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

- 신명기 24장 5절

 
   

허본좌께서 대선 공약으로 결혼하면 1억인가, 5천 만원인가를 준다고 했었는데, 낙마를 하시고 지금은 구치소에 계신다. 애를 낳으면 또 돈을 준다고 했었더랬다. 그리하야 국민 1인당 평생 15억 인가를 국가로부터 받는다고 그랬던가? 근데, 생각해보면 허경영의 허무맹랑한 공약 중에 제일 맘에 드는 공약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뭐 짜장면 값이 한 그릇에 100만원이 될 거라고도 하지만 말이다.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이들에게, 그 중에서도 남편으로 채택된 이들에게, 아내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은 막중한 의무다. 어쩌면 가장 신성한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별 시덥잖게 깝쳐대는 저 국방의 의무보다는 신성하다.

한국이란 사회의 남편들에게, 그 중에서도 저물어가는 남편들에게, 이 의무는 간혹 고문이 되기도 한단다. 난 잘 모르지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유의 남편들은, 대부분 그 정력을 쓰잘데기 없는 곳에 쏟아버렸기 때문에 고통스런 의무가 되버린 게 아닐까? 자의 건 타의 건 간에, 그럴 것만 같다.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착취 구조 속에 자리하고 있는 비극이다.

허본좌의 저 대단한 공약과 신명기의 저 명쾌한 명령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면 어떨까? 결혼해서 1년 동안 유급휴가를 주는 것. 그래서 아내를 즐겁게 해주라는 것. 페미니스트를 고려해서 살짝 틀면, 서로를 즐겁게 해주라는 것. 교수들에게 안식년이라 걸 주는 데에 그 나름대로 의미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수들이 몇 년에 한 번 하는 그 걸, 교수 아닌 사람들에게도 평생에 한 번은 줘도 좋겠다. 아니 줘야 좋겠다.

갓 결혼한 신혼 부부에게, 마음껏 즐거울 1년을 주자. 적어도 출산율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 신명기 24장 5절 말씀을 올해 기도제목으로 삼아 기도해라. 이명박 장로께서도 기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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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뢰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뢰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요한복음 21장 15~18절

 
   

어느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오빠, 나 사랑해?" 나는 "어." 또 그녀가 물었다. "어, 그래." 또 물었다. "그럼." 그녀가 울었다. "왜 울어." "그냥 눈물나." 그리고 볼 수 없었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가 있었더랬다. 사랑하냐고 묻더니 삐쳐버렸다. 남자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바보 같은 놈.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

자꾸 묻지 좀 말아라. 그깟 사랑이 대수냐? 아니 대수다. 그래서 말 못 했다. 미안하다. 그렇다고 가 버리냐? 아니 가야 했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았었나 보다. 생각나냐고? 왜 생각이 안 나겠냐? 그냥 눈물 한 번 흘리고, 또 묻고, 두 번 흘리고, 또 묻고, 세 번 흘리면, 그땐 뭐든지 간에 대답해 줄 수 있었을 것을.

너는 몰랐다. 나도 몰랐다. 바보 같은 것들. 너는 알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지도 아직 모른다.

네가 예수님도 아니고 세 번을 묻고 울더니, 마냐? 세 번에 세 번을 묻고, 그것에 세 번을 더 물었으면 어땠을까? 사랑은 나비처럼 3자를 그리며 날아가 버렸다. 또 어느 남자에겐가 이 밤에는 사랑을 묻겠지. 아마 그 놈은 똑똑해서 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것.

난 아직 사랑을 모른다. 그러니 내게 사랑하냐고 묻지 말아라. 그러나. 문제는 묻는 사람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 시원할 것 같으냐면, 물을 걸 물어라. 아 내가 먹이고 칠 양은 어디에 있는거지. 나도 언젠가 이 팔을 벌리고 어데 먼 곳으로 사라지겠지. 그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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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반전에 마음이 아프군요. 빨리 양을 찾으시길... ^^

멜기세덱 2008-01-17 23:05   좋아요 0 | URL
양들의 침묵입니다...ㅋㅋ

순오기 2008-01-17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목이 바뀌어야 할 듯... '제발, 제게 사랑하냐고 물어주세요!'로

멜기세덱 2008-01-17 23:06   좋아요 0 | URL
아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워" ㅋㅋㅋ

무스탕 2008-01-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있지 않을겁니다. 날 풀려서 바깥으로 다 나가기전에 우리안에 있을때 잘 돌아보세요 ^^

멜기세덱 2008-01-17 23:07   좋아요 0 | URL
이런 노래가 불현듯....
"먼 곳에 있지 않아요. 내 곁에 가까이 있어요. 하지만 찾을 순 없네요. 그대 마음 아주 먼 곳에"

2008-01-1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1-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글은 이해가 가는데, 위의 성경 구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사옵니다.=_=
특히 마지막 대사요. '띠 띠우고' 무슨 뜻입니까? (긁적)

그런데 말이죠.
주님은 외로운가 봅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까...(웃음)

멜기세덱 2008-01-18 11:41   좋아요 0 | URL
마지막 구절은,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띠라는 건 말하자면 허리띠 같은 것이겠죠. 스스로 옷을 정갈히 차려입고 맘대로 다녔지만, 나중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가서 팔을 벌리어 죽게된다(십자가에 달린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ㅎㅎ

참고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는 얘기도 있죠.

저도 외롭습니다.

비로그인 2008-01-18 14:4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주님은 시몬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나요?
양을 먹이고 치면(기르면?) 안 죽는건가요? 우웅..정말 어렵습니다.=_=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 성경은 왜 저렇게 어려운 글자로 있지요?
지구인들은 다 이해를 할 수가 있는건가요? (긁적)

나는 동화같이 쉬운 것이 좋아요. 하지만 성경서점은 주말에 열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먹을 수가 없어요.

프레이야 2008-01-1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물어드리면 안 되겠죠? ㅎㅎ
물면 아플거에요.호호~
세덱 님, 반전에서 저 쓰러져요^^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계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6장 13~20절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내 친구들은 나를 '누구'라고 여길까? 내 부모, 형제, 친척들은 내가 '누구'이길 바랄까? 혹여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나 궁금해 할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묻는데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일까? 아니면 나는 내 '이름'일까? 어쩌면 나는 '야'일까? 그렇다면 나는 '멜기세덱'일까? 멜기세덱은 이미 저 먼 구약 시대의 인물. 나는 '이 새끼'일지도 모르고, '저기요'일지도 모른다. 때론 '안 조교'이기도 한 걸까?

모두들 나를 제외하고는 나를 '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아니다. 나는 어디에고 내 '이름'으로 표시되지만 그 표시는 또한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아니다. 자꾸들 건방진 것들이 나를 '야'하고 부르지만, 그 건방진 것들에게 '왜'라고 대꾸하고 짜증을 확 부리는 걸 보면 그 '야'도 나는 아닌 것 같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멜기님, 세댁님, 멜기세덱님, 간혹 새댁님, 이님, 저님'하지만 난 누구에게도 '님'이 되어본 적이 없다.

나는 어느 누구의 '새끼'였고, 적어도 단 한 사람에게는 귀한 '새끼'이기도 하니, 잘 하면 나는 정말 '새끼'인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누구냐 하면, '저기요'하고 부르길래 '어디요' 했더니 대꾸가 없어서 아직은 어디에도 내가 '누구'로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책 속에 나는 무수히 많다. 그게 다 나이면서도 책을 덮으면 나는 아니다. 누군가 나를 진정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은 어느 것도 '나' 아닌 것이 없지만,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미칠 것 같은 세상은 자꾸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내가 아니어서 나는 자꾸 사라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나는 예전부터 생각했다. 그 사라지는 것이 '나'라면 그 '나'는 무엇이고 누구이기에, 그 어디에서의 실체이기에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아무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일까?

예수님, 내게 당신 이 누구인가를 물으시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가르쳐나 주세요. 정말,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일까? 그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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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엠 후 아이 엠 (죄송합니다 =====3333333)

멜기세덱 2008-01-17 02:14   좋아요 0 | URL
죄송할 짓을 왜 하삼33333 ㅋㅋㅋㅋㅋ

순오기 2008-01-1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이 누군지는 이번에 인천 가서 만나고 나면 답할 수 있을지도~~ ^^

멜기세덱 2008-01-17 02:16   좋아요 0 | URL
ㅎㅎ 인천오신다고요?(아 나 막 긴장....ㅋㅋㅋ)

2008-01-16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1-17 02:18   좋아요 0 | URL
앗 미안 죄송 쏘리.....ㅠㅠ;;
아주 잘 받았는데, 깜빡하고 인사도 못 드렸어요...ㅎㅎ
님도 새해 복 터지삼....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