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전차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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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 여름, 학교 구내서점엘 놀러 갔다가『목련전차』란 시집을 보고 집어 들었다. ‘목련’과 ‘전차(電車)’의 생소한 합성에서 오는 낯섦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전차(電車)’란 낱말은 지하에 숨어버려 꼬부랑 어르신네들께서나 부르실 뿐이지, 요즘 사람들에게 ‘전차’라 하면 우선 전차(戰車)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내가 먼저 떠올린 것이 이 전차(戰車)다. ‘이상도 하지!’ ‘목련’과 ‘전차’의 결합은 다분히 시적이면서도 뭔가 어울릴 법하지 못하다. 이 시집을 집어 들고 나와서는 꽤 오래 묵혀 두었다가 며칠 전에야 펼쳤다. 오래 묵혀둔 탓일까, 울림은 사뭇 커다랗다.


2.

  『장자』의 <응제왕>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해의 제왕은 숙(儵)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忽)이며, 중앙의 제왕은 혼돈(混沌)이었다. 숙과 홀이 마침 혼돈의 나라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혼돈은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후의에 보답하고자 상의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7개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만이 없다. 우리가 뚫어줄까 봐.”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어주었는데 일곱째 날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강조 필자, 우리말 번역은 이인호,『장자 30구』, 89쪽에서 가져 옴.)



  이 우언(우화)은 “인간의 이지(理智)가 깨이게 되면 오히려 이지의 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인호, 위의 책)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은 모두 7개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있다는 구절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여기서의 ‘구멍’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며 통로로써 인식된다. 우리 옛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할 때의 ‘구멍’도 속되긴 하지만 이런 ‘생명의 통로’란 인식과 다르지 않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란 속담에서의 ‘구멍’은 넓은 의미에 ‘생명’ 유지의 통로이겠다. 이렇듯 우리의 언습(言習)에서 ‘구멍’은 질긴 삶과 인생의 의미를 서민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마다

처마 처마마다

얼금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 있구나    -「화엄 일박」부분.(강조 필자)


  홍용희는 <해설>에서 손택수의 시세계를 두고 ‘화엄의 견성’이란 말을 썼다. 견성(見性)이란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앎”을 말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곧 견성의 경지에 이르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成佛). 홍용희의 말처럼 “화엄 사상의 종지를 깨닫고 있는 것”이면서 “삼라만상의 우주적 존재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화엄의 노래로 귀착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구멍’이 “환하게 뚫려 있”음을 통해서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호흡할 수 있는, 즉 ‘살아 있음’, 생명의 존속이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손택수에게 있어 ‘구멍’의 중요성이랄 수 있다. 손택수는 그 ‘구멍’ 있음으로 호흡하고 박동(搏動)하는 삶의 제(諸)모습들에 천착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근원, 생명 유지의 가장 원초적 역할을 하는 ‘구멍’은 그의 시적 방향을 제시하면서, 이 시집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放心」부분.


  ‘숨구멍’이 “확 열어젖”혀진 시적 화자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그에게 삶의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손택수에게 ‘구멍’의 열림은 생의 열림과 동일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용은 ‘방심(放心)’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마음을 굳게 닫혀 있음은 ‘구멍’의 막혀있음에 다름 아니다. ‘구멍’이 막혀있다는 것은 호흡 불능, 소통 불능으로 이어질 터이다. 따라서 ‘방심’은 곧 마음의 ‘구멍’을 뚫는, 생명유지의 필수적 과정인 것이다.

  「혼쥐 이야기」에서는 ‘할머니’의 “사람의 콧구멍 속에” 사는 ‘쥐 두 마리’ 이야기가 나온다. 시인은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시속에 끌어 오면서 ‘구멍’의 이런 생명 유지의 수단의 기능이 옛이야기처럼 오랜 우리 삶의 지혜와 사상임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들숨 날숨 따라 들”고 나가는 쥐처럼 삶의 ‘구멍’은 어떤 조력자들이 있어야 뚫려질 수 있다.


3.

  앞에서 살펴 본 「放心」에서 ‘구멍’을 뚫리게 한 도우미는 ‘제비’다. 이 ‘제비’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시인은 ‘제비’에게 집을 빌려준다.(「제비에게 세를 주다」) ‘제비’는 어쩌면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외로운 사람에게 유일한 소통의 존재일 수 있다. 세상의 고된 삶 속에서 ‘방심’은 불가능하고, 답답하고 꽉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제비’와 소통할 때 ‘구멍’은 ‘뻥’ 뚫리고 삶의 호흡은 유지되는 것이랄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의 지속과 생명의 유지는 자연과의 호흡/소통/교류를 통해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의 시편들에서 이런 자연의 여러 모습들과 “구체적인 살림살이의 성정과 표정”(홍용희)들이 뒤섞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강이 날아오른다」전문.


  ‘강’과 ‘물새’와 ‘아낙’은 모두 乙의 모습으로 하나가 된다. 동일시되는 것이다. ‘들을 품는’ ‘강’의 아픔이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매”는 아낙의 아픔은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것을 ‘들어올’리는 ‘물새떼’는 세상의 아픔을 저 높은 하늘로 ‘들어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 속에서처럼 자연과의 교감은 ‘아낙’의 궂은 삶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숨구멍’을 트이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구멍)이겠다. “나는 잠시 청둥오리 몸속에 있다 청둥오리 몸속 가장 깊은 곳에 닿았다 떨어진다”(「청둥오리떼 파다닥 멀어지기 직전」)는 이런 ‘구멍’ 뚫림은 한 방법인 것이다.


4.

  우리 인간들은 왜 이런 자연만물과 교감해야 할까? 세상적인 것에서 우리의 ‘숨구멍’을 뚫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7개의 구멍이 뚫려 세상에 나와 살아가면서, 천천히(어쩌면 무척 빠르게) 막혀간다. 우리가 태어난 날은 곧 죽음의 시작일 것이다. 세상은 그 구멍들을 서서히 막아가는 것이다. 죽음의 막힘을 세상의 여러 질곡(桎梏)을 통해 얻는 인간은 세상에서는 이런 ‘구멍’ 뚫림의 생명적 경험을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제비에게 세를 주다」)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가난과 외로움의 막힘만이 있을 뿐이다.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판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추석달」전문.


  세상에서는 ‘신세 한탄’을 할밖에 “어디로도 귀향”할 우리의 안식처는 없는 것이다.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투사물로써 시인의 ‘구두’를 제시하기도 한다. “한쪽에 초라하게 낡은 한 켤레/…/상할 대로 상해 알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뒷굽은 닳을 대로 닳았고 반짝이던 코는 무참히 깨어져 있었습니다”(「매제의 구두」) 이런 ‘구두’의 모습은 곧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구두’는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살가죽구두」)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진정한 생명의 ‘구멍’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시인에게 ‘좋은 세상’, 곧 진정한 생명의 ‘구멍’이 존재하는 세상은 “젊으나 젊은것들이 불알 두 쪽만 갖고도 연애를 걸 수 있는 세상”(「자전거의 연애학」)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삶은 세상에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혼자서 살”수밖에 도리가 없다.


5.

  손택수의 시편들은 다분히 서정적이다. 생명의 근원인 ‘구멍’을 온 세상에 뚫고 다니는 그에게 가족과 세상 사람들과 산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막힌 구멍을 바라볼 때에 서글픔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시편들에 짙게 깔린 애잔함은 그의 시를 깊은 서정으로 침전하게 하는 것이다.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단풍나무 빤스」전문.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건 분명 세상의 가난 탓이리라. 이 시를 읽어내면서는 웃음짓게 하지만, 그 웃음은 다분히 씁쓸하다.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그런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오는 애잔한 슬픔이고 미안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정은 짙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감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유머가 있어서이다. 쓰라림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유머로 풀어나가는 손택수의 재치에서 우리는 짙은 서정과 함께 언뜻 지나치는 웃음을 통해서 하나의 희망의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시인의 뛰어난 시적 감수성과 재치, 그리고 친근한 옛이야기와 솔직한 고백, 다양한 소재로부터의 깨달음 등이 뒤섞이면서 그의 시편들을 아름답게 꽃피우게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내, 매제, ‘홀아비로 사는 내 늙은 선생님’ 등의 친근한 가족과 이웃에서부터, 하늘과 바다와 산과 강과 멀고 먼 우주에까지, 그리고 자연 속에 거하는 ‘물새떼’, ‘제비’, ‘청둥오리떼’, ‘메주’, ‘홍어’, ‘명태’ 등 많은 생명들이 담겨져 이 한 권의 시집으로 탄생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손주의 고추를 잡고 가로수 밑에서 오줌을 뉜다 마음처럼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지 쉬―, 쉬―, 하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


화장실에 갔다가 오줌이 나오질 않아 머쓱해질 때가 있다 시가 반짝 떠올라 책상 앞에 앉았는데 한 구절도 씌어지지 않아 애를 태울 때가 많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


무슨 주술처럼 시―, 시―,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노루오줌꽃이 터져나오듯 망울망울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주며 따로 노는 몸과 마음을 한데 이어주는 소리  -「오줌 뉘는 소리」전문.(강조 필자)


  그의 시는 이렇듯 세상 모든 것들,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한데 이어주는’ 대소통의 ‘구멍’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분명 이 시집의 시편들은 내 마음에 커다란 울림 ‘구멍’을 뚫어 놓고 말았다.


6.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목련 전차」부분.


  꽃놀이 철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끝물을 맞고 있다. 아! 이 봄엔 꽃놀이 한번 못가 보는구나! 전차는 전차(電車)임이 분명해졌다. 전차(電車)는 ‘레일’을 잃어버려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 막혀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레일’이 있어 그 길 따라 ‘목련 전차’, ‘꽃전차’ 타고 꽃놀이 가고 싶어진다. 가슴 깊은 ‘구멍’으로 꽃내음 깊게 들이마시면서 우리 생명 깊게 호흡하면서.

  손택수 시인은 1998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등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단다. 그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을 최근 냉큼 구입했다. 이 시집을 읽고 난 후의 울림이 작용한 것이다. 내쳐 읊어볼 작정이다.

  알고 보니, 『목련 전차』를 내기 몇 달 전,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아이세움, 2006.)를 냈다. 유난히 바다 시편들이 많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닷가에서 오래 산 시인은 어떻게 바다와 ‘구멍’을 뚫어 호흡하는지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의 머리말을 보면 훔쳐볼 수 있다.


한번은 거제도 앞바다까지 배를 타고 나가 낚시도 잊은 채 오르내리는 파도의 리듬에 몸을 맡긴 뒤 실컷 잠만 자고 온 적도 있다. 그때 내가 만난 파도의 리듬은 어머니 배에 배를 맞대고 젖을 빠는 아이처럼 근원적인 휴식감과 세계에 대한 밀착감을 선물해 주었던 것 같다.


  손택수라는 멋진 시인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요즘 같은 답답한 세상에서 손택수의 시편들은 우리를 숨 쉬게 하기에 충분할 것만 같다. 사람은 7개의 구멍이 뻥 뚫려 있어야 살 수가 있다. 우리 온몸의 생명 ‘구멍’들, 마음 ‘구멍’들을 ‘환하게 뚫’어야 이 험한 세상, 답답한 세상, 살맛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손택수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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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1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하시는 분답게 시를 어쩜 이리 세밀하게 맛보시고 안내해주시는지요.
 
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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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아는가? 잘 알다시피 그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건내준 이 불로 인해 인간은 밝은 세상, 곧 文明의 세계를 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코카서스 산중에서'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얻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윤동주, 「간」부분)

고종석.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아직도 저 '코카서스 산중에서' 간을 쪼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21세기의 서막에서 불이 아닌 '코드'를 훔치고 있다. 인류가 불로써 개안(開眼)을 얻었다면 새로이 맞이하는 세 번째 천년에는 새롭게 변화할 세상과의 접속이 필요한 것일까? '코드'가 맞아야 '접속'이 가능할 터이다. 이 '불확실한' 21세기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접속'하여 생존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코드'가 필요하다. 이 코드를 고종석이 훔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응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기억하는가? 온갖 악과 질병과 고통이 온 세상에 퍼져나갔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대가라나. 이 상자가 닫혔을 때 그 안에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고종석이 '코드'를 훔친 대가는 무엇일까? 그의 '우둔과 경박'에 대한 비난과 질타일까? 인류에게 주어질 또다른 판도라의 상자일까? 그 둘 모두일수도 있겠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미리(먼저) 생각하는(아는) 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선지자(a prophet)'라고 옮길 수 있을 터이다. 선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예언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모색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모색이 일반적 전망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의지나 욕망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망은 일종의 예언이다."(8쪽)

고종석은 여기서 21세기를 모색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그는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가 훔쳐내고 있는 '코드'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이며, 따라서 그는 프로메테우스이길 자처한 것이다. 곧 우리 에피메테우스들을 일깨우는 선지자요, 예언자가 된 것이다. "너무 구체적인 예언은 엇비슷하게 맞추었더라도 꼬두리를 잡히기 쉽다. 추상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함으로써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 슬기롭다."며 넋두리를 부리긴 하지만 말이다.

'예언'하면 아무래도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이 난다.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지금도 자신들을 예언자라고 떠벌이지만, 아직까지 노스트라다무스란 이름을 따라 올 자는 없어 보인다. 고종석 자신의 훔쳐낸 그 '코드'의 비밀들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유효하게 된다면, 그를 이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고'스트라다무스 라고. 그럼 '고'스트라다무스 고종석이 펼치는 21세기의 예언들을 맛보는 것이 좋겠다.

고종석이 21세기의 '코드'를 훔쳐내려는 발상은 아무래도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앞서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먼저 21세기를 예언했다. 『21세기 사전』(1998)이 그것인데, 지금은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다. 구해 보고 싶어도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크 아탈리의 예언이 어떤 것인지는 고종석이 언급하는 정도밖에는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썩 신통치는 않은 모양이다. 신통한 것이었다면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아탈리의 21세기 예언을 살짝 보면 "갈기갈기 터지고, 희희낙락하고, 야만적이고, 행복하고, 무분별하고, 기괴하고, 살아내기 어렵고, 해방적이고, 소름끼치고, 종교적이고, 세속적이고 … 그것이 21세기일 것이다."라는 식이다. 고종석은 얼핏 그 말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21세기도 틀림없이 모순의 시대일 것이다." '모순의 시대'라!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즉, 갈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인데, 애초에 21세기를 예언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이 책 『코드 훔치기』는 '책 앞에'를 써놓고는 더는 자판을 두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순의 시대'란 역설에서 무언가 특별한 의미찾기를 그는 '모색'하고 있다.

그의 예언은 앞서 그가 피할 구멍을 미리 파놓은 듯 한 넋두리와는 다르게 구체적이면서도 단호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첫 장에서부터 그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단호히 점친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때, 사회주의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로서다. 사회주의 '체제'의 부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둘째, 그 살아남는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조스팽식 사회주의에 가까울 것이다."(22~3쪽)

이런 단호함 속에도 피할 구멍은 파놓는 치밀함도 엿보이긴 한다. 이것은 그의 명석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단호함 속의 치밀함은 허무맹랑한 예언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치밀함'은 그가 단호하게 예언할 수 있도록 그의 사고의 끈을 잡아 물고 늘어지고 있기도 하다.

21세기에는 '개인주의 혁명'을 완성해야할 시기로 명명한다. 곧 개인들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는 21세기 시대의 정신 또한 부여한다. 곧 "더불어서 살겠다는 정신"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 해방'에 대한 모색도 보인다. 이런식이다. 그는 예언하면서 명령하고, 시대의 정신을 부여하고, 모색한다. 그럴때에 21세기는 가치있어지고, 그 가치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를 고종석은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40여개의 테제 속에서 21세기를 예언한다. '자연과 문명'의 미래를 예견하고, 지식인의 운명을 점치며, 민주주의를 모색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많지 않은 테제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인류가 붙들어야 할 가치들을, 구체적인 사안들에서부터 거시적 정신과 사고까지 다양한 '코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예언들은 간혼 낭만적 여린 심성도 느껴진다. 문학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것임을 예견하면서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류"라고 제시한다.

사회주의를 말하고, 개인을 말하며,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사회생물학에도, 문학, 권력, 종교, 언어, 노동, 민족주의, 생태주의, 교육, 문화와 정치, 전쟁, 도시, 세대, 생명공학, 마리화나에까지 이 많은 것들을 한 예언자 고종석이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시대 프로메테우스인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명석함과 박식함, 그리고 이 시대 인류에 대한 따뜻한 애정,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함, 그리고 그의 모색 속에 들어있는 '의지'와 '욕망'들을 통해 볼 때 그가 훔친 이 코드들은 믿음직스러운 예언임에 분명할 듯하다. 그것은 고종석이 '고'스트라다무스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믿거나 말거나, 그가 훔쳐 낸 '코드'로 우리 나중 안 자들은 동이 튼 21세기의 새벽 이때에 일찌감치 새로운 시대로 접속해 보는 것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선배 저널리스트의 우둔과 경박을' 비웃지는 못 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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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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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이 다 그럴 것이지만, 특히나 문학은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문학'하면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이 얼핏 머릿속으로만 상상하여 꾸며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기실은 발품을 팔아가며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고 그 안의 온갖 사물을 보고 또 보아야 참 된 몇 줄의 시 한편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시인은 발품을 많이 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일일이 조사해 본 결과는 아니다. 의심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있을 것이다.'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소설만큼 작가의 발품이 많이 필요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이나 『아리랑』『태백산맥』『한강』의 대작을 완성한 조정래 선생 등이 보여주듯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리 길의 발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발품이라는 것이 다만 돌아다니는 것뿐만은 아니다.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정리해야 하고, 등장 인물에 알맞은 언어, 문화, 생활까지, 나아가 다양한 분야의 왕성한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품을 모두 팔았을때 한편의 소설은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소설 『분노』를 일으면서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루슈디의 발품이 무척이나 많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해박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한 편의 소설을 쓰기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치밀한 구성 또한 이러한 발품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는 독서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다. 어쩌면 그의 책 한 권쯤은 읽어낼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전자일 뿐이고, 그가 『악마의 시』를 써 시끄런 소동을 일으켰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쉽게 읽힐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기도 했다. 이 책 『분노』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내 생각을 마냥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간 이 책을 읽어내면서 시종일관 앞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릭 솔랑카 교수'다. 그는 영국의 '사상사 학자'였고, '인형 제작자'였고, 순간의 '분노'에 휩싸여 처자식을 죽이려했던 적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처자식을 버리고 뉴욕으로 도피한다. 뉴욕에서 은둔하며 지내던 그의 삶을 속내 깊이 파고드는 서술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그는 뉴욕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그가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적 '분노'를 표출하고, 이로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이 소설의 테마는 바로 이 '분노'이다. 그가 왜 분노하고, 어떻게 분노하는지 명쾌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난해함이 있으며 동시에 긴장감이 생긴다. 그가 무엇에 분노하는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겉만 본다면 그의 분노는 정신이상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간혹 그는 몽유병 환자같은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 또한 확실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분노는 사소한 것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고, 어떤 뿌리 깊은 심연에서부터 오는 것인 듯도 하고, 아무런 이유없음에 기인하는 정신질환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어떻게, 어떤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지도 우리는 쉬이 알 수도 없다. 이 점에 대해 분노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furia'는 분노, 광기를 뜻하는 라틴어이다.(p.70 각주 참조)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만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 격정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p.436 각주 참조) 따라서 '푸리아'는 이중적이며 역설적이다. 중의적 표현이라는 소리다. 이 소설에서 솔랑카의 분노는 그의 '열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소설의 결론은 그가 분노로부터의 해방을 이뤄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퍼핏 킹'들의 그 증거이기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분노하는가? 왜 뜬금없이 처자식을 죽이려 했는가? 그의 순간적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왜?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가족, 친구, 또는 알 수 없는 그 누구-에 의해서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건, 세상의 온갖 체제에 의해서건 끊임없이 분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솔랑카의 분노는 어쩌면 이런 분노 유발의 원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우선 그가 사상사를 강의하면서도 별난 취미인 인형 제작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대학 동료 교수들의 편견에서 그의 분노가 유발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리틀 브레인'이 왜곡되고 자신을 배반하는 상황이 또한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아닐까? 후반부에 그의 어릴적 아픈 기억이 고백되는 것에서 알수 있지만, 의붓 아버지의 성추행에서도 깊은 분노의 원인이 있기도 한 것은 아닐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의 '분노'를 유발하고 그 분노에서 그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외적 원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면한 가장 큰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푸리아의 역설은 분노라는 동전의 이면에 열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외적 분노의 인자는 내적인 분노를 유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이면의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닐라'의 등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분노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열고 있고, 이 소설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노 유발 인자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한 인물을 통해 보여주면서, 그 분노가 어떻게 열정과 삶의 긍정적 측면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루슈디의 해박함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명쾌한 독설, 칼날 같은 풍자, 머리아프게 하는 난해함은 이 소설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 주고 있으면서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분노케 하는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고, 우리 내면에 내재한 그 '푸리아'를 어떻게 열정의 푸리아로 이끌어 낼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읽어내면서도,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했으면서도,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루슈디의 어법의 매력을 이 책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의 '푸리아'는 이런 쪽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갈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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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추적한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예수. 그는 누구인가? 새로운 약속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마가복음 1:1) 예수의 세계를 선포하는 이 새로운 약속(신약)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죄악된 영혼을 구원시킬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필요치 않다. 다만 "그를 믿는가?"의 물음만이 필요했다. 누구도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그가 무엇이기에, 그가 과연 어떠하기에 등의 물음을 가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일 뿐인것이다.

구약의 시작은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절대적 믿음을 첫장 첫구절에서 강요하고 있다. 이 시작을 받아들인다면, 성경 전체의 그 어떤 기사와 이적을 받아드리지 못하겠는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은 '천지창조'에 비견될 바 못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아들은 그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곧, 구약과 신약은 그 구조가 동일하다. 절대적 믿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첫마디부터 내놓는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작품에서 첫장 첫구절의 시작은 무언가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해하지 못할바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기독교는 믿음을 강요했다. 성경의 독자에게 수많은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믿어야 구원받는단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논리적 이해(사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를 쓸데없는 것으로 곧잘 치부하곤 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왜 하나님을, 왜 예수님을 이 땅의 신자들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따질 수 없는가? 신성모독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신성 모독이라면, 신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나는 이 땅의 기독교가 예수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예수가 보여주었던 그의 삶과 사상을 우리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땅에 육화되어 온 것이 아닌가?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방법으로는, 인간적 방법인 논리적인 이해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 책 『예수』는 그런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도와준다. 예수가 왜 이땅에 왔고, 그의 삶과 사상은 어떠하였으며, 성경의 내용을 충분히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사복음서는 그 내용의 차이가 꽤나 많다. 그것을 우리는 대조해 보면서, 인간의 방법, 즉 역사적이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각각의 복음서들에 저자들의 주과적 진술들이 보이게 된다. 마태가 신에 들려 저도 모르게 술술 써내려간 것이 마태복음이 아닌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한 예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되었을 때 예수가 말하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굳은 믿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역사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각 복음서의 집필자들이 그 복음서의 예상 독자들이 처해있던 상황들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고 있었을까를 상정한다. 그럴 때에 복음서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실증적인가? 과연 이 땅의 기독교는 예수를,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허무맹랑하게도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걸 절대적으로 믿으면, 너희에게도 그런 기사와 이적이 이뤄질 것이라고 호도하는 이 종교가, 이제는 예수 '읽기'를 통해서 충분한 이해를 통해 반석위에 굳건한 믿음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이 책은 예수 '읽기'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숨에 읽고 깊이 음미해야 할 책,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 사족
간혹 많은 분들이 내가 닉네임으로 쓰고 있는 '멜기세덱'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온다. 여기서 시원스레 알려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멜기세덱(Melchizedek) 구약에 잠깐 나타나는 아주 신비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창 14:18, 20; 시 110:4). 그러나 이 사람의 존재 속에는 오랜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오멜과 여러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중에 그를 만났다. 그때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의 십일조를 그에게 바쳤다. 그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것은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이었다(창 14장 참조). 그 후 수천 년이 흐른 뒤 다윗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멜기세덱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시 110:4).

  예수님과 멜기세덱 :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레위 지파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멜기세덱의 제사장'이라고 말했다(히 5:1-10; 6:20). 그리고 멜기세덱은 탄생, 아비, 어미, 족보, 죽음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히 7:3). 이러한 면은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신학적 평가
  신학자들은 멜기세덱을 놓고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을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판정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가 족보 없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1세기에 이 서신서를 읽었던 독자들은 인간의 족보에 대해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론으로부터 내려온 완전한 족보가 없다면 그들은 아무도 제사장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종류의 제사장을 강조하면서 아론이나 레위 반열이 아닌 영원한 제사장 반열인 지극히 높은 제사장 멜기세덱을 바로 예수님의 반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히 7:4-10).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직접 희생 제물로 드려 더 이상 희생 제사가 필요 없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히 7:26-28).

이상 하용조 목사 편찬, 『비전성경사전』, 두란노, 37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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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17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앞부분에 멜기세덱이 잠깐 나와요. 분위기가 참 신비로웠어요^^

마늘빵 2007-03-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의미군요. 음. 이 쪽 계열은 영 몰라서.

멜기세덱 2007-03-1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전 코엘료를 읽지 않았거든요. 연금술사에 멜기세덱이 나온다? 신비롭다? 마노아님 때문에라도 읽어봐야 할려나....ㅎㅎ
아프락사스님> 제가 쓰이기에는 너무나 크죠! 이쪽 계열도 알고 보면 재밌을거 같아요..ㅎㅎ

Jeanne 2007-06-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평신도 사역자양성' 이라고 해서 부지런히들 교육하고 있지 않나요?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전 학교에서 배웠지만요)
(태클 아니에요...;)

멜기세덱 2007-06-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세요. '평신도 사역자양성'이 얼마나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할런지는 의문이고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곧이 곧대로 믿고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성경 해석의 권위가 여전히 성직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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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의 교과과정은 크게 교양과 전공 과목으로 나뉜다. 다시 교양은 교양필수와 교양선택으로, 전공도 마찬가지로 전공필수와 전공선택으로 나뉜다. 사실 밥 먹여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마도 전공과목일 터인데, 전공과목만 열심히 한다고 대학졸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학졸업의 장애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교양필수와 졸업인증제가 아닐까 한다. 내가 적을 두었던 대학에서는 졸업인증으로(나는 졸업인증제의 굴레에 다행스럽게도 얽히지 않았다.) 영어와 컴퓨터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게 졸업하는 데에 영 걸림돌이 된다.

말하자면 대학의 교양필수나 졸업인증 같은 것이 사회에 나가 밥벌어 먹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학에서는 그것을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야 실제적으로 효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는 해야 어딜가든 뭘하든 대학나온 사람입네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요즘 대학에서 공통으로 교양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 과목들은 영어와 컴퓨터, 그리고 인문학분야 한 과목과 자연과학분야의 한 과목 정도, 그리고 대학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문장작법과 생활한문 등을 적은 학점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도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교양필수 과목으로 영어와 컴퓨터, 그리고 인문학분야 외에, 국어와 한국사 과목이 있었다. 문장작법도 있었으나 생활한문은 없었다. 그러니까 요즘은 국어와 한국사가 없어지고 영어가 강화되었으며 생활한문이 살짝 들어갔다. 변화의 양상을 보면, 영어의 비중이 높아지고, 국어의 비중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사실 문장작법은 레포트 쓰는 법 정도나 가르쳐 주는 글쓰기 과목에다가 2학점 밖에는 안되어서 대학 교양 국어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가져야할 기초 소양중에 국어는 슬쩍 빠져버렸다.

요즘 시대에 누가 뭐래도 영어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로인해 국어의 중요성이 심각한 침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얘기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배운 수준이면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도 가능하다. 대학에서 영어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영어 수준 이상을 대학에서는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즉,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는 국어 수준보다 영어 수준이 더 높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생들의 국어와 영어 실력을 비교해 보면, 국어 실력이 영어 실력보다 좋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말을 무리없이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의 모국어로서 요구될 그런 수준에 한없이 모자란다. 조금 수준 있는 글을 주고 읽을라치면, 국어사전을 몇 번을 들추어보아야하는지 모른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일반인들의 맞춤법 실력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조사들도 보고되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국어교육이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원론적인 지적도 가능하나, 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에는 국어가 없으니 그런 총체적 문제점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도입된다고 하여 논술 학원이니, 논술 교재들이 호황을 맞았다. 서점에 가보면 논술관련 교재 및 도서들이 서점의 가장 요체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거기에 국어교육은 없고, 다만 화려한 글쓰기 교육만 있다. 그렇게 해서 될 글쓰기도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그런 책들에 불티가 나는 이유일 것이다.

얘기가 자꾸 엇나가는 듯 한데,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유혹에 가득찬 제목의 책이 나와 잘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의 국어 수준으로는 사실 학사학위의 소지자가 그에 걸맞는 글을 쓰기에 심히 부족함이 있다. 언어라는 것은 사실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우리는 국어야 계속 말하고 쓰고 읽고 하니 그 실력이 어디가겠느냐 하지만, 거기까지 일뿐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운만큼 그 국어실력으로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대학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학 수준의 국어실력이 요구되어진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사실 뻥에 가깝다. 나같음 사람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대학에서 국어전공한 사람이 그걸 가지고 밥 벌어 먹기에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일반인들에게 오죽할까. 그러나 그것은 국어가 필요없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국어는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준까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가 기본일까?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니, 고등학교 수준의 국어실력이면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산에, 육산, 십산에 가깝다.

대학 나오면 대학수준의 국어실력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그것을 포기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오히려 일반 대중이 몸소 체감한 것인지, 요즘들어 국어관련 책들이 우후죽순 흘러나오고 있다. 대학이 포기한 과목을 일반인들이 일일이 찾아가 배워야 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졌다.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리뷰를 정리하도록 하자. 이 책은 말하자면 우리말의 뉘앙스 사전의 전초격이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대부분의 의미를 어림짐작으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주관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말의 미묘한 차이들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차이를 제대로 알고 쓰지 못할 때가 무수히 많다. 말의 미묘한 차이는 그것이 전달되었을 때 전달된 사람에게 커다란 차이, 즉 오해와 오독을 불러올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한 바를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또한 표현할 때에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도 하다.

속과 안, 사내와 사나이, 고개와 머리, 엉덩이와 궁둥이 등등,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그 쓰임이 조금씩 다른 말들이 우리말 속에 무수히 많다. 그런 미묘한 차이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말 실력은 좋아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런 무수히 많은 우리말들을 이 책은 다 다루고 있지 못해, <낱말편1>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고,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에게도 알찬 우리말 뉘앙스 사전하나 갖게해 주었으면 한다.

중언부언은 글쓰기에서 꺼려지는 것이지만, 아무리 중언하고 부언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있으니, 우리에게 국어는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라는 얘기다. 대학에서는 다시금 교양필수 과목으로 국어의 비중을 영어만큼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투른 리뷰를 과감히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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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2-07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을 잘 붙인 상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해요. ^^
그리고,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좀 어수선하기도 합니다.
님 말씀마따나... 사전으로 정리돼야죠. 이런 책이 시작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