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傳千古心(서전천고심)  글은 옛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讀書知不易(독서지불이)  글 읽기란 쉽지가 않을 줄 아네

卷中對聖賢(권중대성현)  책 속에서 성현을 마주 대하니

所言皆吾事(소언개오사)  말씀하는 것이 모두 내 일이라네

- 李滉(이황), 『退溪集(퇴계집)』에서

 
   

더 이상 무슨 첨언이 필요할까? 우리가 이황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일'로 체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더 책을 읽어야 그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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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1-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멜기세덱 2008-01-31 01:32   좋아요 0 | URL
제가요? 부끄럽게....ㅋㅋ

순오기 2008-01-30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공감~~~~

멜기세덱 2008-01-31 01:33   좋아요 0 | URL
아, 왜 슬프실까요?

세실 2008-01-3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팍팍 드는 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1-31 01:34   좋아요 0 | URL
같은 말이겠지만, 깊이 있게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팍팍 드는 글이죠.ㅎㅎ
 

오늘은 알라디너를 위한 명언이기 이전에 저 스스로를 위한 명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 카테고리의 글들 모두가 그런 것이긴 하지만, 오늘은 얼마 전의 우연찮은 행운도 있고 해서, 성원해 주신 알라디너 지인들께 감사의 인사를 이 글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연말이잖아요? 한 해 동안 다른 알라디너 분들보다는 턱없이 미미하지만, 많다면 많은 저의 1년 간의 독서를 반성하는 차원이기도 하답니다. 요 며칠 제 머릿속을 맴돌던 명언은 이것이었습니다.

   
 

書中自有千鐘祿(서중자유천종록)

책 속에 천종(千鐘)의 녹(관원에게 주는 봉급)이 저절로 들어 있다.

 
   

정말 그럴까요? 잘 아시다시피 천종의 녹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알라딘 적립금은 들어있더군요. 이 말과 관련해서 성종과 구종직의 이야기가 전해지더군요. 낮은 관직에 머물던 구종직이 어느날 우연히 궁을 거닐던 성종을 만나 그 앞에서 『春秋(춘추)』를 줄줄이 외웠다는군요.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구종직을 성종은 하루 아침에 부교리로 승차시켰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7급정도 공무원이 하루 아침에 장차관급으로 승진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책을 많이 읽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노력에 걸맞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온 이 행운이 이런 말로 미화하기에는 제게 너무 자격이 없습니다. 고작 리뷰 하나 용케 써서 어떨결에 봉잡은 것 가지고 "書中自有千鐘祿(서중자유천종록)"을 말하니 이 아니 가당찮은 노릇입니까?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계기로 얼마간 숙연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과연 나는 독서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 독서는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럴 때 참 막연합니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는 전연 보이지 않고, 매일 매일 허송세월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리뷰를 써서 이주의 마이리뷰도 당선된 적이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책이 내게 무엇을 주었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일 뿐이고, 그 이상은 없습니다. 『88만원 세대』도 『만들어진 신』도 천종록은 커녕 일종록 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괜히 머리싸매기만 할 뿐, 내게 돈이 될만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재테크 관련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 같은 것을 읽으면 좀 다를까요? 저는 그런 것들을 가급적 읽지 않습니다만, 그런 책을 읽고 천종록을 얻었다는 얘기를 아직은 듣지 못했습니다. 고사를 보아도 그런 책에서 천종록이 나올 것 같지는 않기도 하구요. 『희망의 인문학』의 리뷰가 당선이 되서 꽤 많은 득을 얻었지만, 그것이 제게 진정한 천종록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이 가르쳐 준 것은, 책, 나아가 인문학을 통해 어떻게하면 천종록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그 왕도를 얼핏 엿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참 정리가 안 됩니다만, 오늘은 이렇게 정리가 안 되는 대로 그냥 주저릴까합니다. 앞으로 저나 여러분이나 책 읽기는 계속하시겠지요? 천 만 금, 억 만 금을 벌기 위해 기를 쓰고 책을 읽으시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읽는 저같은 사람은 간혹 이거 뭔 한가한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그러나 "書中自有千鐘祿(서중자유천종록)"을 생각하면서, 그 천종록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그렇게 감내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과연 천종록은 무엇일까요? 입신양명도 아니고 일확천금도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 진정 잘 모르지만,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세상에 그나마 쓸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책이 제게 주는 천종록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올해의 책 중에 가장 값진 것으로『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꼽는데요, 이것은 그 책을 통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참으로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그런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내가 변화할 때 이 책은 내게 천종록을 준 것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독서가 천종록을 움켜 쥘 듯 하면서도 놓쳐버린 것만 같습니다. 내년에는 좀 달라질 수 있어야겠죠?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되셨다면, 만종록(萬鐘祿), 억종록(億鐘祿)에 도전해 보시구요. 모두들 편한 밤 되십시오. 멜기세덱이었습니다.

* 이 말의 출처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속담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양한 고사들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도 같고,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아마도 중국 北宋(북송) 제3대 황제(997-1022)였던 眞宗(진종)의 권학문이지 싶더군요. 「眞宗皇帝勸學文(진종황제권학문)」의 "書中自有千鍾粟 (서중자유천종속)"의 변형이 아닐까 싶네요. 말이 나온 김에 이 「권학문」을 한 번 감상해 보시지요. 느끼는 바가 참 많습니다.

   
 

富家不用買良田(부가불용매량전)
                                  집을 부유하게하려고 좋은 밭을 사는 것은 소용없다.
書中自有千鍾粟(서중자유천종속)
                                  글 가운데 자연히 천종의 곡식이 있도다.
安居不用架高堂(안거불용가고당)
                                  삶을 편하게 하려고 큰 집을 짓지마라.
書中自有黃金屋(서중자유황금옥)
                                  글 가운데 자연히 황금옥이 있다.
出門莫恨無人隨(출문막한무인수)
                                  문을 나설 때 따르는 사람 없다고 한하지 마라.
書中車馬多如簇(서중거마다여족)
                                  글 가운데 수레와 말이 떼지어 있도다.
娶妻莫恨無良媒(취처막한무량매)
                                  장가를 들려는데 좋은 중매 없다고 한하지 마라.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글 가운데 얼굴이 옥같은 여자가 있도다.
男兒欲遂平生志(남아욕수평생지)
                                  사나이가 평생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六經勤向窓前讀(육경근향창전독)
                                  육경을 부지런히 창 앞에 두고 읽어라.

-「眞宗皇帝勸學文(진종황제권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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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2-21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많이 음미하고 갑니다.
'책을 읽고 변화할 때 천종록을 준 것이 아닐까'에 공감...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나의 삶에 실천해야겠다는 다짐과 같이!

마노아 2007-12-2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사고에서 깊은 깨우침을 새기는 멜기세덱님이 근사합니다. 많이 공감하며 고개 끄덕여보아요.

2007-12-23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天高馬肥(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들 하지요. 가을입니다. 가을 중에서도 10월은 그 마지막 밤을 기억하게 하는 달이지요.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어데 계절이 따로 있어 책을 읽는 것이겠습니까마는, 오늘은 따사로운 햇살을 내려 받으며 서늘한 바람부는 벤치에 앉아 세상 모르고 책을 읽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일까요?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책을 읽다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평생을 이렇게 여유 있고 한가하게 책이나 읽으면서 유유자적 보내고 싶다는. 무엇에 쫓기지 않고, 걱정 없이, 가는 세월을 벗 삼아서, 책 속의 글줄기들을 찬찬히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어질 수 없는 상상이겠지요?

陶淵明(도연명)의 「五柳先生傳(오류선생전)」에 이런 글귀가 있어 옮겨 봅니다.

   
 

閑靖少言(한정소언), 不慕榮利(불모영리),

 好讀書(호독서), 不求甚解(불구심해).

한가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며
말을 줄이고,
명예나 실리를 바라지 않고,
책 읽기를 좋아하나
깊이 따지려 하지는 않는다.

 
   

삶은 항상 분주하고, 이 일이 끝나면 저 일이 닥치고, 말은 점점 늘어만가고, 높아만 가고.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은 어쩌면 죄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여유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만, 늘상 한없이 책에 빠져 지내고 싶은 마음 또한 숨기지 못하겠습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쓸데없는 말 섞을 필요도 없이, 별반 이익이 될 것도 없지만, 그저 책에 묻혀 한세상 여유로이 살아봤으면,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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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0-12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

승주나무 2007-10-13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맡아보는 동양의 향취.. 감사합니다. 아프 님은 좀 뜨끔했을 것이에욧.. 저도 좀 뜨끔~~~

순오기 2007-10-20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 침 맞았어요!

멜기세덱 2007-10-20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 엥...저는 뱉은 적이 없는뎅...ㅋㅋ
 

여러분들은 책을 어떻게 대하시나요? 알라딘에서는 이만한 우문도 없겠습니다만, 책을 귀하고 소중히 여기는 방법들이 요즘은 제각각일 거라고 생각이 되네요. 흔히는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는 분이 많으시죠? 그런데 이 밑줄 긋는 도구도 제각각이더라구요. 저는 샤프를 줄곧 이용하는데요, 어떤 분들은 눈에 확 들어오게 색연필이나 형광펜을 이용하시기도 하고, 볼펜을 이용하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더라구요.

예전에 저는 워낙에 책을 애지중지 귀하게 여긴 터라, 볼펜은 고사하고 샤프나 연필로도 책에 밑줄을 긋는 것까지 꺼렸더랬습니다.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한 번 읽고 난 후, 기억에 남는 대목을 찾아보려면 한참을 또 뒤적여야하는 어려움이 있더라구요. 요즘은 샤프를 이용해 약간씩 밑줄을 긋는 편이고, 포스트잇 같은 것을 이용해서 표시를 해놓은 방법을 사용한답니다.

어떤 분들은 중요한 대목 등에 책을 접어서 표시하거나 볼펜이나 형광펜 혹은 색연필로 찐하게 표시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기도 하는데, 간혹 좀 지저분하다 싶을 정도까지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런데요, 그런 것들을 보면 참 책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자기 책 표시하겠다고 책표지 등에 매직으로 대문짝 만하게 도배하시는 분들, 이건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심히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제발 그런 거는 좀 안해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이왕 표시를 하신다면 깔끔하게 쓰신다던지, 책도장 같은 걸 이용하신다면 보기 예쁘고 좋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저자들은 책머리말에 뜨거운 용기 받침으로라도 쓰인다면 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게 반드시 진심을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나오는 하드커버 책들은 라면 끊여먹을때는 받침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지 싶기도 한데요, 여기 알라딘에는 그러실 분들은 거의 없으실 거라고 사료됩니다. 지나친 기대일까요?

책을 어떻게 대하건, 그건 읽는 분들의 자유시겠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책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공통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책을 귀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다음의 연암 박지원의 말을 보면 억소리가 나실 수도 있겠습니다.

   
 

對書勿欠(대서물흠), 對書勿伸(대서물신), 對書勿睡(대서물수),

若有嚏咳(약유체해), 回首避書(회수피서),

翻紙勿以涎(번지물이연), 標旨勿以爪(표지물이조).
                                                                                         -朴趾源(박지원)-

책을 대해서는 하품을 하지 말고
기지개를 켜지도 말며 졸지도 말아야 한다.
기침이 날 때는 머리를 돌려 책을 피하고
책장을 뒤집되 침을 묻혀서 하지 말고
표지를 할 때 손톱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오늘은 문장이 좀 기네요. 간단하게 한자 공부를 좀 해보시죠.

첫 3구절은 문형이 유사합니다. 對書, 곧 "책을 대하다"라는 뜻이죠. 對는 대답할 대, 혹은 대할 대입니다. 그리고 축구나 야구 경기에서 "한국 대 일본" 혹은 "현재 스코어 3 대 0" 할 때의 대도 이 對입니다. 勿은 "~지 말다"라는 뜻이고, 欠은 하품 흠입니다. 그러니까 "하품하지 말아라" 이런 뜻이죠. 합쳐보면, "책을 대할 때 하품 하지 말아라."가 됩니다.

伸은 펼 신인데요. 申도 펼 신입니다. 여기에 人(사람 인)이 붙었죠. 그래서 伸은 "몸을 펴다"란 뜻을 더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몸을 펼 때는 흔히 기지개를 펼 때가 되죠. 따라서 여기서는 "기지개를 펴다"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첫 구절과 같은 방식으로 "책을 대할 때는 기지개를 펴지 말아라"라는 뜻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睡는 잠 수, 혹은 잠 잘 수인데요, 여기서는 동사 잠잘 수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책을 대할 때는 잠자지 말아라" 즉 졸지 말라는 얘기죠. 여기까지는 쉽죠?

若은 흔히 같은 약으로 읽는데요, 여기서는 "만약 ~ 라면"으로 해석합니다. 有와 함께 해석하면 "만약 ~가 있다면"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다음 두 글자가 어려운 한자입니다. 嚏는 한자변환이 안되서 한자사전 검색을 통해 따올 만큼 흔한 한자는 아닌데요, 이 글자는 기침 체로 읽습니다. 咳도 기침을 뜻하는 기침 해인데요, 굳이 구분을 하자면 嚏는 기침 중에서도 재채기를 뜻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냥 둘이 합쳐서 기침으로 해석하시면 되겠네요. 4번째 구절은 "만약 기침(재채기나 기침)이 날 때는"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자 "기침이 날 때는" 어떻게 하라는 걸까요? 回은 돌 회고, 首는 머리 수입니다. 합치면 "머리를 돌려라"로 해석할 수 있겠죠. 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까요? 避는 피할 피입니다. 여름에 피서를 가죠? 이때의 피가 이 避입니다. 그러니까 기침이 날 때는 책에 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돌려서 책을 피해" 기침을 하라는 얘기가 되죠.

翻은 날 번인데요. 羽(깃 우)를 보면 뜻을 짐작할 수 있죠. 난다는 뜻에서 파생되어서 뒤집다는 뜻을 더하게 됩니다. 번역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고요, 羽 대시에 飛(날 비)를 붙여서 飜(뒤집을 번)으로 더 자주 씁니다. 간단히 여기서는 뒤집을 번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紙는 잘 아시다시피 종이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翻紙는 "종이를 뒤집다"는 뜻이겠죠? 以는 수단과 도구를 나타낼 때 쓰입니다. "~로써"로 해석하시면 되구요, 涎은 좀 지저분한 글자인데, 침을 뜻하는 한자입니다. 침 연으로 읽습니다. 합쳐보면, "종이를 뒤집을 때는 침으로써(침을 묻혀서) 하지 말아라"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標는 표시하다라는 뜻입니다. 旨는 뜻 지고요. 標旨는 "뜻을 표시하다"로 직역할 수 있겠는데, 흔히 합쳐서 표지로 자주 쓰입니다. 국어 시간에 표지에 대해서도 배우는데요, 표지판 할 때에 지는 識(기록할 지)를 씁니다. 뭐 대강 비슷한 뜻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標旨는 그러니까 어떤 것을 표시해 놓는다는 뜻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爪는 손톱 조를 뜻하죠. 앞 구절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표지를 할 때는 손톱으로써 하지 말아라"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첨언이 필요한 때요, 손톱으로 표지를 하지 말아라는 얘기는 무엇인고 하니, 옛날에는 종이질이 좋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중요한 곳을 표시할 때 종이를 접어 놓기도 했는데, 이렇게 종이를 접어 놓으면 종이가 금방 상해서 접힌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다가 손톱으로 꾹 눌러서 표지를 해 놓기도 하는데요, 이 경우도 종이가 상하기는 별반 차이가 없겠습니다.

자, 어렵게 문장을 풀어봤는데요, 어지러우시죠? 그런데 어떻게 옛날 선비들이 책을 이렇게 대했을 거란 생각을 해보시니까, 더 어지럽지 않으세요? 뭐하지 말고 뭐하지 말라는 식의 예법들이 많았지만, 책에 대해서까지 이런 제약이 있을줄은 모르셨을 겁니다.

뭐, 예전에 그렇다는 거고, 요즘은 종이 질이 좋아져서 기침을 좀 해도되고, 접어 놓아도 별 탈은 없을 겁니다. 하품도 하고, 기지개도 책을 대놓고 하면 좀 어떻겠습니까마는, 이 구절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점도 책을 귀하게,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구요? 제 선생님께서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더하셨는데요,

   
  박지원은 진리가 담긴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책에 대한 사뭇 경건한 태도를 가졌다. 그래서 책을 베고 자거나, 책으로 그릇을 덮거나 책을 어지럽게 던져두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영-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진리가 담긴 책"이란 말입니다. 여전에 책은 곧 경전이어서 더욱 그러했겠지만, 오늘날에도 우리가 읽는 책에는 어떤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고, 그런 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책을 보다 소중히, 귀히 여긴다면, 어느 책에서도 보다 값지고 귀한 진리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책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은 또한 아름다운 세상의 또다른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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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9-28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차마 책에 줄을 못긋겠고..한때는 공책에 책의 제목과 이름 그리고 페이지수를 적어놓고 꼼꼼하게 기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그냥 뭐 막가파식인거죠..

멜기세덱 2007-09-28 01:45   좋아요 0 | URL
어쨌거나, 어떤 식으로 읽건간에, 메피님이야 책을 참 효과적으로 읽으실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가장 책을 귀하게 대접하는 것이 아닐까요? ㅋㅋ
저는 워낙에 미련 곰탱이식으로 무식하게 읽어서리....나중에 활용을 제대로 못한다는....ㅋㅋㅋ

로쟈 2007-09-2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공부하는 책들의 경우엔 형광펜을 사용합니다(복사할 때 흔적이 남지 않아서). 그게 나름 책을 '대우'해주는 거라고 생각하면서(그냥 꽂아두느니)...

멜기세덱 2007-09-28 01:49   좋아요 0 | URL
저는 '공부하는 책'은 자까지 동원해서 열심히 밑줄을 거요.(사실 공부를 거의 안 하지만....) 몇가지 색볼펜을 이용하기도 하고, 형광펜도 사용하고.
그런데 긋다보면 다 중요한 거 같고, 죄다 모르는 거고 그래서 거의 밑줄로 책을 도배해 버릴 지경까지 되기도 해요...그러면 좀 지저분해 지더라구요...
점점 내공이 쌓여서 로쟈님 반의반만 되도, 좀더 효과적이 될텐뎅....ㅋㅋㅋ
열심히 읽고, 열심히 공부하다보면....저도 언젠간 좋은 방법을 마련할 수 있겠죠? ㅎㅎㅎ(혹시나 좋은 노하우라도.....ㅋㅋ)

순오기 2007-09-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잘 새겨둡니다. 저는 밑줄치기 위해서 책을 사는데, 밑줄 쳐 놓으면 나중에 금방 찾을 수 있어서 좋아요. 내가 책을 사랑하는 방법은, 책 읽다가 덮을때는 반드시 책갈피를 이용하죠. 책갈피를 만들어서 책을 빌려줄때도 같이 끼워 줍니다. 절대 그냥 엎어놓거나 책날개로 끼우지 말라고...

멜기세덱 2007-09-29 02:23   좋아요 0 | URL
책 읽다가 잠깐 딴짓할때는 자주 엎어두는뎅....ㅋㅋ
앞으론 순오기님 말씀따라 책을 좀더 곱게 다뤄야 겠어요....ㅋㅋ

2007-09-29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29 02:24   좋아요 0 | URL
궁중연인식이라....궁중에서 연애하면 임금님 빼곤 능지처참 당하는거 아닌가요...?ㅋㅋㅋ
따지면 저도 약간 궁중식인뎅....ㅎㅎ

웽스북스 2007-09-2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멜기세덱님, 저는 한자 때문에 좌절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도 이제 책에 한자가 많다고 피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더듬더듬 옥편을 친구삼아 읽고 있답니다 ^^
전 주로 포스트잇 애용, 포스트잇 없음 책끝을 살짝 접고, 밑줄은 샤프보다는 사각사각 연필로 ^^ 없을 땐 볼펜도 쓰고 그래요- 결국 내가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니까요 제가 책을 사랑하는 방법은 많이 밑줄그어주기 ^^

멜기세덱 2007-09-29 02:27   좋아요 0 | URL
ㅎㅎ 멋지단말 감사합니다...ㅎㅎ
얼추 댓글단님들 말씀을 정리 쫙 해보면,
오늘날 책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 책 속에 담긴 소중한 의미(어쩌면 진리)들을 얼마나 잘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간직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하긴 옛날에는 오늘날보다는 현격히 적은 종류의 책 몇을 읽고 또 읽고, 외우고 읊어야 했으니, 계속해서 보아야 할 책을 보다 깨끗하고 온전하게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던 거죠.
말씀대로 "내가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거죠....ㅎㅎ

Jade 2007-09-29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주로 하이테크로 과감하게 쫙쫙 그어버리는데....뜨끔한데요 ^^;;

프레이야 2007-09-2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으며 혹시 자까지 대고 샤프로 밑줄 좍~ 아니신가 했는데 로쟈님 댓글에 덧글 보니
정말 그러셨군요. ㅎㅎ 전 샤프 아니고 그냥 연필 뭉툭하게 깎아서 비뚤게 긋지요.
옆지긴 만년필로 긋더군요. 형광펜은 예전에 공부할 때 쓰긴 했지만 지금은 아니고 ㅋㅋ
그나저나 한자로 풀어주는 명언 시리즈, 좋습니다. 그래도 한자는 어려워용~
 

오늘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고 봐야겠죠? 다들 명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저는 이번 추석에도 방콕할 가능성이 농후하답니다. 핑계는 공부한다는 거죠.ㅎㅎ 작년에도 집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제일 큰 걱정은 밥 먹는 거랍니다. 근처 식당들이 죄다 문을 닫더라구요.

지난 주 목요일부터 시작한 <한문교양강좌>를 이번 주에도 들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다가온 구절이 있어, 여기에 또 소개를 하게 됩니다. 어떤 구절이냐고요? 함께 음미해 보시겠습니까?

   
 

與善人居(여선인고), 如入芝蘭之室(여입지란지실),

久而不聞其香(구이불문기향), 卽與之化矣(즉여지화의).

선한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 있으면 향기를 맡지 않아도 같이 동화된다.

                                                           -『孔子家語』-

 
   

이 구절은 『공자가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선해진다는 것이죠.

알라딘 서재지기들이 있는 곳, 바로 이 곳이 "芝蘭之室" 아닐까요? 이 곳 알라딘 서재에서는 서재지기들의 선한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느끼는 건, 다만 저 뿐일런지요?

이곳 알라딘의 많은 알라디너를 보면서, 그들의 선함과 뛰어난 지성과 재치와 정감과 기타 등등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공자님은 제자들에게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라."하라며 '親仁(친인)'을 말씀하셨다지요? 그 親仁의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알라딘 서재에 있지 않나합니다.

알라딘의 많은 지인들을 통해 그들의 지성과 감성의 향기를 맡으며, 저도 자연스레 (무디긴 하지만) 동화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며,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저도 같은 향기를 뿜어내어 다른 사람들을 동화시킬 경지에 달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감히 해보게 됩니다.

이 곳 알라딘의 "芝蘭之室"에서 우리 오래도록 함께 아름다운 향기로 서로를 동화시키며, 동화받으며, 그렇게 살아가요? 떠나신다는 말은 저를 아프게 한답니다.ㅎㅎ

올 추석, 저는 이곳 "芝蘭之室"에서 더욱 "與之化"하겠습니다. 다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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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두 집에서 방콕-

멜기세덱 2007-09-21 20:21   좋아요 0 | URL
놀러 갈까요? ㅋㅋㅋ

비로그인 2007-09-21 20:44   좋아요 0 | URL
으음... 추석 임시 금촌 캠프라도? ㅎㅎㅎ

멜기세덱 2007-09-22 00:34   좋아요 0 | URL
앗! 금촌.
금촌, 그곳은? 안 좋은 추억이 있는데...ㅋㅋㅋ

라주미힌 2007-09-2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구절이네요...

멜기세덱 2007-09-21 20:21   좋아요 0 | URL
언제부턴가, 라주미힌님의 댓글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어요...ㅋㅋ
기뻐요...ㅎㅎ

라주미힌 2007-09-21 21:55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흥미가 별로 없었는데... 다시 생겼나봐요 ㅎㅎㅎ

멜기세덱 2007-09-22 00:33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라고 말하지는 말아요.)? ㅋㅋㅋㅋ

마늘빵 2007-09-2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구석 프로젝트.

멜기세덱 2007-09-21 20:21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대는 가족과 함께 아닌가요?
전 혼자라구요...ㅠㅠ;;

마노아 2007-09-2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집구석은 맞는데 조카들과 함께 데굴이에요. 멜기님 추석 연휴 잘 지내셔용^^

멜기세덱 2007-09-21 20:22   좋아요 0 | URL
저는 빡세게 공부할게요....ㅋㅋ

2007-09-21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21 20:25   좋아요 0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근데,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 이루었다."이고요, 이 "엘리 엘리 ~"는 우리말로 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인데요.... 음~~
하여간 추석 즐겁게 보내세요....ㅎㅎ

순오기 2007-09-21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싱글들은 방콕인가요?
저는 미국인 친구 데리고 목포 큰댁으로 갑니다~~~~
"芝蘭之室" 마음에 새깁니다.
님은"~향기를 뿜어내어 다른 사람들을 동화시킬 경지"에 이르셨다고 사료되옵니다~

멜기세덱 2007-09-21 20:26   좋아요 0 | URL
커플들은 그럼 태국?

Mephistopheles 2007-09-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善人- 이 한자 두글자에 마구 오금이 저리며 뒤틀리는 메피스토 1人

멜기세덱 2007-09-22 00:36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님께 제가 동화되어도 행복하겠어요....ㅎㅎㅎ

프레이야 2007-09-2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혼자 명절 보내시는 거에요? 어째 송편이라도 좀 드리고 싶네요..
시험공부 하시며 보내시겠군요. 나름 잘 보내시기 바래요^^

멜기세덱 2007-09-22 00:37   좋아요 0 | URL
주소 알려드릴까요? ㅋㅋㅋㅋ

프레이야 2007-09-22 12:30   좋아요 0 | URL
님, 진짜 주소 좀 알려주세요^^ 속닥속닥~~

2007-09-21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22 00:38   좋아요 0 | URL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ㅎㅎㅎ
정말 식당문 다 닫았으면 전화드릴게요....ㅋㅋㅋ

비로그인 2007-09-2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한 표.
좋은, 그리고 적절한 글이군요.^^

Jade 2007-09-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도 혼자 사셨어요? 몰랐네 - 혼자사시는데 책이 천권이면....와 부러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