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천양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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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그녀를 만난 건 요 몇달 전의 일이다. 오늘은 2007년 정해년. 돼지는 돼지인데, 600년에 한 번 온다는 황금돼지의 해란다. 황금박쥐가 아닌 황금돼지가 날아온지 꼭 1시간 37분이 지나고 있는 지금 막 천양희의 시 에세이를 고즈넉하게 읽고 말았다. 여기서 잠깐 천양희의 시 한 편 다시 새겨보자.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 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천양희 시인이 어느 해 신년시로 주었다는 <바람을 맞다>란 시다. 몇 년도의 신년시인지를 따져서 황금돼지해 벽두에는 아니올시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 시란 時와 같아서 흐르고 흘러 어느덧 또 한 번의 1월 1일이 왔으니, 여전히 오늘 이 벽두에는 이 시가 썩 잘 어울린다. 찬 바람이어도 좋으려니, '바람을 맞다'가 문득, 옛시인의 노래가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읊었던 발레리의 시구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천양희의 우리를 위한 신년의 희망찬 목소리는 2007년 새해의 찬바람을 맞고서 또 한 세상 열심히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라는 것에 다름아닐 터이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 당신도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한다면, 이 책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를 읽어보시라. 내가 이 책을 2006년의 끝자락에서 읽고, 2007년 벽두에 되새기는 것은 다만 우연의 작용이었을까? 필연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만은 우연치고는 제법 내게 느껴지는바 많고, 그 시의적절한 울림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를 되뇌이게 한 것은 꼭 이날의 나를 위한 변주곡처럼 느껴진다. 시와 함께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에서 '거닐'었다는 것은 내게 허락되어진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일생 동안 행복했던 시간은 겨우 17시간이었다고 고백"한 괴테보다 내 지금까지의 여생에서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을 것 같지 않지만, 이 행복한 시간은 빠지지 않고 계산되어져야 할 것 같다. 시를 만나는 기쁨은 그것이 사랑이었건 이별이었건 슬픔의 통곡이었건 간에, 행복한 시간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리라.

이 책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는 한 가슴여린 시인의 시 감상기라고나 할까? 그 시의 숲에서 울고 웃었던 한 여인의 살풀이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읽기만 해도 좋으련만, 천양희가 울고 웃었던 데서는 나도 모르게 울고 웃었고, 그녀의 살풀이 춤사위에 교묘히 빠져들었다. 같이 숲을 거닐었거니와 한동안은 그 숲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이 주옥같은 시들의 마을에서 누가 감히 탈출을 시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반역을 꿈꿀 수 조차 없다. 아니 꿈꾸고 싶지도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니 함께 '시의 숲을 거닐'면서 나는 천양희의 길고 긴 시의 낭송을 듣는 듯 했다. 옛시인들이 남긴 가슴의 한 움큼 어린 그 무엇들을 천양희의 가슴울림으로 전해 들으면서, 그에 덧붙인 천양희의 감성어린 되새김을 내 가슴으로 담으면서, 한 구절 한 구절들이 마치 하나의 시와 같았다. 이 책은 그래서 한 편의 시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은 "시의 숲을 거닐다". 천양희는 바로 이 시를 써내려간 것은 아닐까?

여기에 엮인 글들은 천양희 시인이 조선일보 <문학의 숲>에 연재한 것들이란다. 조선일보라는 것이 좀 꺼림직하지만 뭐 어떠랴? 이 주옥의 시편들도 조선일보의 독자들에게 골고루 은혜를 부어주어야 할 것을. 우리의 귀에 낯익은 듯한 구절들도 만날 수 있고, 또는 전혀 듣지 못했던 귀한 시구들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헤세에서 괴테, 발레리와 뮈세, 그리고 신석정과 백석에 이르기까지 귀하고 귀한 우리의 옛 시인들의 구구절절 귀한 엑기스들이 들어 있다. 몇 구절 맛좀 볼까?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를 들어보자.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것 /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의 현재 살아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성공'이라니? 그러고 보면 나는 '성공'한 사람일까? 우리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그래, 적어도 난 단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봄직 하다.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 <슬픔>의 이 시구절은 어떤가?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게 남은 진실이라는 것은 '이따금 울어'보지도 못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닐까? "사랑은 시인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랑은 시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뮈세는 말했다. 아 그래서 난 시인이 못되나 보다. 앞으론 나도 나의 진실을 찾아서 '이따금 울어'보아야 겠다.

예세닌과 마야코스프키의 죽음을 넘은 시의 대화를 한 번 볼까? 예세닌이 죽기 전에 <안녕 내 친구>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마지막 구절에서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 삶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네"라고 읊었다. 여기에 그의 죽음을 가슴아파한 마야코스프키는 이렇게 답했다 한다.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네 /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네." 절친한 친구를 잃은 마야코스프키는 그 "살아내는 것"의 어려움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자살을 하고 만다.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에서처럼 <그리움>은 우리를 어쩔 수 없게한다. 그래서 이 '그리움'은 시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천년을 가도 변하지 않을 시의 중요한 테마가 될 것이다. 우리의 천상 시인 천상병의 시도 한 번 보자.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아! 천상병의 헤맑은 웃음이 떠오르면서 천상병 그는 천상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천상 시인이란 걸 다시 한번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그에게 무슨 '생활'이 부유해서 '걱정'이 없었을까? 그깟 대학 나와서 뭐하나 제대로 해 본 것 없으니 '부족' 없었다 말할텐가? '시인'이라는 그 명함이 뭐에 그리 '명예'로왔던가? '아내', 이것은 인정하자, 천상병 시인의 사모님은 참 아름다우시다. 세상에 천상병의 천씨 손을 내어놓지 못한 것은 그에게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정 행복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에 만족하고 즐거움을 찾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시구를 떠오릴때, 천상병은 그래도 웃음지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그 주옥의 시 줄기들의 몇몇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구구절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천금과 같은 노래가 이 책에 담겨있다. 그래서 '주옥'이라는 과장법의 수식어구는 이 책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과장법의 수사가 아니다. 아니 너무 평범하기까지 하다.

대부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이다. 우리의 상식과 교양의 수준에서 몇몇의 이름은 떠올리고, 몇몇의 시구들은 읊조려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상식과 교양의 수준의 지평은 넓어질 수 있고, 깊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시인 수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외에도 세계적 시인, 천재적 시인들과 얽힌 기묘한 이야기들, 에피소드들을 곁들이고 있어 재미 또한 남다르다. 천양희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면서 '시의 숲을 거닐' 당신에게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나는 읊어본다. 사는 것이 슬픔이어도 좋고, 그리움이어도 좋다. "이따금 울어'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것이 내게 '진실'로 남을테니 말이다. 삶의 진실은 다른데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옛시인들이 눈물 흘리고 가슴시리게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시들에 분명 우리 삶의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아!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던 백석의 그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 시구들을 이 밤에 읽어보고 싶어진다. 나는 '시의 숲'에서 당분간 나올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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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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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란 이름을 안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해서다. 내 전공이 국어교육이고, 그러다보니 대학 1학년 필수과목 중의 하나가 <국어학개설>이다. 이런 언어학 관련 강의 첫 시간에는 의례히 언급되는 몇몇의 이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촘스키다.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 격으로 촘스키는 언급된다. 변형문법은 최근까지의 언어학계에 있어 거의 지배적 이론의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촘스키란 이름은 세계적 권위의 언어학자  쯤으로 기억되어졌다.

  촘스키란 이름은 그렇게 기억되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발음상 쉽고 재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그의 이름이 들려오는 곳에 <언어학>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촘스키가 그 촘스키가 아닌가 보다 했다. 그러나 이 촘스키는 그 촘스키였던 것이다.

  언어학자, 그것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언어학자, 언어학계에서 ‘한 획을’ 굵직하게 그어 논 大언어학자가 언어학하고는 별반, 아니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에서 그 이름이 크게 울리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 외교, 언론 등의 분야에서 그의 비판적 목소리에는 그의 언어학자로서의 목소리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고, 그렇기 때문에 내 관심을 끌었다.

  사실 촘스키의 이름이 내게 크게 울리면서 ‘그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우선 촘스키란 이름을 처음 접했던 그때의 모습, 바로 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를 아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언어학 관련 저서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저서를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촘스키 읽기는 지금까지 미뤄져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촘스키 과련 서적을 구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학 관련 서적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촘스키 읽기를 시작하겠다는 뜻은 없었다. 단순히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니, 이 기회(값싸게 살)에 사 둬서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구입하게 된 것이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3권의 시리즈였고 덤으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얻었다. 그 후로 조금은 오랫동안 내 책상위에 쌓여 있었다.

  이제야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이다. 그리고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열심히 이 책을 읽었다. 쉽고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명쾌하면서 신랄한 비판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이제 촘스키 읽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애초의 언어학 관련 저서로부터 촘스키 읽기가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면서, 아 이게 천만다행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것들은 우리가 대부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는 것들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 ‘돈을 가진 자’,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권력’, ‘권력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촘스키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언어학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날카로운 시각의 정치비평가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언어학자의 모습이 아닌 촘스키는 더 다가가고 싶게 나를 유혹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천만의 다행.

  사실 촘스키를 ‘집어 들게’한 것은 『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이다. 거기에 실린 짤막한 인터뷰에서 촘스키의 비판적 목소리를 엿들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도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시대의 양심~』에서 접했던 촘스키의 모습을 계속해서 읽어볼 수 있었다. 좀 더 친근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현대의)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곧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족속들은 그 진실이 말해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도라는 이름을 그것을 가둬둔다. 여기에도 촘스키의 목소리는 칼날을 드리운다.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탄원서에라도 서명하겠다는 촘스키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촘스키에게 “표현의 자유”란 생명과도 같다.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의 촘스키의 사명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 “표현의 자유”는 지식인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숨결과도 같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은 너무 자명하다. 그러나 너무 자명하기에 우리는 거기에 무관심하다.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그러한 무관심 속에 우리를 지배하는 그 무엇들은 더욱더 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우리를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 속으로, 곧 無知 속으로 밀어 넣는다. 촘스키는 우리들에게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앎이 곧 힘이다.

  이 시대를 일컬어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대라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의심하라”(『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는 촘스키는 진정한 “자본주의는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라고 ‘현재의 경제체제’를 정의한다. 몇몇의 거대한 기업들이 이 세계의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어떻게 ‘자본주의’라 칭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러한 세력들은 모든 ‘경제’를 독점하고 지배한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지배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촘스키의 목소리는 친절히(?) 다가온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말이다. 모든 것들을 먹어 삼키기 위해 범죄로 서슴지 않는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경제를 지배하고, 자본을 독점하기 위해 ‘권력’을 동원한다. 나아가 ‘권력’을 소유하고자 한다. 다국적 기업들은 어지간한 국가보다도 그 힘이 세다. 국가보다도 힘이 센 다국적 기업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촘스키는 말한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알지 못하면 저항할 수 없고, 싸울 수 없다. 그러니 오늘날의 현실에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우리는 알아야 하고, 지식인은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민주주의’ 또한 의심한다. 의심의 도를 넘어 아예 ‘가짜’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라고 과감히 말한다. ‘방관자’, 그렇다. 그래야만 그들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함부로 시비 걸지 못하게 아예 그 근본을 없애겠다는 노릇인 것이다. 때로는 협박을 동원하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심 조장”이 그것이다. 우리도 이 대목에서는 크게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협박에 어지간히 당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렇게 ‘방관자’를 만드는 민주주의, 그리고 협박과 공갈을 일삼은 오늘날의 지배체제는 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모든 형태의 지배구조를 찾아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촉구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할 수 있는가? “가난한 흑인은 암살해도 상관없지만 권력을 움켜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언론? 지식인들? 그들을 촘스키는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에게 ‘정당성’을 묻지 않는다. “권력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에게 순응하고 동조한다.

  그러나 모든 지식인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와 같은 극히 일부의 지식인들이 있어 우리에게 이러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인들이 너무 미미하기에 그들의 대략 ‘미친 놈’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굴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내 목표”라고 말하는 촘스키의 목소리는 더욱더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두렵게 생각하고, 그들이 언제라도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국가이익을 위협받을 때마다 미국은 ‘비합리적이고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동네 뒷골목의 불량배쯤으로 여기면 그만일까? 폭력조직 일제단속 기간에 조직폭력배로 구속시키면 되는 것일까?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아래 우리는 시나브로 종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나라라면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줘야” 하고 “비밀로 감추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문서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우리는 참 무서운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이 책을 통해 촘스키의 날카로운 시각과 명쾌한 열변에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힘’을 기르고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떠오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세상일을 염려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그 사람, 바로 촘스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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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12-1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전투적인 조직의 초청이라면 전국, 전세계 어디라도" 간다는 촘스키를 우리 알라딘 서재님들과 함께 초청해 보면 어떨까? ㅎㅎ 근데, 우리가 '전투적'이기는 한가? ㅎㅎ

딸기 2007-01-1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촘스키는 그 촘스키였던 것이다." 재밌어요 ^^
반대로 저는, 비판적 지식인 촘스키의 글은 많이 읽었는데,
정작 언어학자 촘스키를 몰라서 많이 아쉬워요. 생성문법에 대해 들은 거라곤
과학책(생물학책)들에서 단편적으로 본 것 밖에 없거든요.

그러고보니,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1-1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 유명한 딸기님 맞으시죠! ㅎㅎ 몸소 찾아와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너무나 기쁘답니다. 많은 분들의 귀한 서재를 몰래몰래 훔쳐보면서 먼저 인사드리지 못하는 저는 참 못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드려요. 아참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딸기'랍니다. 너무 좋아요...ㅎㅎ

딸기 2007-01-1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히 그 유명한 딸기냐고 하면, 유명하긴 하지요. '딸기'를 모르는 사람은 갓난아기 말고는 없을테니까요.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
근데 저는 정작 딸기를 안 좋아해요. ㅋㅋ 시어서... 인삼딸기는 그래도 괜찮아요, 안 시니깐.

멜기세덱 2007-01-1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삼딸기도 있나요? 난 왠지 인삼은 싫은뎅..ㅎㅎ 하긴 알라딘 갓난서재인 말고 '딸기'님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거에요.ㅎㅎ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하워드 진.에드워드 W. 사이드 외 17인 지음, 강주헌 옮김, 데이빗 버사미 / 시대의창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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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촘스키의 열렬한 추종자처럼 보이는 <시대의창>에서 또하나의 이벤트성, 프로젝트성 책 한 권이 나왔다. 이 책『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이하『시대의 양심』)가 그것인데, 이것이 이벤트성, 프로젝트성으로만 치부해 버릴 그런 책은 아니다. 그야말로 쟁쟁한, 우리나라에서 그야말로 인기있는 촘스키를 비롯해서, 에드워드 사이드, 하워드 진 등 전세계적으로 지명도 있는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유리한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례 그렇듯이, 상업적 목적의 이벤트성 도서들이 그 질적인 측면에서 기대이하였던 것들이 많았던 바, 이 책도 그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맨 뒷페이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독자를 먼저 생각하는 정직한 출판". 이게 <시대의창> 출판사의 회사로고인가보다. 그리고 또 이런 글귀도 있다. "시대의창이 '좋은 원고'와 '참신한 기획'을 찾습니다."라고. 그런데, <시대의창>이라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그러니까 그렇게 클 거 같지 않은 출판사(출판자본)에서 촘스키의 여러 저작들을 독점적으로 계약하여 출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보이는 듯도 하다. 어쨌거나 이런 회사의 로고처럼, <시대의창>에서 '좋은 원고' 하나 건져내서 번역해 내놓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시대의 양심』은 "독자를 먼저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독자에게 좋은 책임에는 틀림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이 미국의 한 지방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러 인사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것을 간추려 모은 것인데, 그 이름도 쟁쟁한 촘스키, 진, 사이드를 비롯해서, 의외의 인사 대니 글로버, 랄프 네이더 등 내가 알고 있었던, 또는 모르고 있었던 주요 지성들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거창하게 "세상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거반 거짓말에 가깝지만, 또한 약간은 시기가 지난 시류적절치 못한 내용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특히 나에게는 이 책이 참 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촘스키나 사이드는 너무 유명해서, 우리가 잘 아는 듯 하면서도 잘 모른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난 촘스키의 여러 저작들(특히 <시대의창>에서 내놓은 "촘스키, 세상의 ~"시리즈 등)을 구입해 놓고 있지만 읽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뻔한 내용일 듯 싶기도하고, 읽기 지루하고 어려울 듯도 해서일 거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그런 점에 있어서 너무 유명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오늘날 세계의 선각자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지성들의 지적, 인간적 측면들에 쉽게 접근하게 해주는 하나의 출입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리고, 내가 의외의 인물로 칭한 영화배우 대니 글로버의 또 다른 면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여러 지성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장점이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미국비판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에 구성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금까지 그런 역할을 해왔고, 아직도 그렇게 해오고 있다. 다만 사이드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다.(이 자리를 빌어 삼가 애도를 표한다.) 그 외 몇몇 분야들에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 충분한 인사들도 포함되고 있다. 20인의 인사들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그런 책인 것이다.

이 책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 책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통해 사이드에게로, 진에게로, 아흐메드 라시드에게로, 아룬다티 로이에게로 나아가야만 이 책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 책에서 '진실'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아니 제로다. 그들은 '시대의 양심'으로서 때론 날카롭게, 때론 친근하게, 그리고 유쾌하고 명쾌하게,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과 현실을 진지하게, 그러나 너무 짧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고, 그렇게 아쉬움을 남겨 놓고 외면한다면 이 책은 단순 이벤트, 프로젝트, 이름만 거창할 뿐 남는 것 없는 그런 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이 책은 '세상의 진실'을 찾으러 떠나보려는 우리들에게 출입구를 작지만 환하게 열어주고 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리라. 들어가 보시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분명 그 가치를 다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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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2-07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미국이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게 싫을 정도입니다.ㅠㅜ
읽어봐야겠군요. 잘 읽고 갑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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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戱曲)이 하나의 문학 장르이고, 그것은 ‘읽히는 것’이지만, 연극은 궁극적으로 그것은 ‘상연(上演)’되어질 때 의미가 있다. 간혹 중 ․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소설, 시, 수필, 희곡의 장르 구분과 그것들의 특징에 대해 배우면서, 희곡은 상연을 목적으로 한다고 들었다. 하긴 상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그러니까 연극(演劇)으로 나아가지 않고, 희곡으로서만 끝나는 그런 희곡도 존재하긴 한다. 그런 특이한 희곡을 제외하고, 자로고 희곡은 상연되어져야 제 맛이 아닐까? 사뮈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못내 떠나질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하면,『고도를 기다리며』가 따라오고, 거기에 또한 ‘부조리극(不條理劇)’이란 어려운 말이 따라온다. 오늘날 세계의 고전이요, 정전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만큼이나 그의 이름과 그의 작품은 유명하다. 그런데 내 부끄러운 치부하나 드러내야겠다. 우선,『고도를 기다리며』는 알고 있으면서도 ‘고도’가 뭘까? 고민해야 했다. ‘설마 고도(高度)나 고도(古都)는 아니겠지’ 그래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늘 이 작품에 따라오는 ‘부조리극’이니 ‘부조리’니 하는 말의 의미 또한 사실 크게 관심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비만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에 그 중대한 이름 ‘고도’는 누구(무엇)인가? 왜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는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의 그 ‘님’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한용운의 ‘님’이 사랑하는 연인이기도하고, 부처님이기도 하고, 어떤 초월적 절대자이기도 한 것처럼, 이 ‘고도’ 또한 무엇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님’과의 어떤 암묵적 약속과도 같다. 이 또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고도’와의 약속과 어떤 면에서 동일하다. ‘님’이나 ‘고도’나 언제 올지는 몰라도, 그들이 올 거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한용운이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나 모두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한용운은 과연 ‘님’을 만났을까? 나는 잘 모른다. 살아서는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또한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 내가 볼 때 그들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한용운은 저 극락에 가서 그 ‘님’일 것으로 추정되는 부처님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그 황량한 들판에 앙상히 서 있는 나무에 목을 매달았을 때에 진정 ‘고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은 정말이지 무작정이다. 왜 그를 기다리는지, 그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무엇이 해결될 것인지는 전혀 불명확하다. 그는 과연 무엇이기에 그들은 그토록 ‘고도’를 기다리는가? ‘고도’를 만나면 그들은 구원받는가? 이 작품에서 구원은 어쩌면 죽음과 동일어가 아닐까?

  중요한 것은 ‘고도’가 누구이고, 그를 만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살아있게,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와 거기에서 오는 삶의 의미부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뿐 아니라, 인간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다림, 그것이 삶의 희망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다. 인간은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2막으로 된 짧은 이 희곡을 읽으면서, ‘부조리극’이 가지는 특징들에 공허해 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뭔 소리들인지, 왜 이를 쓸데없는 상황과 장면과 대사들이 오고가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 이름 모를 ‘고도’를 기다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그런 우리의 삶이 이렇게 ‘부조리(不條理)’하고 이해될 수 없는 행위와 상황의 연속이지 않은가를 반문할 때, 나는 이 희곡『고도를 기다리며』가 왜 오늘날 세계문학의 고전이 되었는지를 수긍할 수 있었다.

  짧은 이 희곡을 후다닥 읽으면서 남는 아쉬움이라면, 이 작품을 연극으로 만났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희극적 모습들을 희곡으로만 ‘읽혀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희곡은 그래서 연극으로 상연되어야 그 가치와 의미가 최대한 살게 되는 것이리라. 기회가 되어 이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된다면 관람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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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2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남자생활백서 - 보다 행복해지기 위한 남자들의 생활 기술
에스콰이어남자생활연구회 엮음 / 가야북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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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새는 이러저런 ‘~백서’가 붐이다. 무엇보다 출판시장에서 그렇다는 얘긴데, ‘~백서’란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수백 권이다. 최근 들어 이 ‘~백서’가 눈에 띄게 된 것은『백수생활백서』(박주영, 민음사, 2006.)로부터이다. 무엇이 앞이고 뒤인지 모르겠지만 이로부터 서점 진열대나 인터넷 도서 목록에서 ‘~백서’가 참 많이 눈에 들어왔다.『여자생활백서』,『현대생활백서』,『팀장생활백서』등 줄줄이 백서더니, 이제는『크리스천 생활백서』까지 나와 있다. 하여간 요즘에는 이 ‘백서’를 붙여야 책이 잘 팔리나 보다. 그걸 시비 걸자는 건 전혀 아니다. 

  ‘백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 중에 <청년백서>라는 코너가 있었다.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재밌게 봤던 코너로 기억이 된다. 혹시나 최근 들어 이 ‘~백서’ 붐이 그 개그 코너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백서, 백서’하는데, 이 ‘백서’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백서’라는 말의 시작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국의 정부 공식보고서의 명칭을 ‘white paper’라 불렀는데, 이는 보고서의 겉표지가 흰 색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로부터 여러 나라에서 정부의 공식보고서에 ‘백서(白書, white paper)’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경제백서’, ‘환경백서’ 등이 그러한 예이다. 따라서 이 ‘백서’라는 말에는 무엇에 대한 보고서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최근의 ‘~백서’ 붐은 자기계발의 중요성과 맞물려 있는 듯하다. 현대사회에 있어 자기계발의 생존의 필수전략일 수밖에 없고, 그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그 전략서나 방법론들이 책으로 출간되어 잘 팔리게 되는 것이 터이다.『백수생활백서』를 빼면 대다수의 ‘~백서’가 거의 모두 이런 종류의 책이다.

 

  나는 이렇게 많은 ‘~백서’들 중에 딱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자기계발 서적은 다분히 상업적이고, 또한 나한테는 별반 득 될 것 없다는 생각(아직도 이 생각에는 크게 변함은 없다.)에 소설인『백수생활백서』만 읽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여러 종류의 ‘~백서’들이 우연찮게(사실 너무 많아서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니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이 책 『남자생활백서』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충동이 일어서 인지는 몰라도, 이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서 바로 값을 치르고 집에 와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충동이라기보다는 이 책의 내용들이 많은 부분 대한민국의 어엿한 ‘남자’로 태어난 나에게 어떤 필요성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이 책은 대체로 쉽게 읽혀지면서도, 몇 몇 장들에 대해 집중력을 갖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충 여기서 언급하자면, 2장과 3장과 4장이 그것이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요즘과 같이 이 사회에서 ‘남자’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변화해야하고, 전략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단적으로 ‘위버 섹슈얼 시대’의 도래를 말하면서 남성도 자기의 몸을 가꾸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알지 못했고, 행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행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져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불안감도 엄습한다.

 

  대부분의 동물(일단은 여기서 인간은 제외한다.)들은 수컷이 암컷보다 더 아름답다고 한다. 그것은 생존본능 혹은 전략으로써, 그래야만 암컷을 꼬실 수 있고, 그래야 자기의 종족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사회에서 조금 다르게 작용한다. ‘아름다움’이 수컷이 아닌 암컷, 다시 말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해당되는 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었을 뿐, 동물들의 그러한 전략은 여전히 인간 사회에도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물의 수컷의 전략이 아름다움이었다면, 인간사회에서의 수컷은 부와 권력(사실 이것 또한 동물들의 세계에서 수컷이 갖추어야할 덕목이기도 하다.)으로 바뀌었을 뿐이다.(바뀌었다기 보다는, 아름다움이 제외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또 무언가가 달라졌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다만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요즘의 대세는 이준기 스타일, 꽃미남 천국, 즉 ‘아름다운 남자’가 트렌드인가 보다. 얼추 틀린 얘기도 아니고, 고깝고 볼 일도 아니다. 사실 꽃미남, 이준기 이러면, 짜증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남자들은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남자에게 ‘멋지다’를 여자에게 ‘아름답다’를 강요해 왔다. 나는 이것이 우리사회는 큰 병폐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멋있어야 하기에,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고, 부엌엘 들어가서도 안 되며, 어디 가서 얻어맞고 들어와도 안 된다. 반면 여자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수많은 ‘안 됨’과 억압을 당해온 것이 아닌가? 남자나 여자나 이 사회의 단순한 억압에 종사하여 우리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요즘의 이 ‘남자의 아름다움’이란 논리는 무엇보다 예전의, 원초의 그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복고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본다. 새로운 세기, 오늘날 21세기는 바로 부드러운 남자, 아름다운 남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요구에 우리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책『남자생활백서』는 그런 요구에 적잖은 답안들로 가득 차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절대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거나, 화장을 하거나 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몇몇 부분에서 이 정도는 그래도 내가 노력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지금까지 옷 한 번 내 돈 주고 사본 기억이 별로 없다. 사다주면 입는 것이고, 대충 옷장에 있는 옷들 꺼내 입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비단 남자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전략들이 필요하다. 그런 필요성은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런 최소한의 전략들을 갖추어야 한다. 수트를 입을 줄 아는 정도, 구두를 잘 골라 신을 수 있을 정도, 깔끔하고 단정된 옷차림을 갖출 수 있을 정도, 여자들을 매너 있게 대할 수 있는 정도 등은 우리가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다.

 

  사실 이런 것들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동안 우리를 강요해 왔던 ‘남자다움’의 병폐로 인해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닐까? 또 하나의 사실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는 남자가 봐도 멋지고 예쁘다는 것이다. 멋짐과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은, 그것을 인식하는 기준들은 남자나 여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의 내용들이 다분히 ‘여자에게 잘 보이기’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타인에게 잘 보이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 사회에서 남자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이름, 곧 ‘백서(白書, white paper)’라는 이름에 충실히 값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남성들의 필수생존전략보고서,『남자생활백서』는 대한민국 노무현 정부의 그 어떤 보고서보다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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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2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고, 분석적이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글이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 :)

멜기세덱 2006-11-2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과찬의 말씀이세요. 아무튼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