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박노자를 좇아온 세월이 벌써 8년여가 되어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충격에서 시작하여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박노자를 따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그 비정(非情)한 역사의 굴곡들로부터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탐욕적 이데올로기의 잔재들이 발가벗겨진 그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의 수치를 면치 못함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그렇게 나에게, 또한 우리에게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함을 일깨우는 죽비 소리와도 같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전근대적, 국가주의적 추태들을 들추어내어 우리들의 진정한 대한민국, 곧 “다양성의 나라, 평등한 나라”로 거듭날 것을 부르짖는다. 이어서 그의 작업은 우리안의 편견적 폭력과 차별의 일상화를 비판하고(『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우리 스스로가 제국주의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제국주의적 면모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하얀 가면의 제국』). 역사학자로서의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탐구하며, 그러한 역사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당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리하여 오늘날의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의 근현대 수난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당대적 현실에서의 ‘수난’의 반복을 피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작업들은 『우승열패의 신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등에서 계속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폭력적, 파쇼적, 전체주의적, 군사주의적,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을 끊임없이 추적해온 박노자. 그런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 유효함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까발리는 폭로성 작업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이 단지 아무런 목표와 지향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것일까? 그간 8년여의 세월 동안 그를 좇아 온 우리에게 그는 그간의 작업들의 중간 기착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저서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비판적 자기성찰이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성찰로부터 이루어낼 수 있는 발전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 모델이라는 것은 저자 박노자가 이 책을 일컬어 “‘반란적 동아시아’에 대한 지역 연대 지향적인 보고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연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의 작업들은 이 ‘동아시아의 연대’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수반되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반(反)동아시아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서야 그 연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발전적 지향 없는 성찰과 반성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은 그런 성찰과 반성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자의 지금까지의 작업이 성찰과 반성이었다면, 이번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의 작업은 그것을 토대로 한 발전적 지향, 곧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인 것이다. 새로운 대안으로 내어 놓은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과연 얼마나 될까? 박노자를 따라서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동아시아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박노자는 서두에서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반란적 동아시아’가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동아시아의 기존 권력과 가치는 지극히 서구적이면서도 제국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란’이란 그런 “권력에 대한 반란, 기존 가치에 대한 반란”이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풀뿌리 동아시아가 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반란’을 꿈꾸어야 하다. 그럴 때에 박노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연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 연대의 뿌리는 곧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박노자는 과감하게 선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의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외침의 소리를 다시 듣는 듯도 하다. 여전히 공산당하면 치를 떨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이승복들이 많은 이 사회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말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또한 ‘사회주의’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도 아직은 여전하다. 어쩌면 그간 우리 안의 이러한 편견을 혁파할 것을 박노자가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체적 동아시아인으로서 ‘반란성’을 회복하고, 그간의 추상적 ‘동아시아’ 담론에서 벗어나 ‘실감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며, 그 구체적 모델로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박노자의 ‘동아시아 연대’ 구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 구상과 구체적 모습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탐색을 동아시아 역사의 뿌리에서부터,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역사적 실재에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동아시아”에서부터 찾아가고 있는 것이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란 제목은 이제는 우리가 동아시아에 대해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주의가 사회 곳곳에 내재해 있어 몰랐던 개인과 종교의 자유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이었음(「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니체보다 ‘이지’가 빨랐다」등)을 설파한다. 동아시아의 근대에 있어서 망령(妄靈)으로 지목되는 ‘유교’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보성이 강한 많은 유교 사상가들”이 있었음을 ‘무시’했고 알지 못했다. 니체보다도 빨랐던 이지(李贄)의 ‘열린 개인주의’도 있었다. 동아시아 담론에서 배제된 ‘이슬람’과의 공존은 이미 우리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존재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수많은 동아시아적 가치들을 깨달을 때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민중운동과 연대하는 길”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국적의 신비화’가 얼마나 반동아시아적인지, 근대 권력과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들, ‘관습’을 들먹이는 지배세력들의 자구책, ‘민족자본’이라는 미명 아래 숨어 있는 재벌자본가들의 논리, 뿌리 깊은 ‘숭미주의’,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 등등 20세기에 이식된 ‘망령’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얼마 전 까지 학교에서 ‘교련’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기도 하는, “국가적 상징 세계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을 만날 수도 있다. 오늘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준 열사’가 열사만은 아니었음을, 그 이면에는 친일의 모습도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충격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파시즘’을 명쾌하고 비판한 ‘1930년대 논객 김명식’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우리 역사의 자랑 ‘화랑’의 동성애 가능성을 읽는다거나, 미적 기준의 변화들, 필자의 경험담이 섞임 ‘국제결혼’에 대한 이야기, 개화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들은 더욱 이 책의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우리가 영원한 우방일 것이라고 여기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연대’를 위한 박노자의 작업은 오늘날에 있어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한미FTA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신식민지로서 재편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주창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박노자의 이번 작업이 그 무모성을 가리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담론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탐구에서부터 가능성을 엿보았다면, 그것은 토대로써, 뼈대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 토대에 건물을 세우고, 뼈대에 살을 붙일 때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은 더 이상 가능성의 담론이 아니라, 실제적 담론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 나아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모델의 좋은 설계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자아 2020-11-29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이나 후기로 쓰는 글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글을 쓰는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닌 것 같군요. 문학 작품 심사위원 내지 평론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댓글을 쓰려고 들어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평가의 서재‘라고 되어 있군요. 보통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우리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을 통해서 박노자 선생을 알게 되었고 사상적 지향성도 비슷해서 아주 친근하게 느끼지만 그분의 많은 저서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비평가님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놀라움의 흔적도 남기고 칭찬도 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 서툰 글을 계속 엮어봅니다. 아마도 비평이나 평론이 직업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박노자 선생이 저술하는 책을 계속 주시하면서 또한 비평가님의 서평에도 관심을 가지고 볼 생각입니다. 문장을 얽어나가는 논리적 전개가 정말 치밀하고 체계가 완벽한 것 같습니다. 박노자 선생 같이 중생들과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좋은 서평과 독후감으로 자비로운 보시를 많이 베풀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마무리 합니다.
 
07년 6월 권장도서 - 김훈의 (남한산성)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 두 번째다. 『칼의 노래』가 그 처음이었다. 사실 김훈이란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이 『칼의 노래』덕분이다. 아니 정확히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었고, 더 정확히는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탄핵은 대한민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민주공화국 역사상의 치욕이라기 보다는, 스타크래프트의 종족간 싸움보다도 질 낮은 블랙코미디였다고 난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 이 탄핵의 처음이(이 탄핵으로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이 웃기는 노릇이라는 것, 노무현을 탄핵한 세력이 진작에 탄핵되어 없어졌어야 할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블랙코미디를 가능케 한다.

『칼의 노래』가 탄핵이라는 이벤트에 당첨되었던 것 때문인지, 외롭고 고독한 사나이 노무현의 간택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인지, 무엇보다도 김훈의 소설이 탁월했었기 때문인지,  그것들을 가릴 필요는 딱히 없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시류를 탔다는 것이고, 김훈의 소설이 얼마나 탁월했던 것인지 아닌지에 관계 없이 세상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는 것,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과대평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그런 것에 상관 없이 많이 팔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소설이 개떡 같은 탄핵세력 같았다면야 아무리 떠들어도 읽히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내가 읽은 『칼의 노래』는 이러한 연유에서 읽혀졌을 가능성이 컸고, 또한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리 달가운 평가가 내려지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다. 김훈이 『칼의 노래』로 인해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잇다른 작품들을 내어놓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소설계의 거목으로 부각된 지금, 이 소설 『남한산성』은 그런 이유들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려 떠들석하다. 『칼의 노래』와 어느 정도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세간이라는 것은 주로 언론을 통해서 주도되고 있는 것인데, 이전의 것은 시류를 잘 탔다는 점과 지금의 것은 김훈이라는 이름의 상업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어쨌건 나는 『남한산성』을 읽었고, 지금 리뷰를 쓰고 있다. 『칼의 노래』에는 리뷰를 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 리뷰를 쓰는 이유는 리뷰를 쓰게끔 하는 무언가 마음의 동함을 『남한산성』에서 받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이 책 『남한산성』은 빠르게 읽힌다는 데에 나름의 장점이 있겠다. 소설이 빠르게 읽히고 느리게 읽힘에 그 장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읽힌다는 것은 느리게 읽히는 것보다 서사적 강점을 더 많이 지닌다는 것을 뜻할 수는 있다. 빠르게 읽힌다는 것은 복잡스럽지 않다는 것이고, 서사의 진행이 간명하다는 것이며, 그 간명한 진행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이어진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바로 그런 것들을 분명 지니고 있었다. 밤의 야심을 틈타 읽은 이 소설을 새벽녘까지 끌고와 마침내 모두 읽어낸 후에, 이른 아침 이렇게 리뷰를 쓰게하는 그 힘을 분명 가지고 있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서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284쪽)

김훈의 소설은(이 소설 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도) 칸으로부터 붓놀림의 엄한 다스림을 받은 듯 하다.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칸의 이런 엄함으로 인해 "글을 짓는 일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처럼, 이 소설을 읽어내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인가 보다.

이 소설의 이런 빠르게 읽힘과 더불어 장점이랄 수 있는 것은 여러 인물군상의 다양한 구도설정에 있다. 얼핏 이러한 구도가 복잡스러움으로 얽히고 설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극히 간명한 문체로 처리되면서 그런 복잡성을 타파한다. 여러 갈래의 샛길이 있고, 그것은 큰 길, 곧 대로를 향하다가, 다시금 두 갈래의 길로 나뉜다. 그 두 갈래의 길은 본래의 길이었다. 길이 갈리고, 다시 합치고, 원래의 두 길로 돌아가는 이 구도의 설정은 길의 얽히고 설키며 이루어지는 긴장감과는 다른, 간명함의 극치를 이루는 데서 오는 어떤 이질적 종류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 빠르게 읽히는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김류는 느꼈다." (94쪽)

이것은 김류의 길이다. 김류 앞에는 김상헌의 길과 최명길의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던 것이다. 그 길 사이에서 김류는 시간의 길을 가고 있다. 어느 길로든 합쳐져야 할 것인데, 그 합쳐져야 할 길이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 가운데의 길로 느리게 걸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임금의 길과도 조금 다르다. 임금의 길은 최명길의 길과 김류의 길 사이에 있는 또다른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묘당의 길도 제각각이며, 체찰사의 길과, 김상헌의 길과, 최명길의 길과, 당상의 길과, 당하의 길과, 간관의 길이 또한 제각각 달랐다. 성안의 백성의 길은 저마다  다른 듯 하나 그 길은 어쩌면 같은 길, 삶기만이라도 하자는 길이었다. 정명수의 길은 또다른 삶의 길이었다. 비난하지 못하는 길, 어느 누구의 길도 나무랄 수 없다. 제각기 나름대로 "아름다운" 길일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수어사는 어느 쪽이오?
  이시백이 대답했다.
  ―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218쪽)

이시백의 길은 이처럼 또 달랐다. 여기에 자못 김훈의 목소리라고 여겨지는, "조선에 그대 같은 자가 백 명만 있었던들"이라는 언설은 쓸데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시백은 그것이 그의 길이었거늘, 이시백 같은 자가 많지 않았음을 한탄하고 있을 필요는, 이 소설에서는 하등 없어 보인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김훈의 말은 이시백과 겹쳐져서는 아니된다. 그런 점에서 이 한탄이 쓸데없어 보이는 것이다. 과연 김훈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김훈의 길은?

그렇다면 '고통 받는 자들'은 누구일까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임금으로서나 당상으로서나 당하로서나 저 나름의 고통이 있겠으되, 김훈의 '고통 받는 자들'은 민중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김훈의 길은 민중의 길로 합쳐진다. 임금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은 임금의 길,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었다. 그 길에 다시 당상과 당하의 길이 합쳐지고, 양반의 길이 합쳐진다. 남겨진 성 안에는 김훈의 그 '고통 받는 자들'의 길이 있다. 이시백은 성 안에 있었지만 그도 다시 성밖의 임금의 길로 합쳐져야 할 것이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363쪽)

이것이 곧 민중의 길이다. 김훈은 이렇게 그들의 편을 들고 있다. "봄농사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안도감 속에 민중의 삶의 길이 열렸다는 희망이 담긴다. 나루가 초경을 했다는 사실은 또한 그 희망의 씨앗이다. 서날쇠의 웃음 속에서 민중의 아들과 또한 그 딸들은 질긴 생명을 살아가면서, 늦은 봄농사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것이 곧 민중의 길이고, 그들 편에선 김훈의 길이다. 그길은 곧 희망의 길이다. 임금의 길에서는 그런 희망의 메세지를 김훈은 남기지 않았다.

흔히 임란과 호란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치욕스런 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임란과 호란의 치욕의 비중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 인식 속에 더 큰 치욕은 임란으로 기억되며, 또한 더 큰 자랑은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을 부각시키는 임란에 있다. 호란은 그러한 임란의 기세에 눌려 조금씩 잊혀져 간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호란의 그 치욕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박씨전』이란 고전소설은 또 다른 종류의 『남한산성』이랄 수 있겠다. 요즘식으로 한다면 환타지계열이겠다. 호란의 치욕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작품이 『박씨전』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호란의 치욕의 잊지 못함을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중의 길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지 싶다. 그 길을 김훈은 '남한산성'에 올라가 물었던 것이다.


댓글(7) 먼댓글(1) 좋아요(6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1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프레이야 2007-05-2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의 리뷰입니다...

마노아 2007-05-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동 받았어요. 멜기세덱님 멋져요^^

Passionian 2007-05-2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작가의 필체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보네요. 리뷰 문체가 완전 김작가 풍입니다.

멜기세덱 2007-05-2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이런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동하시면, 감동하실 일 너무 많으셔서 피곤하셔요...ㅎㅎ
마노아님> 제가 멋진 걸 이제야 알아 주시는 군요....ㅎㅎ^^;;
Passionian님> 과분하고 당치 않으신 말씀이세요. 부화한 문장, 우원한 문장, 잔망스러운 문장, 게으른 문장 투성이인걸요. 김훈 작가에게 누가 될 따름입니다. 다만 부끄럽게도 기분은 좋네요..ㅎㅎ

2007-07-0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7-02 17:09   좋아요 0 | URL
^^;; 저의 첫 트랙백이에요...ㅎㅎㅎ

책속에 책 2007-08-03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리뷰를 긴 줄 모르고 읽었어요..서평 잘 읽었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조금 전까지 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여행하고 오는 참이다. 단 한 사람을 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 혼란과 무질서와 더러움과 굶어 죽어 지독한 썩은내가 진동하는, 굶주린 개와 고양이가 죽은 시체를 물어뜯는, 그런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긴장감과 지독한 더러움과 냄새를 참아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고난의 여행이다. 난 지금 그 여행으로 충분히 지쳐있으면서도 이렇게 즉각적으로 리뷰를 끄적이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그런 긴장과 괴로움은 해체되지 않았으며, 자칭 눈 뜨고 있다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눈먼 자들이 주는 어떤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도중,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불에 멈춰선 김에, 보는 능력도 멈춰 서버렸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시작으로 한편 그를 도와주면서 그의 자동차를 훔친, 그러나 그의 눈멂까지도 훔쳐버린 눈먼 자동차 도둑. 첫 번째로 눈먼 남자를 진찰한 의사, 그에게 진찰받은 아이, 노인,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이들은 눈 멂은 전(全)도시적으로 전염되어버린다. 이른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된다. 그러나 그 도시에 단 한명의 눈뜬 자가 있으니, 의사의 아내는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이단아가 된다. 모두가 눈이 멀었을 때 단 한 명의 눈뜬 자는 타자일 수밖에 없겠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우리가 눈을 떴다고 우쭐대지 마라. 너희들의 눈뜸은 눈 멂만 못하느니라. 우리가 확실히 이 세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온통 하얀 백색의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너희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의 진실, 이 사회의 본질,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지극히 하얗게 바라보는, 백색 악의 질병, 곧 눈멂의 상태에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눈 크게 뜨고 우리 현재를 잘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눈뜬 자들의 삶의 모습과 세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다만 눈뜸과 눈멂의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를 부각시킨다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되겠다. 다만 환상적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리얼리티는 이 소설에 살아있다. 우리 눈뜬 자들의 도시는 여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올곧이 그려져 있다. 너무나도 리얼리티하게 말이다.

 

  눈이 먼 사람들은, 그들의 눈멂이 위험한 전염병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들은 통제되어지고 감시되어진다. 이것은 곧 이 사회의 눈뜬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우리 눈뜬 자들은 이 사회적 정치적 체제 속에서 감시되고 통제되어진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외곽에서는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다. 다만 그들은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고 거짓말 치고 있을 뿐이다. 이 통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격적, 수많은 非적 행위들은 또한 우리 눈뜬 자들의 공간에서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오히려 눈뜬 자들의 공간에서보다 더 잔인하게, 더 다양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런 의식 이면에는 인간의 본질적 삶의 방식 혹은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의 자동차를 훔친 도둑이 눈먼 자들 중에서 가장 첫 죽음의 희생자로 기록되어짐으로써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인간적 본질, 곧 인간적 윤리의식과 도덕의 본질은 바로 이런 보편적 권선징악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의 순간에 개과천선의 태도를 보인다. 이것 또한 보편적 개념의 윤리의식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주의 깊게 볼 대목 중의 하나는 바로 눈먼 자들의 눈먼 자에 대한 약탈과 강간이 아닐까 한다. 눈먼 재소자들에 대한 눈뜬 군인들의 무차별적 총알 세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인간의 지배욕과 탐욕, 그리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작가는 이 상황에 담아 재현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죄악의 모습, 현대 사회체제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러한 약탈과 강간을 우리는 이 소설적 사건에서 축약과 상징적, 비유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눈뜬 자들의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사라마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희망적 요소를 가지고 있을까? 거두절미 하건대, 주제 사라마구는 무엇보다 의사의 아내의 희생적 행위와, 인간적 연대와 유대를 그 희망, 곧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 본질의 회복의 희망적 요소, 원인자로 보고 있다. 그렇다. 이 아가페적 사랑의 희생과 인간관계의 연대와 유대는 이 소설의 다양한 장면에서 보이는 약탈자와 지배자들, 탐욕과 권력의 이합집산과는 그 본질적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연대요 유대인 것이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 눈뜬 자들의 도시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우리 눈뜬 자들의 이 도시 어딘 가에도 ‘의사의 아내’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개입이다. 적당한 용어를 찾자면 편집자적 논평 비슷한 것도 삽입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끝자락에서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의 집을 찾아가서 만난 작가인 눈먼 남자가 바로 주제 사라마구의 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장면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이 먼 세 가족이 움직였다면 이산가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함께 움직여야 마땅하건만, 눈먼 작가 남자만 남과 여자인 아내와 딸만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얻기가 어렵다. 결국 작가라는 인물과의 만남은 이 소설에서 불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편집자적 논평의 성격을 띤다면 얘기는 다르겠다.

 

  이 장면에서 작가라는 인물은 주제 사라마구의 가면이다. “내가 여자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내 아내와 두 딸이오, 내 말은 언제 여자들이라는 말을 쓰는 게 좋은지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나는 작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낯간지러운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상상해 보라, 작가가 내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주제 사라마구는 작가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작가라는 존재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 살짝 언급한다. “이제 아무도 그걸 읽을 수 없소, 따라서 그 책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눈이 먼 독자들에게는 더 이상 작가라는 존재는 의미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우리 눈뜬 독자들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사라마구의 쓴 소리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집에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결국 이 세상에 이성이 없는 비인간들에게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란 삶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인내나 얻는 사람”이기에 그는 여전히 작가적 삶을 위해 인내하고 있는 것을 지도 모른다. 이런 소설을 통해 세상 사람들, 곧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호소하면서 말이다.


  “지금 이대로 살아가자는 거요, 지금은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소, 나는 내 아파트가 어떻게 되는지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볼 생각이오, … 방금 또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 당신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이곳에 당신네 손님으로 사는 거요, 이곳은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을 만큼 넓으니까”


  여기에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대로 살아가자’는 것은 곧 의사의 아내를 중심으로 한 7인의 연대와 유대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또 다른 연대와 유대를 이루고 살아가자는 것이 된다. 곧 첫째도 연대요, 둘째도 연대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사라마구가 말하고 있는 이 눈 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 눈먼 현대인들에게 말하는 본질적 눈 뜸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요소는 이런 작가의 개입이 이 소설의 리얼리티, 혹은 온 도시의 사람들이 눈이 멀었다는 비현실적인 논리를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화 시켜 받아들이도록 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지금 책을 쓰고 있소”라고 말하면서 마치 작가 자신이 이 환상적 현실을 경험하여 진술하고 있다고 여기게끔 독자들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함정은 “작가란 다른 사람들과 똑같소, 모든 것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소, 따라서 물어보아야 하고 상상해야 하오.”라는 서술을 통해 살짝 피해갈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 의해 쓸려면 똑바로 쓰라는 호통을 듣기도 한다. “말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따라서 그런 형용사들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라고 소설 똑바로 쓰라는 호통이다.

 

  이상의 것들 이외에 이 소설은 재미있는 요소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본질적 문제의식, 그리고 보편적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작가의 문체에서도 독자로 하여금 소설적 상황을 보다 사실적으로 혹은 몰입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장부호의 극소적 사용이다. 특히 대화의 상황에서 대화를 나타내는 “”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다만 반점만을 찍고 있는 점이다. 문자 기호 자체가 시각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 소설적 상황과는 적절한 배합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이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자기호의 시각적은 극단적으로 해체시키면서, 말하자면 대화를 문장부호를 사용하여 처리할 경우의 시각성을 없애버림으로써 소설적 상황에 독자로 하여금 일부분이나마 체험하게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작가의 문체적 특성에 기인하면서 작가의 주도면밀한 소설적 구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러모로 좋은 작품을 읽는 기쁨이 남는다. 우리 사회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면모는 이 작품 하나만을 읽어 본 나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주제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을 사라, 마구! 곧 마구 사서 읽으라는 암묵적 강요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리라. 우리 사회의 내면적 눈먼 장님들인 우리들에게 세상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회복하여 진정한 눈을 뜨도록 요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학교 후문가에 장미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어버이날도 지났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 아직 뭐가 남았길래 꽃타령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하긴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은 카네이션으로 불이 났을 것인데, 오늘은 장미 한 송이 송이들이 어여쁘게 포장되어 거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직도 꽃 줄 날이 남았는가보다 했다. 그러고보니 이 꽃 주는 5월에 어느 누군가에게도 꽃을 줘 본 기억이 없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께 자못 송구스럽다.

왠 꽃일까 했던 의문은 이내, 오늘이 5월의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물어 듣고야 해결되었다. "만 20세가 된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을 부여하는 날"로 문화관광부까지 나서서 주관하는 날이란다. 기실은 장미꽃 상인들이 주관에 후원에, 북치고 장구치는 것도 모자라 꽹과리까지 요란스레 쳐 대는 날인 줄 알았다. 내가 성년이 되던 날, 후배들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기억도 나고, 더불어 백석의 시집을 받은 감회로 잠깐은 즐겁기도 하였다. 세월은 훌쩍 지나고 나는 낼모레 서른을 바라보는 서른 즈음,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고인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지금이다. 그런데, 이 땅의 젊은 동량(棟梁)들은 오늘 성인이 되었다.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땅의 성인이 된 그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축하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일까? 어제 나는 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은 탓으려니 했다. 이 땅의 이 젊은이들은 오늘 성년이 되었지만,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아니 세상에 태어나 울음 울고, 제 어미 아비에게 재롱도 부리기 전에, 굶주리어 죽어간 그들이 생각난 이유는. 브라질 세아라 주의 크라테우스라는 곳엔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아 배고픔과 쇠약, 설사, 탈수 등으로 숨진 이름 없는 아기들의 무덤", 곧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가 있다는데, 그들은 오늘 이 기쁜 성년의 날을 맞아 보지도 못하고 참혹한 굶주림에 그렇게 이름도 없이 죽어갔단다.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이것은 그 무슨 아이러니일까? 우리 이 땅의 아이들이 성년을 맞은 오늘은 그들, 그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아이들의 죽음의 또다른 비극은 아닐까? 갑자기 마음 한 켠이 답답하고 울울(鬱鬱)하다.

왜 하필 어제 나는 이 책을 읽었고, 또한 왜 하필 오늘은 '성년의 날'이어서, 붉게 활짝핀 장미꽃 한 송이 받아보지 못하고 굶어 죽어간 저 절반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적해지는가? 오늘 이 땅의 성년을 맞은 이들에게 살갑게 축하의 말을 전하지 못하며 하루 종일을 힘없게 지내야 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그리고 그 절반은 굶주리지 않으며, 또한 그 절반은 배불리 먹으며, 또 그 절반은 배가 불러터져 남겨 버리는가? 무엇인가 불합리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또한 그래서는 더더욱 안 될 것만 같다.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되어야 한다.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그 원인들이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로 인해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구호조직의 활동과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굷는 현실, 사막화와 삼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 특히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과두지배",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차별적인 정책 등을 들고 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자들의 죄가 아니라는 것, 그들이 게으르고 무능력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원죄, 죄앗을 씨앗을 품어서도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것은 저 저열(低劣)한 이 세계의 돈의 지배자들의 탐욕과 그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갖혀서 절반의 굶주리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한 우리들에게 그들의 굶어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니, 그것은 큰 벌 받아 마땅할 죄악이다.

'비참(悲慘)'하다는 말은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에 두고 말해야만 타당할 것이다.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직"한 현실이 이것 말고 그 무엇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저 브라질의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젖먹이 아이들의 분유에도 세계의 자본과 금융과두지배자들의 돈놀이가 존재하고, 쌀 한 톨, 밀 한 알 가지지 못해 굶주리 배를 부여잡을 힘도 없는 아프리카의 참혹한 민중들 뒤로 몇몇 금융자본가들의 베팅게임에 남아돌아 썩아가고 있는 이 불합리한 현실 말고 그 어디에 '비참'이란 말을 붙일 수 있으랴? 나는 다른 것을 찾는 것을 포기하겠다.

저자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다. 부록으로 주경복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잘 신자유주의를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신자유주의가 그 무엇이더라도, 이 세상을 어떤 놈들이 좌지우지하며 주물러 대더라도, 저 죽어가는 이들을 밟고 내가 살아간다는 현실은 정말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굶어 죽어가는 절반을 두고, 우리 절반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그 절반이 굶어 죽어 사라진 후, 우리 절반의 절반이 또 그 꼴을 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자명한 예측을 나의 이 멍청한 머리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말하나 마나, 세상의 절반이 굶어 죽어가는 이 현실은 불합리와 비참함과 죄악이라는 것을, 나는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겠다.

몇몇 매체들에서 오지를 탐험하고, 기아와 전쟁의 현장을 탐방하고, 구호의 손길을 사뿐히 뻗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때 몇 번의 전화다이얼을 돌려본 기억으로 오늘 나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는 그런 인종이 못된다. 가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찔끔했었다고, 어떻게 저런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분노의 혈기를 머리끝까지 솟아올렸다고, '쯧쯧쯧' 세치 혀로 세상의 현실을 한탄했었던 적 있었노라고 자랑스레 떠버릴 수 있는 그런 인종 또한 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오늘 이 성년의 날이 마냥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 이 못난 인간아! 아 우리 못난 인간들아! 오늘 우리는 울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글러의 말에 난 겸허히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내가 그런 생명체이긴 할 걸까? 오늘 내가 하루 종일 우울했었던 것에서 내가 그런 생명체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을 뿐이다. 누가 그랬을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그런데 '빵'도 없이는 더더욱 살 수 없고, 어느 꽃 피는 봄날 화창한 5월의 셋째 주 월요일에 붉은 장미 한 송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저 성년의 장미 한 송이 받아든 그 젊은이는 알고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픈 맘도 전혀 없이 배부른 우리들은, '배부른 돼지'가 못내 부러울 저 굶어죽어가는 세상의 절반의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가 이런 글쓰기의 여유나마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어, 너무나 굶주리어 배고픔의 울음 한 번 크게 울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들의 영령들에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또 답답해진다. 그냥 희망만을 부여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댓글(8) 먼댓글(1)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58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마늘빵 2007-05-2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

멜기세덱 2007-05-2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들이 '아프'지 않게 말이에요.ㅎㅎ

마노아 2007-05-3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군요! 멜기세덱님 축하해요^0^

멜기세덱 2007-06-0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황스럽네요.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한숨쉬고 한탄하고 푸념에 절망만 늘어놓은 것을...이주의 마이리뷰라니...

프레이야 2007-06-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이매지 2007-06-0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조금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멜기세덱 2007-06-0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배혜경님, 이매지님> 감사합니다.

드팀전 2007-06-0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많이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스승의 옥편 -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지난 2월에 인천 교보문고 나들이를 갔다가 이 책을 만났다. 지하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교보문고에 들어서면 제일 처음보이는 신간서적 코너를 살펴보다 이 책이 눈에 확 띄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민 선생의 책을 좋아해서 그의 신간소식에 귀를 기울여 왔었다. 그 즈음에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과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란 책이 연이어 출간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던 때였다. 이 책이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옥편'이라! 그 자리에서 집어들고 <책머리에>를 읽어보았다. "지난 10년간 쓴 글을 모았다.", "책 속에는 올해 열다섯이 된 둘째의 다섯 살 때 이야기부터 최근 이야기까지가 섞여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의 삶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는 책이란 얘기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2권의 책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른 종류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문들을 모아두고 있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단문이 책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보았다. 그가 지금의 한문학자가 되기까지 이런 스승의 삶의 가르침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덜누덜해진 스승의 옥편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던 제자 정민의 모습이 아른거려 그만 책을 덮고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사실 교보문고 나들이의 본래 목적은 책사러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책을 구경하는데 있다. 간혹 몇 권의 책을 사오기도 하지만, 그날 구경한 책들을 메모지에 꼼꼼히 적어오는 것에 주 목적이 있다. 그 날도 이 『스승의 옥편』을 메모지의 가장 윗편에 굵은 글씨로 적어놓고, 집에 와서 알라딘의 보관함에 담아 놓았다. 보관함에 담아 놓은 책은 오래 묵히는 것이 많았지만, 이 책 만큼은 며칠을 묵히지 못했다. 그렇게 이 책을 주문하여 구입한 후에 책상의 한 자리에 올려두고 매일 몇 편씩 읽어갔다. 사실 단숨에 읽어도 별 무리없는 책이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10년의 삶의 향기가 배어있는 이 책에서 정민 선생의 진한 향기를 맡기는 조금의 시간과 여운을 가져야만 했던 것이다.

한문학자라고 하면 흔히 좀 보수적일 것 같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옛 사람들의 사상을 되풀이하는 것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고전이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루함의 대명사니까 말이다. 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많은 한문학자들이 고전을 현대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한문학자들 가운데 가장 선두주자는 바로 정민 선생이 아닌가 한다.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나 최근에 나온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등이 그런 작업의 성공적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 속에서는 옛사람은 살아 있고 오늘의 사람은 어느 틈으론가 사라져 버린다. 정민 선생의 이런 작업들 속에서 그의 면모를 살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성격이 사뭇 다르다. 한 두 쪽의 짧은 글들은 그의 생활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기존의 그의 작업들과 비슷한 방식의 글들은 이 책의 1부와 4부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들에서는 정민이라는 개인의 삶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그리고 솔직한 고백으로 울려나고 있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4학년짜리 누나가 덧셈 뺄셈을 못하고 일곱 살배기 제 동생이 못내 한심했던지 제가 가르치겠다고 먼저 나섰다.
  "7 빼기 5는 뭐야?" "7 빼기 5?" "그래! 7에서 5를 빼면 뭐냐구?" "7!" "뭐? 어째서 7이야! 7에서 5를 뺐는데?" 누나의 말꼬리가 조금 올라간다. 답답하다는 듯 동생이 말한다. "자! 여기 7이 있지?" "그래." "그리구 여기 5가 있지?" "그래." 동생은 손가락으로 5를 가린다. "7에서 이렇게 5를 빼고 나면 7만 남잖아? 그러니까 7이지." 할 말 잃은 누나가 쪼로록 달려와 말한다. "아빠! 얘 좀 봐. 7에서 5를 빼면 7이래요."
  나는 에디슨이 생각나서 기특해서 혼자 막 웃었다. 
    -「에디슨이 생각나서」전문, 144쪽.

이런 그의 '생활 속의 단상'들에서 정민이라는 개인의 삶과 사유를 엿본다는 것은 이전의 그의 성공적 작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그가 한문학자로서 살아온 인생의 여정들 속에 이런 내면이 있었다는 사실들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의 한문학자로서의 성공적 작업들, 그러니까 고전을 현대적으로 번역해 내고 그것은 오늘날에 적합하게 재구성해내는 그의 고전을 보고 해석해 내는 시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내면의 고백과 같다. 정민이라는 한 개인이 올곧이 살아있는 책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그는 소리소문없이 세상에 내어놓은 까닭은?

옛사람의 글을 현대적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문학자가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 또한 예외가 아니가. 한자 한 글자 한 글자에 다 뜻이 있어, 그것을 문자 그대로 풀어내기만 한다고 그것이 번역이랄 수는 없다. 그 안에 담긴 상황과 문맥을 함께 풀어내야 진정한 번역일 것이다. 그런 작업들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는 인상깊은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있다. 한시를 번역하다가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했던 것은 그의 스승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이라고 더욱 간단히 바꿔버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운치와 운율과 여운을 더욱 살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민 선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아찔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민 선생의 문학적 감수성을 이 책에서 자주 엿볼 수 있다. 특히나 그는 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러편에서 시를 읽으며 느낀 감회들을 적고 있다. 보통 한시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정주나 신석정, 김용택의 시들도 즐겨 읽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나,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들에 얽힌 단상들도 이 책에는 등장한다. "피곤한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또한 명문장이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 그리고 주변 생활의 단상에서 오는 다양한 사유 속에서 그의 고전의 현대화 작업들은 보다 창조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아닐까?

또한 이 책에서는 그가 자식을 키워오면서 느끼는 기쁨들과, 세상의 여러 씁쓸한 단상들, 그리고 지난 추억에 대한 구수한 정취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정민이란 한 개인이 있기까지의 희로애락을 이 책 한 권에 담아놓은 것이다. 옛 글 뒤에 묻혀있던 오늘날의 한 한문학자가 옛글이 아닌 자식의 글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옛사람의 풍취 그 이상으로 정민이란 개인의,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한 학자의 짙은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애착이 간다는 3부의 '생활의 발견'에 모은 글들이 그만큼 나에게는 값지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독서에 관한 좋은 글들이 담겨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다만 부록에 지나지 않게끔 느껴진다. 이 책의 진한 정민이란 사람의 향기에 깊게 취할 따름이다. 언젠가 그의 이런 글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옛글의 명문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