33쪽에 "1985년 훌리건의 난동으로 39명이 숨진 헤이젤 참사(32쪽 사진)"라고 했는데, 32쪽에는 아무런 사진도 없다. 그 사진은 뒷장 34쪽 상단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있다. 131쪽 "34살 동갑내기 오모트(124쪽 사진)"를 보려면 124쪽으로 가면 안 된다. 거기엔 워메인지, 에토오인지 아님 드로그바인지 모를 축구선수 사진이 있을 뿐이다. 가려면 132쪽으로 가야할듯 싶다. 거기에는 노장 스키선수로 보이는 사진이 있다. 이런 실수는 좀 이해하기 어렵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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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2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윤동욱 기자가 이런 책도 냈군요. 이 기자분 한겨레21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기사 전담했던(?) 분이랍니다. 얼마전 책도 냈는데, 그 책이 이 책보다 먼저 나온거 같네...

멜기세덱 2007-09-27 16:01   좋아요 0 | URL
오늘 하루종일 답답해서 혼났어요. 우리학교는 이상하게 종종 알라딘이 안 될때가 있어가지구....ㅋㅋ
아 그랬었군요.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 했는데, 얼마전에 칼럼집을 낸 것이 있더군요. 그것도 함 읽어봐야겠군...추석 잘 보내셨죠?

비로그인 2007-09-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나도 거의 다 읽었는데 흑흑... 멜기님 리뷰에 밀려서 난 리뷰도 못 올리겄네 ㅠㅠ...
넘 잘쓰셨다... 추천!

멜기세덱 2007-09-27 16:02   좋아요 0 | URL
헉!
전 체셔님이 리뷰 쓰실까봐 걱정이에요. 어째, 뭐만 쓰면 그렇게 인기가 폭발이신지....저 막 후달려요....ㅋㅋㅋ

2007-09-27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27 16:03   좋아요 0 | URL
아 그게 그거군요. 좋은 정보 감사...
저는 추석을 그럭저럭 외롭게 잘 보냈어요....ㅎㅎㅎ

심술 2007-09-27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따금 알라딘에 안 들어가져요. 동병상련하는 분이 있으니 왠지 덜 외롭네요.

멜기세덱 2007-09-27 21:40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 곳은 대학교인데요, 여기 전체 망에 문제가 있는거 같아요. 제 컴퓨터가 안 들어가지면, 다른 컴퓨터도 안 들어가지더라구요....이상하게시리..
집 컴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말이에요....
도대체가 답답해서리....

잃어버린우산 2007-09-2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주문한 책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멜기세덱 2007-09-27 21:40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으시길 바라요....ㅎㅎ

프레이야 2007-09-2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그인 안 하고 들어왔는데 추천하려고 로그인 했네요.^^

멜기세덱 2007-09-27 21:41   좋아요 0 | URL
담부턴 로그인 하고 들어오세요. 추천 안하려다가도 추천하시게....ㅋㅋ

시비돌이 2007-09-28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츠가 나쁜 양부모라는 얘기군요. ㅋㅋ

멜기세덱 2007-09-28 09:41   좋아요 0 | URL
나쁜 양부모라기보다는,
친부몬데, 알고보니 이 부모가 입양아였다거나 혼혈이었다 정도요...ㅋㅋ
그렇다고 부모를 버릴 순 없다...뭐 이런거죠....ㅋㅋ

시비돌이 2007-09-28 09:43   좋아요 0 | URL
아, 그런거구나, 꼼꼼히 읽지 않고 단 댓글이라 금새 표시하네요. 어쨌든 나쁜 양부모도 버리긴 힘들잖아요. ㅋㅋ

twinpix 2007-09-3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잘 쓰셨네요. 서평단 도서로 받아서 리뷰 써야 하는데, 이 리뷰보니 감탄만 나옵니다. 'ㅁ'

멜기세덱 2007-09-30 22:51   좋아요 0 | URL
잘 쓰긴요 무슨...좋게 봐주셔서 그렇죠...ㅎㅎ
근데, 감탄만 나오시는게 좋아요. 토까지 나오면 지지잖아요...ㅎㅎ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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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화제의 책 『만들어진 신』을 읽는 내내 당황스럽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때문이었을까?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리뷰쓰기를 주저했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리되지 못한 채 혼란스럽다. 리처드 도킨스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그래, 신은 없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 못난 자존심 같은 것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의도가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가 뜻한 바를 전부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내 안의 충격은 나를 도킨스의 손을 잡기 가까운 쪽으로 밀어버렸다.

도킨스의 논리는 너무나 명쾌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나같은 범인으로서는 그를 반박하고 싶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굳이 반박하려 애쓴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라고 매도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악마의 사도가 내민 선악과를 이미 한입 깨어물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하는 7개의 스펙트럼 속에서 나는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나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 책을 한 번 더 읽는다면 그 아래로 더 내려가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었나?"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 시작은 내 의지와만 상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태신앙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나이때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던 듯 하다. 그 어린 기억속에는 교회가기 싫어 이른 아침부터 떼를 쓰다가 매를 맞은 가슴아픈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교회를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면서 나는 당연스레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어떤 영적체험의 기회를 갖게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영적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고, 지금은 아예 교회를 나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애써 '날라리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열성적으로 교회를 나갔다. 고등학생 때쯤인데, 그때는 온갖 교회의 일들을 맡아서 참으로 열심히 했다. 학교와 집과 교회 밖에 모를 정도였다. 성가대도 하고, 학생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주일학교에서 보조교사로 봉사하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기도회도 열심으로 나갔다. 여러 부흥집회에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나섰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런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배때는 교인들 앞에 나가 찬양인도까지 '정열적'으로 도맡았다. 그러나 거기에 흔히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는 찾지 못했다. 의구심이 들었고 회의감이 나를 휘감았다. "내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회의를 하게 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때 그 회의 속에 성령이 찾아와 위로하고 뜨거운 영적 체험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의 그 지독한 회의감은 열심으로 나가던 교회를 끊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정확히는 예수를 사랑한다.

왜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일까? 지독한 회의심은 교회와 예수를 분리하게 만들었고, 단지 교회를 나가기 위해 열심이었던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 열심 가운데 예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찾으려 했고 교회를 끊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간절히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에 대해 전부터 회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경의 첫 구절부터 나는 믿지 못했다.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성경의 그 어느 기사와 이적도 믿지 못한다. 반대로 이 사실을 초장부터 인정하고 가면 성경의 어느 구절도 믿지 못할 바가 전혀 없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천지창조보다는 미약해 보이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교회를 다니는 내내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신화적으로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천지창조라니? 어느 신화가, 전설이, 그 어떤 환타지 소설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가정으로 시작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것이 내 회의감의 원인이 되지는 못했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 나는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는 여전히 부확실하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나는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정말이지 그것은 그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말이다. 난 그의 말들을 사랑했고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행위를 사랑했다. 그런 예수가 있다면, 그것이 상상속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믿고 싶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후엔 그 말에 더욱 동의하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또한 그런 망상,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을 상상한다는 것을 나는 그리 무력하게 보지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가 신을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망상이 일으킨 백해무익의 결과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예수라는 망상, 아니 상상은 어떤가? 그것 마저도 유해할까? 나에게 그것은 결코 유해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어디까지는 전통적 예수관과는 다를 것이긴 하다.

얼마전 김용옥으로 한국기독교계가 떠들석 했다. '구약폐기론'은 운운했느니 안 했느니하면서 분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김용옥을 불편해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마저도 그런 불편한 감정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가 앞으로도 리처드 도킨스를 따라 읽는다면 언제고 리처드 도킨스에게 설복되고 말 것만 같다. 그의 논리는 철저하고 명확하다. 너무 쉽지 않은가? 그의 논증은 너무나 당연한 설법이고 빈틈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독교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으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망상의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난 단지 '사랑의 예수'만을 상상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진정한 예수'를 찾아내는 날이 온다면 행복하겠다.

이 책 『만들어진 신』을 우리는 기독교 비판서로 읽어도 좋을 듯 싶다. 그가 일반적인 신을 공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논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를 대상으로 한다. 나는 충분히 기독교 비판서로서 이 책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많은 기독교인이 보아도 좋지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었다. 그리고 『죽은 신을 위하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끝끝내 기독교를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련의 책들을 통해 보다 의미있는 예수를 상상할 수 있을 것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아직까지 날라리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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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까지 겨우... 날긋날긋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정도지요.

일련의 서적들을 읽으면, 저도 기독교를 아주 떠나지 싶어요.
교회에 의미를 둔다는 건, 거의 접은 상태랍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멜기세덱 2007-09-16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교회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교회에 의미를 두고 있고요.ㅎㅎ
아무튼 이게 홀가분하게 시원스레 떠나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더 편하겠어요.ㅎㅎ

프레이야 2007-09-16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라리 기독교인(멜기님보다 더더 심한) 여기 하나 추가요.
무신을 증거하는 일은 신을 증거하는 일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아직 이 책, 사두고 안 읽고 있지만..
신의 존재에 회의감과 의심이 들어 더욱 더 기도로 간구한 마더 테레사처럼
님이 말씀하시는 '상상의 예수'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6 17:3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유신과 무신의 논쟁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제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믿는 예수가 그 대목에 심각하게 걸린다는 게 문제지요.ㅎㅎ

순오기 2007-09-1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를 믿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정의한다면, 현재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교회 출석 방학 4년째..)전 당당하게 종교란에 기독교인이라 적습니다. 내 마음에 그분이 자리하고 있기에...교회를 다니는 일이 예수를 위한 일인지 목사를 위한 일인지 많은 회의가 들어 현재는 방학중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더 많은 비판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데 동감입니다.
기독교인들끼리만 용납하고 이해되는 종교라면 별 의미가 없다 생각...생활속에서 이웃의 비기독교인에게 감동줄 수 있어야 그들이 감화될테니까요.

멜기세덱 2007-09-16 17:38   좋아요 0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예수의 향기'를 찾아야 그 존재의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과 신앙 2007-09-1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공감하는 바도 많고, 님과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그 어떤 설득력 있는 말을 해 줄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저의 비참함이 다시 떠오릅니다. 교회의 후배가 제게 진화론이 맞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면서, 예수님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고 내게 강하게 말했을 때, 저는 아무런 답변도 못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저는 이 방면에 책을 읽게 되었고, 지금은 최소한 제 자신에게 만큼은 기독교 신앙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답니다. 또한 자주 다른 사람에게 제 확신에 대해서 말해 주기도 한답니다. 책 선택을 신중하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될 수 있으면, "예수는 역사다" "창조 설계의 비밀" 등의 책이 참 좋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는 책들로는 "기독교 지성으로 이해하라" "김용옥의 하나님 VS 성경의 하나님"(도서출판 누가) 이 책들입니다. 이냥 책 읽기를 즐겨하는 분 같아 보이시니, 제가 추천해 주는 책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라 여기서도 주제 넘게 긴댓글을 달았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님께서 기독교 신앙에 확신있는 삶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6 17:47   좋아요 0 | URL
고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전에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읽어 왔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도 그 중 일부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신실한 신자'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여러번 읽었구요. 어쩌면 이전까지의 독서가 다소 기독교쪽으로 치우는 면이 커보입니다. 지금은 그 치우침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소개해 주신 책은 감사히 제 다음 독서목록에 포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기독교에 대한 이성적 확신(혹은 감성적 확신까지도)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확신을 추구하는 것은 다분히 위험할 수도 있기때문이죠. 지극한 회의로 나아가는 것도,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로 나아가는 또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7-09-16 21:50   좋아요 0 | URL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은 저도 갈급한 부분입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군요 :)

누에 2007-09-1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전 추천만 누르고 갈래요. ^^

지성과 신앙 2007-09-17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과 체셔고양이님께
제 댓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삶되세요.

(주)사랑 2007-09-1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고민이 제가 했던 고민과 비슷하리라 생각되기에 몇 자 적어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회의를 합니다. 특히, 한 때 교회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의 경우, 회의감이 찾아오면 정말 미칠 노릇이죠.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저 역시 신을 부정하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2-3년 정도 방황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 교회는 매주 나갔지만, 이미 저의 영혼은 방황 중이었던 것이지요.
그 방황 속에서 저는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정신만큼은 본받겠습니다."라고요..
적어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나 정신은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간디나 체게바라,마틴루터킹 목사, 등등..많은 위인들의 정신을 높이 사고 그분들을 추종하는 것처럼 - 그 정도 수준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의 고백이었죠.

하지만, 고민의 고민 속에서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의 실존이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실존만큼은 아직도 과학이 풀지 못하는 영역이지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영적 존재인 신이 있다는 까닭이기에
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영적인 부분입니다.
영의 세계에는 영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요..
신(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담이지만(아주 위험한 발언이지만..)
'하나님', 즉, 이 세상의 주관자에 대해
어떤 사람은 '도'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주의 기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성리학의 용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영적인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표현이 등가의 가치를 지니느냐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학문적 시각으로 봤을 때엔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미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오셨기에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영적 실존을 알고 나서는 영적 세계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 고민은
신(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라기 보다
그분의 법칙,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회의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부분 때문에 기독교가 비기독교인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기도 하고요..

모든 종교는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그러기에 인간은 교만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야 할 뿐입니다.

또한 내자 부족한 자이기에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처럼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교만합니다.
마치 영적 진리를 다 소유한 양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이 오신다면 똑같이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갈구하고, 더 많이 찾읍시다.
그리고 찾았다면, 그에 맞게 삶을 삽시다. 세상을 사랑하며...

참고. 도킨스의 책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결론은 하나입니다.
영적 영역의 실체는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분은 '스스로 말미암아 계실' 수밖에 없다는 것!

멜기세덱 2007-09-20 01:03   좋아요 0 | URL
고견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저의 '회의'을 당분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ㅎㅎ

Dreamer 2007-10-0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서평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님이 신앙의 체험과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든 말이죠^^) 출 33:11, 창세기 18:22-32, 요나서 등도 한번 읽어보시길..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죠. 책에 대해 궁금해서 서평을 읽었거든요. 꼭 사서 읽어볼게요.

심술보 2007-10-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말고 성직자 말고 예수 그 분의 말과 행동을 믿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종교일지 신념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당신들의 예수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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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 전체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좋게 말해 비판이지, 일부에선 '개독교'니 '먹사'니 하면서 기독교 혐오의 감정을 적대적으로 내비치며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이런 비판 또한 비난에 대해 한국의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엎친 데 덮친 격"적 인식이다. 그러니까 속되게 말하면,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안 되려다 보니 별의별 기독교 관련 사고들이 터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의석 군 사건이나, 사학법 개정, 대형교회 비리와 부정, 이랜드 사태와 최근의 아프간 피랍자 사건 등 교인들도 줄어드는 마당에 안 좋은 일들만 계속 터지고 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상황의 해법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가 되겠다.

또 하나로는 "올 것이 왔다."라는 인식이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기독교 내에서 그간의 상황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일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법으로는 "이제야 말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근원적 해결을 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라는 절실한 태도로 현 상황을 당면하는 것이 되겠다.

짐작하겠지만, 전자의 태도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왕 속담을 쓴 김에, 이 태도또한 속담에 빗대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가 되겠다. 지금 보니, 말을 잘못 한 것같다. 빗댄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되버렸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면,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간 열심히 "구렁이 담"을 수십차례 넘겨 주었으니, 이제는 '가래로' 아니 대형 포크레인을 돈 주고 불러야할 상황이 아닌가?

얼추 조짐을 보니 이번에도 구렁이, 아니 이젠 100년 묵은 능구렁이가 되서 빌딩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같다. 이제는 이무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부라퀴가 맞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성찰해서 기독교가 그야말로 진정한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역시 나는 서론이 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건 그렇다고 치부하더라도, 한국 기독교는 이런 비판에 대해 서론만 길게 나불되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에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이 기독교 관련 비판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나 또한 이런 경향에 관심을 가지고 속속 출간되는 이런 비판 서적들을 구해 읽고 있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다. 이 책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후로 준비해 둔 것은 슬라보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미셸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 데이비슨 뢰어의 『아메리카, 파시즘, 하느님』등이다.

이와 함께 한국 기독교 비판에 중점을 둔 책으로 얼마전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를 읽었다. 이 책도 추후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간략히 언급하면,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에 대해 추적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아울러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소유한 풀러신학대 총장 리처드 마우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도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전직 목사였던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다. 저자 류상태는 대광고 강의석 군 사건 당시 대광고 교목실장으로 재직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소속 목사였다. 그런 그가 강의석 군 사건을 계기로 목사직을 반납하고 기독교 비판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두 번째 결과물이 이 책 『당신들의 예수』다.

저자 류상태는 목사직을 반납하고 나와서 먼저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를 출간했다. 목사직을 그만두고 행상을 하면서 펴낸 것이다. 이 책을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목사직을 그만둔 이후 '기독교 의식 개혁운동'에 나선 것을 볼 때 아직은 기독교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번의 책 『당신들의 예수』는 더이상 자성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다. 분노는 한층 높아졌고, 이제 그는 기독교를 혐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만드는 책이다.

"깨달음을 교리라는 그릇에 담아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기독교는 스스로 생동성을 죽이고 자신의 종교를 박제화하고 말았다.", "존중해야 할 전통 문화와 다른 신념 체계는 가차 없이 파괴하는 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공격적인 전도 행태와 안하무인식 문화 파괴 행태로 우리 사회와 이웃 종교인들께 큰 결례를 저질러왔습니다." 등의 그의 언급과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여, 성경을 찢어라", "예수님, 그만 은퇴하십시오-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주십시오"라는 언설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운영한다는 '불거토피아'에 들어가보면 그가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안티기독교를 표방하는 넷티즌들과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현직 목사였던 사람이 한 명의 제자로 인해 목사직을 버린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무엇이 그를 지금의 이르게 했던 것일까는 더욱 알기 어렵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분노의 글'을 쓰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과연 기독교를 혐오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보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책의 제목과 같이 "당신들의 예수"에 대한 혐오이다. 그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왜곡하고 제멋대로의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예수, 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수는 어떠한가? "영혼이 존재한다면, 다음 세계와의 연결 문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과 윤회사상을 참고하라고 말하고 싶다. 연기설과 윤회사상이 설명하는 전생과 내세의 가능성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론이나 부활론보다 훨씬 정교하고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언급을 들으면 과연 이 사람이 전직 목사였던 사람이 맞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맥락은 기독교의 배타적 폭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한 배타성을 버리고 다원화를 인정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각기 다르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견해는 아무리 나같은 날라리 기독교인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적인 것이다. 그의 한국 기독교 비판은 구구절절이 옳은 것이지만, 그의 파격적 다원화 주장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독교가 지금의 배타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차원이지 그들과의 통합을 말하기에는 기독교 자체의 본질이 그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점에서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시민 교양이 그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높다.

저자 류상태가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류상태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그는 아직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비판은 그러한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가슴을 쥐어뜯는 외침인 것이다. 2000년 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듯이 2000년 후 류상태의 외로운 외침을 그에 견주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다시금 사울로 개종한 것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저자 류상태의 이 외침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그의 조언을 오늘날 한국 기독교 신자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교우님이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거든,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 또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고백과 충돌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기독교 교리에는 부합되지만 이 두 고백과 충돌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는 교회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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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지식 교육론 국어교육연구소 연구총서 6
김광해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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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7차교육과정이 막바지에 이르러 '새로운 교육과정'이 공시되었다. 이르면 2009년도부터 8차교육과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百年之大計"라는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자주 바뀌는 교육과정은 우리나라의 주먹구구식 교육정책이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잘못된 것은 빨리 바꾸는 것이 나은 점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바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바뀌느냐에 있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입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는 7차교육과정이 적용되고는 있으나 '새로운 교육과정'이 마련되면서 8차교육과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형성되었다. 여기서의 관심 주제는 국어교육 내에서의 국어지식교육의 현황이다. 국어교육이 실용적 기능교육을 중시하면서 국어지식교육의 비중은 점차 축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7차교육과정상에서 국어지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문법>은 선택과목으로, 이를 택하는 학교가 거의 없을 정도이니, 국어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중~고1까지의 국어시간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자꾸 밀려나고 있는 판국이다. 국어교육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것을 대세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논의가 되고는 있지만 앞으로도 국어지식교육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국어지식교육의 효용과 필요성, 그리고 그것의 효육적인 교육목표 달성의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김광해 교수는 6차교육과정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국어지식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어지식교육의 새로운 방법적 측면을 6차교육과정에 반영하였다. 김광해 교수의 견해가 100%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에 힘입어, 그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주입식 교수학습방법에 대한 개선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 책 『국어지식 교육론』은 6차교육과정에서 일부 반영되었던 국어지식의 교수학급방법 개선에 대한 김광해 교수의 연구성과를 엮은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국어교육에서의 국어지식의 위상과 필요성, 나아가 바람직한 교수학습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국어지식교육이 국어교육에 있어 상호보완적 필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의 주입식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스스로가 창의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탐구학습을 도입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간의 국어교육 흐름이 실요성 위주의 기능교육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과 아울러 국어지식교육이 소외되고 있는 것을 우려하면서 그는 국어지식교육이 가지는 "교육적 가치와 필요성"을 찾고자 한다. 그가 제시하는 국어지식교육의 필요성은 '우리말 알기'와 '우리말 가꾸기'로 정리된다. 이것은 "문학영역이나 기능영역에서도 다루기 어려운 내용"으로써 국어지식교육에서만이 다룰 수 있는 부분이며, 따라서 국어지식은 그 자체로서 필요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현재 국어지식이 더이상의 외면을 받는 길은 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제1부 "국어지식 교육의 전개"에서 이러한 작업을 전개한다. 국어교육과 국어지식교육이 어떤한 관계에서 정립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 국어지식교육이 가져야할 정체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국어지식교육이 국어교육에 있어 어떤 필요성을 지니는가를 그간의 국어지식교육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면서 밝히고 있다. 국어지식교육의 정체성과 필요성을 정립한 후에는 그는 국어지식교육 방법의 방향전환을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단순암기식 주입방법에서 탐구학습에로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탐구학습은 국어지식교육에 있어 보다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현재 7차 교육과정상에서 이러한 탐구학습은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실정이며 앞으로 바뀔 교육과정에서도 자기주도적이며 능동적이고 창이적인 방법으로 '탐구학습'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기초를 저자 김광해는 이 책을 통해 다져 왔던 것이다.

제1부에서 탐구학습에 대한 기본적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면, 제2부에서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제2부 "탐구 학습의 실제"는 국어지식의 다양한 장면에서의 탐구학습 적용 사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례들이 단지 학부생들의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은 보고서라 하더라도 그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고, 탐구학습이 실제의 교육현장에서 적용될 것인 만큼, 학부생들의 보고서는 그 실제적 상황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탐구학습사례들이 그야말로 재판삼판의 일률적인 학습방법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김광해 교수의 '탐구학습'에 대한 실제 사례 연구가 부족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1997년에 출간되어 현 시점에서는 여실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김광해 교수의 탐구학습에 대한 연구성과는 비교적 신선한 시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부족함은 당시로서는 그 신선함에 상실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국어지식탐구』라는 책을 통해 보다 자료를 보완하고 실제 적용될 사례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실상 탐구학습은 현장에서의 교사가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연구한 후에라야 제대로 시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해 교수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매우 부족함을 절감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례들과 이에 따른 효과적인 자료들이 개발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지금에서는 그 효용이 다 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사족이지만, 저자 김광해 선생께 한마디 충언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책의 초판이 1997년에 <국어교육연구소연구총서6>로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이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근으로 보여지는 초판 제6쇄본이 2006년 9월 20일에 출간되었다. 그 기간동안 교육과정은 제6차에서 제7차로 바뀌었고, 지금은 '새로운 교육과정'이 마련되어 곧 제8차 교육과정이 시작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 버젓이 이 책의 초판 그대로를 제6쇄로 찍어냈다는 것은 다소간 저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교육과정이 바뀐 이상 미세한 부분에서나마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앞으로 이 책의 개정판이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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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03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자! 화이팅.

멜기세덱 2007-09-03 20:32   좋아요 0 | URL
'힘내자'로 순화(<아무 데나 'fighting'? 나랑 싸우자는 겐가?>(http://blog.aladdin.co.kr/criticahn/1122998) 참조) ㅋㅋㅋ
근데 왠 파이팅?

마늘빵 2007-09-03 22:2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그 생각 했습니다만, 영어를 번역한걸로 보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어는 감염되는 것이라고 봤을 때, 이미 콩글리쉬화 해서 우리말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멜기세덱 2007-09-03 23:13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같은 '하하하'인데 왜 이리도 분위기가 다를까요.ㅋㅋ
감염되는 건 좋은데, 그게 오염이라면 문제가 있지 싶어요.ㅎㅎ 파이팅은 여전히 전투적이니까 말이에요...ㅋㅋ

302moon 2007-09-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어떻게 바뀌느냐가 중요한데, 과연 결과는 어떨지. 국어가 밀리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합니다. 저는 문법 과목 정말 좋아했는데, 주위 동생들을 보면 많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자신이 쓴 책은 수시로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안 그런 분들 종종 보이더라고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멜기세덱 2007-09-03 23:5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문법도 알고보면 참 재밌는게 많은데요.ㅎㅎ 사실 김광해 교수는 여러모로 바쁘실 거에요. 강의도 열심히 하시고, 연구도 많이 하시고....다만 개정판이 좀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에서 내뱉은 말이구요, 김광해 교수가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좀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랍니다.ㅎㅎㅎ

길손 2007-10-0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해 교수님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본인이 개정판을 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새로 개정된 교육과정은 "8차 교육과정"이란 말 대신 "2007년 개정 교육과정" 또는 그냥 "새 교육과정"이라고 하기로 한 것으로 압니다.

멜기세덱 2007-10-07 22:40   좋아요 0 | URL
이런, 김광해 교수님이 돌아가셨군요. 문법교육에 있어 그 공로가 적지 않으신데....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예,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교육과정"이라고 한다지요.

들곶 2008-05-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격입니다. 돌아가셨다니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