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
김광하 지음 / 운주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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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은 첫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본시 '첫경험'에 대한 설렘이나 흥분같은 것은 발동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디뎌놓기 전의 어떤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이 약간은 있었던 것같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나 스스로는 날라리이긴 해도 기독교신자임을 항상 표명하고 살아왔다. 그런 내게 불교는 어쩌면 금단의 세계였다. 이런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두려움일 수 있다. 모든 첫경험에는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대체로 기우일 뿐이다. 비정상적인 첫경험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이 첫경험은 비교적 정상적이었다고 해야겠다. 이제 그 두려움은 어느 정도 가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라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었다. 제대로 불교에 대해 접해본 적 없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비치는 불교, 지나다니며 보게 되는 불교,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내가 아는 불교의 전부였다. 『반야심경』의 몇 구절정도를 아무 뜻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일 수 있겠다. 그래서 불교 관련 서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을 들춰보다보면 그 중에 불교와 관련한 책들도 제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정통 불교 서적까지는 아니지만 오롯한 불심을 담은 책을 읽기는 처음, 첫경험이다.

먼저 내가 그 전에 저질렀던 불교에 대한 짓궂었던 행위를 반성해야 하겠다. 간혹 지하철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던 스님들 앞을 지날때면 '마귀, 사탄의 역사'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얄궂게 주기도문 정도는 입으로 읊으며 지나갔다. 이것은 조금은 무례한 짓이었다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또 간혹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치며 떠들썩한 이들에게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론 내가 중얼거릴 수 있었던 반야심경의 몇 구절을 염불하기도 했었더랬다. 이것으로 면죄부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반성은 매우 깊다.

이 책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를 읽게 된 것은, 내가 모시는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을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저자 김광하는 얼마 전 뵙게 되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고, 나의 선생님의 친한 친구분이기도 하다. 얼핏 듯기에 저자의 결혼전 함을 지고 박완서 선생댁으로 들어간 것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한다. 나의 선생님께서는 오랜 친구인 저자가 보내온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깊게 느낀바가 크다고 하셨다. 한학자인 본인이 부끄러울 정도로 각종 불교서적은 물론 노자의 『도덕경』까지 번역하며 끊임없이 학문과 불심을 닦으며 많은 결과물을 내어 놓고 있다. 그런 저자의 직업이 중소규모의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높이 사야할 것은 그런 저자의 수행의 깊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의 선생님께서 이 친구분을 높이 사는 것 또한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주장하며 온 세상에 정치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 어느 세상이 사랑과 우정,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를 존중하는 체제인지 물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없으면 어떤 사회라도 아직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그가 지금껏 불자로 살아오면서 닦아 온, 깊은 불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는 재가불자로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고민과 수행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가 된 듯하다. 흔히 인간의 삶을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그 가는 길에 뜨거운 '화두'는 하나씩 품고 가야하지 않을까? 저자는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마음을 성찰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길 위에 하나의 화두를 던져놓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저자가 재가불자이기에 그 화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불교적 시각으로 세상에 던지는 화두를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하나씩 받아들어 음미해봄은 그리 손해날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그간의 불교에세이랄 수 있는 것들은 다섯 마당으로 모아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부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첫째 마당에, "현실의 여러 갈등을 만날 때 불교적인 인식과 판단"이 어떠해야 하는 지의 에세이는 둘째 마당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소개"한 세째 마당, "수행 한담"이라는 넷째 마당, "불자로서 살아가기"의 다섯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부처의 역사적 모습을 찾아본다. 석가모니가 인도의 한 작은 왕국의 왕자였다는 사실 정도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우리가 부처님을 신격화하기 이전의 석가모니라는 한 수행자의 사실적 면모들을 살펴보면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겨야할 귀한 가르침들을 몇몇의 화두로 던져준다. "부처님께서는 29살에 출가하셔서, 35살에 그분이 가진 고민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과문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얼핏 예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이라고 느껴진다. 문득, 나는 이제 29의 나이가 몇달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면서,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이끄는 종교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특히 부처님께서 네 가지 집착, 즉 욕취(欲取;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 견취(見取; 견해에 대한 집착) · 계금취(戒禁取; 미신, 관습과 타부에 대한 집착) · 아어취(我語取; 나라는 이론에 대한 집착)를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하십니다.(46쪽)

부처님은 출가 후 새로운 사상을 대표하는 당대의 여러 스승들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 등에게 제자로서 이들의 가르침을 직접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의 교리가 윤리적 행위를 가져오는 합리적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이들을 떠납니다.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은 인간사회에 선한 행위를 가져오지 못하는 맹목적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76쪽) 

 
   

조금 간추려 본 것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부처님의 삶을 통해 저자는 유익한 깨달음들을 전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될 때 이천 여년 전의 부처의 그런 깨달음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익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마당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불교 에세이는 저자의 불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현 사회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재가불자로서의 저자의 삶이 지극한 불심과 현실에 대한 자비심으로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있게 하는 대목이다. "현실 삶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실체와 조건이 무엇인가를 먼저 해명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문제인 것을 인정하고 일단 멈추는 태도입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고[止], 우리 삶의 조건을 성찰[觀]하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겸허히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도 미래에서의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해야 하고 끝없이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문화가 심지어 생명을 가꾸는 농업과 종교, 시민단체까지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의 지속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있지요. 이런 동기가 있을 때, 과연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가 평화로울까요? 이런 삶을 버려둔 채 닦는 수행이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격을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 종교이며 그 실천이 종교적 수행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이 과연 종교적 수행일까요? 아니면 이 시대의 삶이 혹 우리의 수행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138쪽)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의 여러 모습들의 부조리함을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서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죽음에 대한 성찰, 노숙자에 대한 관심 등 저자는 우리 사회 곳곳의 현실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피고, 절실한 화두를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쌓은 모든 공부를 버리는" 것이 바로 이 하심이다. 하심은 달리 말하면 겸허해 주고 겸손해 지는 것이며, 나의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소유로 이어지고, 무상, 무위로 이어지는 기초의 관문이랄 수 있겠다. "하심은 깨달음에 관해 습득한 지식이나 분별을 내려놓는 것[放下心]"이기도 하다. "그동안 처음과 중간과 끝, 무명과 깨달음, 문 밖과 문 안, 법(法)과 법을 닦아 얻은 여러 경지 등 모든 계단이나 사다리를 놓아 버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의지해 왔던 모든 방법이나 평생 쌓아온 수행을 버리는 것이다."

   
  다급한 것은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눌려 있는 우리 생명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살리는 일에 계급적인 장벽을 앞세우거나 사회의 변화가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두려움과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고통받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눌려서 끙끙거리는 생명에 대한 창문을 활짝 열고 숨을 쉬는 태도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곳곳에서 던져주는 이런 화두들을 오롯이 내것으로 챙겨넣기에는 내게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 김광하가 세상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불심으로 연민하고 자애하며 절실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묻고 또 물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는 있다. 이런 저자가 던져주는 화두들을 그 하나라도 잡고 늘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그가 친절히 소개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것과 무에 다르다 하겠는가?

이 책에서 쓰이는 불교 용어들이 많이 낯설어 읽는 동안에 제법 걸리적 거렸던 것은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아마도 불교신도들을 대상으로 이 글들을 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용어들이나 불교고적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각주들을 붙여 놓았더라면 나같은 사람에게 보다 유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자가 던지는 화두를 우리가 받아내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세 가지의 새로운 무재보시", 즉 무재삼시(無財三施)가 있어 이것마저 소개해야겠다.

무재보시란 "재물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시"다. 이것에는 7가지가 있다는데, "부드러운 말과 웃음 띤 얼굴"로 하는 '언시(言施)'와 '화안시(和顔施)' 등이 있다. 여기에 저자는 새로운 무재보시를 제안한다. 우선 '경청시(傾聽施)',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보시"다. 다음으로 '발언시(發言施)', "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보시"다. 마지막으로 '공의시(公義施)'가 있다. 이는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대중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모임의 대화로 받아들여주는 보시"라고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 세 가지의 새로운 보시는 지극히 개인화되고 이기적이 되어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 곧 부처님의 자애와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는 참으로 절실한 보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 안들고 힘 안드는 이런 보시로도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저할 이유가 없겠다. 오늘부터라도 이 무재삼시를 실천해 보자. 저자의 이 책은 불교건 아니건 간에 한번쯤 깊게 음미해 볼 좋은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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