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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 - 고전시가로 만나는 조선의 풍경
김용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불렀던 '하여가'보다 더 유명한 것은 하여가의 원조격인 이방원이 불렀다는 일명 '하여가'란 시조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 건국에 그 공이 매우 컸다. 이후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로 인해 결국 두 차례의 난으로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된다. 그가 불렀다는 이 '하여가'하면 또 자연스러 떠오르는 것이 정몽주의 '단심가'다. '일편단심'의 처절한 사랑노래의 원조격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정몽주, 「단심가(丹心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냐? 저 산의 칡넝쿨 좀 봐라. 얼키고 설키어 잘만 살지 아니하냐? 고려면 어떻고 조선이면 또 어떻겠는가? 우리도 저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키어 잘 한 번 살아보자고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이 노래를 전했단다. 어찌보면 이방원이 정몽주에 대한 애착으로 그를 설득하여 조선건국을 함께 하고자 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래저래, 그냥저냥, 잘 살만 되지 않겠냐고 떠보는 폼이 썩 건방져 보이는 듯도 하다. 그러니 정몽주가 이방원의 진심을 못 알아볼리 만무하다.

이방원의 건방진 듯 떠보는 '하여가'에 답하여 안색을 고치며, 우문현답을 하듯이 단호하게 변절불가, 일편단심을 노래한다. 내가 골백번을 죽더라도, 죽고 또 죽어서 뼈가 문드러져, 한 줌의 넋이라도 존재치 않더라도,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난 말이야 일편단심이라구. 결국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피를 토하고 죽는다.

이처럼 '하여가'와 '단심가' 속에는 여러가지 역사적 요소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서로 그저 흥이나 돋구자고 주고받는 노래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늘날까지 불려졌고, 앞으로 불려질 노래들이 모두들 그러하겠지만, '하여가'나 '단심가'와 같은 시조는 무엇보다도 그 노래가 불려졌던 당대적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상들이 밀접하게 관계된다.

정몽주나 이방원, 그리고 조선건국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만, 그것을 시조를 통해 접하게 될 때 보다 흥미롭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조란 장르의 특색이 강하게 부각된다. 국어나 문학 시간을 통해 배우게 되는 일부 시조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시조의 역사적, 문화적 속성들을 부각시켜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조선후기에 지어진 사설시조류들 또한 당대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시조를 순수 문학적으로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시조에서 외재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내재적 의미만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가능은 하겠지만, 온전한 이해를 갖기에는 여러가지로 힘이든다. 이 점은 또한 시조를 배우고 익히기 어려게 하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 편의 시조를 익히기 위해서는 당대의 역사와 문화를 폭넓게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조가 고려말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하면서, 조선 중기까지 사대부들의 전유물로서 기능해 오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 그 작자층이 폭넓어지며, 시조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기에 이른다. 그럼으로 해서 시조는 다채로움을 획득한다. 사대부의 감회와 포부에서부터 당대 서민들의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시조는 다양한 생활상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시조를 고정된 형식의 틀에 갇힌 매우 딱딱한 장르로 인식하지만, 시조가 담아내는 그 다양함 만큼 비교적 다채로운 형식을 보여준다. 초기 시조의 형태가 단시조, 단가의 형태였다면, 이것이 차츰 연시조의 형태로, 조선후기 작자층의 변화와 더불어 사설시조라는 형태적 변이가 일어난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시조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 '종장 첫음보의 3음절'의 제한도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간혹 4음절 이상도 보여진다. 시조가 어떤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유연하게 변화하는 포용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유연한 형식은 시조가 다채롭게, 그리고 손쉽게, 즉흥적으로 지어지면서 흥을 돋울 수 있게 한다. 시조란 말이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이라는 것을 볼 때, 이것은 본디 노래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여럿이 모인 즉석에서, 때로는 혼자서 감흥이 오를 때, 즉흥적으로 이런 유연한 형식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시조의 특성이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주된 시가의 역할을 시조가 감당하게 만들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옛 노래인 시조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생생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조를 보다 깊이 들여다 볼 때, 시조가 담아내고 있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다양한 당대 생활상들, 그리고 선인들의 내면을 대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시조는 "옛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그러한 시조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내밀한 풍경화"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조를 접하는 기회는 대부분 학교교육을 통해서다. 학교에서의 문학교육이 종종 비판받는 것이 문학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시험을 위해서 순 암기식으로 가르쳐진다는 것인데, 이는 시조에서 더욱 여실히 나타나는 문제다. 시조를 단순히 정형시의 특징들로서만 주목하고 가르쳐지며, 그것을 암기토록 강요하면서, 시조는 따분하고 고릿적 사람들의 얘기들로만 치부하게 만들고,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교육의 문제와 더불어 이제는 사어가 되버린 옛 우리말들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이 더하면서 시조를 수시로 읊고 감상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된다.

시조가 담아내는 옛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생활상과 내밀한 내면의 풍경들을 우리가 외면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출간된 이 책 김용찬 교수의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한번쯤 들어봤을 시조에서부터 처음 보는 시조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조를 담아내면서, 그것을 당대의 역사와 문화, 생활, 당대인들의 내면을 들추어내면서 올곧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른다 시조로 보는 옛사람들의 문화사, 혹은 생활사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시조에 대한 딱딱한 설명은 제하고, 친절하고 정다운, 쉬운 말들로의 해석을 들려준다. 거기에 꼼꼼하게도 시조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시조 읽기를 더욱 재밌게 해준다.

우리가 옛 노래를 통해 당대인들을 이해하고 그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다만 옛것에 대한 앎으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오늘을 현실을 비추어보고,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보다 희망차게 그려보는 것이, 고전 읽기의 가장 큰 이유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담아내고 있는 시조 이야기들은 모두가 오늘의 현실과 관계된다. 저자가 몇 가지의 테마로 엮을 여러편의 시조들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치와 문화, 생활상들에 대한 반추와 반성, 그리고 그로부터의 새로움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그간 외면받아 온 우리 고전시가, 특히 시조로의 충실한 여행 길잡이가 아닐까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를 따라 참으로 흥미롭고 즐겁게 시조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가령 이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무척 재밌고 익살스런 시조들을 보면서, 옛 선비들의 그 익살스런 내면풍경들을 엿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조들 말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玩月長醉) 하려뇨.  - 이정보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請)하옴세
백년(百年) 덧 시름없을 일을 의논(議論)코저 하노라.  - 김성최

 
   

옛 사람들의 술타령이라고 해야할까? 그때나 지금이나 술을 마시는 사연들은 모두들 제각각이었으면, 술로 벗을 부르고, 세상의 시름을 한꺼풀 벗어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조들을 통해 몇 백 년 전의 선인들과 교감하고 동감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놀랍기까지 한 일이다. 이렇듯 시조는 선인의 깊은 내면들을 다채롭게 담아내고 있는 거의 유일한 문학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인지를 이제는 충분히 알 수 있겠다. 보다 구구절절한 시조 속에 담긴 '조선의 영혼'들을 직접 감상하고 저자 김용찬의 안내를 받아보는 것은 재미난 일일 것이다. 끝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대목은 시조 놀이라고 할까? 사랑 놀이라고 할까? 다음 시조를 소개해야겠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 임제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한우

 
   

임제는 조선시대의 문인이다. 한우는 그 유명한 평양 기생인데, 위의 두 시조는 당대 문인과 명기의 절묘한 화음으로 빛난다. 그리고 익살넘치고 음흉한 임제의 수작걸기와 한우의 재치넘치는 화답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하게 한다. 한우(寒雨)는 말하자면 차가운 비, 그러니까 찬비다. 그래서 임제가 종장에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평양 기생 한우를 만났으니 함께 어울려 자지 않겠느냐는 노골적 수작인 셈이다. 이에 대한 한우의 화답또한 기막히다. 임제가 (추위에) "얼어" 잔다니까, 왜 따뜻한 "원앙침 비취금" 나두고 얼어서 자느냐? "오늘은 찬비 맞"아서 추우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원앙침' 베고 따뜻하게 "녹아" 자야지? 하는 것이다. 참으로 명문장가의 능청스런 수작에 명기의 재치넘치는 화답이다.

시조의 재미는 이런 즉흥성에서 나타나는 재치와 익살, 그리고 놀이적 특성이다. 장기말을 소재로 절묘한 시조를 지은 소백주의 시조 또한 우리를 놀랍게 한다. 이런 다채로운 시조를 통해 다양한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현행 우리의 문학 교육, 특히 시교육에서 이런 시조의 특성들을 폭넓게 이용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시조의 유연한 틀(형식)을 이용한 간단한 시(시조) 짓기라든가, 재치와 순발력을 발휘한 글쓰기 등은 시조를 지어봄으로써 효과적으로, 더불어 재미와 함께 기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시조를 감상하고, 거기에 담긴 옛선인들의 자취와 내면들, 그리고 옛사람의 생활과 흥취를 생생히 느낄 수 있어 무척 좋았다. 이런 작업이 고전시가 전반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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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22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고전문학의 안내자는 역시 멜기님이에요!
임제...그 무덤이 우리 집에서 목포 가는 길에 있어요~~~
광주이벤트는 6월 14일 토요일 오전 10시 광주역에서 집결...가사문학의 산실 담양 돌아보기인데 시간 좀 내 보세요!!

멜기세덱 2008-04-2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천에서 광주까지~~ 오전 10시면? ㅋㅋㅋ
제가 내일 일을 도통 모르고 삽니다.... 그때쯤 가봐야 광주이벤트의 수혜여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ㅎㅎㅎ
 
낙타 창비시선 284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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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또' 시집을 내놓았다. 그는 그의 '전집'을 엮어 낸 적이 있다. 전집들이 대개 시인 사후에 묶여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신경림 시인이 두 권으로 묶어낸 '전집'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시인이 절필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전집을 낼 당시(2004년) 고희를 앞둔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는 시적 감수성에 충만한 '현역' 시인이었으니, 그즘의 전집이 결코 전집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 시인이 『낙타』란 시집을 또 내놓았으니, 이전의 전집은 이제 '전집'이 아닌 게 된 셈이다. 어찌 되었건 새 시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에는 반가움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살아있는' 시인이니까.

신경림을 떠올리면 새삼 감사를 전해야 될 곳이 있다. 바로 MBC의 <느낌표>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지지리도 책을 안 읽는 대한민국에 한때나마 독서열풍을 몰고 왔던, 꽤 공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선정한 도서 중에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나는 신경림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래저래 방향도 잡지 못하다 끌려가듯 군대에 가서, 어느 것 하나도 낙이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찾은 게 책이었고, '느낌표' 열풍에 살작 기댄 것이었다. 시에 관심을 꽤나 가지고 있던 터라, 신경림이 찾아간 옛 시인의 자취들, 신경림이 풀어내는 그 시인들의 노래들을 읽으며 참 행복했다. 군대라는 살벌한 공간에서 길 떠나는 노(老)시인을 따라 옛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내게 참으로 행복한 낭만을 주었다. 그것을 통해 더욱 신경림 시인에게 끌리게 됐고, 신경림 시인의 시들까지도 찾아 읽게 되었다. 그의 유명세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시를 여러편 탐독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시를 접하면서는 더욱 이 시인이 좋아졌다. 어쩜 이런 시를 써낼까, 감탄하면서. 가령 이런 시들 말이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달 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이 옛 시인들을 찾아 이러저리 떠돌았던 데에는 지나온 이력이 있다. 그는 시인만을 찾아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듯이 그는 장돌뱅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장이 서는 곳들을 찾아 떠돌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떠돌면서 보았던 애틋하게 삶에 충실했던 농민들, 서민들, 민중들의 모습을 이렇게 시로 그려냈다. 주천강 가를 지나다 본 마애불에서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웃음이기도 하다.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질긴 삶을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때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며 살아간다. 그 모습들에서 시인은 삶의 소중함과 행복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는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했고,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나는 왜 시를 쓰는가」) 했다. 그 이웃들은 설움 속에서도 그렇게 "사람답게 살"고 있음을 볼 때, 너무나 좋아서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부처님 체면은 아랑곳없이 춤을 춘다.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나는 신경림을 대단한 시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인이 전집을 엮어 내었을 때, 나는 이 늙은 시인이 시 쓰기를 그만할 작정인가 염려했었더랬다. 그러니 이번 시집이 무척이나 반가울 수밖에. 그런데 그런 반가움을 뒤로 하고,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를 온통 흐느끼게 한 것은 노(老)시인을 감싸고 도는 왠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이번 시집 한 편 한 편을 흐느끼며 읊었다. 아, 이 시인도 그가 찾았던 옛 시인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는구나.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전문

 
   

시집 『낙타』는 여는 이 시에서 나는 '낙타'를 타고 쓸쓸히 길 떠나는 시인을 본다. 사막을 그 고된 길을 낙타는 뚜벅뚜벅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걸어간다. 등은 굽어 뒤우뚱거리며 걷는 것이 마치 어느 늙은이의 쓸쓸한 뒷모습 같다. 그런 낙타를 타고 "가장 가엾은 사람", 곧 시인이 저 멀리 사막의 길을 간다. 일흔을 넘긴 시인에게 드리운 것은 저 '저승길'의 "별과 달과 해"일 뿐이다. 이번 시집은 이 노시인이 차분하게 그러나 "아무것도 못 본 체" 낙타를 타고 걸어가는 사막길에서의 편지가 아닐까?

그 가는 길에서 시인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이"와 "눈에 웃음을 단 아낙"과 "조그맣게 엎드려 사는 사람들"과 어느 또다른 늙은이가 저 뒤어서 타고오는 '조랑말'(「이역(異域)」)을 본다. 때론 '사랑방에' 앉아 계셨던 '할아버지'도 보고, '건넌방에' '아버지'도 보고,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본다.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장난을 하"(「즐거운 나의 집」)던 자신의 옛모습도 본다. 그는 또 '고목을 보'면서는 이렇게 읊는다.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고목을 보며」부분

 
   

그렇게 먼 길을 가면서 시인은 '이역'의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지나간 옛 추억에 침잠하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는 "흉하고 추하기만" 한 제몸을 돌아보며, 지난 날에 품었던 '찬란한 꿈'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면서, 천천히 죽음의 길을 간다. 그가 가는 길은 "무너진 성과 집 사이의 무성한 잡초 속"(「폐도(廢都)」)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는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 그리고/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흐르고 있기도 하다. '낙타'를 타고 가는 그 길은 '사막'이고, '무너진 성과 집'을 지나며, '무성한 잡초 속'이기도 하고, 그 옆으로는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나와 세상 사이에는」) 흐른다. 이 모든 것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것이고, 시인에게 죄송스런 말씀도 아닐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은, 그 길을 가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마지막 편지, 마지막 시편들이 아닐까?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귀로(歸路)에」).

이번 시집의 구성을 보면, 시인의 죽음에 대한 정서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시편들은 1~2부에, 그리고 3부에서는 파괴되고 오염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편들을, 그리고 4~5부에서는 기행시편들을 모아두고 있다. 사실 그의 시편들은 기본적으로 '기행'으로부터 탄생하지만, 4~5부에 실린 시편들이 보이는 차이는 국내가 아닌 국외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정서와 메세지는 여는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집 말미에 담긴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인생을 겸허히 토해내고 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던 시에 대한 회의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시인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정의에 입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지는 시를 쓰고자 했단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성 높은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다. 그런 그에게 결론은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 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없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였다. 그것이 시인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3부에 엮인 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적 성취에서는 좀체 신경림 시인의 명성에 부합하지 않지만 말이다. 4부와 5부에 엮은 시편들은 이역 만리를 여행하면서 거기서 보고 느꼈던,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보지 못"했던 것을 시로 풀어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본 그 타국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한 오십년쯤 전/안성 장터 어느 골목으로 사라지던/떠돌이 젊은 악사와 닮았다 그 어깨가./몇봉지 약을 팔기 위해 저녁 한나절 기타를 켜고는/절뚝거리며 골목으로 들어가던 그 어깨"를 바라본다. 우리네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본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는 사는 모습과 애환과 설움은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편들은 지난 날의 그의 시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노쇄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간혹은 시적 성취는 좀 떨어져 보이는 것 같다(특히 3부의 시편들이 그렇다). 그러나 고희를 넘긴 시인이 써낸 시들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가 세상에 대고 격없이 퍼붓는 비판들은 그만큼이나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가령, "그 잘나고 힘센 사람들은 다 두고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수만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부서져야 했는가?"(「아, 막달라 마리아조차!」)라는 절규가 그렇다. 상투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노시인의 애틋한 절규에 대고.)

노시인 신경림의 마지막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한 이번 시집 『낙타』는 그래서 끝까지 안타까움으로 읽혔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서서히, 우리도 이 노시인의 기나긴 시적 여정을 기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시인이 무거운 걸음을 애써 옮겨가며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아름다고 낭만 넘치는 옛시인의 자취와 노래들에 감격했듯이, 우리도 이 노시인이 낙타를 타고 사라진 이후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끝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는 찾을 수 없는 노시인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이 행복한 순간에 많이 많이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가, 이 노시인을 찾아갈 때다. 얼른, 출발하자.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을 찾아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아! 내 더 큰 바람은 이 노시인이, 이 큰 시인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었으면,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갔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이 아름다운 그의 "방언을 중얼거"려 주었으면, 그랬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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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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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통 시 양식 중에 하이쿠(俳句)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정형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양식일 것이다. 5-7-5의 음절로 이루어진 하이쿠는 달랑 한 줄이다. 꼭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식으로하면 17자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시가 짧은 만큼 쓰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실 시는 생략과 절제가 미덕이다. 압축의 미. 그것이 극도로 발휘되는 시 양식이 이 하이쿠다. 단 한 줄에 시인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하이쿠다. 그래서 쉽지 않다. 한 줄로 시인의 마음을 담아내고 그것을 듣는(읽는) 사람들에게 큰 여운과 감동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이쿠는 한 문장의 시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감행한다. 송곳에 찔린 듯한 딴끔한 충격. "마음을 찌르는 생의 의미가 있고, 유머가 있으며, 그리고 그림 같은 묘사가 있다." 특히 하이쿠의 대가 바쇼(芭蕉)의 시가 그렇다. 그의 시는 "단순하고, 쉽고, 운율이 있으며, 시적이다. 동시에 단검으로 찌르듯 생의 핵심에 도달한다."

일본의 하이쿠는 매력적인 시 양식임에 분명하다. 서양의 학자들도 이런 하이쿠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하이쿠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시인 중에 이 하이쿠를 가장 잘 쓸 것 같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안도현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전문,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안도현의 이 시에서는 하이쿠가 가지는 매력들을 물씬 풍기고 있다. 짧은 시일수록 그 안에 삼라만상을 담을 듯한 넓이와 깊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비록 안도현은 하이쿠 시인이 아니지만, 그의 시에서는 하이쿠가 가지는 다양한 장점들을 담아내면서, 단순하면서도 쉽고, 운율감이 있으며, 시적 여운을 길게 남긴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는/누구에게 한 번 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며 삶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안도현은 1984년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데뷔한 이래(엄밀히 말해 데뷔작은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낙동강」이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등을 내놓으며 작품성과 함께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는 인기 시인이 되었다. 단적으로 그는 본격문학 가운데 가장 잘 팔리는 시인일 것이다. 그는 1998년 '소월시문학상'을 받으면서 그 시의 문학성도 높은 경지에서 인정을 받는다. 그러니까 우리 시인들 가운데 몇 안 되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그가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다. 이 상이 소월의 시적 정취와 경향을 따르는 시인들에게만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안도현의 경우 소월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서 이 상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소월의 시 만큼이나 운치 있게 읊기 좋다. 이후 『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문학동네, 2005.),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등을 펴내며, 안도현은 그야 말로 한국의 대표시인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안도현을 말하는 자리에는 으레 섬진강을 터잡은 김용택 시인을 언급하게 된다. 이 둘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둘의 출발도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다. 김용택이 섬진강에 터잡은 시골 초등 교사였다면, 안도현은 전라도 이리(현 익산) 시골마을의 중등 교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도현은 전교조 해직 교사 시절은 오래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복직이 되었지만, 이후 그는 큰맘을 먹고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들어선다. 여기에는 이래저래 비판도 많았다. 그것은 차치하고 그가 글쓰고 시만 쓰며 살겠다고 나선 데에는 작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시만 쓰고 먹고 살기가 안도현인들 쉽겠는가마는, 그나마도 안도현이였기에 그에 대한 대중적 사랑이 그나마 전업작가로 나선 그를 먹여살리기가 가능했지 싶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가 전업작가로 나선 이후 더욱 아름답고 좋은 시를 내어놓느냐는 것일 테다. 내가 볼 때,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안도현은 전업작가의 길에서 다시 선생의 길로 살짝 귀로한 것 같다. 우석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서 버젓이 '교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수도 선생이지만, 이전의 그것과는 물론 그 성격이 다를 것이다. 시를 평생의 업으로, 시만 쓰면서 살겠다고 나선 그가, 이제는 시인으로서 다다를 어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시인은 애써 부인하겠지만, 나같은 범인이 선뜻 반론을 펴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제는 그처럼 시를 쓰면 살겠다는 이들에게 시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교수 안도현이 제자들에게 던지는 화두이면서 시론, 시학이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은 안도현이란 시인의 시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중요한,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 「공양」전문

 
   

이 시는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의 첫 머리에 실린 시다. 말하자면 서시인 셈이다. 비록 제1부 첫머리에 갇혀 있지만,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담고 있는 시다. 대부분의 시집에서 이처럼 첫머리에 얹힌 시들이 그 시집의 키워드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이다. 아무튼 이 시에서 안도현은 시쓰기는 '공양'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싸리꽃을 위한 산벌의 날갯짓, 칠꽃의 향기,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 소낙비의 오랏줄, 매미울음. 이것처럼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그 향기를 널리 퍼뜨리고, 슬퍼하며, 감싸주고, 울어주는 그 무게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가 간절해 지는 것. 이것에는 '공양'하는 마음이고, 시를 쓰는 마음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면, 시를 쓰는 시인의 자세는 '구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독거」부분), 홀로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구름처럼 세상과 자연과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는 시작된다. 박형준이 지적하듯이 이 시집 전체가 하나의 바라봄의 시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안도현은 그 바라봄이 어떻게 시로 태어나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지금까지의 시들이 보여주는 바도 세상과 자연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봄이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빗소리」)하는 것이 시가 된다.

시인 안도현에게 시란 '철길'이기도 하다.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자국으로 꿰매놓은 것"이다.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는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탁족도(濯足圖)」부분)는 시인의 마음이 "두 줄기 실자국"처럼 꿰매져 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안도현의 시들은 "수면에 욜랑욜랑 무늬를 짓는 빛의 시문(詩文)을 베껴두었다가 밤 들면 어두운 창가에 걸어"(「탁족도」부분)두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는 한없이 바라보다가, 달빛의 시문을 베껴두기도 하고, 멀리 바라보는 그곳에 가고싶은 마음을 "두 줄기 실자국으로" 아쉽게 꿰매놓음으로써 시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안도현의 이런 바라봄은 그저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한 마음이고 따스한 마음이며 애처로움의 마음이다. "기러기 알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품는"(「기러기 알」부분) 마음이다. 때론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혼자 남아 날이 새도록 달을 돌리는 아이"(「목판화」부분)의 마음처럼 "참 철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벌레도 사람도 반반씩 사이좋게 나눠먹는"(「콩밭짓거리」부분) 마음이 안도현 시인의 그 바라봄에 깊게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아무래도 순수한 아이의 마음, 곧 동심이다. 그래서 일까?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깔스런 음식이야기가 이 시집의 제2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은 시인에게 추억이고, 아름다움이며, 시간을 넘어선 오랜 사랑이다. "눈발의 이동경로를 따라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맛있게 자셨"던 어머니가 해주던 '명태선'을 이제는 "아들과 함께"(「북방(北方)」부분) 맛보는 지금, 그 추억과 사랑이 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먹음직한, 맛깔스러운, 담백한,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애틋한 음식이다. 그래서 시는 이 음식과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나는 음식의 시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통영 바다는 두런두런 섬들을 모아 하숙을 치고 있었다

  밥 주러 하루에 두 번도 가고 세 번도 가는 통통배

  볼이 오목한 별, 눈 푹 꺼진 별들이 글썽이다 샛눈 뜨는 저녁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 여자 생각하던 평안도 출신이 있었다

- 「백석(白石) 생각」전문

 
   

안도현은 옛시인 백석을 무척 사랑한다. 백석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이번 시집의 제2부 음식시편들에 오롯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시인 백석이 음식을 소재로 많은 시를 써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시집의 음식시편이 백석의 영향이 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도현은 백석의 시에서 한 구절을 따와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제목을 삼기도 했을 만큼 백석을 사랑한다. 그래서일까? 안도현은 점점 시인 백석을 닮아가고 있는 것도 같다.

   
 

  건진국수에는 건진국수,라는 삼베 올 같은 안동 말이 있고 안동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여름날 안마루에서 밀가루박죽을 치대며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있고 반죽을 누르는 홍두깨와 뻣센 손목이 있고 옆에서 콩가루를 싸락눈처럼 술술 뿌리는 시누이의 손가락이 있고 칼국수를 써는 도마질 소리가 있고 멸치국물을 우리는 칠십년대 녹슨 석유곤로가 있고 애호박을 자작하게 볶는 양은냄비가 있고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펌프질하는 소리가 있고 뜨거운 국물을 식히는 동안 삽짝을 힐끔거리는 살뜰한 기다림이 있고 도통 소식없는 서방이 있고 때가 되어 사발에 담기는 서늘한 눈발 같은 국수가 있고 찰방거리는 국물이 있고 건진국수 옆에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있고 열무며 풋고추며 당파를 담은 채반이 있고 건진국수에는 누대의 숨막히는 여름을 건진국수가 안동 사람들을 건졌다는 설이 있다.

-「건진국수」전문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모닥불」전문

 
   

이 두 시를 놓고 보면, 시적 구조나 방법에서부터 시적정서까지도 무척 유사하다. 무미건조하게 소소한 것까지 나열하고 있는 것같지만, 그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시적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안도현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백석을 흉내내고 닮아가고 있다. 설마 그가 '백석시문학상'을 노리고 그런 것일까? 아니, 백석을 사랑하는 탓일 게다. 안도현의 음식 시편들이나, 백석에게서 영향을 받은 시편들이나 그것이 백석이란 한계에 머물지 않고 안도현 만의 다른 시편들로 형성하면서 또다른 시적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은,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이 시편들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안도현은 백석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안도현은 이번 시집에서 바라봄의 시학과 음식의 시론을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백석이라는 시인에게서 느끼고 배운 바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금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안도현의 시학으로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예천 태평추」부분), 그렇게 그는 시를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시를 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간절함과 철없는 순전함으로 시를 쓰고,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넌즈시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이 안도현에게 있어서 매우 유의미하면서도, 우리에게 또한 아름답게 가치 있음은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 안도현은 할 일을 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져도 좋고, "아무 이유 없이 걷"기도 하며,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를 맡아도 보고, "가끔 소낙비를 흠씬 맞기도 하면서, 때론 철없이 혼자 우는 것"(「가을의 소원」부분)이 소원이란다. 그렇게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울음들이 있는 한, 그는 우리에게 이 시 '공양'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의 울음은 곧 시가 될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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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29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관심도서였기에 저도 사서 읽었지요. 그날 가방속에 있었고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시 꺼내든 시집.
즐거운 시간 뒤로 하고 광주입성했답니다!

멜기세덱 2008-01-30 02:14   좋아요 0 | URL
저도 며칠 전 읽었는데요, 아주 좋았습니다.ㅎㅎ
그리고 오늘 안도현, 김사인 북콘서트에 갔다가 듣지는 못하고 사인만 받아왔는데요, 항상 이분들 뵐 수록 설레요...막.....ㅋㅋ

로쟈 2008-01-2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하지는 않은 '백석 계보'의 적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멜기세덱 2008-01-30 02:17   좋아요 0 | URL
백석의 매력이 안도현 시인을 통해서 한층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백석의 계보를 제가 꿰고 있지는 못하지만, 백석의 영향을 느껴지는 시들이 제법 되는 것 같아요. 김사인 시인도 그렇고요. 백석을 가히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러도 족하지 싶어요.ㅎㅎ
 
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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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징가 계보학』? 무슨 시집 제목이 이래? 내가 이 시집을 처음 보게 된 것이 언제, 어디서인지 모르겠다. 2005년 9월에 출간되었으니, 한 몇 달은 전에 있었던 일이었을 게다. 아마도 어느 서점의 시집 코너에서 스쳐가는 눈길을 이 독특한 제목의 시집에 멈췄던 것이 분명하지 싶다. 그렇게 눈길로 담아두고 오래 묵히다가 최근에야 이 시집을 사 읽었다. 그 첫 만남 즈음에는 독특은 했었어도 선뜩 시집에 손길주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던 것이지 모르겠다.

  이 책을 주문하여 받아보는 즉시, 표제시 「마징가 계보학」을 펼쳐 보았다. 제1부 두 번째 수록된 시였다. 전문을 옮기자니 너무 길다. 그래서 옮기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는 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짱가, 그랜다이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마징가를 비롯한 그의 후예들은 전날의 그 마징가 들이 아니었다. 마징가 Z, 그 “기운 센 천하장사”는 “우리 옆집에 사”는 술고래였다. 고철을 모아 파는 이 마징가는 밤만 되면 술 먹고 아내를 그 굳센 팔로 두들긴다. 이보다 더 대단한 마징가, 그레이트 마징가는 마징가Z의 그 지겨운 소란을 “오방떡 기계”로 무마시킨다. 이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 그레이트 마징가의 마누라는 아마도 짱가를 찾아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마지막 그랜다이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부분의 소제목이 ‘4. 그랜다이저’다. 왜 그랜다이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무언가 숨어있기는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이 마징가Z부터 그랜다이저까지의 계보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웅 로봇들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 먹고 마누라는 패는 사내, 그 사내의 소란을 못마땅하게 여겨 때려눕힌 사내, 그 사내를 두고 도망간 아내, 그리고 그 사내들과 아내들이 저 우주 너머 외계에서 그랜다이저가 만들어준 그런 행복한 공간에서 거했으면 하는 인간사다.

  

  사뭇 재미있는 형식의 시도다. 만화 주인공을 끌어다가 이런 인물들을 표현하고 있는 그 자체로 처음에는 웃음을 짓게 한다. 그러나 읽어가면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한다. 그래서일까? 독특한 제목이 준 호기심뿐이었다면 이 시를 나는 시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들이 사는 배경을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어느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저소득층의 서민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그대로의 현실이지만, 그들은 어쩌면 마징가나 그랜다이저가 그런 것처럼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그런 비현실적인 모습들이다. 이런 비현실적 인물들이 전 시대, 혹은 현 시대에도 여전히 현실로서 살아가고 있다. 비현실성과 현실성의 만남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웃음과 애잔함의 교차, 쓴웃음으로 마감되는 이 시는 결국은 모순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고 노래했던 시인과 촌장은 한 사람이다 나도 그랬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부르며 귀가할 때마다 나는 출가한 붓다였고, 샴쌍둥이처럼 그녀의 몸에 세들어 살고 싶을 때마다 나는 늑대인간이었으며, 출근하기 싫어 장판에 들러붙을 때마다 나는 그레고르 잠자였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나는…… 이라고 쓰는 나는……    -「모순」부분

 

  

  이 시에는 아수라 백작과 헐크, 육백만 불의 사나이가 등장한다. 그들은 모순을 내재한 인물들이다. 양성구유의 아수라 백작, 괴물로 변하는 데이빗 배너 박사, “제 안에 제 것 아닌 걸 데리고 사는” 스티브 오스틴 대령. 모순을 내재한 이 인물들로부터 “좌익과 우익을”, “안팎의 경계”를 배우고, “초당 9.8미터를 더한 속도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아이들”이 생겨났다. 좌우, 안팎은 그 사이에 모순을 내재한다. 이 모순은 뛰어내려서는 안 될 옥사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작게는 다리에 부러지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상처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화자 개인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여러 모습들이 각각의 상황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튀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별난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러할 테니까. 결국 현실이란 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다.

  이 시집의 저자 권혁웅의 기법은 하나의 모순어법이다. 패러독스라고도 한다. 「마징가 계보학」이나 「모순」에 등장하는 만화나 공상 영화 속 주인공이든, 그에 비견되는 현실 속 인물들이든 모두가 이 모순으로 형상된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마징가로 대표되는 시인의 인물 군들은 비현실성을 대표하면서도 강력한 현실성으로 모든 시에서 표현된다. 때론 희극적으로 때론 애잔하게, 어쩌면 비극적으로 말이다. 그랜다이저가 만드는 세상, 곧 저 외계의 행복한 공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곧, 시의 화자가 살았고, 살아가고 있는 공간은 현실 그 자체이고, 그 안에서의 모순된 현실은 다분히 비현실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현실인식이 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시 「드라큘라」에서 “지금 서울엔 마늘 시세가 똥값이다 십자가는 동네마다 있다 그리고 나는 아파트에 산다//그분들처럼 이 동네 사람들도 밤이 되면 층층이, 나란히, 눕는다”는 언술은 그런 현실인식을 대표한다. 만화 같은 세상, 영화 같은 세상으로 시인을 현실을 파악하지만, 그것이 다만 만화나 영화처럼 허무맹랑한 것들로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시인이 살아오면서 보고 경험했던 현실 그자체가 그것들과 함께 모순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보자.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이, 애숙(愛淑)이, 양숙(良淑)이, 현숙(賢淑)이, 경숙(京淑)이, 남숙(南淑)이, 난숙(蘭淑)이, 미숙(美淑)이, 정숙(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정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뜨거운 주전자 물을 뒤집어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거지꼴을 한 동방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쑥대머리」전문

 

  

  말하자면 정숙이 에피소드라고 할까? 처음엔 고종석의 『바리에떼』에서 진주타령을 보는 듯도 했지만, 중간이후부터는 다분히 꽁트스러운 반전이 있다. 제목 자체에 농축되어 있듯이, 이 시는 정숙이라는 아이의 대머리 굴욕사건이라고 하면 딱인 셈이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이 ‘쑥대머리’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한참을 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정숙이란 아이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겉모습과 대머리로 대표되는 내면의 모습 사이의 모순을 깊이 간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정숙(貞淑)이란 이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래도 항상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정말 정숙(貞淑)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대머리였다. 모순을 간직한 채 살아온 아이는 그 모순이 발현된 순간 ‘그 길로’ 상처를 안고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 모순된 현실 속에 화자 자신이건, 또는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건, 그리고 정숙이건, 누구도 빠져나올 수도 없고,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혁웅 시에서의 말하기 방식은 간혹 하이개그를 구사하기도 한다. 쌍팔년도 개그라고 욕먹기 십상인 이 개그는 “나중에 사과해서/과수원을 해도 좋았을 친구”처럼 구사된다. 「쑥대머리」도 이런 식에 포함될 듯싶다. 이런 하이개그식 어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조소를 머금게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아이러니를 형성하는데, 이런 반어적 어법 또한 현실세계의 모순을 보다 극명히 드러내주는 데에 기여한다. 아내를 두들겨 패는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도 그레이트 마징가에게 두드려 맞듯이, 그 그레이트 마징가의 아내는 또 어딘가로 집을 떠나듯이, 이들은 아무리 보다 마징가도 아니고 그랜다이저도 아니다. 이 얼마나 반어적인가? 아이러니는 모순의 또 다른 표현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런 식이다. 가지각색의 만화 영웅들이 등장하고, 때론 에로배우도 등장한다. 야구선수 박철순도 등장하고 원더우먼과 용가리, 킹기도라 등등 각양각색의 비현실성의 대표들이 현실성과 합체되면서 변주되고, 그러면서 시인의 지난날의 경험들과 보고 들음과 어우러져 지극한 현실성을 획득한다. 이 속에는 모순과 아이러니로 꽉 들어차 있어 우리를 웃게도 했다가 씁쓸하게도 하고, 때론 울게도 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패러디의 집합처럼도 보인다. 백석의 시를 비롯해서 팝송에서도 구절구절들을 따오는 시의 작법들도 제법 많다. 그러니까 어느 곳 어디에서도 모순을 발견되고,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다. 마징가는 우리 시대 모순을 대표하는 존재의 시원인 것이다.

  황현산은 해설에서 “『마징가 계보학』은 필경 이 시집의 저자였을 화자가 서울의 가난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목도하고 살아낸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을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와 유머의 그물로 엮어낸 모욕과 굴종과 폭력의 족보”라면서 이름하여 이것을 ‘기억의 계보학’이라 칭한다. 분명 그럴 수도 있겠다. 황현산은 덧붙인다, “유쾌하고 비통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기억의 계보학’이란 표현에 맘 상했던가보다.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주름―사람들의 동선(動線)이 그어놓은―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사람들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시인의 말에 동의한다. 각개 군상들의 ‘주름’과 ‘겹으로 된 삶’의 그 지극한 속성에 대해서, 모순에 대해서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어찌 그것을 아련한 기억의 저편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시집은 그럼에도 재미있게 읽힌다. 이 시집을 읽는 내내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 웃음 공허함만을 남겨주는 단순무식 개그는 아니기에, 시집을 덮고나서 운다고 하더라도 그리 겸연쩍은 일은 아닐 것이다. 시집에 경기(驚氣) 있으신 분들까지도 일독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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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11-0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 경기 있는 제 흥미까지 끄는 독후감이었습니다, 멜기님. 혹시 정가 만원짜리 책 팔면 작가,출판사,중간상인,최종소매상이 얼만큼씩 이익을 얻는지 대충이라도 아세요?

멜기세덱 2007-11-08 22:02   좋아요 0 | URL
재밌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ㅎㅎ
제가, 출판계통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근데, 저자 인세의 경우 얼핏 잘 나가는 작가 정도가 10%를 받는다고 들은 것 같아요.
나머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은 가능할거 같아요. 최근 할인율을 10%로 제한하고 있는 걸 볼때 최종소매상의 경우 10%이상 마진을 주지 않을까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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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광규(金光圭, 1941~)와는 좀 이상한 악연(?)이 하나 있다. 그 악연은 2005년 12월 첫째 주 일요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학년도 중등교사 신규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이라는 무시무시한 시험에 처음으로 응시하는 그 날, 그와의 악연은 탄생했다. 내 대학 인생을 유일하게 유의미하게 마무리하도록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유일함에 대해 대부분의 대학생활을 반항하며 지냈다. 명색이 시를 좋아한답시고 끄적거려 보기도 하고, 시집을 많이 읽는 척들도 해보고, 시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사 모으는 것은 내 대학생활의 낙이었다. 그 중에서도 시비평서들을 읽는 것을 좋아했더랬다. 시를 쓸 만한 재능이나, 그것을 이해할 만한 어떤 철학적 이론들을 구비하지 못했었기에, 시를 읽어주고 이해시켜주는 비평들이 그나마 시를 좋아한답시고 떠벌이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보는 당일까지도 내 가방에는 시 평론 모음집만이 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신뢰성을 높여준다. 하나는 내가 그 중요한 시험에는 하등 아무런 준비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반증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대학 생활을 시를 좇으면서 보냈을 거라는 추측의 확실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그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 곧 시인 김광규와의 악연이 있게 한, 그 주인공은 바로 『대표 시 대표 평론 2』라는 책이다. 이 책은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와, 그 시에 대한 대표적인 평론들을 엮은 시 평론집이다. 시험을 보는 날까지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보기 바로 며칠 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꽤나 유명한(사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이 유명한 것이지만) 김광규의 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싶다. 김광규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와 그 평론(서울여대 이숭원 교수의 글이다.)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김광규를 세밀히 접한 적이 없었다.(이 리뷰를 쓰기 이전, 그러니까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읽기 이전까지도 유효한 진술이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나는 여러 번 읽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만큼 유명했으니까.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많이 접해 본 시(詩)였기에 이 시와 그 평론에 유달리 관심을 가지고(가방에 넣고 다니는 또 하나의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샤프다. 책에 낙서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어지간하면 밑줄 같은 것도 치질 않았다. ‘유달리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프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집중해서 읽었다. 중요한 대목들에 밑줄도 긋고, 이숭원 교수의 설명을 착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와 이숭원 교수의 해설은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시험 보는 그 날에도 말이다.

  짐작들 하시겠지만, 시험 당일 나는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시험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시험지를 받아들고, 그래도 찬찬히 한 문제 한 문제를 읽어내려 갔다. 알듯 말듯(사실 ‘알듯’은 ‘말듯’에 비해 극소수에 지분만을 차지한다.) 한 문제들로 가득했고, ‘알듯’한 것을 나름대로 짜내고, ‘말듯’한 것은 그럴싸하게 꾸며서 차곡차곡 빈칸들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쓰다 보니 한 장 두 장 넘어가고, 팔이 아프고, 대강 한 절반 쯤 넘어갔다 싶더니, 2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그래도 시험이어서 그런지, 30분이라는 남은 시간의 경고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남은 문제들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풀어나갔다. 결국 30분이란 시간도 지나고 넘겨보지도 못한 시험지가 2장쯤 되었다.(시험지는 총 10장이다. 이때는 총 23문항으로 모두 서술형이다.) 감독관은 시험 종료를 알려왔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사로 남은 시험지를 들춰 넘겨보았다.

  아뿔싸! 시험지 마지막 장을 가득채운 한 문항이 있었으니, 그게 다름 아닌 김광규였고, 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고, 배점이 무려 8점이었던 것이다.(총 23문항이 출제된 이 시험의 총점은 80점이다. 이 문항 하나에 무려 총점의 10%에 해당하는 점수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거의 논술에 가까운 답안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빠르게 그 문제를 읽어본 결과, 나는 며칠 전 읽었던(이상하게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이 시와 이 시의 평론을 불현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나는 시험지를 그냥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이 끝난 후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비공개되는 출제위원에 대한 풍문들이다.) 서울여대 이숭원 교수가 출제위원으로 들어갔었다는 것이 아닌가(이 사실이 맞는 것인지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럴 수가! 그 문항을 돌이켜보면, 또렷이 기억하던 그 평론을 대강 요약하여 써놓았으면 거반 만점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려 8점을 놓쳐버린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고! 내 팔자야.’를 연발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시험에 낙방을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문항(결과론적이지만 내가 시간이 있어서 그 문항을 맞췄더라도 시험 합격에 영향을 주지는 못 한다.)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질 못했던 것이다. 아! 김광규. 악연이라는 데에는 의문이 들지만, 좋지 못한 인연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 이후로 김광규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이숭원 교수는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나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예비군훈련(반나절짜리 훈련이다. 으레 나는 예비군훈련엘 가서 시집을 읽는다.)을 받기 전에 시집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서점의 시집목록을 훑어보다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 김광규, 그리고 그의 신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었다. 나의 정신적 외상은 나를 무의식적(?)으로 이 시집을 주문하도록 만들었다. 억하심정에서였을까? 그렇지만은 않을 무언가 아쉬움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시집을 며칠 전 예비군훈련에 동원했고, 읽었고, 다시 한 번 ‘아! 김광규.’를 외쳤다는 것. 그것이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그와의 악연을 끝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 김광규.’는 그런 의미에서의 감탄사다. 이 감탄사는 그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한 반전에서 오는 것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이전의 김광규에 대한 나의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김광규란 이름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동일시되었고, 그 시에 대한 조악한 이해는 그대로 시인 김광규에 대한 나의 이해로 이어질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기억되는 그의 시세계는 “자기 세대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냉철하게 비판”한 것 이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 시 또한 나름의 시적 성취를 가지고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4 ․ 19가 전면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단출하게 이해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 김광규.’는 이런 맥락에서의 반전에서 오는 감탄사였다. 이전의 단조로운 김광규에 대한 인식과 한 때의 악연이 만들어낸 아주 조악한 이해를 단숨에 타파해 버린, 무엇인지 모를 흔쾌함을 그의 최근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에서 나는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보이는 그런 비판자적 모습의 김광규가 아니라, 이제는 어느덧 노년의 할아버지 김광규의 따뜻한 서정성을 감지한 덕분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시작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다분히 시적 노정의 굴곡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 노정에 동반하지 않았던 관계로, 이 시집에서의 그의 다소 신선한 모습에 나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김광규의 나이가 이렇게 많았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4 ․ 19를 겪고 18년이 지나서 쓴 시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고, 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다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시인 김광규로만 기억할 뿐, 그의 나이 듦을 전혀 고려치 않았었던가 보다. 어쩌면 모든 시인은 시와 함께 나이 드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백석이나 기형도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청년기의 그들의 시적 나이로만 그들을 기억할 뿐이다.(다소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아나운서가 몇 달 새에 부쩍 늙어버린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도 이 시집을 통해 그런 놀라움이랄까,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경이감을 느끼게 되었다. 60대 후반의 김광규를 어느 때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이번 시집에 배인 그 노년의 감수성은 자못 충격이었고, 나는 그 충격 속에서 어떤 포근함 마저 느끼게 됐다. 결국 그와의 한때 악연은 멀리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혼자서 산길을 올라갑니다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 들

산비탈에는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들

청설모와 다람쥐가 나는 듯이 오르내리고

멧비둘기와 산까치 들 짝을 부르고

골짜기 물소리와 그윽한 숲 냄새

멀리 산봉우리 위로 떠도는 구름

어느 산이나 오솔길은 비슷하지요

등산객이 많은 곳 아니라 해도

싫증나지 않는 한적한 산길 곳곳에

흙과 돌과 풀과 나무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들 동행으로 벗 삼고

아내와 남편으로 맞이하라는

속삭임 귓전에 아련히 감돌다가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그 소리 알아듣지요

                      -「산길」전문




  김광규의 이번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부는 따로이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위의 인용한 시는 제1부의 제목과 동명의 시다. 그렇다고 이 시가 제1부의 첫 번째 시는 아니다. 두 번째로 실린 시에 지나지 않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집의 꾸릴 때 시인들은 각기 어떤 의도에 따라 시를 배열한다. 그 배열의 위계질서상 시집의 첫 번째가 될 시는 무엇보다도 그 시집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뛰게끔 되어있다. 말하자면, 한 시집을 풀어나가는 키워드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의도가 다분히 강하게 느껴지는 배열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첫 번째 시는 「춘추(春秋)」가 차지하는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시 「춘추」는 비록 제1부에 묶여 있지만, 그것은 이 시집 전체를 대표하는 키워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제1부에 어쩔 수 없이 있는 시라는 얘기다.

  그렇게 볼 때 위의 인용한 시 「산길」은 제1부의 표제시가 되는 것이다. 제1부의 제목이 「춘추」가 아니라 「산길」인 것은 그때문인 것이다. 「산길」은 제1부에 모인 시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이 시의 구조는 상승과 하강의 구조, 즉 ‘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구조이다. 그러면서 상승과 하강은 많은 점에서 대비된다. ‘산길’을 오를 때에는 ‘혼자’이지만, 내려올 때에는 그렇지 않음을 안다. ‘산길’을 오르면서 무심코 스치우는 것들의 의미를, 그 ‘산길’을 내려올 쯤에는 깨닫는다. 이 상승과 하강의 구조를 통해 화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혼자서’ 오르는 ‘산길’이자만, 거기에는 ‘혼자’이지 않게 하는 ‘정겨운’ ‘동행’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벗 삼고’ 함께 하라는 어떤 깨달음을 화자는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된다. 이 깨달음은 노년의 시인이 현실에서 얻은 실제적 경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서 저무는 저녁노을의 풍취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리고 산길을 묵묵히 내려오는 희끗한 어느 노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2행과 3행에서 보이는 복수접미사 ‘-들’의 쓰임이다. 이것은 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앞말에 항시 붙여 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당당히 ‘들’만을 독립해 쓰고 있다. 왜일까? 2행을 보면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가 있다. ‘황토 흙’은 여럿이고, ‘돌멩이’도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여럿이고, ‘잡초’ 또한 그 종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 ‘흙’과 ‘돌멩이’와 ‘잡초’ 사이사이에도 무한의 다른 존재들이 상존한다. 그것을 시인은 간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들’의 쓰임에서 우리는 시인이 ‘산길’을 오르며 본 것이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 그리고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겨운’ ‘벗’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세밀한 시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제1부에서는 이런 노년의 시적화자의 감수성을 살펴볼 수 있는 시들이 모여 있다. “죽음의 불빛들 찬란하게 반짝이는/수평선의 아름다운 야경”(「밤바다」)을 보는 한 노인은,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제 몫의 삶 지켜가는/청단풍 한 그루”(「청단풍 한 그루」)에서 그 여유로운 정서를 보여준다. ‘산길’을 오르며 보았던 자연의 모든 것에서 「산 아래 동네」에 있는 모든 하찮은 것들까지도 “우리 동네 이웃들”로 삼는 시인이다. 더불어 시인은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데, “담쟁이덩굴은 느린 속도로 넓게 퍼져가면서, 모든 땅과 벽과 지붕을 남김없이 뒤덮고, 결국 온 동네를 점령하게 되었”(「담쟁이덩굴의 승리」)다는 것이나, “못생긴 덕택에/위엄 있게 살아남아 오늘까지/달 마을 지키는 팽나무/정승 댁 송덕비보다 신령스러워”(「팽나무」)한다거나, “끈질긴 생명의 경이와 환희를 보여준 이 화초”(「이대목의 탄생」) 등에서 보이는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은 노년의 시인만이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까?

  이 시집 전체에는 노년의 김광규 시인의 나이 듦의 짙은 애수와 더불어 삶의 성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았던 시인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한참 지나왔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능숙하게

무자맥질하면서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강」부분




  에서와 같은 노년의 애수 짙은 성찰을 보여준다.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의 ‘여중생’을 보면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이른 봄」)는 생의 희망을 보는 것은 노년의 김광규 시인이 가진 서정의 아름다움이다.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어느 날」) 맞이한 “한 생애의 후반기”에 그는 “젊어지는 세상으로 흘러가버리고 이제는/혼자서 쉬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고 푸념해 보기도 한다. 때론 ‘배추꼬랑이 신세’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뭇 대비되어 보이는 노년의 세상보기는 희망과 애수의 절묘한 교차 속에서 남은 생을 맞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치매환자 돌보기」




  어떤가? 시인 김광규는 이렇듯 나이 듦을 차분히 관조하지만은 않는다.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오는 어떤 희망과, 나이 듦의 애수 짙은 푸념도 섞이고, 위의 시처럼 당당히 세상의 각박함에 대해 몰아친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노년의 김광규 시인의 다채로운 서정을 느껴볼 수 있다. 단조로운 노년의 교훈 섞인 설교가 아니라, 때론 위트 있고, 때론 신랄한 아이러니와, 생의 묵묵한 관조와 깨달음, 그리고 숙성된 삶의 성찰을 우리는 여러모로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시간의 부드러운 손’인 것은 이런 시인의 짙은 서정이 그 거역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벽오동 잎보다 훨씬/커다란 손/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부드러운 손”을 정중히 맞이한 탓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시집의 제2부에서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시인의 비판적 목소리 또한 들을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보다 진화하여 푸근한, 그러면서도 예리한 시적 성취를 한껏 뽐내며 생의 막바지를 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점에서 ‘아! 김광규’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년의 김광규를 상상하는 것은 그에게는 미안한 것이지만, 사뭇 기분 좋은 일이다. 그의 정제된 성숙한 시적 성취를 이 시집은 고스란히 담아놓고 있지 않은가? 김광규란 인간은 늙었지만, 그의 시는 한층 활개 치며 그 아름다운 서정의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하다. 이 시집은 내게 김광규란 멋진 시인과의 악연을 단호히 끊게 만든 귀한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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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제목만으로도 심금을 울리잖아요.

리뷰도 참 구성지고 멋지네요 :)

멜기세덱 2007-09-03 00:03   좋아요 0 | URL
ㅋㅋ, 리뷰가 구성지다?
흠흠!!!ㅋㅋㅋㅋ

마노아 2007-09-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이 가득한 리뷰예요. 마지막 문제는 정말 안습이군요. 저는 올해 시험지 받으면 맨 뒷장까지 문제는 꼭 읽어보겠습니다(>_<)

멜기세덱 2007-09-04 00:00   좋아요 0 | URL
헉! 이번에 시험보세요? 설마 마노아님도 국어?

마노아 2007-09-04 20:49   좋아요 0 | URL
설마요. 전 역사로 봐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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