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새판짜기 - 박정희 우상과 신자유주의 미신을 넘어서
곽정수 엮음 /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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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짠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말을 내가 익숙히 자주 듣는 경우는 무엇보다 바둑에서다. 바둑에서 '판을 짜다'라는, 일종의 은어 혹은 전문어가 있는데, 이 말은 주로 바둑에서의 포석(布石)에 해당한다. 바둑 용어인 '포석'이란 말이 여러 상황에서 비유적으로 쓰이지만, 이 말의 기본적 의미는 돌을 벌여놓는다는 것이다. 바둑을 두자면, 361점의 빈 바둑판에 흑백을 교차해 가며 한 점 한 점 두어가게 되는데, 이 때에 허공과도 같은 빈 바둑판에 효율적으로 돌들을 배치함으로써 "집의 기초와 기둥을 세워놓는" 것이 바로 포석이다. 바둑은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자기 돌을 경계로해 둘러쌓인 빈 점들이 바로 집인데, 결국 이 집들의 대략적인 경계짓기가 포석인 셈이다. 이것을 얼마나 능률적으로, 효과적으로, 균형있게 짜느냐에 따라 승부의 8할 이상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데, 초절정 고수들의 대국에서는 돌 몇 점만 놓아보아도 그 판의 승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바둑에서 포석이 무척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둑의 최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바둑기사들은 이 포석을 무척이나 중시하고, 주어진 제한 시간을 거의다 이 포석 단계에서 허비한다. 한 칸을 높게가느냐, 한 칸을 더 벌리느냐, 상대의 돌을 공격하느냐, 내 집을 보다 튼튼히 지켜두느냐를 신중히 고민하고 길게는 100수 이상을 머릿속에 놓아보며 착점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착점에 따라서, 즉 한 칸을 높이느냐 낮추느냐, 한 칸을 더 가느냐, 덜 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바둑 성향이랄까, 스타일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실리형이면서 공격적인 이세돌 9단 같은 경우 내 집을 지키기보다는 상대편 집을 깨고, 이왕 벌리는 것은 최대한 많이 벌리고 하는 것인데, 그 차이는 단 한 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다. 반면 이창호 9단은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집을 신중히 지켜가며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포석을 짜나가는데 그 차이는 한 칸을 높이느냐 낮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이창호와 이세돌의 바둑 스타일을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단 번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이 차이가 그리 크게 표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바둑이 공격적이냐 아니냐, 실리형이냐 세력형이냐 하는 것은 포석에서의 아주 미묘하고 미세한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그 차이가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들 모두 포석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아무리 집을 지키고 실리를 추구하는 바둑 기사라고 해도 그 조화와 균형에 맞지 않으면 실리가 아닌 세력을 지향하고 집이 아닌 공격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바둑에서는 "판을 제대로 짰다"라고 하는 것이다. 무조건 공격하고, 무조건 집지키고 해서는 어느 누구도 바둑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이창호나 이세돌이나 그 바둑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판을 짜는데 있어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포석을 짜나가는 것이다.

바둑 얘기를 길게 했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무엇이든지 바둑에서의 포석을 짜는 원리처럼 모든 상황과 조건의 조화와 균형 아래 각각이 추구하는 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판이 '제대로' 짜였다는 언사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인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세 사람과 한겨레 기자 곽정수 씨가 내놓은 『한국경제 새판 짜기』를 읽고 든 생각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잘못 짜면 돌이킬 수 없는, 설령 되돌리더라던 그 폐해가 클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나라의 경제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이 사람들이 고민하고 토론한 결과물인 이 책이다. '새판'을 짜 보겠다는 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새판'이 아닌 '제대로' 된 '새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학자들이 내어 놓은 '판'이 어떤 것인가를 읽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짜일 수 있는 판일지를 가늠해 보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 양 극단의 대립 가운데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으면서 합리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개혁론자들이 있다. 시장은 강조하되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쟁을 환영하되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중시하고, 개방을 지향하되 준비된 개방을 하자는 입장이다. 시장도 국가도 절대적 선일 수 없으며,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를 위하여 실용주의적으로 시장과 국가가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하자는 입장이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 양극화가 아닌 동반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다.(7~8쪽, 글자 색은 원저.)  
   

 "이런 입장을 공유하는 학자들"이 바로 저자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시장만능주의에서 시장합리주의로", "재벌 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선 성장에서 동반 성장으로", "요소투입형 경제에서 사람 중심 지식경제로" '새판'을 짜는 것이다. 시장합리주의 아래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어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람 중심의 지식경제가 종합하자는 이들이 추구하는 한국경제의 '새판'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 경제를 민주화 하자는 얘긴데, 그렇다면 이들의 판단은 지금 한국 경제는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경제를 지배하는 근본은 자본이고, 그 자본은 결코 민주적이지 못한 것을 속성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민주화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가 속살을 차분히 들어보는 것이 이 '새판'의 '제대로' 가능성을 가름하는 우선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서구사회의 중상주의적 국가개입이 전면화된 상황 속에서 갑자기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적 과제의 완성과 진보진영의 보완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신자유주의로 건너가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는 과거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시장의 야만성, 즉 신자유주의 문제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공공성도 확립하지 못한 채 오늘날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39~40쪽. 글자 색은 원저.)  
   

이들이 진단하는 현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달리 하면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통해 '국가개입'을 줄이고, "국가의 공공성 확립" 아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로 들린다. 이런 견해의 정반대에 있는 또다른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장하준과 정승일이다. 이들이 이 책에서 스스로 말하는 단어들을 섞어보면 이들의 견해를 진보적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수용 가능성을 내비친 이들의 견해에는 다분히 우려스럽니다. 한국경제가 '국가의 공공성을 확립'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배후 세력에게는 그것이 먹혀들 것인가에 의뭉스러움을 감추지 못 하겠다는 것이다.

장하준과 정승일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이들보다 이른 시기에 이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박정희 시절은 중상주의적 경제 정책을 어느 정도 수용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적극적 '국가개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분적 수용에도 다분히 우려를 표명한다. 장하준이 최근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보여주는 것을 토대로 한다면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선진국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장하준 등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면서 이 책 『한국경제 새판 짜기』에서의 이들의 주장에는 우려가 남는다.

   
 

중기업 또는 중견기업이 그 나라의 생산과 고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영세기업이나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구조 개혁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자 성장과 고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재계나 정부가 주장하는 재벌 중심의 투자 확대를 통한 이른바 떡고물 전략,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 전략은 U자형의 구조를 점점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73쪽.)

세계 각국에는 분명히 재벌기업,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도록 규제하는 장치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장치가 없이 유일하게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금산법 정도가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지금 무력화시키면서 외국에는 그런 규제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훨씬 강력하고 효율적인 규제가 있는데도 말입니다.(104쪽.)

당시 루스벨트는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와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대재벌 기업집단은 모든 부를 차지하는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들은 못살게 되어서 대공황이 왔고, 이런 상황이 지속하지 않게 하려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상황인데, 그걸 좌파로 몰아붙이며 비판을 하고 있으니 답답한 겁니다.(105쪽.)

재벌은 더는 우리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재벌의 좋은 일자리는 소수 노동자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좋은 일자리는 대폭 줄어들고 있어요. 이것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재벌 중심 체제가 더는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알려주는 자료지요.(125쪽.)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 재벌과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옳다. 무엇보다도 재벌만이 득세하는 이 경제구조는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재벌 개혁이나 중소기업 육성이 극단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에도 조화와 균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재벌을 개혁하고 그것을 감시하고 견제할 국가적 통제 수단과 정책의 마련은 필요하되, 그 재벌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 보다 투명성을 갖추고 효율적인 경제력을 가진 기업으로 변모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재벌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다는 적하효과에 대한 이들의 비판을 동의하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바람직하게 유기적으로 작동되는 경제 구조가 한국사회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장하준의 견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의 견해와 이들의 재벌 개혁에 대한 강조점이 한 곳에서 만나서 보다 효과적인 경제 구조 개편의 대안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양극화는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세계화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는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218쪽.)

우리가 양극화라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 고민의 출발점이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한국 경제의 현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화되어 있는 나라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기 때문에 선진국과는 반대방향으로 정책을 끌고 가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재계나 기득권 세력이 '전 세계가 복지시스템, 세율구조, 노사관계를 이런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한국의 양극화 문제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대책 측면에서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와 일관성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해요.(236~7쪽.)

 
   

이런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최근 양극화 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지배계층의 논리에 따라서는 결코 양극화가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들의 견해는 탁월하다. 이 중 홍종학 교수는 5가지 정도의 대책을 제시하는데, "안정적 경제운영, 공정한 경쟁제도 확립, 경제성장 과실의 공유, 사회적 보험 강화를 통한 패자부활전의 활성화, 소득재분배 및 후생지원"이 그것이다. 나는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 성장의 문제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들도 이 부분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요구하는 것으로 읽히는 데, 이 문제는 이렇듯 강제되어야 할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아울러 이들은 "하루빨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장치를 철저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데 의문은 있지만, 그걸 차지하더라도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적극적 대책 마련은 시급한 문제이다.

이들이 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존의 낡은 성장모델은 더는 유효하기 않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른바 "지식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로는 개혁의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이, 밑으로는 더욱 성숙하고 능동적인 주권자들의 참여가 서로 맞물려야 한다." 또한 '제도 변화와 함께 그것이 실제 제대로 작동하는데 꼭 필요한 다양한 사회적 자본들의 축적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식경제라는 패러다임과 그에 따른 정책과 제도의 변화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기존에 대한 전면적 거부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을 이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내놓고 있으니, 이 점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장하준 등의 견해에 대해 "이분들이 주장하는 것은 스웨덴식의 사회민주주의 방식 같은데, 실제로는 재벌 편향적인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에 굉장히 가깝게 느"낀다는 어떻게 들으면 모욕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는 지적이면서도 대협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시장을 믿지 못하는 자들과 국가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 합치할 수 없는 그 거리가 이들을 멀게만 느껴지게 한다. 주주자본주의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냐 하는 어려운 얘기들이 그 안에 많이 들어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많은 부분들에서 공감하지만 '합리적 시장'에 대한 이들의 희망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정 정도의 수용가능성을 내비치는 언사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차이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보다 바람직한, 그래서 정말 '제대로' 판, 한국 경제의 '새판'이 짜여지길 바란다. 이것이 이들만의 논의를 벗어나 보다 확대되고 다양한 견해들을 조율하고 조화할 때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더 많은 이들의 제대로 된 판 짜기, 한국 경제의 신 '포석'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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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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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세상엔 나쁜 놈들 투성이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실 나부터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변명하자면 내가 한 나쁜 짓들이 그렇게 우려할 만큼의 피해를 세상에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보다 더 나쁜 놈들이 주구장창 줄 서 있으니 상대적으로 난 천국문에 가까울 것이라는 일말의 위안이랄까? 보르헤스의 소설집 제목이 『불한당들의 세계사』다. 동명의 제목으로 권혁웅은 시를 썼다.

   
 

  1. 여해적(女海賊)

  면도칼을 씹어대던 주인집 작은 누나는 삼선교 칠공주 가운데 넷째였다 첫째와 셋째는 미아리 파와 영역 싸움을 하다 병원에 실려갔고 둘째는 같은 날 도망쳤다가 제명되었으며 다섯째는 덜컥 임신했고 여섯째는 가출해서 연락두절이었으며 일곱째는 개과천선했다 남은 건 너덜너덜해진 누나의 입 안뿐이었다

  2.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

  이상필은 삼선문방구집 둘째 아들이다 늘 총천연색 크레파스를 갖고 다녔던 우리 반 친구다 그 친구 삶도 무지갯빛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반장이었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삼선극장 뒤편 골목길에서 중학생들의 삥을 뜯고 다녔다 장밋빛으로 시작해서 검은빛으로 완성한 그림이었다

  3. 무례한 예절 선생

  빽바지를 입고 다니던 사촌형을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경철서였다 젊은 녀석이 할 짓이 없어서 유부녀들을…… 순경들이 지나가며 조서를 철한 장부로 머리를 탕탕 내리치고 있었다 형은 고고에서 지루박까지 못 추는 게 없었지만, 순경 앞에서만큼은 맥을 못 추었다

  4. 잔혹한 구세주

  내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사임했다 안질이 심해서 그만둔다고 했는데, 사실은 밤에 찾아온 여집사님을 사택에서 맞아들인 게 문제였다고 한다 밤에도 정장 차림으로 잠자리에 든다고 생각한 분이 잠옷 바람으로 나왔으니 여집사님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그분 눈이 어두웠다는 것도 맞기는 맞는 말이다

  5. 황당무계한 사기꾼

  나주 아줌마가 가출한 것은 내가 고1때 일이다 외아들이 날마다 돈을 내놓으라고 부수고 때리고 발광을 해댔기 때문이다 나보다 여덟살이 많았던 형은 내 나이 때부터 포커에 미쳐 밑 빠진 독에 돈을 쏟아부었다 결국 형은 집문서까지 잡아먹고는 지금껏 을지로에서 서울역으로 풍찬노숙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6. 부정한 상인

  어머니는 피 같은 돈 800만원을 떼였다 돈암식당집 연희 엄마는 이웃사촌에서 사돈의 팔촌까지 돈을 빌려 남편 계좌에 넣고는 가뿐하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어머니가 머리채를 잡고 재판정에 끌고 갔지만, 눈물 곳물 섞은 아줌마 한탄에 판사도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연희 엄마는 지금도 연희와 아저씨와 잘 산다

- 권혁웅,「불한당들의 세계사」전문(『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5.)

 
   

재미있는 시다?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재미있는 시인 것도 같다. 그런데 읽고나면 씁쓸하다. 이 시에 등장하는 불한당들은 흔히 우리 주변의 인물들이다. '주인집 작은 누나'가 그렇고, '이상필'이 그렇고, '사촌형'이 그렇다. 건물마다 빨간 십자가 불빛만큼이나 '교회의 담임목사'도 흔하고, 어디 어디 '아줌마'도 그렇다. 우리는 모두 언제나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고, 그 어머니에겐 누구 '엄마'는 빼놓을 수 없는 친구다. 하여간에 이들 모두를 '불한당'이라고 하기에는 좀 얄궂다. 인생의 어두운 그늘들, 혹은 얄궂은 서민들의 인생사에 놓여진 험한 세상의 '폭력'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 시를 읽고 또한 불현듯 드는 것은 세상에 참 믿을 놈 없다는 아주 유명한 진리이다. 결국 세상은 불한당들 투성이다, 나를 포함해서.

다만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면 "먹고 살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각박한 세상에 대한 책임 전가다. 이것 또한 일말의 근거는 있다. 문제는 "그래도 그렇지"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그렇지',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못된 짓들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면, 이들이 그저 울부짖을 밖에 또 무어라 변명하겠는가?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불한당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안한 마음이 많다. 그냥 '나쁜 놈' 혹은 놈들이 격에 맞겠다.

사실 내가 좀 쓸데없는 얘기를 한 것 같지만, '불한당' 혹은 '불한당들'이라고 할 때, 그 이름에 걸맞는 인간들(?)은 따로 있었다. '불한당(不汗黨)'이라고 하면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사람들의 무리" 또는 "남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 파렴치한 사람들의 무리"를 말하는데, 이게 개개 인간이 아닌 '무리'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 사전적 의미에 200% 이상 부합하는 '것들'을 우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진정한(?) 불한당들을 떠올려 본다면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대표적이겠다. 그런데, 우리가 시각을 좀 넓혀서 세계사적으로 오늘날의 불한당들을 떠올려 보자면 어떨까? 어떤 '것'들이 이 진정한 불한당들일까? 적어도 "황당무계한 사기꾼" 내지 "부정한 상인"이라고 보르헤스가 명명한 '불한당'에 해당될 '것'들이 있으니, 장하준에 따르면 "나쁜 사마리아인들", 곧 오늘날의 선진국입네 하는 '것'들이다. 장하준이 이들을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지칭하지만,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분 '몹시' 나쁜, 어쩌면 인종차별적 명명일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버젓이 있는데 괜히 그 이미지에 손상을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말에 좋은 말이 있으니, 나는 이 '것'들을 '불한당'들이라고 하겠다.

이 것들이 왜 불한당들인가 하면, 명색이 선진국입네 하면서 좀 잘 살아보겠다는 나라들에게 지네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구라를 치면서, 뒤로는 벼룩의 간에 심장에 피까지 쪽쪽 빨아자시고 있으니, 어찌 불한당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불한당'이란 표현이 부족한 감이 있다.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형편없는 '성장' 기록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성장의 가속화 ― 필요하다면 불평등의 증대와 약간의 빈곤 증대라는 대가를 치르고라도 ― 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내건 목표였다. 우리는 부를 더 많이 나누어 가지려면 그 전에 먼저 '더 많은 부'를 창출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야말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득 불평등은 증대한 반면, 성장은 사실상 크게 둔화되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가 풍미했던 기간에는 경제 불안정까지 급증했다. 세계는, 그 중에서도 개발도상국의 세계는 특히 1980년대 이후 더 큰 규모의 금융 위기를 보다 빈번하게 겪어 왔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경제 생활의 모든 전선 ― 성장, 평등, 안정 ― 에서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례 없는 풍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53~54쪽. 강조는 필자)
 
   

며 신자유주의를 무슨 '구원의 길'인 양 전면에 내세우면 거짓말을 일삼는 지금의 선진국들을 비판하고 있다. 자기네들이 가르쳐주는 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따라야만 지네들처럼 잘 살 수 있게되고,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에 따라 살아온 나라들은 죄다 잘 살게됐다고 김구라보다 더한 구라를 치고 있는데, 장하준에 따르면 이게 다 '뻥'이라는 소리다. 어떤 식으로 뻥을 치냐 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면 투자의 흐름이 줄어들고, 외국인 투자 규제를 완화하면 외국인 투자의 흐름이 증대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의 유지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엄격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런 규제 덕에 ― 19세기부터 192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던 경제였다. 이는 외국인 투자 규제가 경제의 성공 전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일반적인 견해의 토대를 허무는 것이다.(149쪽.)  
   

이런 식이다. 장하준은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2004.)에서 미국을 일컬어 "'근대 보호주의의 아버지'이자 철옹성"이라고 말한다. 또한 영국은 결코 "자유 무역과 자유방임 경제 국가"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이런 '것'들이 이제와서 니네 보호주의 하지 말라고 하고, 갖은 규제들은 다 풀어야 하고, 그 허울 좋은 '자유' 나부랭이 내세워서 시장의 뜻에 따라 자유무역을 해야 된다고 '전도'한다. 오늘날 미국의 이 말씀은 로마 가톨릭 교황의 말씀에 버금가는 위세를 지닌다. 그러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만큼의 일말의 진정성은 없다.

이런 거짓말의 속내는 결국 이제 지들만 잘 살겠다는 도둑놈 심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했지 아마. 지들이 필요할 때는 도와주는 척 하면서 이제는 그 필요성이 다했으니 이제 살이고 뼈고 다 발라놓고 피까지 빨아먹자는 심산이 이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미국의 논리다. 이 논리가 얼마나 가식의 논리이고, 민주주의의 대표자임을 자청하는 미국 스스로에게도 배반의 논리인지는 이 신자유주의가 결코 민주적인 논리가 아님에서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결국 시장의 논리가 제일시 하는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큰 비중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그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하는 지점이다.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대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게 되면 부자들은 자신들의 욕구 가운데 가장 하찮은 요소들까지 실현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조차 없다". 결국 돈 없는 놈들, 가난한 나라들은 모두 "죽어라"다. 아 이 선진국들은 토 나올 것 같은 더러운 거짓말에 언제까지 속고만 있을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가 일면 이 신자유주의의 거짓말에 속아나 피해를 보는 입장이면서도, 이 신자유주의 패밀리의 쫄따구로 일선에서 개발도상국 이하 최빈국들에게 삥이나 뜯어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놈의 대한민국이 조만간 '불한당'에 당당한 패밀리로 가입하더라도, 조폭에서 제일 먼저 잡혀가는 놈들이 쫄따구들인 걸 보면, 이 나라의 종말은 불을 보듯 뻔할 터이다. 조만간 그때가 오면 어쩜 미국 놈들의 감옥에서 동향의 한국인들을 만나 타향 설움을 정답게 나눌 것이다.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는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 선수들이 벌이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국제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모두가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선수들의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데 경기장이 평평하다면 결국 그 게임은 불공정한 것이 된다. 축구 경기를 하는 한쪽 편이 부라질 국가 대표팀이고, 상대편은 열한 살 먹은 내 딸 유나의 친구들로 짜여진 팀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여자 아이들이 아래쪽을 향하여 내달리며 공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공정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경기장을 평평하게 하기보다는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 공정한 경쟁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울어진 경기장을 볼 일이 없다. 경기장을 기울어지게 만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브라질 국가 대표팀이 열한 살 먹은 여자아이들과 경기하는 것이 허용될 리가 없어서이다. (경기장이 기울어져 있든 아니든 간에) 대부분의 운동 경기에서는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 참가자들끼리 서로 경기를 치르는 것이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경기는 불공정한 경기가 될 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 중략 …
  권투에서는 체급은 아주 세밀하게 구분된다. 예컨대 경량급의 경우 등급마다 1~1.5킬로그램 이내로 조정되어 있다. 이렇듯 몸무게가 2킬로그램 넘게 차이가 나는 사람들끼리 하는 권투 경기는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미국과 온두라스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은 인정하라는 것인가?(330~31쪽. 강조 필자)
 
   

장하준의 '이의 제기'에는 자명한 논리와 객관적 자료와 명명백백한 역사가 100%의 타당성을 부여한다. 이런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다보면 신자유주의가 최고입네 하는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의 맹랑한 주장에 참 귀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런 어린아이 같은 주장에 놀아나는 우리나라는 또 뭐가 되는건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결국 권혁웅이 읊었던 그런 '불한당'이 되어 비극적 인생사로 점철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허무맹랑은 신자유주의의 온갖 유혹과 협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대책을 세우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투정은 온갖 과자를 한아름 안고도 남겨진 과자들을 보며 한없이 울어대며 한사코 가게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억지로 끌어 안고 가게 밖으로 나올 수는 있지만, 그것을 달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하루 종일 울어재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몸집이 너무 크다면? 그 아이를 끌어 안고 나와야 할 어른들이 죽도 못먹고 삐쩍 말라 힘도 못쓰는 데다가, 그 몸집도 아이보다 수십배나 작다면? 이걸 어떻게 억지로 끌고 나오냐? 하여간 어려운 문제다.

장하준의 이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의 개정증보 내지 대중 보급판이랄까? 『사다리 걷어차기』가 학술서인 반면 이 책은 그것을 보다 대중적으로 풀어 설명한 책이다. 장하준의 쉽고 상세한 설명과 때론 소설같은 상상력과 에세이 같은 잔잔한 여운, 그리고 신랄한 비판과 적절한 비유가 종합적으로 녹아난다. 이걸 살려서 소설을 한 편 써도 좋을 듯 싶다. 그러나 장하준이 신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선진국들의 거짓말들, 그들의 거짓된 행동들, 불한당 같은 짓거리들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거기까지가 이 책은 장점이면서 한계가 아닐까 한다. 그 불학무식한 불한당들이 이 정도로 설득돼서, "이제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돼야지"하고 개과천선을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도 그 거대한 틈바구니에서 행보를 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대세론을 따르자는 것은 분명 아니다. 대책을 간구하고 머리를 써야하고, 착한 사마리아인을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간자적 입장에서 적절한 역할을 간구하는 방법을 장하준도 제시하고 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그러한 행보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안타까움은 어디까지나 경제 성장과 개발의 논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현재 포화상태다 더 개발하고 더 성장한다는 것은 어쩜 불가능할지 모른다. 경제 성장과 개발의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하준의 이 책은 매우 유의미하고 가치있다. 선진국들의 거짓 논리를 단호하게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은 가히 세계 경제사 '새로 쓰기' 혹은 '바로 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책에 다른 이름을 부여하자면 나는 이 책을 "불한당들의 경제사"라고 명명할 것이다. 아 참 세상은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나라부터 불한당이니 어쩌면 참 뻔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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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2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기를 겁내고 있었는데, 멜기님의 설명(?)에 보고픈 맘이 생기네요~~~ ^^
이주의 리뷰 당선도 축하합니다!

2008-01-29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8-01-2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축하해요. 이거 너무 잘 쓰니깐 자주 받잖아요. 저도 오랫만에 이름 올렸습니다.

이매지 2008-01-29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다리 걷어차기도 보고 싶었는데 왠지 어려울 것 같아서 미뤘어요.
근데 이 책은 대중적으로 설명한거라니.
으음. 일단은 보관함에 넣어둬야겠어요 ㅠ_ㅠ
멜기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해적오리 2008-01-2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오널 보니 제가 아는 이름들이 주루루 올라있네요~
이 리뷰는 일단 찜~ 책은 보관함으로~ ^^

마노아 2008-01-3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리뷰 당선이었군요. 아까 요 얘기한 거였는데 저만 못 알아들은 거였어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구요. 얘기 많이 못해서 아쉬워요. 다음을 또 기약해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8년 무자년(戊子年)의 벽두에 쓰는 서평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02년 겨울(12월 10일 제1쇄 발행)이고 내가 읽은 판본은 2007년 2월 15일 발행된 제9쇄다. 저자 더글라스 러미스가 이 책의 내용은 구술한 것은 그러니까 밀레니엄으로 떠들썩하던 그 무렵 혹은 그 후였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여졌던 글도 부록으로 담겨있다. 더글라스 러미스란 사람은 말하자면 친(親)일본 미국인이라고 할까? 국적을 옮겼다는 얘기는 못들었으니 아무래도 맞는 표현이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러미스는 정말이지 일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런점에서 '친일파'란 단어의 '친'보다 이 사람에게 수식된 '친'이란 접두사가 더욱 진정성을 가지고 있지 싶다. 이 말은 이 책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논지의 주요 대상이 일본이란 소리다. 우리나라의 박노자처럼, 그는 비록 국적을 분명히 옮긴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 러미스와 차이가 있지만, 너무나도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본이란 나라에 친절히 충고하고, 정중히 부탁한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2007년이 저물면서다. 최대 이슈였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오래 전에 수중에 넣어두었던 이 책을 집어들었다. 이유인즉, 이 책이 현대적 · 당대적 현실에 지극히 요구되어지는 것이면서도, 2008년부터 5년을 말아드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그 직접적 원인이라고 해야겠다. 제목 그대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대통령 당선자에게, 그도 안되면 인수위원회 위원들에게, 그도 안되면 허공에다 대고라도, 해야만 했다. 최근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운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할 것이라는 비보에 더욱 절실해져서, 며칠을 묵혀둔 이 책의 서평을 이 늦은 밤 시간에 쓴다. 어느 옛 노래처럼 '사랑해요'라고 쓰지는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안타깝지만, 그래도 쓴다면 이 나라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 가득히 담고 쓰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압도적' 지지 속에 당선되었다. 숫자 놀음 같은 것은 접어두고, 선거 결과만을 놓고 보아도 이런 '압도적'이란 말이 그리 무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선거율이 낮다고 해도 50% 가까운 득표율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간 진보적 성향의 젊은 층들도 대다수 이명박을 선호했다는 대선 결과 분석을 보면서, 그들이 보수화 된 것이 아니라, 실용을 추구한 것이라는 평가를 한나라당 대변인이 내린 것이 오래 기억된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이 이 당면한 한국적 현실에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런가?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러미스는, 내가 좀 무식하게 옮기자면, "현실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라고 말한다. 이명박이 실용하고 현실이더냐? 웃지 못할 노릇이다.

이 책의 제1장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비판한다. 우리가 현실주의라고 떠들지만 그것은 진정한 현실주의가 아니라고 말이다. 타이타닉 호가 빙산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빙산은 아직 보이지 않아서 현실적이 얘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 결국 빙산에 부딪혀 파멸하게 되는 것이 분명 우리에게 놓인 현실임을 어찌 모르느냐고 목놓아 부르짖는다.

   
 

누군가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입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라는 배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저마다의 일거리가 없어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진한다는 것이 타이타닉호의 본질인 것입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모두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늘날, 세계 전체에 퍼져있는 현실주의는 그러한 현실주의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주의적인 경제학자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하려고 합니다. "속력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논리적이고 현실주의적으로 들리는가. 도무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17쪽)

 
   

이번 대선의 핵심 키워드는 '경제'였다고 한다. "살리고 살리고 명박이가 살리고"라는 슬로건을 지어줄 걸 그랬다. 그러나 러미스가 반문하듯이, 과연 경제성장만이 우리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 주겠냐는 물음에 나는 회의적이다. 먹고 사는 어려움을 덜어준 박정희에게 그나마가 어디냐고 감사하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커졌다.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말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지배체제의 무력적인 힘에 의해 그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그때의 배고픔은 잊었지만, 오늘 우리는 여전히 가난의 설움을 씻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배고픔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우리 부모님이 겪었던 가난이란 설움을 내가 또다시 겪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현실인 것이 엄연한 이상, 내가 그 누구에게 감사를 전할 수 있겠는가?

이명박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되지는 않는다. 경제 7% 성장을 자신하는 그에게 분배 7%의 성장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비정규직이 7% 줄어들고, 내 봉급이 7% 인상되는 그런 기대를 해도 좋은가? 주가가 이 배로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부동산 시세도 오르기를 기대하는 기대치에는 턱없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없는 자들에게 주어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현실이 아닐까? 경제성장이라는 논리하에 우리의 이명박 선장이 이끄는 타이타닉호는 전속력으로 내달을 기세다. 한반도 대운하를 파느니 마느니가 앞으로 분분하겠지만, 그 안에 경제성장은 좋은 것이야라는 '현실주의'는 하느니 마느니를 떠나 모두가 공유하는 논리일 것이다. 그러나 러미스의 "그건 현실주의가 아니야"란 목소리가 거기에 낄 수 있으면 좋겠다.

러미스가 주목하는 또다른 잘못된 현실주의로는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논란이다. "일본 평화주의는 비현실적이다"라는 현실에 대해 러미스는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반박해 나간다. 전쟁이 끊임없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 무력화(無力化)를 추구하는 것은 자못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평화를 추구한다면서 펴나가는 정책들은 도무지 얘네들이 평화를 원하기는 한 것인가 의아스럽기만 하다. 미국이 그 대부지만, 우리나라도 전혀 예외는 아니다. 최근 국회에서 파병연장안이 통과된 것을 보면 뻔하지 않은가? 눈 앞에 보이는 이득만을 현실로 아는 이 현실주의자들에게 감히 누가 제대로된 현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 러미스의 이 책을 이명박을 쫓아다니면서 읽어준다고 하더라도 금방 청와대 경호실의 대통령급 경호에 막혀 좌절되고 말 것이다.

다시 경제성장으로 돌아오면서 러미스는 '제로성장'은 어떤가 하고 제안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무한한 추구는 자연에 대한 무한대의 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자연이라는 것은 무한대가 전혀 아니라는 뻔한 사실은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세계 나라들이 자꾸 성장만 하면, 지구는 지금 '아파요'인데, 자꾸 들볶으면 죽지않고 배기겠는가? '제로성장'을 말하는 러미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기울이는 것은 2008년 벽두에 있어 소중하게 여겨진다.

   
  일본의 이와 같은 상황, 요컨대 제로성장 상황은 '불경기'라든가 '불황'이며, 큰 문제라고 신문의 경제면에는 씌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매우 의미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냐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제로성장을 '엔진 고장'이라 여기지 말고, 기꺼이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제로성장을 오히려 정부와 나라 전체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삼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 나의 제안입니다. 앞으로도 경제성장을 계속하며 풍요로운 사회를 추구해 갈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 없이 제로성장 상태로도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문제제기, 문제설정으로 관점을 바꾸자는 것입니다.(94~5쪽)  
   

일본만이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이런 "문제제기, 문제설정으로 관점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그 대안으로 '대항발전'을 내놓고 있지만, 일단은 우리의 관점부터 먼저 바꾸는 것이 시급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명박을 선택한 인간님네들께서 과연 성장만이 제일인가 하는 물음을 머리속 한 구석에서라도 그려주었으면 한다. 이명박 당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과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며칠 전 녹색평론사에서 격월간 발행하는 《녹색평론》정기구독을 신청했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먼저 읽고 나서는, 봄이 오면 자전거를 튼튼한 놈으로 구입할 예정이다. 책 값을 좀 줄여야 하더라도 말이다. 고백하지만 그간 자연을 꾸준히도 더렵혔던 인간으로서 이제라도 좀 녹색에 대해 생각해야겠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께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운하를 파신다고 하시니, 나라도 '녹색'으로 옷해입고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녹색을 생각하고, 경제성장 하시겠다는 나리들에게 "그거 아니어도 나 행복할 수 있거든요."라고 말하고 다녀야겠다. 그게 내 새해 벽두에 비는 소원내지 각오다. 이명박 당선자께 마지막으로 한마디 전하자면, "나 앞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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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01-03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함.. 졸려~ 이 글 쓰느라고 나를 살살 피했던 거군요 ㅋㅋ
낼 읽어볼게요.. 지송~~~

멜기세덱 2008-01-03 17:27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어제 새벽에 발동이 걸렸더랍니다.ㅋㅋ
글고, 내가 언제 자기를 피했다고 그래요...ㅋㅋ

웽스북스 2008-01-03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얼마 전에 구입했는데 ^^ 푸하님이 추천해 주셔서요~ ^^
리뷰는 책 읽고 나서 자세히 읽어보게요 반갑습니다!! ㅋㅋ
(불면증도 반갑고 책도 반갑고)

멜기세덱 2008-01-03 17:28   좋아요 0 | URL
앗, 이 죽일놈의 불면증....요즘 제가 미쳐요.!!

마노아 2008-01-0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에요~ 저도 이 책 사놓고 아직 못 봤는데 다시금 시선이 갑니다. 저도 2008년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_<)

멜기세덱 2008-01-03 17:28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은 행복해보여요....

쥬베이 2008-01-0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고 갑니다. 이명박 관련부분 웃겨요^^
'이 책을 이명박을 쫓아다니면서 읽어준다고 하더라도 금방 청와대 경호실의 대통령급 경호에 막혀 좌절되고 말 것이다.' 압권ㅋㅋ

고양이 2008-03-1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노혜경이라고 합니다.
라디오21에 님의 서평 소개하려고 합니다.
허락해주실 것으로 믿고 미리 소개해 버릴랍니다. 괜찮지요?
^^;;;;;

멜기세덱 2008-03-19 17:4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미리 소개해 버리시고 알려주시지 그러셨어요...ㅎㅎ
워낙에 미천한 글이라서.....
근데, '라디오21'은 뭐하는 곳이죠? 제가 라디오를 잘 안 들어서리...ㅎㅎ

고양이 2008-03-20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라디오21은 인터넷라디오방송국이고요. http://www.radio21.tv/
제가 님의 글을 소개한 프로는 노혜경의 캣츠아이 라고, 매주 월~금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화, 사람, 관심, 뭐 이런 주제입니다.
매월 책 한 권씩을 청취자들과 함께 읽자, 이런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3월의 도서가 이 책이에요. 오늘 책 이야기 하면서 블로그 뒤적뒤적 하다 보니 님의 글이 나오는데, 제가 처음 이 책 소개할 때 했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더이다. 그래서 반가운 김에^^;;;;;

미리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라디오에서 책이야기를, 그것도 함께 읽자 그러면서 한달씩 하려면 어떤 형식을 갖춰야 하는지 다양하게 실험하는 중입니다. 인연이라고 저는 주장하고 싶고, 그러니 가끔 조언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양이 2008-03-2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제가 이 책을 선택할 때 이미 님의 글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어요. 알라딘, 교보, 다음과 네이버의 블로그들의 독후감을 다양하게 참고했거든요^^ 그때 님의 글을 아마 읽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인연이 아니라 대단한 인연인 게죠. 저 혼자만의 주장이지만요^^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서평단 알림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신동준 지음 / 살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 정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구단 만큼이나 술술 외우고 있을 정도로 우리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무척 친근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의 국호가 조선이었으니 우리가 그 전의 고려나 신라보다 시간 상으로 더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에 대한 사료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자세한 것 또한 그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왕조의 계보를 달달이 외운다는 것이 그리 정상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국사(國史)였고,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세뇌된 역사를 줄줄이 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우리 역사교육의 실상이었다. 왕조의 계보를 전 국민이 달달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역사교육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나라의 '국사'교육에 대한 비판은 근래에 이르러 봇물처럼 제기되고 있다. 당대의 지배세력들의 구미에 맞게 서술된 국사(國史)와 그것의 주입에 대한 자각과 비판은 매우 필요한 부분이었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작업이다. 그런 측면에서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으로 민중 중심의 역사 서술이 시도되기도 한 것은 고무적이다. 시대에 따라 역사는 항상 새로 쓰여지지만, 시대 정신을 반영한 주관적 태도와 함께 각종 사료와 자료에 근거한 객관적 태도가 잘 조화되어 보다 바람직한 역사 서술과 역사 교육을 이 시대는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역사학자들은 부흥하고 많은 노력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최근들어 다양한 역사 연구자들의 결과물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러한 결과물들이 모두 긍정적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일례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재발견 혹은 재해석인데, 거대 제국에 대한 반시대적 열망을 조장하면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들을 들 수 있다. 이 책 『조선의 왕고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이하 『조선의 왕과 신하』)도 그런 점에서 비판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조선의 왕과 신하』는 제목에서 표방한 조선의 '부국강병' 전략의 역사라기 보다는 조선이 왜 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견지한 '조선망국사(朝鮮亡國史)'라고 할 만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이란 나라는 왕권강화를 통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군약신강'의 병폐에 치달아 결국 패망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성리학의 통치 이념인 왕도주의와 공허한 붕당정치 등의 추구로 인해 조선의 신하의 나라가 됐고, 이것이 결국 왕권의 몰락으로 이어져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해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가 끊임없이(태조에서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데, 자못 내재적 조선 패망론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나라가 망하는 제1 원인을 "최고 통치권자를 비롯한 위정자와 이러한 위정자를 묵인한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있다"면서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이른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왜곡된 통치 구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군약신강'이 과연 "왜곡된 통치 구도"인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한 나라의 멸망의 책임을 그 나라의 민중에게까지 돌리는 저자의 논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일제의 제국주의 행보를 탓하기에 앞서 세계사의 흐름에 눈을 감은 채 사변 논쟁과 이전투구의 정쟁을 일삼은 조선의 붕당정치를 철저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다. 자기반성을 하지 않은 채 남만 탓하는 것은 스스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12쪽)  
   

라고 말하고 있는 저자의 견해가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선순위가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니 어느 것은 순서를 따지기보다는 그 둘이 각각 다른 측면에서 주장되어야 할 것들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일제의 제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그것대로 문제시해야 하고, '자기반성'은 또다른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저자의 논리를 따를 때,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치부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의 논점이 위험스러운 것은 이러한 저자의 역사 서술이 현 시대에 있어 잘못된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것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 말기의 상황은 당시의 일본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면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젊은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구미 선진국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나라의 앞날을 구상하도록 강력히 뒷받침"했고 결국 조선이 일본에 의해 지배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주장을 편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근 1백여 년에 걸쳐 일제의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이라는 오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국민의 모든 힘을 모아 부국강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있을 수 없다. 치국 방략과 거리가 먼 이상주의에 빠져 수단일 뿐인 이념이 오히려 목표로 변질되는 조선 붕당정치의 전철을 두 번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를 기존의 위정자에게 맡기는 것은 연목구어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인 책임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있다. 과거와 달리 국민들이 직접 위정자들을 뽑는 시대를 맞아 '반통치'를 일삼는 이러한 붕당주의자들을 선택한 궁극적인 책임은 주권자인 국민들이 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통치'와 '반통치'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아는 국민들의 혜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13쪽)
 
   

는 '부국강병'이 만병통치약으로 결론지어진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부국강병이라는 소리다. 저자의 부국강병이라는 것은 결국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지도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국민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강력한 제국을 형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이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러한 논리 아래 자신의 입맛에 맡는 단편적 역사들을 오려 붙인다. 나아가 "만일 조선이 태종이 완성한 강력한 왕권 국가로 존재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긍정적 언사를 내뱉고 있다. 이것은 광개토대왕이 수백년을 살았으면 전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라는 소리만큼이나 허황되게 들린다.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군왕과 신하가 서로 조화롭게 통치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표방한 것은 그 자체로는 어떤 근대적 진보성을 띄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전개상 부패하고 이념적 분쟁과 공허로 치달은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패망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라는 판단은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이러한 주관적 전제하에 역사를 구미에 맞게 짜맞추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저자의 이 책 『조선의 왕과 신하』를 세세히 한 자 한 자 따져가며 비판할 만한 가치를 찾기가 힘들다. "그는(양녕대군) 공부를 싫어하고 잡배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일삼았다. 게다가 장인인 김한로가 죄를 지어 물러나자 거만한 상소를 올리는 실수를 저질렀다."와 같은 서술은 이 책 전체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저자의 객관적이지 못한 태도가 극명하게 들어난다. '나쁜 짓을 일삼았다'거나 '거만한 상소', '실수를 저질렀다'와 같은 서술은 역사를 연구하는 자의 태도가 못 된다. 그러한 가치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단 저자의 논점 하에 따라 그에 맞지 않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러한 주관적 가치판단이 개입된 서술들로 채워지고 있어 이 책을 신뢰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시간도 없거니와 오랜 시간을 내가 이 책에 투자했다는 것이 못내 아깝기도 하다. 몇 가지 건진 것이 있기는 하다. 조선 왕조의 몇몇 부분에서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고,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새로운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 중 일부도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한가지 더 한다면, '흥청망청(興淸亡淸)'이 "연산군이 폐위된 뒤" 나타는 신조어로, '흥청(興淸)'이 "장악원(掌樂院)에 적을 두고 소리와 춤 등을 배운 이른바 '여악(女樂)'이라는 관기"를 일컫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들 알았다는 사실이다. 이 외에 몇 가지가 더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이 책이 보다 가치있어 지는 것을 바라기는 어렵다고 본다.

※ 警告 : 本 書評은 알라딘 書評團에 當籤되어 出版社로부터 無償으로 圖書을 提供받아 作成된 것으로 本 書評의 內容을 全的으로 信賴하여 本 圖書의 購買 與否를 決定하는 것은 讀書生活에 深刻한 懷疑를 誘發할 수 있사오니, 이 點 留意하여 주실 것을 當付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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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21세기가 요구하는 가치, 똘레랑스 or 관용(寬容)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 끼여 살아간다는 것은 다분히 혼란스러운 것이다. 시간 혹은 세월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자르듯 나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 또한 새천년 시작의 카운트다운에 의해 급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기의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그 의미와 상징, 그리고 인식에 가해지는 충격은 매우 크다. 서기 2000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이 큰 혼돈에 빠질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들도 거셌다. 이른바 밀레니엄버그가 와서 말로 다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 말, 세상 곳곳은 들썩거렸다. 앞으로 다가올 21세기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를 놓고 저마다 한 목소리씩 내고 있었다. 20세기를 이끌었던 가치의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21세기의 가치가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목소리에 섞여 나온 것인데,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도 가는 곳마다 이런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쳐대고 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가치들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따져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새로운 가치 혹은 인식이 필요할 것만 같다.

내 생각에 21세기는 20세기가 보여줬던 모든 가치와 인식이 뒤집어 엎고 새로운 틀 안에서 형성되어만 하지 않을까 한다. 산업화 · 공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인한 인간 소외,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적 사회 인식 등등 20세기적 가치들은 21세기 더이상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21세기와 더불어 추진되고 있는 한미FTA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화는 20세기적 과거의 가치들이 겉모습만 바꾸어, 아니 더 강화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인양 들이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요구되는 가치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그것은 상생이다. 20세기의 중심 가치들이 모든 것을-인간을, 자연을- 소외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할 때, 이러한 것은 회복하는 가치, 곧 모든 것이 서로 사는 상생(相生)이어야 할 것이다. 상생의 기반에는 서로가 서로는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른바 똘레랑스 혹은 관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한다. 21세기에는 '관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2. 관용이란 무엇인가?

1990년대 중엽에 파리에서 택시를 몰다가 온 홍세화는 이 땅에 '똘레랑스'란 개념을 소개했다. 흔히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두 개념, 즉 '똘레랑스'와 '관용'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관용은 많은 부분 똘레랑스의 개념에 바탕한다. 홍세화가 소개한 그 똘레랑스말이다. 홍세화와 비슷한 시대에 이 똘레랑스, 그러니까 그것은 번역어인 '관용'에 대해 천착한 우리나라의 철학자 김용환 교수가 1997년에 출간한 『관용과 열린 사회』는 홍세화의 경험적 똘레랑스와 달리 보다 학문적, 철학적, 체계적 '관용'의 저술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는 이 책을 중심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21세기의 필수적 가치 혹은 사회윤리로서의 관용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관용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용'은 여기서 말하는 '관용'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런데 서양의 '똘레랑스'라는 것도 간단명료하게 정의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똘레랑스'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고, 김용환도 이 책에서 그 정의의 문제를 길게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헨드릭 빌렘 반 룬이 따르고 있는 브래태니커의 정의를 따르는 것으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Tolerance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nce'에사 온 말) :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인 방식이나 관점과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 있게 참아주는 것."(헨드릭 빌렘 반 룬, 『관용』(반 룬 전집 03), 서해문집, 2005. pp.23 ~ 4.에서 재인용)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관용의 정의로 채택하기로 한다.(관용의 정의에 관해서는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 2003. 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관용의 정의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 『관용과 열린사회』의 제1장 '관용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하면 복잡하다는 것인데, 김용환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관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가 확 와닿지는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3. 우리 사회에 왜 관용이 필요한가?

불행하게도 해방 이후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통치 아래에서도 정치적 저항만을 했을 뿐 관용의 가치를 말하거나 미래 세대를 위해 관용 교육을 해야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불관용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관용은 철권 통치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머리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의 중요성을 말한 사람은 몇몇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미하다. 또한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통치"는 이미 끝났다고 하지만 21세기에 이른 이 사회는 여전히 불관용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97년에 이 책을 펴내면서 가졌던 이런 문제의식이 1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관용이 없다. 관용에 목마르다. 상황이 변해고 시대가 변해서 사람들이 인식하기에 이런 관용이 그리 절실한 것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전혀 달라졌다. 사회가 다원화 되고 개개인이 존중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최고지선인 이 시대에 관용은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저자가 제5장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요청되는 영역들"에서 제시한 관용이 절실히 필요한 영역들은 아직도 여전하다. 저자 김용환은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을 잠정적으로 다원주의 사회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런 다원주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큼직한 걸림돌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관용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문제 영역" 다섯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 극복과 동질성 회복", '탈연고주의', "종교적 분파주의의 해체", "배타적인 경쟁의 논리", "학문, 예술, 문화의 자유" 등이다.

여기 저자가 제시한 영역들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 영역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누군가는 말하고 있지만, 북한의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말하지만, 개성 공단 등의 경제협력으로 왕래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부르짖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족속들이 거세다. 연고와 연줄이 여전히 중시되고 있는 사회, 종교적 관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승자독식의 사회, 그도 모자라 사상의 자유까지 통제되고 있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니다. 이러한 영역들에 우리는 여전히 관용이라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던져주어야 한다.

4. 서양의 똘레랑스와 동양의 관용의 만남

우리의 관용과 서양의 똘레랑스가 정확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차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서양의 똘레랑스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인 관용도 이런 똘레랑스를 껴안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여기서는 이런 접목, 혹은 그간 알지 못했던 동양의 관용의 넓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제우는 말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事人如天(사인여천))고. 사실 이것은 똘레랑스가 가지는 타인을 존중하고 나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동양적 관용의 경지다. 입때까지 우리말에서 '관용'은 힘을 가진자의 자비 내지 동정으로만 축소되어 사용해 왔지만, 이런 '사인여천'의 개념이 관용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和而不同(화이부동)"이나 "求同存異(구동존이)" 또한 서양의 똘레랑스란 개념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서의 관용이다. 이것은 앞서 제시했던 21세기의 지향인 '상생'의 경지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공자님은 "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는 서양의 똘레랑스란 개념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공자가 정리한 『서경(書經)』에서 보이는 '같음을 추구하되 다름을 인정하는" 구동존이의 자세는 정확하게 똘레랑스의 개념을 담아내고 있다. 김용환은 '관용의 기능'이 "궁극적으로 갈등의 해소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먼저 차이를 인정하고 같음을 추구하는 자세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즉 '구동존이'가 필요한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에 대해 토론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열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자칫 폭력과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 김용환이 관용을 정의하듯이,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떤가?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 不可則止(불가즉지).
진심으로 이야기해서 잘 인도하되, 불가능하면 그만둔다.

이것은 서양의 똘레랑스와 다르지 않다. '不可則止(불가즉지)'는 곧바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폭력과 억압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다른 기회와 상황에서 다시금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의 통념이 관용에 대해 "지배자의 통치 기술로써 관용을 이해하고 이 때문에 소수의 지배 집단 또는 권력의 소유자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관용을 이해"하고 있는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어쩌면 오해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관용은 권력자의 특권이라기 보다 의무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 증거다.

居上不寬(거상불관), 吾何以觀之哉(오하이관지재).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그를 성숙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관용은 소수자보다는 다수자가, 힘 없는 자들보다는 힘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보다는 부유한 자들이 더욱 중시하고 실천해야할 가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힘 있는 자들에게 당당히 관용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동양의 오랜 전통은 이런 똘레랑스의 맹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관용에 전제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동양의 관용은 놓치지 않는다. 광무군(廣武君)은 이렇게 말한다.

智者千慮(지자천려), 必有一失(필유일실), 愚者千慮, 必有一得(필유일득).
지혜로운 자도 천 번 생각하다보면 한 번 실수할 때가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동양에서 중시되는 겸손의 덕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보면 똘레랑스의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댄 전제도 이런 겸손의 덕목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똘레랑스 혹은 관용의 기본 자세이다.

마지막으로 관용 혹은 똘레랑스의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동양의 속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待人春風(대인춘풍), 持己秋霜(지기추상).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가을서릿발처럼.

이와 비슷한 말로 『幽夢影』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律己宜帶秋氣(율기의대추기), 處世宜帶春氣(처세의대춘기).
자기를 다스릴 때는 가을기운을 띠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봄기운을 띠어야 한다.

관용의 실천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관용의 실천의 모범적 자세가 될 때 이 땅에 관용이 올곧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5. 무엇을 똘레랑스/앵똘레랑스 할 것인가?

문제는 관용 혹은 똘레랑스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까지 떠벌인 말은 어쩌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들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관용, 아니 똘레랑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의 일러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똘레랑스가 이 땅에 정의를 세우기 위한 사회윤리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 것이나 다 똘레랑스하고 관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앵똘레랑스가 된다. 무엇을 불관용할 것인가?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인가? 똘레랑스의 정의가 복잡하였듯이 앵똘레랑스의 문제 또한 그 정확한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앵똘레랑스해야 할지의 문제는 앞으로 사회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합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학자나 보수주의자들의 몫이라기 보다는 교육자와 진보주의자들에게 짊어지게 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소수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자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한 똘레랑스, 그런 세상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앵똘레랑스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항상 우리에게 남는 문제다.

6. 관용교육 - 똘레랑스의 실천을 위하여

김용환의 『관용과 열린 사회』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제6장과 제7장, 그리고 부록이다. 제6장에서는 "관용과 교육'을, 제7장에서는 "관용과 가치 교육의 전략을", 그리고 부록에서는 관용 교육의 구체적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관용이 이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고 보다 적극적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교육, 즉 관용교육이기 때문이다.

관용의 가치와 관련해서는 주로 정당화의 문제와 한계 문제 그리고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집중된다. 불행하게도 많은 연구자들이 앞의 두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관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어떻게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동안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관용의 문제가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결단에 달린 문제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개인의 심성이 너그러우면 관용적인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불관용적인 사람이 된다는 단순한 논거 위에서 관용을 사(私)적인 태도로 보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이 사회적 가치로서 갈등과 분쟁의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용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결단하고 행동하는 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의 결과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관용의 가치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의 서구 사회가 비록 관용의 영역을 확대해 온 역사이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불관용의 영역은 남아 있으며 오히려 어느 부분에서는 불관용의 영역이 더 많아졌고, 특히 자본주의 정신이 강조하는 경쟁과 생산성의 증가라는 가치가 관용 정신의 필요성을 그만큼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관용의 가치를 정당화하거나 또 관용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 등은 자체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모두 관용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며 또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153~4쪽)

이런 점에서 관용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관용 교육이 절실해 진다. 관용 교육의 이런 필요성은 다시금 "관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의 방법적 문제를 남긴다. 저자 김용환은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여러 분야에서 관용의 가치가 실천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불관용의 근거를 공략함으로써 관용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것은 교육적 차원에서 "규범적인 학교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같은 일반적인 환경" 전범위에 걸쳐 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 김용환은 제7장에서 관용교육의 전략적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가 작성한 『관용 : 평화의 시작 ;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교육을 위한 교수/학습 지침서』의 일부가 부록에 실려 있기도 하다. 저자는 관용 교육의 방향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충서(忠恕)의 가치와 타자 존중의 정신"에서는 공자의 仁과 德의 관점에서 관용을 접목하여 학교나 사회에서 교육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한 "화쟁 정신과 토론 문화의 지향"이란 방향, 그리고 "도적적 공감과 공동체 의식의 계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이러한 관용 교육의 전략이 어떤 식으로 교육과정이나 사회속에 접목되어 실천될 수 있는가? 즉 관용교육의 구체적 교수/학습 방법이 요구된다.

이런 관용교육의 구체적 교수/학습 방법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부록에 실려있는데, 이것은 1994년 유네스코가 발간한 『관용 : 평화의 시작 ;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교육을 위한 교수/학습 지침서』의 일부이다. 학교 교육에서 각 과목별, 또는 통합교과에서 어떤 방법으로 관용을 교육할 수 있을지 그 교수/학습 지도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어나 영어, 나아가 수학에서도 관용의 가치를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적절한 교수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때에 관용 교육이 몸에 체득될 수 있다. 이 부록을 유의깊게 살펴보고 보다 체계적이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관용 교육의 교수/학습 전략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7. 남는 문제들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하승우의 말대로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생명을 얻"고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관용을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쌓여갈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원론적 차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관용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문제들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적극적으로 관용 혹은 똘레랑스를 실천하자.

문제 1) 무엇을 관용하고 무엇을 불관용해야할까? 이는 막연하지만 언제나 구체적 여건 속에서 물어야할 물음이다. 이를테면 내가 이 리뷰를 언제까지의 기한을 두고 작성해야 한다고 할 때, 불가피하게 그 기한을 어겼다면, 이는 관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비비케이라던가, 뇌물의 문제는 불관용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용과 불관용의 대상이 이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느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 시점에서 무엇에 대해 관용하고, 말하자면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고, 또한 무엇에 대한 불관용해야 하는지, 다시 말하면 어디서부터 불관용해야할지를 하나하나 규정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근시적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앵똘레랑스의 대상은 무엇이 있을까?

문제 2) 관용 혹은 똘레랑스는 실천적 사회윤리이고 이것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어떻게 교육해야할까? 이 관용을 말이다. 교육은 실천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실천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정할 수 있지만, 교육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기보다는 그런 시행착오라는 것이 매우 위험한 문제일 수 있다. 잘못된 관용 교육을 받고 이미 졸업해버린 학생들에게 그 시행착오를 수정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 교육의 구체적 내용과 교수/학습 전략이 보다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될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관용교육의 보다 효과적 전략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와 함께 현재의 학교교육 현장에서 학습되고 있는 불관용의 모습은 또한 어떤 것이 있고, 이들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

그러고도 문제는, 아직 많이 남아있고, 또 남을 것이고,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같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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