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많이 격조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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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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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평론집 <문학의 아토포스>를 읽었다. 문학 평론이라는 게 늘상 따분하고 지리하고 어렵고 짜증나게 마련이지만, 그 와중에 재미난 평론도 있기 마련이다. 작품을 보는 새로운 눈, 흥미로운 해석 등을 만나게 해주는 평론이 그런 류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런 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철학을 전공하고 시를 써서 등단하고, 교수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말은 어렵고, 문학 평론이라기 보다는 철학 평론 같은 느낌만 강하다. 문학은 거들 뿐.

 

저자는 문학의 정치성, 혹은 정치의 문학성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문학(예술)과 정치, 윤리에 대해 머리에 쥐가나리만큼 해박하게 논의하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의 견해를 바탕으로 "2000년대의 새로운 시인들이 지닌 자의식과 그들의 시에 대한 비평적 관점들을" 살펴보고 있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는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함으로써 낡은 분배 형태와 불일치하고 그와 맞서 싸우는 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하는 랑시에르의 입장에서 현단계에서의 한국 문학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분배,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듯 하다.

 

한국 문학은 그간 강한 정치성을 띈 문학과, 강하게 정치성을 배제한 문학으로 팽팽히 대립해 왔다. 한국 문학의 정치성을 논하면서 김수영에 대한 논의도 빼놓지 않고 있는데, 그보다는 전체적인 양상에서의 현단계 한국 문학의 정치성을 논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학의 정치성을 극도로 혐오하는 집단이 있고, 세상 정치에 쓸모 없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집단이 있다. 이 양극단은 타협이 불가하다. 정치성을 강조하다보니 문학성이 쇄퇴하였다거나, 의미없고 내용없는 허무맹랑한 아름다움 타령이나 하는 문학만 존재한다거나 하는 극단의 문학 양상은 우리 문학을 황폐하게 한 주범일 터이다.

 

그래서인지 진은영은 그러한 문학과 정치의 시간과 장소를 재분배하고자 한다. 문학적이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의 문학, 정치적이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의 정치를 행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그게 가능하고, 필요한 것일까? 진은영은 실제적인 작가들의 그러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가능성을 증거하고 있다. 문학 아닌 듯 문학이고, 없는 듯 정치적인, 그런 문학.

 

이 책은 어쩌면 진은영을 포함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의 실험을 합리화 혹은 이론화하고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과연 문학이 정치 아닌 듯 정치여야 할까? 그리고 과연 그것을 재분배하여야만 하는 것일까? 문학이 보란듯이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시간과 자리만을 찾아다니며 정치를 하면 그것은 문학이 아닐까? 정치적인 자리를 피하고 정치적인 시간을 거부하는 문학 또한 문학이 아닐까? 그들이 실험한 정치적인 장소에서 그것과는 전혀 무관해보이는 문학을 읊어대는데, 그게 또 다른 정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것과 정치적인 장소에서 당돌하게 정치적인 문학을 떠들어대는 것은 뭐가 다를까? 전자가 옳고 후자는 그를까?

 

나는 정치적인 문학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그런 인식이 그들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들은 '정치적'이란 단어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이고 왜 문제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정치적 문학은 나쁜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 문학을 편견없이 보는 인식이 필요하고,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그들의 논리에서 보면 정치성을 확 빼버리면서 정치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얼떨결에 생겨나는 정치성을 보라"는 식의 실험은 자칫 정치적 문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진은영은 말한다. '정치'라는 말에 노이로제가 걸린 듯한 작가들은 별다른 의미없는 낭송일 뿐인데, 정치적인 시간과 장소를 피하더라는. 그들을 다소간에 부정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 그들의 문학을 순순히 놓아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순수를 추구하는 문학의 순수 그 자체가 정치일 수 있으니.

 

혹자들은 이야기한다. 문학은 정치인 듯 정치 아닌 듯, 은연 중에 정치인 듯한 문학이어야 한다고. 그것이 문학성과 정치성을 올곧이 확보하는 길이라고. 어쩌면 이것은 문학가의 입장에서만의 억압적인 생각이 아닐까도 싶다. 대중들에게 문학의 재미를 통해 강력한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진은영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실험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것이고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인 문학과 비정치적인 문학의 양비론적 견해의 일단으로 흐르는 점을 우리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마감일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숙제를 마친다. 어려운 책이고 읽기 싫어서 그냥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그래도 책임이 있기에, 시간을 어기었지만, 마음을 편하다. 그래도 알라딘에 출판사에는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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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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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교회엘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개신교)에 나갔고, 중고등학생 때에는 교회 활동이 재미있어서 거의 자발적으로 열심히 다녔다. 대학에 오면서 교회와 멀어졌다. 거리상의 물리적 문제가 큰 원인이었지만, 그렇다해도 교회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다닐 수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연을 끊었다가 군대에서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대 후 다시 멀어졌다. 군대에서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된 것은 군대라는 특수성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신병때는 먹을 것을 주니까, 자대에서 짬이 낮을 때는 주말에 그나마 맘 편히 있을 곳을 찾으러)

 

내가 교회를 끊은 계기는 물리적 거리의 문제에서 유발된 심리적 갈등 때문이다. 과연 그 물리적 거리 상의 문제를 힘겹게 극복해 가면서까지 교회를 나가야할 이유가 나에게 있을까? 아니면 친숙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서까지 교회를 다녀야할 기제가 나에게 있을까? 결론은 '없다'였다.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나의 심리적 갈등에 문제제기를 강력히 요청한 것은 어느 목사님의 설교다. 지금은 그게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주제만은 강하게 기억하고 있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신앙인이 되라." 여기서 종교인과 신앙인의 정의를 정확히 내릴 수는 없겠지만, 종교인은 교회라는 체제에 얽매여 기계적으로 종교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 안에 신앙의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교회라는 공간에서의 생활이 좋아서 그저 일요일만 되면 교회에 가는 사람부터 교회내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위선적인 행위를 보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종교인일 뿐이다. 내가 나를 돌아볼 때, 나는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었다.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를 이겨내면서까지 교회에 갈 신앙은 적었다. 고민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였을 뿐이다.

 

여기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오늘날 종교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다. 신앙이 종교가 되고 종교인들이 넘쳐나고 그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그러다보니 분쟁과 분열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악의 전사가 되어버리는 현실.

 

<세 종교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러한 종교의 문제를 떠올리기 되었다. 유대교로 시작하여 기독교가 파생되고, 그 물줄기에서 이슬람교가 성립하기까지, 결국은 신앙이 종교가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유대의 종교가 되면서 분열하고 투쟁하며 문제들이 발생한다. 예수를 따르던 인물들의 믿음과 신앙이 기독교가 되면서, 다시 개신교가 되면서 입에 담기 조차 무서운 살육과 범죄가 발생한다. 무함마드의 깨우침과 신앙이 이슬람이 되면서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툼, 기독교와 이슬람의 다툼, 그런 종류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이슬람 안에서도 분열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으로써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 피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 여기서 종교의 백해무익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없애니 마니 하는 것은 또다른 피 흘림을 예견하게 만들 것이다.

 

<세 종교 이야기>에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뿌리가 같음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갈라져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께 분열하고 싸우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마도 원래는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했으니, 이제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뉘앙스를 책 전체에 심어놓고 있지 싶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쉽겠는가? 그리고 그게 가능하지도, 합당한 논리도 아니다.

 

이 책은 또한 세 종교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정리해 놓고 있다. 이렇게 비슷한 점이 있으니 공존하고, 이렇게 다른 점은 서로를 인정하자 하는 것일 게다. 분명 그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종교인데 어떻게 그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종교가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싸우게만 두어야할까?

 

근본적으로 이러한 종교들의 전쟁은 표면적으로만 종교를 들먹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려는 세력이다. 모든 종교적 분쟁과 전쟁, 그리고 분열은 바로 그 종교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대교는 유대교의 신앙으로, 기독교는 기독교의 신앙으로, 이슬람은 이슬람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되돌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것 또한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종교의 합일도, 차이의 인정도, 종교의 폐지도, 어느 것 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에는 좋은 방안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오면서 종교적 병폐의 문제들은 개선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의 사고와 이념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통해서 그들이 다시금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예수의 사랑으로, 무함마드의 깨달음으로 되돌아가게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길이 요원해보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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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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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이 어제 개막을 했다. 내가 사는 인천에서, 그것도 내가 일하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식에 차가 많이 막힐 줄 알았는데, 퇴근길은 그리 막힘이 없었다. 개막식의 입장료가 100000원이 넘는데, 감히 가볼 엄두를 못냈다. 티비로 중계를 보는데, 이건 뭐, '내용 없는 아름다움'도 아니고 그냥 '내용 없음'이란 느낌이었다. 쫌 유명하다는 사람들 데려다 시간이나 보내고 만 듯한 느낌. 하여간 그렇게 개막을 했다.

 

인천에서 하는 아시안게임이라길래 의무감에라도 몇몇 경기를 관람하고자 했는데, 이건 뭐, 볼만하다 싶은 것은 다 매진. 집에서 티비 중계로나 보아야 할 듯. 아시안게임의 각종 경기를 관람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치맥이다. 대한민국 야구팀 경기를 보면서, 축구를 보면서 치맥을 하면 딱 좋겠다. 손연재의 리듬체조를 보면서 치킨을 뜯는건 쫌 격이 떨어짐이 있다. 치킨집이 닭들을 많이 준비해 놓았을 듯 한데, 내가 지금 얘기하려는 것은 아시안게임이 아니라 치킨이었다.

 

정은정의 <대한민국 치킨展>에서 '展'은 '펼 전'자인데, '~展'하면 전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치킨을 전시해 놓은 책이라는 얘긴데, 글쎄 이것보다는 치킨의 사회사 혹은 사회학 쯤으로 읽힌다. 대한민국은 왜 치맥에 열광하는가? 우리는 왜 치킨을 먹는가? 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치킨이 대한민국에서 먹히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이며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치킨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치킨이 어떻게 키워지며, 유통되는지를 추적한다. 정유정을 치킨학자라 해야할 듯 싶다.

 

나는 치킨을 잘 먹지 않는다. 더불어 치맥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당연히 치맥을 해야한다고 외치기는 한다. 누구가 치맥을 하자하면 거부하지 않는다. 그럴 때 닭다리 하나 쯤은 뜯고, 맥주 한 잔 쯤은 마신다. 어느 특정한 순간에 치맥은 당연하다고 느끼고 딱이라고 느낀다. 왜일까?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 물음을 정은정이 던졌는데, '어 왜일까?'하는 궁금증이 신선하게 왔다. 그리고 그걸 정은정이 풀어내는데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짓으 왜할까 하면서도 치킨이 우리 사회의 변화와 문화와 경제의 모습을 반영하는 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다.

 

치킨의 종류와 치맥을 하는 이유 등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끌면서, 정은정은 치킨의 불합리한 유통구조, 치킨을 파는 자영업자 사장님들의 어려움, 대형 프렌차이즈의 횡포 등을 이야기한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이거 치킨을, 치맥을 계속해야하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과연 이 책은 치킨을 먹으라는 건지, 먹지 말라는 건지, 치킨이, 치맥이 어떻게 발전해야하는 건지, 안해도 되는 건지, 뭐 그럴 말은 하지 않는다. 치킨은 어떻게 변화해오고 있고 현재 치킨을 얽힌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탐구하고 있다.

 

어쩌면 조만간 더이상 우리는 치맥을 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치맥을 외친 이유는 글쎄, 정은정이 축제의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편히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어느 정도의 맛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나 더 간단히 먹으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 어떤것이 나온다면 치맥의 자리를 차지할 터. 더불어 우리의 경제적, 문화적 변화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최근 피자가 치맥에서 치킨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피자를 전혀 먹지 않으니, 아직은 치맥을, 치킨을 외칠 것이다. 정은정이 말하는 치킨의 사회사는 그럭저럭 흥미를 가지고 읽을 만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붙이는 것은 치킨에게 너무 과한 요구를 하는 것과 같다. 재밌게 그냥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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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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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하면 왠지 프랑스 사람 같았는데, 스위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대학교를 나왔단다. 결국 보통 프랑스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데 프랑스에서는 보통이 넘는 인정을 받았나 보다. 우리나라에서도 알랭 드 보통은 보통이 넘는 인기를 구가하는 듯하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 보통이 넘게 시중에 나와 있고, 나도 이 보통의 이름을 보통이 넘게 들어봤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보통 이런 인기 작가의 책을 찾아 있지만, 베르베르 같은 이들의 책을 꺼리는 경향이 나에게는 있어 이 보통의 책도 그닥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알라딘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보통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의 이름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제목 같았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 건축, 종교, 사랑, 미술 등등의 소재들을 다뤘다는데, 검색해보면 소설가로 되어 있는데, 뉴스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미심쩍었다. 그런데 웬걸? 보통이 아니었다. 역시나 알랭 드 보통은 보통의 인물이 아니었나 보다. 이 책 <뉴스의 시대>에서 내가 얻고 깨달은 바가 크다.

 

정치 뉴스가 따분하다는 대중적 인식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뉴스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모으는 데 실패할 때, 사회는 자신의 딜레마를 붙들고 고심하는 일에 위험할 정도로 무능해지고,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대중적 의지도 결집될 수 없기 때문이다. (37쪽)

우리 사회에서 뉴스는 오늘날 따분하고 지겹고 재미없을 뿐이다. 어떤 음모가 숨어있다고 선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로인해 현대 사회의 수많은 대중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끊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우리는 정치가들의 잘못으로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겠된다고 말하는 데,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통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뉴스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보통의 지적은 결코 틀리지 않다. 보통의 제시하는 오늘날 뉴스의 문제들, 우리가 뉴스를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조언들, 나아가 앞으로의 뉴스가 어떤 모습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보통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없다.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된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다.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편향을 벗어나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지나친 시도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33쪽)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34쪽)

오늘날 뉴스는 '사실보도'를 무지하게 강조한다. 객관성, 공정성 등의 대한 강조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들만을 나열할 때 뉴스는 단순한 찌라시가 될 뿐이다. 또한 우리는 그 사실 속에 감춰진 진술을 읽어낼 만한 능력이 없다. 능력이 없다고 자신을 탓할 일은 또한 전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간혹, 뉴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들의 편향성을 지적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편향적이라고 욕을 먹는 뉴스들은 편향의 문제라기보다 뉴스로서의 가치가 없는 질의 문제인 경우가 대다수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뉴스에 대한 공격으로도 사용된다. 조금만 뉴스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편향이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과연 편향이 문제일까? 뉴스는 편향적이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보통에 따르면 뉴스는 기본적으로 편향적이어야 한다. 자신들의 일관된 시각에서 사실을 해석하고 대중들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대중은 그 편향의 시각이 타당한가를 알아내는 것. 이것은 뉴스의 보도하고 이해하는 자들의 기본 행위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이 얼마나 합당한 이이기인가?

 

현대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란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36쪽)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늘날의 뉴스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망쳐버리는 데 강력히 기여하고 있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리의 뉴스는 나름의 편향적 시각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사회가 조금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뉴스가 성숙해져야만 한다고 본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뉴스의 시대>는 아마도 이런 뉴스의 성숙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의 정치 뉴스 뿐만 아니라 해외 뉴스, 연예 뉴스, 재난 뉴스 등의 문제들도 분석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통의 넘는 솜씨의 필치로 따분하지 않고 흥미롭게 진행한다. 하지만 약간의 가벼움과 통찰의 깊지 않음이 걸리적 거리긴 하다. 마지막에는 깊이 새길만한 뉴스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명언스러운 말을 남기면서 리뷰를 줄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수많은 희망을 단호하게 묻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155쪽)


 

뉴스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경제 '논쟁'은, 대중의 기대와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중의 감각 모두를 엄격한 통제선 안에 가두고 그 밖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 그런 의제에서 벗어나려 하면(예를 들어 주주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거나 성장과 복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품는다거나 하면) 갑작스레 '급진적'이라 간주되고 따라서 우습게 여겨지고 만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히 여기는 것들 대부분(최저임금, 아동 보호, 환경 정책)이 처음에는 미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 '합리적인' 의견으로 정착된 것인데도 말이다. (159~60쪽)


 

기자들은 숫자 뒤에 감춰진 세상을 보아야 하고, 자본주의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으로 인식해야 하며, 오싹할 정도로 질서정연한 사무실과 제조 시설의 살균된 아름다움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169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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