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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 쯤으로 기억한다. 대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소개하셨다. 그 강의는 <한문교육>이라는 전공 과목이었다. 전공이 국어교육이지만 한자와 한문도 국어의 일부일 수 있다는 취지의 교과과정이었을 것이다. 이 강의는 딱딱한 한자 한문 강의가 아니다. 감명 깊은 옛 문장들을 간추려 엮고, 그것을 통해 한자와 한문, 나아가 교양과 감성까지를 기르도록하는 강의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일까 매 수업시간마다 좋은 책들을 추천해지셨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책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오늘은 교내 우체국에 일을보러 갔다가 근처 구내서점에 들렀다. 진열된 책들을 돌아보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잊고 지냈던 옛 친구를 만난 느낌이랄까, 반가운 마음에 이 책을 집어들고 서점에서 나왔다. 생각보다는 얄팍하고 겉보기에 내용도 빈약해보였다. 한 번 훑어보니 한 2~3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듯 싶었다. 일을 보고 사무실에 들어와 내쳐 이 책을 펴들고 읽어내려갔다. 빠르게 읽히면서 손쉽게 넘어갔다. 정말 30분도 안되어서 다 읽게 되었다. 시집만큼 작은 책에 글자수도 보통책보다는 적게 된 이 책은 한장에 고작 11줄 정도밖에는 안 된다. 그렇게 70쪽이 이 소설의 다다. 책에는 편집자와 역자의 글이 수록되어 140여 쪽 분량이지만, 그것마저 읽기는 1시간도 남는다.
황폐한 마을, 그 마을도 이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람나는 냄새를 풍기며 어울려 지내던 곳이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황량해진 아무도 거하지 않는 비루한 곳일 뿐이다. 산이며 언덕이며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는 바람만이 싸늘하게 불어온다. 장 지오노는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 소설로 풀어내고 있다. 장 지오노가 분명해보이는 화자는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엘제아르 부피에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을 이 지역에 살면서 매일같이 황량한 들판과 언덕과 산에 나무를 심었다. 3년에 걸쳐 쉬임없이 나무를 심어 모두 10만 그루를 심었지만 자라는 것은 2만 그루에 지나지 않고 그마저도 끝내 곧은 나무로 성장하기까지는 1만그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엘제아르 부피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 땅은 변화해갔다. 황폐하던 마을에 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고 "물이 다시 나타나"고 "버드나무와 갈대가, 풀밭과 기름진 땅이, 꽃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이 땅은 이제 "삶의 이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아주 짧은 내용의 짧은 글이지만, 그 울림은 너무 크다. 장 지오노는 이 글에서 엘제아르 부피에를 한 고귀한 성자와 같은 경지로 생각하는 듯도 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달리 생각해 보게 된다. 황폐한 사막같은 곳에서 묵묵히 나무를 심은 부피에란 사람은 성자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고 말이다. 장 지오노는 이 소설에서 이 마을이 왜 황폐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짝 언질을 준다. "견디기 어려운 날씨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서로 밀치며 이기심만 키워 갈 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부질없는 욕심만 키워 가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하고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루 다투었"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부피에 같은 사람은 이상한 사람, 즉 광인이거나 혹은 성자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피에는 정상적 시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을 했던 것은 아닐까? 미친 것은 다만 세상일 뿐이다.
이 글을 통해 환경의 문제를 새삼 돌아보고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이기적이 되어가는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묵묵히 나무를 심어갔다. 그것은 황폐한 사회에 희망을 심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한 후 그것을 묵묵히 실천했던 부피에는 결국 "사람이라고는 단 세 명만이 살고 있었"던 마을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부피에에 대해 장 지오노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행복해질 수 있는 멋진 방법을 찾은 사람"이라고.
이 글이 환경 문제에 직면에 우리에게 던져주는 큰 문제의식도 있지만, 나는 내 입장에서 조금 다른 울림을 얻었다. 이 황폐한 사회를 바꾸는 방법, 이 사회에 희망을 심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사회에서 엘제아르 부피에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된 지난 강의의 교재를 찾아보았다. 메모를 해두었던 곳을 살펴보니 이 부분의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 즉, "한 해의 계책은 곡식을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십 년의 계책은 나무를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평생의 계책은 사람을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란 유명한 문장이다.
아 이거다. 나는 사람을 심는 엘제아르 부피에가 되는 것이다. 나무를 심은 엘제아르 부피에가 결국에는 온 마을에 희망을 꽃피웠던 것처럼, 나는 이 땅에 사람을 심고 기르는 것이다. 그렇게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사람들을 길러낸다면 이 땅은 희망찬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나무를 심은 부피에처럼 묵묵히 이 땅의 미래를 길러내는 사람이 되기위해 나의 능력과 심성을 닦아 나가야겠다. 사람을 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목표이다.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면, 이 땅에 복되고 희망찬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 땅은 바다보다도 넓고 깊게 행복에 겨워 살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담담한 포부처럼 내 포부도 담담하게 거창하다.(이 소설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인터넷에 많이 돌고 있으니 찾아보시면 또한 좋겠다.)