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 23명 지음 / 호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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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사(時事)에 민감하지 않은 나로서는 일간지 하나 제대로 챙겨보지 않는다. 정 따분하고 심심할 때, 혹은 화장실에 정이 들고갈 만한 것이 없을 때, 그때나 펼쳐보는 것이 신문이다. 그것도 대강대강 제목정도만 훑어볼 뿐이고, 신간안내나 바둑기사 등을 세심히 볼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사에 둔감한 편이다. 세상사에 둔감한 것은 어느 한 군데 흥미롭게 말붙이지 못하는 소외의 삶을 주기도 하지만, 세월아 내월아를 읊기에는 여간 편한 것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요즘은 워낙에 인터넷이 발달해서인지, 워낙에 할 짓이 없어서 죽치고 인터넷이나 들여다봐서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참 시시한 시사들을 어느 정도는 접하게 된다. 이게 인터넷의 장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행여 요즘 어데 몇 사람 모인 곳에서, 특히나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시사 얘기는 워낙에 찬밥대우이니, 시사에 대해 자발타발적으로 둔감할 때나, 타발적으로나마 민감한 지금이나 시시하기는 마찮가지다. 그러나 간혹 알고 싶지 않은 가운데 알게된 세간의 소식들이 나를 종종 분노케 한다. 이번의 이랜드 사태가 그렇고, 또한 시사저널 사태가 그러하다.

그런데, 시사에 한 없이 둔감하다는 것이 어느 은둔자적 행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이상에는 알고 싶지 않은 것과 더불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상존한다. 어찌 어찌 하여 알게 된, 그리하여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건 사고들이 그런 종류의 것이리라.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 그것이 소리소문 없이 지렁이 담넘어 가듯 넘어갈 때, 우리 한 때 분노하지 않아 좋일지언지, 더 큰 분노와, 어쩌면 분노할 새도 주지 않을 파멸이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천박한 세상은 만인이 분노하여도 그 분노케 한 자들은 여전히 지렁이론 모자로 구렁이가 되고, 담 넘어가는 것에 성이 안 차, 담을 뚫고 부셔서 지나가버리는, 개탄할 따름이다. 그것은 한 때의 우리 풀뿌리 분노가 결집되고, 연대하여 하나의 거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한 이랜드 사태에서는 우리 분노하는 사람들이 더욱 큰 목소리로 뭉쳐주길 바라는 바이다.

여기 또다른 분노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곧 시사저널의 전 · 현직 기자들이며(어쩌면 前 시사저널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사저널의 이름이 이미 자본의 노예들에 의해 더렵혀졌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이란 이름은 시사저널 기자들과 독자들의 것이지만, 이 더렵혀진 이름을 떨치고 다시 새로이 시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시사저널을 사랑했던 독자들이며, 또한 이번 사태를 보며 다분히 분노한 이땅의 민중들이다. 그들은 왜 분노하는가? 그야말로 저 더러운 자본세력에 의해 우리 민중들이 끝끝내 지켜내야할 언론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전횡 의혹을 다룬 경제면 기자를 금창태 사장이 인쇄 직전 단계에서 삭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에 항의하는 편집장과 기자들을 징계하고, 또한 그에 반발하는 이들에 대해 고소 고발하는 등의 무지목매한 짓거리를 신나게 벌였던 것이다. 이에 시사저널 기자들은 파업이라는 극단적 태세에 돌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인 시사저널 경영진과 결별하고 만 것이다. 결국 시사저널 기자들을 거리로 내몬 자본권력과 그 하수인들에 분노하는 기자들과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발족되기에 이른다. 이 분노하는 사람들을 누가 말리겠는가? 여기서 나는 이런 분노가 강한 저항이 되고,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고, 또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새삼 확인했다.

금창태 사장이 기사의 질이 떨어져 직접 삭제했다는 변명을 한다지만, 수차례의 편집과 교정을 거친 기사가 편집인들의 눈에 이상 없이 통과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장의 눈에만 수준낮은 기사였는지 난 모르다가도 또 모르겠다. 편집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작태에 더욱 말도 안되는 변명을 짓거리는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 우세스러운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데, 저 사람은 비범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이 시사저널 사태의 핵심에는 바로 '남 우세스러운 짓'도 개의치 않는 저 한 없이 비범한 인간 이상이거나 이하의 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언론의 '정도'를 걷겠다는 이들이 있"는 곳에 말이다. 아 이 비범한 것들을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더욱 가관은 아직까지도 정기구독하는 이들에게 괜한 보상 안해주려는 가련한 심사에서인지, '짝퉁'이래나 '결호 방지용'이래나 하는 것들을 뿌려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코미디언 언저리 어느 쯤에 있는 분자들일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코미디언들께서 충분히 화내실만 하지만 참아 주시라.)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시사저널 기자들은 울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웃기지도 않은 자들이 웃기고 있으니 울어야 할 밖에. 그러나 그들의 울음은 분노의 울음이다. 그 분노의 울음의 분노의 울림으로 일파만파 커져갔고, 마침내 그 울림이 하나되어 이 웃기는 작태에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쳐 서게 만들었다. 시사기자단은 이전의 명품 시사저널의 정신과 가치를, 그리고 이땅의 민중들이 반드시 누려야할 언론의 자유를 저 더러운 자본으로부터 지켜내기로 한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힌다,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힌다.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한다."라는 정신아래 그것을 온전히 구현해온 시사저널들의 기자들. 그들은 거리로 내몰리었을 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울분과 분노를 품었다. 그리하여 강인하게 저항하고 참 언론을 온몸으로 지켜내기 위해 세상에 호소했고, 그 호소에 우리 많은 민중들은 오롯이 화답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간의 울분과 분노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희망과 이상을 심어 놓을 것이다. 아니 이미 심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어쩌면 금창태 사장에게 고마움의 애정을 건내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사저널을 이제 온 국민의 저널로 날개달아 주었으니 말이다.(맛간 아이디어, "온국민저널"이란 제호 괜찮지 않나요? ㅎㅎ 아 저 못난 '국민'이란 말이 조금 거슬리는구만.)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란 긴 명칭에는 홍길동의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서글픔보다도 더 큰 아픔을 담고 있다. 제 이름을 제가 부르지 못하는 것을 어찌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아픔에 비하겠는가 마이다. 성룡의 'Who am I?"란 영화에서처럼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도 아닌 다음에야 부르고 싶어도 저 더러운 자본이 손에 쥐고 한낱 법이란 칼로 부르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저 긴 이름만큼이나 긴 서글픔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긴 이름을 우리 힘주어 말함에 있어, 우리는 끝끝내 '참언론'을 수호하는 자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참언론'을 분명히 '실천'하고도 남을 '시사기자단'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여기 이 책, 바로 시사저널 전 · 현직 기자들이 엮은 『기자로 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전의 시사저널의 정신과 가치와, 참언론 실천의 노력과, 사실과 진실을 밝히고자한 구구절절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기에 이 시사저널의 기자들은 오늘 이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인가를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이란 길고 긴 이 이름이 왜 그들에게 값하는 이름인지를 알고 싶다는 이 책을 읽어보길 강력히 권한다. 여기서 더 이상 떠벌이는 것은 자칫 아둔한 잡설에 지나지 않을까를 염려할 따름이다.(다만 한 가지 잡설을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www.sisaj.com에 당장에 달려가서 정기구독을 단박에 약정하는 단호함과 신뢰를 이 책은 나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승주 모 나무 님과 아프(면) 락사스님의 영향으로 가입한 이 사이트에서 계속 로그인이 안 돼 이래저래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 고생을 감수하고도 충분한 남음이 있었기도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을 나는 간혹 꿈꿔보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고 서는 아예 손사래를 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시사저널 전 · 현직 기자들처럼 살아야 진정한 '기자'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꿈에라도 기자가 될까 두려울 따름이다. 그만큼 기자 한 번 제대로 해보자면 이 사람들만큼 해야되겠고, 그러자면 나는, 한숨만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의 앞으로 보여줄 진정한 저널, 그 저널의 독자만큼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의 독자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성우제 식으로 말하면 "기적이자 축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기자로 살고 있는 한, 자 이제 우리 이런 사람들의 독자로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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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3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저도 찬조출연하는군요. :)
이 땅의 정의과 기본이 지켜지는 그날까지.

멜기세덱 2007-07-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면)약사써 님은 찬조출연이시라기보단, 특별출연이라고 해두죠...ㅎㅎ
 
멜기세덱 추천 7월의 책 『평화의 얼굴』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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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사회 속에 드리운 기독교의 모습

  요즘 각 언론매체를 통해 이랜드 노사분쟁 사태와 관련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심히 괴롭다. 이랜드가 어떤 회사던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겠다는 사명을 표방하며 선교를 최고의 목표로 삼아 발전해 온 기업이 아니던가? 이랜드의 사주 박성수 회장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철강왕 카네기만큼이나 존경받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언급되던 영웅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신앙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의 이랜드를 키워왔다는 그의 성공사례는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아무런 대책도 내어놓지 않는, 전형적인 비기독교계 회사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무자비한 행태를 보이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계 기업이라 자청하는 이랜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사주 박성수 회장의 잘못된 믿음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일반적 기업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번 이랜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요소, 지주자본가의 기업적 횡포와 왜곡된 자기 합리적 신앙이 이번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와 분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 사측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 다른 기업도 아닌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을 표방한 이랜드, 특히 신앙인을 자처한 박성수 회장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박성수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 경영진의 기독교적 사상과 이해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성수 회장이 "노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이랜드의 박 회장이 얼마나 자기 합리적 기독교 신앙을 품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박 회장의 신앙적 깊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신앙이 본질적 기독교 정신과는 많이 다른 각도로 깊이 박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많은 기독교(특히 개신교)인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 후에 성경적 근거를 제 입맛대로 찾아들고 와 보란 듯이 우긴다. 거기에는 절대적이면서 비타협적 태도로 모든 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하게 된다. 결국 박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의 경영진에게 "기독교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비판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강력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이랜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이랜드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 내의 기독교에 이런 박 회장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나 기독교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님, 예수님의 뜻이라고 내어놓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자기 합리적 '하나님의 뜻'을 비타협적이고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행태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백 여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너무 많이 왜곡되고 변질왔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 병폐들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신교계 케이블 방송에서 중계하는 한 대형교회의 예배 실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님께서 "미국은 우리 형님 국가니 우리 동생 나라가 잘 대접해 줘야하고, 사악한 저 이북의 공산주의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또 한 번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신앙인 김두식, 그의 용기 있는 비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우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이 책 『평화의 얼굴』에서 재삼 확인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김두식 교수의 『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적 추이와 오늘날 한국의 실태, 그리고 그 문제점과 대안들에 대해 친절하면서도 강력하게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 기독교 정신의 근본 바탕에 '평화주의'적 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반평화주의적 행태에 조심스런 비판을 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음을 나는 고백해야 하겠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란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은 칼과 창으로 상징되는 '전쟁'에 있지 않고, '보습'과 '낫'을 들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화'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기본 주제다. 그러면서 김두식 교수는 본인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한국 기독교의 본질적 회복을 위한 자성과 반성의 성찰을 이 책 곳곳에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용기와 진정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왜곡에 대한 전면적 비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아니 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전에 이런 한국 기독교 비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어떤가? 기독교가 본디 그리스도교임을 알고, 그리스도가 곧 메시아, 예수님임을 아는 나에게 오늘날의 기독교는 본디 '예수 그리스도의 교'하고는 한참을 멀리 가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마가복음 12:28-34, 누가복음 10:25-28)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을 온전히 보여준다. 기독교의 절대 경전인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란 것인데, 구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새 언약,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기독교에는 새로운 예수님의 언약이 유효하다. 구약의 약속은 성취된 바, 다만 그 기독교 역사적 교훈으로써 우리에게 역사(役事)할 따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이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와 동등하게("그와 같으니"란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할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이어야 하는데, 한국의 기독교는 이 본질에서 한참을 빗나가 있는 듯 보인다. 그 단면이 바로 이랜드 사태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주류 기독교계의 대응에서도 우리는 이런 본질적 기독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서 김두식 교수의 문제의식은 심각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방해야할 기독교, 곧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할 기독교가 평화의 모습이라고는 코빼기 보이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김두식 교수 자신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는 것은 무척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기에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김두식 교수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대한 지금의 기독교계의 반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점이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기독교가 어떻게 그 반대 선상에서 대척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종단은 국가 안보와 국군의 정신 전력 보호 차원에서 병역대체법 도입에 절대로 반대한다.”, “병역대체법이 도입되면 국내 140여 종의 이단 종파가 신앙적 양심을 내세우며 병역을 거부하고 특히 국가의 모든 제도에 대해 양심적 거부를 불사하는 극도의 국기 문란이 예상된다.”, “병역을 거부하는 특정 종교인들이 감옥에 간 것은 기독교와 상관없이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고 “이들을 평화주의자나 다수의 힘에 의해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처럼 만들어 가는 것은 무지와 악함의 극치” 등의 표현은 한국의 기독교계 단체들의 대표자들의 입에서 발설된 것들이다.

  이 땅의 모든 전쟁에 반대해야할 입장이라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보다도 기독교가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김두식 교수는 왜 기독교가 이 땅에서의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기독교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밝혀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이상적 모델로 추구하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는 평화를 지향하는 모습을 품고 있었으며, 기독교의 역사를 통틀어 많은 신앙인들이 병역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해왔음을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병역거부는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지배층과 결탁의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그것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근대 국가주의의 창궐에 기인한다.

  기독교의 근본에 평화에 대한 염원과 실천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인된 기독교로서 지배층과 결탁하고 그들에게 봉사해야하기에, 그 왜곡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 왜곡은 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모습이 기독교 전통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가히 역겨운 일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 교회 어느 곳에서건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가 군에 입대하여 총을 굳건히 들고 모든 전투에서 하나님의 능력주심에 힘입어 적들을 섬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므로 모든 위험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실 것이고, 내가 쏘는 총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돌질해 오는 적들의 심장에 백발백중할 것을 믿는다. 과연 이게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의 구속의 축복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자신을 버리고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아가페, 곧 완전한 사랑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배운 오늘날 기독교 형제자매들은 적과 나를 구분짓지 않고, 원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단골 설교 메뉴도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다만 군대에 가서 총을 들고 적을 섬멸할 그날을 위해 살인 훈련에 매진하는 것은 그런 설교에서 논외가 된다.

  찬송가나 복음성가에는 전쟁에 대한 노랫말이 많다. 원수와 대적하여 담대히 싸우고, 완전히 무찌르고, 강하고 굳센 하나님의 전사로서 모든 악에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인데, 얼핏 듣기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구약의 성경 구절에서 그런 노랫말의 근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축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성경에 근거하여 볼 때, 그 문맥 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전제가 있다. 즉 전쟁은 인간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자기 다툼에서 총칼을 들고 휘둘러 적들을 섬멸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곧 영적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하고 담대히 악에 대적하여 인내하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영적 승리를 맛보게 된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들의 분규와 전쟁에서 지지고 볶을 것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날의 영적 승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군대가서 총을 들어 국가에 충성하라는 논리는 껴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종교적 의미에서건 개인적 의미에서건 기독교는 그들에 대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반대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서라도 그 근본 기독교의 원리상에 있어 그러하며, 더욱이 기독교 사랑의 관용과 포용에 있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는 그 소수자들을 포용하고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제모습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주류 기독교는 어떠한가? 과연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임을 포기한 것이며, 기독,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유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배반의 기독교가 아닌가?


4.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성 프랜시스의 이 기도문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진리와 희망을 전하고, 기쁨을 주는 것, 곧 기독교의 제 역할이 아닐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곳은 이 땅에서 주류 기독교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멸시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당밖에 없다. 과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받아들이지를 못하겠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리고 간구하는 프랜시스의 기도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이 읊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의 기도로 읊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가득 품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김두식 교수의 이 수고로운 작업도 그러한 지극한 염원을 한가득 담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두식 교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다시금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길 다시 한 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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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 회장에게 권하는 두 권의 책
    from 상콤한 포르노그라피 2007-07-13 15:01 
    얼마 전에 집근처 한 대형교회에 현수막이 붙은 것을 보았다. <개그맨 마빡이 정종철 집사 간증 예배> 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개그콘서트 내 요즘 인기를 얻은 신인 오지헌 씨도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이름이 나있고 여기저기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비단 이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어떤 직업인이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면 그때부터 여기저기 교회서 간증을 해달란 초청이 줄을 잇는다.   예수님의 가르침
 
 
마늘빵 2007-07-11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먼저 쓰셨군요. :) 강추입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4   좋아요 0 | URL
좀 제대로 써보겠다 싶어 조금조금씩 쓰다가 얼렁뚱땅 마무리해버렸네요...ㅎㅎ 앞으로 계속 보완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가져보려구요. 명색이 크리스천으로서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부끄럽네요.

홍수맘 2007-07-1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에 "아멘"하며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5   좋아요 0 | URL
이 땅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합니다. 그 뜻 가운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있지 않겠습니까?

투명고냥이 2007-07-1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멜기세덱 2007-07-11 22: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근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2007-07-1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7-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제 페이퍼에 트랙백으로 꼬리 남깁니다 :)
 
국어과 교수 학습론
박영목.한철우.윤희원 지음 / 교학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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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7차교육과정에서는 창의적 사고와 자기 주도적 학습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다. 그런 목표를 지향하여 교육과정이 설정되었고 각과목의 세부 항목들도 선정되었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몇 가지 전제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학생들이 창의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얘긴데, 그 조건들이 교육과정에서의 말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 조건들이라는 것은 우선 각각의 학생들에게 창의성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마다의 흥미와 관심과 재능이 천차만별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집단 교육 구조의 현 우리 학교교육 현장과는 다분히 이질적 목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조건이다. 그러니까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학생 개개인에 맞는 그런 교육내용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최상의 방법은 일대일의 맞춤형 학습방법 밖에는 없겠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학교교육에서는 그 최상의 방법을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없을 수 밖에 없겠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되는데, 일대일 맞춤형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효과적으로 그 목표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교사 일인당 학생수가 적정한 정도여야 한다. 그 적정선의 구체적 수치가 어떤 연구를 통해 밝혀졌는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OECD 회원국의 통계치에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가 그 적정선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조건들로는 사회구조적 문제들이겠다. 학력위주, 입시위주의 교육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는 천편일률적 교육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들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창의적 사고는 허울좋은 목표일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차교육과정은 이런 악조건들 속에서의 사투를 위해 몇몇 창의력 학습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그 중심에 '자기 주도적 학습'이 있다. 원론적으로는 창의성 개발이라는 것이 스스로의 의할 때 가능한 문제임을 볼 때 적합한 선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악조건들을 다만 회피하고자 하는 책략이라고도 보여진다. 말하자면 학교교육을 통해서는 창의성을 키워주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혼자서라도 알아서 해보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얘기다. 결국 '창의적 사고'와 '자기 주도적 학습'은 교묘한 이해타산 가운데 책정된 목표 아닌 목표일 뿐이다.

현재 8차교육과정안이 이미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시행될 예정이다. 8차교육과정이 7차교육과정과 큰 틀에서는 차이를 두기는 어렵다. 교육과정의 변화는 아무래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겠다. 세대가 바뀌고 학생들의 제반사항들이 변화되는 상태에서 구시대적 발상에 의해 선정된 교육과정에 따라 배운다는 것은 제대로 된 교육이기 어렵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구체적 모습들을 죄다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교육과정이 나름의 이런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백년의 큰 계획이 서야한다는 것이 교육일진대, 이런 큰 계획이 그간의 교육과정에서 있었는가도 의문이고 앞으로의 교육과정에서도 있을는지 의문이긴 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아무리 교육과정이 바뀌어도 서두에 말한 그런 교육 구조적, 사회적 문제들이 선결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고 폐해만 낳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회의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적 위치에서 교육을 멈출 수는 없다.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 상황을 보다 효과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실제적 대안들이 끊임없이 제기될 필요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 구체적 방법 가운데 하나인 실제 교수 학습 현장에서의 방법론들의 필요성이다. 지금의 대다수의 교육 현장에서는 그간의 천편일률적 주입식 수업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것은 앞서 말한 여러 조건들에 의해 강요되는 방법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은 노력부터라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응하려는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효과적인 교수 학습 방법들이 연구되고 실제 현장에 적용되는 일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것을 일반 교사들의 책무로만 남겨서는 안된다. 일반 교사들이 스스로 수업을 연구하고 다양한 교수 방법과 교재들을 개발하는 노력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국어교육 전문 연구자들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축적되고, 그들에게 제시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당국에서 보다 주의를 기울여 선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연구들과 그나마의 연구의 성과들은 너무나 부실하고 미약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 『국어과 교수 학습론』이 그래도 개중에서는 돋보이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교수 학습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어과 전반의 '교수 학습'에 관한 개론이다. 그러니까 국어과의 목표 및 성격, 내용, 그리고 교수 학습 방법, 평가에 대한 전반적 정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책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중심이 '교수 학습'과 '평가 방법'의 그나마의 구체성에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을 보다 가치있게 하기는 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지울 수는 없다.

교수 학습 방법에 대한 제시는 각 영역에서 단 하나의 수업모델을 구체화하여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한 차시의 수업 형태만이 들어있다. 평가 방법에 대한 모델들도 그리 구체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보다 구체적 형태의 방법들이다. 국어 교육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다양한 연구와 개발을 통해 일선의 교사들에게 여러가지 방법들 중에 적합한 방법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내어 놓아야 한다. 이 책이 그 시발을 감당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 밥에 그 나물일까? 이 책의 공저자들은 앞서 『국어교육학 원론』을 집필했던 분들이다. 많은 부분에서 이 책이나 그 책이나기도 하고, 부실하기 또한 매 한가지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이 책이 실제성 면에서는 좀 낫다는 생각이 든다. 각 영역을 다룬 후 참고서지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 참고목록 중에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어교육 연구의 부실성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겠다. 앞으로의 국어과 각 영역별 교수 학습 방법론의 다양한 연구와 개발이 이뤄지고 좋은 성과들이 나와 일선 교사들의 참고 자료들이 풍부해져서 선택의 즐거움을 가져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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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
더글라스 에이브람스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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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돈 주앙, 그의 이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간혹 모르는 척하기도 하는 이 시대 '부끄러운' 욕망의 고유 명사다. 흔히 "플레이보이의 대명사로" 카사노바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그는, 카사노바와는 또 다른 특색들을 지니면서 보다 음험한 호색한으로 카사노바와 차별성을 가져왔다. 카사노바가 역사적 실존 인물임이 확실시되는 반면, 돈 주앙의 실존성 여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실존 인물 돈 주앙 테노리오가 이 돈 주앙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지만, 돈 주앙이 실존했던 인물이건 아니건, 오늘날 우리에게 돈 주앙은 그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차를 내재한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돈 주앙 문학의 시효로 여겨지는 스페인의 극작가 몰리나의 『세비야의 호색한과 석상의 초대』(1630) 이후 다양한 장르로 각색되고 재탄생한 '돈 주앙'이 곧 오늘날 우리 인식 가운데 존재하는 '돈 주앙'의 가장 진실된 모습일 뿐이다.

몰리나의 작품 이후 근 500여년간 수많은 돈 주앙이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 작품들은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바(이 책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뒷 편에 <옮긴이의 말>에서 그 대표작들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http://blog.naver.com/donjuandiary에서 돈 주앙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것들의 목록을 여기서 늘어놓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비공식적 돈 주앙 이야기들의 목록을 가늠해보는 것은 거반 불가능하리라 여겨지지만, 내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공식적 이야기 중 하나일 수 있는 일종의 돈 주앙 야설을 접해 본 경험이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고등학교 때 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아이들이 어떻게들 구했는지 요상스런 이야기책들을 여러 명이 돌려보곤 했다. 대부분이 무협지 비슷한 것들이고, 간혹 성교육 교재 그 이상의 것들도 돌았다. 그 중 하나가 돈 주앙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 밝혀두지만, 나는 당시 이른바 대표적 모범색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책을 서로 돌려보던 가운데 나도 잠깐 구경할 수 있었던 기회가 생겼고 몇 쪽 넘겨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그 후 그 책을 틈틈히, 그러나 은근슬쩍 정독했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돈 주앙과 뭇 여성들의 성애의 묘사가 무척이나 리얼하면서도(나는 아직 그것이 진정 리얼한 것인지 의문이지만) 선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을 나는 알지 못 했다.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리즈의 중간의 어디 쯤이었으니까.

돈 주앙이 등장하는 작품이 다양한 만큼, 그 다양함의 각각들을 접해본 독자(또는 관객)들에게 동 주앙의 모습은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그 당시 이후 나의 돈 주앙은 일종의 섹스머신 혹은 섹스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각양각색의 돈 주앙의 모습에(어느 정도 공통 분모를 가지고는 있겠지만) 맞고 틀림이 있을 수 없다. 돈 주앙 테노리오의 실사(實事)를 대조해가면서 따지고 볶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돈 주앙은 그만큼 역사로부터 멀어졌고, 그 멀어짐으로부터 다양한 모습의 실체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책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이하 『잃어버린 일기』)는 또 하나의 돈 주앙을 그리려고 했다. <옮긴이의 말>에서처럼 "동양적 세계관으로 새롭게 조명"했다거나, BBC에서 "돈 주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거나, 이 책의 홍보물 등에서 말하듯이 돈 주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돈 주앙의 재해석이라며 이 책을 곳곳에 알리고 있다. 이것은 돈 주앙이란 이름을 알 만한 사람에게 매우 관심을 끌게 만드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이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의 돈 주앙에 대한 호기심에 비례한 만큼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재해석의 신빙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잃어버린 일기'에 바탕을 둔 팩션이라는 전략을 택하고 있어 관심을 배가시킨다.

또한 이 책은 『다빈치코드』를 펴낸 출판사에서 발굴한 것으로, 그 출판사가 대대적으로 투자한 만큼 그 재미와 흥미에 대한 의심할 여지를 줄이게 만든다. 띠지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25개국에 판권이 팔린 화제의 소설"이라는 문구라든가, 이 책의 공식블로그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전 세계 20여개 언론사를 초청한 프레스 투어"라는 문구에서 이 책을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 전략과 이 책이 얼마만큼이나 상부할지는 사서 읽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고, 나도 읽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 확실했다.

사실 『다빈치코드』로 재미를 본 출판사의 안목은 그리 좋은 것은 못 된다. 『다빈치코드』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이것이 다루는 제재의 민감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소설로서의 완성도와 작품성은 그리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성공의 이유는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의 반증으로 소설『다빈치코드』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상대적으로 별반 성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만큼 원작의 단순한 추리적 이야기성이 영화로 시각화되었을 때 극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좋지 못 한 안목의 출판사에서 펼치는 상업 전략을 우리는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하겠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책 『잃어버린 일기』가 출판사의 상업 전략과 얼마나 합치되고 불일치되는지를 따져 보도록 하자. 우선, 이 책 『잃어버린 일기』의 표지에는 "400년 만에 발견된 돈 주앙의 일기를 소재로 한 역사 팩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원본 일기의 서지사항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책의 공식 블로그를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다. <편집자 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이 일기의 우연한 입수 과정 또한 하나의 허구일 뿐이란 의문이 간다. 설혹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또한 이 돈 주앙이 '역사 팩션'이 될 때의 그 문화적, 문학적 가치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재적 의미에서의 다양한 돈 주앙의 모습이 제각기 진실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일기'를 들먹이며 '역사 팩션'임을 주장하는 것은 소설적 전략이면서 홍보 전략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어 보인다. 먼저 소설적 전략으로써의 '일기'의 틀은 작중 화자의 내면에 독자가 깊숙히 침전하면서 동일시를 이룰 수 있어,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 있게끔 기능한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흥미를 내재하고 있다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켜 읽는 재미를 톡톡히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기본적 이야기의 흥미로움을 갖추고 있을 때 얘기다.

다음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을 보여주고 있는지의 여부를 가려보자. 기존의 돈 주앙에 대한 해석이 호색한으로서의 악한의 이미지로 돈 주앙이 묘사되고, 그런 돈 주앙의 행위에 대한 권선징악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공통분모를 뽑아 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와 다른 묘사, 그와 다른 결과, 그와 다른 어떤 해석의 여지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나의 내공의 부족에서 오는 것일까?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하겠지는 나는 그것을 찾지 못했다.

이 책의 전반적 줄거리는 짧게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출생의 비극을 가지고 태어나 버려진 고아 돈 주앙, 그가 여성 편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삶의 여정, 이 소설의 악의적 인물에 의한 일종의 양육, 그로 인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에 대한 동조, 주인공의 내적 외적 갈등, 돈 주앙을 각성케하고 변화시키는 구원자의 등장과 그에 대한 돈 주앙의 진정한 사랑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고전 영웅 소설에서 보이는 '영웅의 일대기적 구성'의 약간의 변종으로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 구도는 고전틱하다. 진부하다는 얘기다.

주인공 돈 주앙의 여성 편력의 행각은 그간의 여타 작품들과 대동소이하다. 다양한 여성을 상대하는 점에서 대동(大同)이라면, 성애의 묘사 등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점에서 소이(小異)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읽을 수 있었던 야설보다도 흥미는 절대적으로 반감될 뿐이다. 대동에서의 진부함과 소이에서의 흥미의 반감, 이 소설이 재미없어지는 이유다. 이미 말 했듯이 '일기'라는 기술 전략은 이 흥미의 반감과 함께 기법적 전략의 성공을 저해시킨다.

주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돈 주앙 문학이 인과응보적, 악에 대한 처벌적 주제로 이루어졌다면, 이 소설은 그 점에서 정반대로 포장되어 있다. 돈 주앙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하며 이 소설은 끝나고 있지만, 돈 주앙은 여성을 농락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일종의 반성을 경험하며 진정한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는 반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일종의 개과천선이다. 이것이 다른 해석, 곧 이전의 진부한 해석과의 차별성이라면, 동전의 양면으로 우릴 우롱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과응보라는 진부한 주제의 결말의 한쪽면에 죄에 대한 처벌이라면, 그 다른 면은 천선에 대한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다섯살짜리 어린아이도 몸소 체감하는 너무나도 쉬운 논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재해석이라는 홍보성 멘트는 기존의 진부한 해석이 당연히 내재하고 있었던 주제의 동전을 살짝 뒤집어 놓고 "이것은 다른 동전"이라고 당당히 떠드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 소설의 마무리를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마무리 또한 작가의 의도적 전략이 숨어 있다. 돈 주앙이 마무지 짓지 못한 일기, 곧 이 소설의 결말을 돈 주앙의 마부였던 크리스토발의 회고로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열린 결말'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래 간직했던 돈 주앙의 일기를 자신의 임종 직전에 알마에게 전하며 쓴 이 크리스토발의 회고는 돈 주앙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 한 일종의 풍문으로 전하며, 돈 주앙의 생존 가능성을 살짝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로 하여금 보다 행복한 돈 주앙의 후일담을 상상하게 만드는 전략인 것이다. 자체로 하나의 해피엔딩인 셈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 일종의 희미한 해피엔딩 전략이 보다 더 이 소설을 기존의 진부한 결말과 더욱 동질성을 갖게 되는 데에 있다. 개과천선하면 자손만대 행복해야 하는 것이 고전의 절대 공식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이 책 『잃어버린 일기』의 리뷰를 때리기식으로 매도한 것에도 불구하고 별 세 개를 준 이유는 "풍부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에 찬찬을 금할 수 없다."는 프랭크 매코트의 찬사나 "16세기의 도시 세비야. 이 신비한 도시"의 배경을 세밀히 묘사한 것, 그리고 "베껴 쓰고 싶을 만큼 멋진 사랑의 경구들이 가득하다."는 로버트 오시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밑줄 거둘 만한 구절들을 간략히 옮기면서 잔혹한 리뷰를 마치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는 부실하겠지만, 심심풀이로 읽기에는 이 책이 그만큼에 값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읽을 이는 읽을 것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건간에 말이다.

"비밀 하나 이야기해줄게, 크리스토발. 여자의 욕망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지 않아."(16쪽)

"여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조금이라도 노력해본 남자들은 그 보상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잔인한 시대에 여자를 이해하려는 남자들은 거의 없고, 가장 하찮은 사랑의 손길을 갈구하는 여자들은 수없이 많다."(38쪽)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이 가진 뛰어난 능력 중 하나이다. 그 능력은 남자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47쪽)

"결투에서 절대 질 수 없는 사람은.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117쪽)

"욕망은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신은 여섯째 날 동물들과 함께 욕망을 창조했다. 욕망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166쪽)

"모든 여자에게 신경 쓰는 건 곧 어떤 여자에게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178쪽)

"여자의 욕망의 강이 비금속을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약액(練金藥液)이 아닐까? 여자의 문을 통해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없다면 조물주의 창조 행위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190쪽)

"죽음과 삶은 끊임없이 얽히고, 불길한 죽음의 징조는 종종 열정을 부추긴다. 생명은 항상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길 바란다. 알마가 그렇게 말한 것도 그러한 욕구 혹은 몸에서 들리는 생명의 외침 때문일 것이다. 시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모든 여자에게 찾아온다."(309쪽)

"'내가 말했지….' … '어떤 검술에서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서…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건 거짓말이었어.…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건….' … '사랑에 빠진… 남자겠군요.'"(355쪽)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혼의 비밀은.' … '한 여자를 통해 모든 여자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군요.' … '맞아, 모든 여자의 모습은 각각의 한 여자 안에 들어 있고, 모든 남자의 모습도 각각의 한 남자 안에 들어 있지.'"(361쪽)

"사랑 없는 쾌락은 고기 없는 양념, 음식 없는 미각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 쾌락 없는 사랑은 양념 없는 고기, 맛없는 식사와 마찬가지다. … 진정한 열정적인 사랑은 매일 새로워지는 연회일 것이다."(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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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멜기님 ^^
성애의 묘사가 부실하다니 쳇!
그렇다면 돈주앙을 읽는 아무 의미가 앖자나욧!

:) 추천~~!

멜기세덱 2007-07-05 23:08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이님의 페이퍼가 훨씬 재밌다고 알차다고 할까요.^^;;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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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는 다분히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남미하면 제일 먼저 축구를 떠올릴 따름이다. 좀 더 나간다면 브라질의 삼바나 아마존 정도 되겠다. 중미 지역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단순히 우리에게 여행지 그 이상은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남미 지역은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에 쌓여있다. 어느 TV프로그램의 오지탐험 코너의 단골 무대가 아프리카이거나 중남미 지역이라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말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페루 정도 남미 지역 국가들이 떠오르는 건 축구와 상관된다. 그 밖에 멕시코나 코스타리카 정도가 떠오르지만, 축구이거나 휴양지이거나 오지이거나다. 또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오랜 옛날에 갇혀있을 따름이다.

중남미는 우리 인식가운데 매우 '흥분된' 상태로 놓여 있다. 헐리우드 영화에 쇄뇌된 영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와는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매우 먼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만큼 우리는 중남미를 잘 모른다. 이 정열의 대륙에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혁명의 연속으로 발전해 왔다. 그 중심에 우리에겐 체 게바라가 상징적으로 떠오른다. 흥분과 혼란과 정열과 혁명의 대륙 중남미에 또 하나 새로운 혁명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 주역은 베네수엘라의 체베스란 인물이다.

자칭 '볼리바리안 혁명'이란 기치아래 베네수엘라는 온갖 혼란과 어려움 끝에 혁명의 기초를 닦았다. 차베스가 집권하면서 민중들의 거의 일방적 지지아래 '급진적' 혁명이 진행중이다.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21세기 신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자원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토지의 재분배 등 혁명적 정책들을 저돌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차베스는 미 정권을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와 보수세력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볼리바리안 서클의 민중조직의 집중적 지지하에서 이 모든 혁명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해 오고 있다.

아마도 전세계의 지도자 중에서(김정일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지도자가 차베스가 아닐까 한다. 그는 어떻게 이런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의 다양한 혁명 정책들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런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법도 하다. 사회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중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도 가장 기본적 민중 복지 정책으로써 무료교육과 의료서비스의 확대에 집중되고 있다. 세상의 어느 지도자도 이런 무조건적 민중 복지 강화 정책을 펴기에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차베스는 그걸 하고 있으니 이런 민중의 지지는 날로 높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독재정권과 일부 부유 지배층의 억압아래 억눌려 궁핍하게 살아온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이런 차베스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으리라.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중남미의 통합이다. 강력한 제국 미국에 맞서기에는 베네수엘라는 지극히 약소국이며, 세계의 조폭 부시에 비해 차베스 골목대장일 따름이다. 미 제국의 신자유주의의 확산아래 중남미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차베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미 제국과 '맞짱'뜨기 위해서는 중남미의 통합에 따른 공동의 대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차베스의 급진적 혁명이 다분히 공상만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베네수엘라만의 혁명으로는 21세기를 살아남기에는 불가능할 따름이다.

이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읽으면서 차베스에 대한 급호감을 갖게 되는 한편, 또다른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성공적 기로를 타고 있고, 더 나아가 차베스는 중남미의 통합을 위해 절실히 노력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차베스를 적극 지지하지만, 이것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너무나 거대하고 무서운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혁명에 응원을 보내는 모든 이들이,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차베스의 다양한 민중을 위한 정책들이 너무나 급진적이기 때문에 즉흥적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이 오랜 지속성을 갖기에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동반한다.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면서 민중들의 의식을 키우려는 노력이 있지만, 민중들은 배고픔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차베스의 혁명 정책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이 혁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 그리고 중남미를 상상할 때, 우려가 더욱 크게 남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미 제국은 전세계를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차베스가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을 넘어서 중남미의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계의 각국들이 미국에 어느 정도의 딴지를 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을 큰형님으로 깎듯이 모시는 우리나라는 좀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차베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자. 그러다가 우리를 향해 차베스가 "전 세계의 민중이여, 단결"하자고 도움을 요청해 올 때를 위해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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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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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4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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